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나는 한 가지 주제만을 반복적으로 쓰고 있다). 보통 월초에 나가다가 이달엔 월말에 나가게 됐는데, 낮에 천안함 구조 속보를 계속 클릭해가며 쓴 것이다(끝내 원고를 보낼 때까지 좋은 소식은 뜨지 않았다). 칼럼의 제목은 '행복은 경제성장과 무관하다'로 나갔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행복'은 정치적 공약이 되기에는 너무 모호하다는 점이다. 정치의 장에서 행복은 언제나 계량화된 행복, 정량적인 행복일 수밖에 없으며(행복의 비교급은 그런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곧 '행복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 미처 거기까지 다 쓰지 못한 탓도 있다...
경향신문(10. 03. 30) [문화와 세상]행복은 경제성장과 무관하다
중국의 부유층 사이에서 티베트의 토종개 ‘짱아오’ 열풍이 불고 있다 한다. 사자의 갈기처럼 긴 털로 덮여 있어서 일명 ‘사자개’라고도 불리는 이 희귀종 개는 원래 유목민들의 양치기개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신흥부자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육하면서 몸값이 한국 돈으로 십수억원까지 치솟았고, 중국의 고가품 10대 아이템에서도 1위로 꼽혔다는 소식이다. 사치품 과소비의 전형적 사례로 이제 자본주의 중국도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진입했다는 의미일까.
소비사회란 상품의 사용가치, 곧 도구적 용도보다는 행복이나 위세 같은 기호적 가치가 소비의 고유한 영역이 되는 사회다.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는 걸 인정받고 싶어한다. 더 행복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한다. 소비사회에서 행복은 구원과 동의어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이런 갈망은 인간의 타고난 성향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조건에 의해 배태된 것이다.
사회학자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1970)에서 내민 통찰에 따르면, 행복의 신화는 근대의 정치혁명이 표방한 평등의 신화를 구체화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이념이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 전이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평등이 실현되기 위해 행복이 계량 가능한 것이 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즐거움은 평등의 척도로 부적합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행복은 무엇보다도 측정 가능한 복리와 물질적 안락이라는 내용을 갖게 되었다. 모든 인간이 욕구와 충족의 원칙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그 전제다. 그렇게 해서 똑같이 유행하는 옷을 입고 똑같은 TV프로그램을 보고 하는 생활수준의 민주주의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짝이 되었다. 더 높은 성장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보장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행복의 신화’는 한갓 ‘신화’에 불과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멜라네시아의 원주민들은 미군의 보급기지를 본떠 어설픈 활주로를 만들었다. 물자를 잔뜩 싣고 드나들던 화물기가 자신들의 ‘비행장’에도 착륙하기를 고대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의 ‘화물 숭배’는 아무런 효력을 보지 못했다. 원주민들의 주술적인 미신이었을 뿐일까? 하지만 이것은 소비라는 활주로를 만들어놓고 그곳에 행복이 착륙하기를 필사적으로 기다리는 소비사회의 우화이기도 하다고 보드리야르는 꼬집는다. 개발과 풍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이 대책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국민의 행복지수가 언제나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그들은 쓰레기를 뒤지며 살더라도 마실 물과 먹을 것이 있으면 감사하며 행복해한다고. 이것은 ‘행복지수’란 말 자체가 난센스이면서 동시에 행복은 경제성장이나 정치적 진보와는 무관하다는 걸 시사해준다.
절판 유언에 따라 품귀 현상이 벌어진 법정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의 중고판이 20억원대까지 경매가가 치솟았다가 110만5000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무소유’라는 가치조차도 소유의 대상이 되는 소비사회의 자연스러운 풍경이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무소유에 대한 이러한 붐이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이어진다면, 다가오는 정치의 계절에 혹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도 해본다. 적어도 ‘7·4·7’ 같은 구호에는 더 이상 현혹되지 않으리란 기대다. 사회적 진보는 오히려 행복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10. 03. 29.
P.S.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문예출판사, 1991/2002)는 강의를 할 기회가 있어서 자세히 들여다본 책인데, 그의 중요한 논쟁상대가 <풍요한 사회>(한국경제신문, 2006)의 저자 갤브레이스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풍요한 사회>의 초판은 1958년에 나왔으며, 보드리야르는 갤브레이스의 성장사회론에 대한 검토와 비판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갤브레이스의 책으론 1967년에 나온 <새로운 산업국가>(홍성사, 1979)도 다뤄진다. 모두 당시에 불어로 번역된 책들이다. 전에 포스팅한 바 있지만, 리포베츠키의 <행복의 역설>(알마, 2009) 또한 <소비의 사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으로 같이 읽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