'감각의 독서가 정헤윤의 황홀한 고전 읽기'란 부제로 나온 책이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민음사, 2010)이다. 눈에 띄는 제목이고 표지다(개인적으로 <런던을 속삭여 줄게>의 표지는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언젠가 저자를 한번 만났을 때, 연재중인 원고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걸 묶어낸 것이다. 책은 <위대한 개츠비>부터 <위대한 유산>까지 15편의 고전에 대한 독서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나도 이런 유형의 책을 기획하고 있기도 해서 많은 참고가 된다. 서평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0. 03. 27) 고전 속 주인공과 나누는 대화
똑똑! 누군가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새벽 3시다. 마음문을 열어보니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약혼자가 있는 여인 로테를 사랑하는 절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 베르테르’다.
‘감각의 독서가’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시비에스 라디오> 프로듀서 정혜윤씨의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독특한 고전 읽기 책이다. <세계가…>에는 지은이가 2008년 10월부터 온라인 서점 예스24 웹진과 민음사 누리집에 연재해온 독서 칼럼 중 가려뽑은 15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겨레>에 ‘정혜윤의 새벽 3시 책읽기’를 연재하고 있는 그의 고전 읽기는 마치 고전 속의 주인공과 나누는 대화 같다. 그의 글에 유난히 슬픔, 기쁨, 분노, 안타까움 등 감정의 묘사가 많은 것도, 지은이가 고전 속 주인공과 이렇게 감정적 교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얼른 달려나가 가련한 청년 베르테르를 껴안는다. 그 또한 “흠모하는 이의 가벼운 뿌리침 한번만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는, 너무나 가련하고 나약한 몸뚱이가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관능 그 자체였던, 그런 어린 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베르테르뿐이랴. 그는 <위대한 개츠비>, <폭풍의 언덕>, <마담 보바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984>, <설국>, <주홍글씨> 속의 상처 입은 주인공들에게도 문을 열고 손을 내민다.
이 주인공들과의 만남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15살에 처음 <폭풍의 언덕>을 대했을 때, 그는 온갖 기행을 저지르는 히스클리프가 죽기만을 바라면서 책을 읽어나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다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만났을 때, 그는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깨닫는다. 아니, 적어도 그 열정에 매혹된다. “지상에 있는 동안 한번만이라도 내가 시작한 일을 끝까지 끌고 가보고 싶기 때문”인데, 이런 변화는 아마도 두 번의 만남 사이에 그 자신이 “격렬하고 쓰라린” 세상살이와 사랑을 겪었던 탓이었으리라.
그가 만나는 주인공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다시금 되돌아보라고 조언해주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통제된 빅브러더의 세계 <1984>에서 과거 기억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윈스턴 스미스와의 만남에서 그는 “사상경찰, 통제, 전쟁, 권위주의, 전체주의” 등 소설 속 세계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 지은이는 오히려 “우리가 이미 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란”다. 윈스턴이 어딘가에 끌려가 경험했던 것은 전기고문과 약물 투여, 벌거벗겨짐, 그리고 얼굴을 물어뜯으려는 쥐의 위협인데, 우리는 쥐보다 무서운 개가 위협하는 관타나모 수용소라는 현실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새벽 어스름이다. 마음의 문을 두드렸던 고전 속 주인공과 작별해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고전 속 주인공은 떠나가더라도, 그와 나누었던 대화는 지은이를 이미 바꾸어 놓았다. 그 깊은 절망과, 그 벅찬 기쁨과, 그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지은이의 가슴속에 계속 울림으로 남아 그를 ‘어제와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출근길 북적이는 사람들은 어제와 같아 보여도, 이미 세상 또한 어제의 그 세상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고전 읽기를 통해 날마다 세상을 두번 살아간다.(김보근 기자)
10. 03. 27.
P.S. 기자의 지적대로 "그의 고전 읽기는 마치 고전 속의 주인공과 나누는 대화 같다." 내 생각엔 그게 저자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 같다. 그는 고전과 그 주인공들에게 너무 관대하다. 그래서 인용이 많아진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다 보니 저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는다('새벽 3시'의 책읽기라면 크게 떠들지도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개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몇 편의 '읽기'를 읽어봤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저자의 프롤로그다. 가령 이런 저자의 고백들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때부터 고독은 시작되었다. 말 못 하는 고민 때문에 나는 집을 빠져나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나는 거의 매일 두 코스를 달렸다. 하나는 학교 운동장, 하나는 겨울이면 겨울이면 미끄러지지 말라고 늘 연탄재를 뿌려 두던 지독히 가파른 언덕.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동안 서서히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둠이 내리면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없는 뭉클한 기운이 밀려오고 심장이 뛰었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의 조그만 입으로 아름답다 조아리며 멈춰 서서 지켜볼 때 이미 아름다움은 육체적 감각에 속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달리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번도 달리기를 좋아해본 적이 없는 나로선 100미터를 13초대에 뛴다는 저자의 달리기 얘기가 무용담처럼 들린다.
언덕을 달리는 것은 좀 더 힘들었지만 오랜 연습 끝에 꽤 긴 언덕을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게 되었다. 언덕 정상에 거대한 보름달 대신 그보다 유혹적인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렇게 뛰고 난 다음 구멍가게의 온갖 물건들, 우유, 보름달 빵, 두부, 빗자루, 쓰레받기, 고무장갑, 세탁비누 같은 것을 천천히 구경하다 보면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서 집에 돌아갔다. 그때 구멍가게의 물건들이 언덕 밑 나의 집으로 끌어주는 나만의 중력이었다.
달리는 것만 빼면 나도 그렇고 다들 비슷한 체험을 갖고 있을 법하다. 하지만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체험도 저자는 갖고 있다.
체육 시간 전날이면 서점에 가서 얇은 문고판 책 한 권을 사고 엄마의 커다란 팬티를 한 장 빼돌렸다. 체육 시간엔 체육 선생의 작고 예리한 눈을 피하기 위해 엉덩이와 헐렁한 엄마 팬티 사이에 문고판 책 한 권을 끼워 넣고 그 위에 체육복을 입고는 운동장에 나갔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친구들이 편을 가르고 공놀이를 시작할 때 나는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엉덩이 아래서 책을 꺼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말하자면 독서가 정혜윤의 독서 편력의 시작이었다. 핵심은 엉덩이로 하는 독서였다는 것.
나는 아직도 엉덩이의 힘을 믿는다. 세상의 어떤 자리에 앉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엉덩이로 앉아야 하는 것니까. 그렇게 읽은 책이 대개 고전이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책이 엉덩이 밑에 숨기기게 좋았느냐. 즉 사이즈의 문제가 나의 독서 방향을 결정했다.
독서가 정혜윤의 개성이 어디에서 기원하는가를 알게해주는 대목이다. 한데, 저자는 그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이야말로 한 번뿐인 인생의 쓸쓸한 일회성, 혹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내려는 '의지'와 관련된 문제 같다"는 문제의식을 철저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한 번뿐인 인생의 가벼움을 다루고 있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저자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건 좀 기이한 일이다. 저자의 '고전'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독서의 흥미를 돋우는 저자의 대범한 주장.
만약 우리에게 세계가 한 번만 진행된다면(보이는 그대로만 보는 데서 멈춘다면) 우리는 매 순간 과거의 자신이다. 확실히 우리는 한 몸 안에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갖고 있다. 한 순간에도 과거와 미래를 산다.
하지만 여기에 이어지는 건 좀 평범한 문장이고 통념이다(징후적이게도 문장 또한 늘어지고 있다). 즉, 그는 더 진행하지 않고 멈춘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미래는 좀 다르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무너가 읽고 써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빼놓지 않고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이 고전인데, 어떤 고전이 지금의 우리에게 적합한 대화 상대인가는 너무나 상대적인 것 같다.
그리하여 주저앉는 문장들.
어쨌든 정말 좋아하는 책을 만나는 것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살갗을 부비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똑같은 쾌감을 줄 테니 그런 순간을 놓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린 모두 지독한 쾌락주의자로 사는 시기를 겪을 테니까.
사실 내가 기대하는 건 '극복의지'이지 '쾌감'이나 '쾌락주의'가 아니다. 책읽기가 "한 번뿐인 인생의 쓸쓸한 일회성, 혹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내려는 '의지'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과 책읽기란 "살갗을 부비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란 주장은 과연 같은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건 나의 취향이 아니다. '어쨌든'이란 부사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취향('어쨌든'은 우리를 관대하게 만들고 게으르게 만든다). 나는 저자가 겹쳐읽는 감각보다는 엉덩이의 힘을 '실제로' 더 신뢰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