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교육문화센터 분당센터에서 내주 24일(수) 저녁(19:30-21:30)에 이벤트 특강을 갖는다(http://www.hanedu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3&tolclass=0001&searchword=&subj=B90824&gryear=2010&subjseq=0001&p_selmenu=01). 강의주제는 '로쟈 이현우 특강: 2010년이 가기 전, 이 책은 꼭 읽어라'라고 돼 있는데, 애초엔 읽을 만한 책 4권을 골라서 풀어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고 '이 책을 꼭 읽어라'보다는 '이 문제는 생각해보자'란 취지로 몇 권의 책을 추천했다(그러니까 선정기준은 '올해의 책'이 아니다). 국민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고전이란 무엇인가, 교양이란 무엇인가 등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네 가지 주제를 다루는 데 참고할 책은 아래와 같다.  

1.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니시카와 나가오 지음/역사비평사  

 

2.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센델 지음/김영사 

 

3.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스토예프스키 지음/민음사  

 

4. 교양이란 무엇인가?/동경대교양학부 지음/지식의 날개   

 

10.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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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내 2010-11-1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당에서 하는건가요?

로쟈 2010-11-14 18:18   좋아요 0 | URL
네, 분당센터는 분당에 있습니다.^^

헌내 2010-11-14 18:39   좋아요 0 | URL
엉엉.... 너무 멀군요..T_T

노원 평생학습관에 한 번 강의 오세요~ (저번에도 한 번 오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2010-11-14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4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칼 슈미트'를 검색하다가 발견하고 입수한 책은 독일의 저널리스트 헤닝 리터의 <씽커스>(21세기북스, 2010)이다. 두 달쯤 전에 나온 책에 뒤늦게 손이 간 셈인데, 독어책에 '씽커스'란 제목을 붙인 것이 눈에 들지 않았던 듯싶다. '20세기를 창조한 12명의 지식 정복자들'이란 부제가 책의 실상에는 더 가깝다. 12명의 면면도 눈길을 끌었지만(그 중 2명은 '초면'이다), 저자가 독일의 유력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인문학 부서 책임자였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글의 대부분이 그 지면에 실렸던 것이다.  

파이낸셜뉴스(10. 09. 15) 20세기 사상가 12인..그들은 ‘정복자’였다

요즈음 인문학이 위기다. 많은 사람이 인문학이 죽었다고까지 말한다. 철학, 문학, 예술, 역사 등을 포괄하는 인문학은 경제학, 심리학 등과 같은 소위 실용학문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오랜 세월 인문학에 매달려 궁핍한 삶을 이어오다가 끝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느 대학 시간강사의 죽음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문학이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인문학은 현실과 갈등하면서 고뇌하는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본연의 임무를 잊고 대중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미명하에 값싼 화장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대중들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려는 탈선까지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인문학의 죽음을 더욱 앞당길 뿐이다.

독일의 대표적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인문학 담당자인 헤닝 리터가 저술한 ‘씽커스 THINKERS’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 12인의 삶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인문학의 매력과 그것이 우리의 삶과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소개하고 있다. 

무의식의 대륙을 정복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변신’의 실존을 살았던 프란츠 카프카, 언어 성찰을 통해 철학을 혁신하려했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오늘날 인문학의 보고로 인정받고 있는 도서관을 세우고 새로운 문화사를 정립한 아비 바부르크, 문예비평부터 문명비평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지성의 아우라를 뿜어낸 발터 벤야민, 히틀러가 일으킨 재앙의 역사를 냉정한 어조로 묘사한 나치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 민주적 스노비즘의 종착역을 통해 속물’의 역사를 예견한 알렉상드르 코제브, ‘프랑스와 결혼한’ 앙드레 말로, 영국과 소련의 이중간첩이자 영국의 가장 권위 있는 미술사학자였던 앤서니 블런트, 30년에 걸쳐 ‘군중과 권력’을 집필하고 원시시대를 기준으로 현재를 평가하고자 했던 엘리아스 카네티,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담론의 대가이자 영국 지식인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이사야 벌린. ‘슬픈 열대’를 통해 사라져 가는 문화들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성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사고의 탐색을 추구하고 사유의 도발을 감행한 이들 12인을 통해 저자는 근대철학에서 미술사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식의 제국을 조망하고 있다. 

20세기는 산업혁명으로부터 비롯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의 변혁이 바야흐로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이들은 사색의 공간이 사라지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냉혹한 시기에도 성찰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종합적 지식인’의 전통을 이어갔다. 자신을 한니발과 동일시하며 스스로를 학자라기보다는 정복자라고 느꼈던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발견하고 꿈을 철학적으로 고찰하여 현대 심리학의 기초를 다졌다. 미술사학자였던 앙드레 말로는 정치가로 변신하여 문화부 장관을 지내기도 하고, 또 시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사상가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이들을 ‘정복자들’이라 칭하고 있다.

이 책은 이들 지식인들의 생애와 업적을 읽기 쉽게 요약해 소개하는 형식이 아니라 이들의 작품이나 지인들과 왕래한 서신 등을 통해 이들의 내면을 꿰뚫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죽음은 곧 시대의 정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인문학에 대한 우리 모두의 관심이 인문학을 살리고 시대를 살릴 수 있음을 상기하자.(최종옥 북코스모스 대표) 

10.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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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4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4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의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문가 서평'을 옮겨놓는다. 필자는 정치철학 전공자인 서울대의 유홍림 교수다. 전공 학자의 서평을 애타게 찾던 분들의 갈증이 좀 해갈되지 않을까 한다.

대학신문(10. 11. 07) '공동선의 정치'는 정의로운가?  

우리는 얼마나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가? 정의의 기준에 대한 합의는 가능한가? 정의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공동체적 삶의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다. 정의의 문제는 왜 중요한가? 정의 관념은 정치와 법질서의 토대로서 정치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법과 정책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삶의 상징적 기초다. 따라서 정의에 대한 공통된 이해에 의해 사회통합이 가능해지며, 기대와 상황에 부합하는 정의 관념의 수립에 의해 정치적 안정이 확보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정의에 대한 생각의 차이는 불안정과 내란의 원인이 된다. 정치 위기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의 관념의 와해와 깊은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정의가 사라질수록 정의에 대한 관심과 요구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정의는 복합적인 관념, 다양한 가치들의 분배와 직결
정의를 주제로 한 정치철학 수업을 담은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치철학의 실천성에 대한 샌델 교수의 관심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를 연상시키는 질의토론식 수업,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현실 속의 다양한 논쟁사례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은 토론과 논쟁의 활성화를 통한 ‘철인-시민(philosopher-citizen)’의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샌델 교수는 자유주의, 공리주의, 공화주의 등을 공공철학의 관점에서 다룬다. 공공철학은 철학적 논의를 사회 운영의 원리와 결합시키려는 노력이며, 다양한 가치들의 분배와 직결되는 정의 관념은 공공철학의 핵심 주제다.

정의는 복합적인 관념이다. 자유, 평등, 행복, 목적, 미덕 등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정의 관념은 공적 토론의 중심에 위치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한 구분으로부터 출발한다. 행복, 자유, 미덕 각각을 기준으로 정의의 문제에 접근하는 사상체계들로서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칸트의 도덕철학, 롤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등이 차례로 소개된다. 지루할 수도 있는 철학적 설명은 흥미로운 사례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들이 짜임새 있게 얽혀 있다. 이 책의 두드러진 매력이다.

샌델은 공리주의·자유주의 아닌 ‘공동선의 정치’ 주장
샌델 교수의 정의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과 논의는 “정의와 공동선”을 결합하는 “공동선의 정치” 구상으로 귀결된다. 그는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정의 담론의 한계를 적시한다. 공리주의는 정의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환원시킬 뿐만 아니라, 가치를 획일화하고 가치들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또 그는 자유에 기초한 정의 이론들은 개인의 자율적 선택과 권리를 절대화하면서, 목적의 도덕적 가치,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중립의 명분아래 정치 영역에서 배제한다고 비판한다. 샌델 교수는 이러한 “회피의 정치”를 넘어 “공동선의 정치”를 추구한다. 비판이 고조될수록 공동선의 정치 구상은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시민의 윤리적 역량을 중심축으로 삼는 공동선의 정치는 물질적 이해와 개인의 권리 담론에 경도된 현대 정치의 천박함과 공허함을 비판하면서 도덕적 열망의 정치를 지향한다. 시민의식, 희생, 봉사,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인식, 불평등의 해소를 통한 연대 구축,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결론에 따르면 철학과 정치의 화려한 재결합을 보는 듯하다.

현대 정치에 대한 불만과 함께 공화주의 또는 공동체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정치적 소외와 무력감, 시민윤리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여의 활성화와 시민덕성의 함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샌델 교수의 정치 구상은 오랜 역사를 갖는 공화주의 전통을 계승한다.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공화국은 정의와 공동선을 기반으로 주권자인 시민들이 만든 정치공동체로서 시민덕성, 즉 시민의 윤리적 자질과 역량에 기초한다.

 

정치가 도덕 문제 해결의 장 되면 사회통합의 위기 이어질 수도
공화주의 전통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공동선의 정치”는 샌델 교수가 그의 다른 저서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인정하듯이 “성공의 보장이 없는 위험한 정치”일 수 있다. 정의와 공동선을 결합시켜 도덕 담론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경우 의견 갈등은 증폭될 것이다. 물론 가치와 그 의미를 둘러싼 공적 논쟁이 결국 정의로운 사회 형성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의 도덕 논쟁이 낳을 결과에 대한 지나친 낙관은 위험하다. 정치영역이 도덕 문제 해결의 장이 되어 시민의 가치관 형성에 개입하게 된다면, 정치-도덕 논쟁이 사회통합의 위기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민들이 참여하는 토론이 어느 정도 합의를 지향한다면, 이성적 합의를 위한 조건과 절차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즉 샌델 교수가 비판하는 중립성과 대표성의 절차, 추상화된 정의 원리가 다시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정의에 대한 상이한 이해 방식들은 순환적으로 연계된다. 따라서 다른 방식들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어느 한 방식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의에 대한 샌델 교수의 ‘선택적 접근’과 대비될 수 있는 ‘정치적 접근’ 방식은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포괄하는 다초점적이고 맥락적이며 전체를 둘러보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정치세계는 자유, 평등, 복지, 유대, 개인성, 집단정체성, 민주적 정당성, 시민윤리, 리더십 등 다양하고 때로는 상충하는 열망과 가치들을 내포한다. 문제는 이러한 가치들의 완전한 조화와 실현을 보장하는 하나의 해결책은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정치는 상충하는 가치와 요구들 간의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의 담론은 이러한 ‘균형의 정치’에 필요한 사고력과 판단력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돼야 한다.

한가지 정의 담론을 선택하기보다 영역별 고유의 자율성·협력 보장해야
샌델 교수의 열망과는 달리 현대 다원사회에서의 정의 관념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유와 평등, 정치와 경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분배와 인정 등의 제도와 관심들이 분화하고 교류하는 양상은 복잡하다.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각각의 영역은 고유한 정의 관념과 원칙을 자율적으로 형성해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의 역할은 영역별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상호협력을 위한 통합을 유지해가는 것이다. 정치에서의 정의는 부분적 요소들 간의 ‘조화’의 문제이다. 샌델 교수의 정의 담론에는 부분적인 ‘영역별 정의’와 전체포괄적인 ‘정치적 정의’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어떤 시공간의 맥락에서 어떤 정의 원칙이 타당한지 알기 위해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식의 기준 선택에 대한 논쟁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유홍림 교수_정치외교학부) 

10. 11. 14. 

P.S. 서평은 발표지면과 분량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을 나는 한 대학원신문으로부터도 청탁받은 적이 있는데, 일정 때문에 응하지 못했다. 그런 지면에서라면 나는 '경영계'에 쓴 것과는 다른 서평을 썼을 것이다. 더불어,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란 문구와 함께 소개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인문서로는 8년 만에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하면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다." 같은 서두도 불필요했을 것이다. '사보'류의 책에 책소개 중심의 서평을 썼다고, 마치 무자격자의 월권행위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 온당한지 나로선 의문이다. 과연 두 종류의 서평은 상호배제적인 것인지?  

더불어, 공동선의 정치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을 담고 있는 전문가 서평에 대해서도 정치세계와 정치의 역할에 대한 필자의 정의(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정치는 상충하는 가치와 요구들 간의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란 필자의 주장이 공허해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정의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관점과 요구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민주사회에서 도덕적 가치의 개입이 중요하다는 주장(샌델)과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립한다면, '조화'와 '균형'은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을까? 역시나 '적절한' 개입에서 찾아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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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4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주 관심도서의 하나는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그린비, 2010)이다. 예상대로 한겨레에 리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기사에서도 거명이 되지만, 샹탈 무페나 아감벤, 지젝 등의 책과 연결해서 읽으면 '생산적'일 듯하다.  

  

한겨레(10. 11. 13) 불온한 사상가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 

독일의 헌법학자·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사진)의 이름은 불온하고 위험한 20세기 지식인 리스트의 앞자리에 놓인다.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정치신학>이 김항(고려대 HK연구교수)씨의 번역으로 나왔다. 슈미트는 ‘나치 법학자’로 낙인찍혔지만, 그의 사상의 독창성과 심원함이 지닌 힘은 이 낙인을 뚫고 슈미트라는 이름을 지식세계의 복판에 다시 세웠다. 특히 샹탈 무페(<정치적인 것의 귀환>), 조르조 아감벤(<예외상태>) 같은 급진적 좌파 이론가들이 이 보수반동적 학자의 사상을 되살리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슈미트 사상은 그만큼 중층적이고 급진적인 데가 있다. 



슈미트 사상은 1918년을 기점으로 하여 변화의 급류를 탔다. 그 전까지 한스 켈젠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자유주의 법학의 흐름에 한발을 담그고, 다른 한편으로 아나키즘적 낭만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보였던 슈미트는 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해 승전국들의 굴욕적 강압 속에서 베르사유체제가 성립하고 이어 국가의 혼란이 거듭되는 상황을 겪으며 국가주의와 권위주의가 결합된 ‘결단과 독재’의 사상가로 나아간다.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그는 나치즘의 법학적 대변자가 된다. 나치에 가담하기까지 그의 사상의 변신과 도약은 당대의 논적들을 공격하는 정치적 팸플릿 성격의 저술 작업으로 나타났다. <독재>(1921)에서 예외상태를 뚫고 나가는 수단으로 ‘독재’라는 제도에 주목하고, <정치적인 것의 개념>(1927)에서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라고 선언한다. 또 <헌법의 수호자>(1931)에서는 당시 비상대권에 의지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탱하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헌법의 수호자’로 옹호하고, <합법성과 정당성>(1932)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이라 할 다수결주의의 무능을 규탄한다.  

  

1922년에 펴낸 <정치신학>은 10여년에 걸쳐 급진화하는 이 보수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슈미트는 주권이론을 새롭게 세워 이 이론을 거점으로 삼아 자유주의 이념을 규탄하고 나아가 극좌이념을 비판한다. 이 책은 ‘주권자란 무엇인가?’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이 명제는 힌덴부르크의 통치 사례로 설명될 수 있다. 바이마르 헌법 48조가 보장하는 ‘대통령의 비상대권’에 의지해 힌덴부르크는 1929년 이후 몇 년 동안 ‘긴급명령’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의회의 기능이 고장난 이런 예외상태에서 대통령이 사실상 주권자로서 정치적 결정을 임의로 했던 것인데, 여기에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명제의 엇비슷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슈미트는 19세기 스페인의 반혁명적 보수사상가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1809~1853)를 불러내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운다. 코르테스는 1830년 7월혁명으로 등장한 프랑스의 7월왕정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정부로 규정하고, 이 정부의 자유주의적 어정쩡함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 ‘정치신학’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들의 신학이 7월왕정의 정치학과 상동관계에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코르테스는 ‘이신론’, 곧 신은 세계를 창조했지만 운행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부르주아의 신학으로 제시한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는 신을 원하지만 이 신은 활동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는 군주를 원하지만 그 군주는 무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코르테스의 자유주의 부르주아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부르주아지는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면서도 교양과 재산에 따라 선거권을 유산계급으로 한정할 것을 요구한다.” “부르주아지는 혈통 및 가계에 기초한 귀족지배를 폐기하면서도 가장 파렴치하고 저급한 금권적 귀족지배를 용인한다.” 코르테스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토의하는 계급’이라고 정의하는데, (예외상태에 봉착해) 결단을 행해야 할 시점에 토의를 개시함으로써 결정을 회피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모든 정치적 활동을 의회의 논의에 내맡기고 진정한 투쟁을 거부하는 자들, 영원히 대화만 하는 자들, “결정적 대결,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의회의 토론으로 바꿀 수 있고 ‘영원한 대화’를 통해 영원히 유보상태에 머물 수 있다”고 기대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슈미트는 보수주의자 코르테스에게 ‘불구대천의 적’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무신론적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그 불구대천의 적들이 자유주의적 어정쩡함을 거부하고 결단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들의 “악마적 위대성”을 존경했다. 이 점에서 코르테스와 슈미트는 하나다. 슈미트는 의회주의의 어정쩡한 틀 안에 모든 정치적 적대를 뭉뚱그려 넣고 회피하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을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치이념을 압도하여 ‘진정한 정치’를 없애버리는 현대 부르주아 국가를 규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급진주의 이론이 슈미트를 주목하는 이유가 발견된다.(고명섭 기자) 

10. 11. 13.  

 

P.S. 슈미트의 정치신학에 대한 도전적인 독해로는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샌트너,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이 공저한 <이웃>(도서출판b, 2010)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의 부제가 '정치신학에 관한 세 가지 탐구'이다. 일부만을 읽었었는데, <정치신학>이 나온 김에 마저 읽어볼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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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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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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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283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2010)를 거리로 삼았다. 저자의 입문서론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번역본의 부제는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저자는 프랑스 현대사상 전공인데, 약력을 보니 레비나스 번역서와 연구서를 갖고 있으며, 국내에 소개된 책으론 <하류지향>(열음사, 2007)이 있다.    

기획회의(10. 11. 05) 근원적인 물음을 제공하는 입문서

구조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1960년대 프랑스의 한 잡지에 ‘구조주의 사인방’을 그린 카툰이 실렸다. 원주민 복장을 한 네 명의 구조주의자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인데, 그들이 푸코, 라캉,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바르트였다.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란 부제를 달고 나온 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표지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그 카툰이었다. “입문자를 위해 쉽게 쓴 구조주의 해설서”를 자임한 책이기에 또 그런 ‘친근함’에 대한 기대를 자연스레 갖게 했다. 저자 스스로 입문자용 책에는 “모든 독자를 손님처럼 맞이하는 상냥한 태도”가 있다고 적었다. 친근함에 더하여 친절함까지 갖추고 있는 모양새다.  

책에서 본론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서문에서 피력하고 있는 입문서론인데, 전문가를 위한 책이 ‘알고 있는 것’을 쌓아올려 간다면 좋은 입문서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루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입문서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지적 탐구란 늘 ‘나는 무엇을 아는가?’가 아닌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므로, 그러한 입장에 충실하자면 전문서보다도 입문서가 오히려 지적 탐구에 더 적합한 형식이고 매체다. “입문서는 전문서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만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고 보면, 그의 ‘쉽게 읽기’는 여느 ‘깊이 읽기’보다도 더 지식의 핵심을 건드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 명의 구조주의자들을 살펴보기 전에 저자는 1장에서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를 정리하고, 2장에서는 그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소쉬르의 언어학의 핵심을 짚어준다. 일단 그는 ‘구조주의의 종언’ 이후의 시대인 포스트구조주의 시대를 “구조를 상식으로 간주하는 사상사적 관습의 시대”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즉 구조주의 사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아니라 이미 그것이 지배적인 편견이 된 탓에 더 이상 ‘문제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시대다. 더 나아가 ‘사상의 관습’에 대한 이러한 성찰 자체가 구조주의의 산물이자 유산이다.  

따라서 구조주의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구조주의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 구조주의의 진정한 종말은 구조주의의 용어 자체를 폐기하게 될 때, 다들 그것에 질리게 될 때 찾아오리란 전망이다. 하다못해 ‘구조조정’이란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한, 구조주의의 수명은 계속 연장될 것이다. 우리는 구조주의 패러다임 안에 있다는 뜻이니까. 이런 주장이 떠올려주는 것은 오래 전 방한했던 프랑수아 도스의 말이다.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의 저자인 그는 구조주의 전성기 때 프랑스에선 축구팀 코치도 ‘구조조정’이란 말을 입에 올렸다고 한다. 기대와는 달리 전혀 우습지 않은 일화다. 그런 일화가 ‘역사’가 아니라 아직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는 관점이고 세계관이다. 세계에 대한 견해가 시점이 바뀌면 달라진다는 자명한 ‘상식’을 일깨워준 것이 구조주의의 기여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바르게 세상을 보고 있다’는 주장의 문제점을 자각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가령 30여 년 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미국 사람이 보는 베트남 풍경과 베트남 사람이 보는 베트남 풍경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한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조지 부시의 반(反)테러 전략에도 일리가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시민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 시민의 ‘상식’이 되었다. 자신이 구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구조주의적으로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구조주의의 힘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전사(前史)를 이루는 세 사상가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다.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사고한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 마르크스라면, 프로이트는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덧붙여 고전문헌학자 니체는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단언했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자기의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의미다. 자기의식이란 ‘지금의 나’로부터 벗어나 이질적인 자리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현대인들은 다른 곳의 다른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했다. ‘19세기 독일의 부르주아이며 그리스도교 신자’인 그들은 자기만의 가치판단을 인류 일반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 현대인은 바보가 되었는가?”라고 니체는 물었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가 구조주의의 ‘땅고르기’를 했다면 소쉬르의 언어학은 구조주의의 직접적인 연원이 됐다. 소쉬르는 어떤 것의 언어적 가치라는 것은 그것이 언어체계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것 자체에는 생득적이거나 본질적인 어떤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조금 확장해보자면, ‘나’라는 정체성 혹은 자아는 그 자체로 어떤 가치나 의미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소쉬르의 사상이 ‘자아중심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는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 하에서 문화인류학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 기호론의 롤랑 바르트, 사회사의 미셸 푸코가 등장하게 된다.

입문서인 만큼 기존의 구조주의 해설서들과 중복되는 내용이 없지 않지만, 몇몇 대목에선 저자의 안목이 도드라진다. ‘권력=지’가 되는 ‘표준화의 압력’에 대한 비판이 푸코의 핵심 사상이므로, 푸코의 저작이 전 세계 인문사회과학도에게 필독서가 돼 있는 현실은 분명 역설적이라는 지적이 그런 경우다. 또 바르트의 용어 ‘에크리튀르’를 설명하면서 ‘아저씨의 에크리튀르’, ‘교사의 에크리튀르’, ‘깡패의 에크리튀르’, ‘비즈니스맨의 에크리튀르’ 등을 예로 든 것은 “에크리튀르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가 지닌 ‘자연’적 어법에 부여해야 하는 사회적 장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바르트의 문장을 예전에 곱씹어 읽으면서도 내가 무얼 이해하지 못했던가를 일깨워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책은 내게 제값의 입문서 역할을 했다.  

10. 11. 12.  

 

P.S. 서두에서 적은 구조주의자 카툰은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 전4권)의 표지에 들어있기도 하다. 우치다 하츠루의 책을 읽고 다시금 관심을 갖게 돼 나는 절반만 읽었던 이 책의 3-4권을 마저 구입했다. 2권짜리 영역본도 '백업용'으로 구입하고.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과 함께 오래 망설이던 시리즈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돼 감회가 없지 않다. 물론 독서시간도 손에 넣는 게 남은 과제이다.  

현대 지성사가인 프랑수아 도스의 책 얘기가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그의 평전<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도 이번에 구한 책이다(우리말 번역이 진행되고 있는 책이다). 덧붙여, <의미의 제국>도 자꾸 눈길이 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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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2 16: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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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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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2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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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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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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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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