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주 관심도서의 하나는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그린비, 2010)이다. 예상대로 한겨레에 리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기사에서도 거명이 되지만, 샹탈 무페나 아감벤, 지젝 등의 책과 연결해서 읽으면 '생산적'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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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10. 11. 13) 불온한 사상가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
독일의 헌법학자·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사진)의 이름은 불온하고 위험한 20세기 지식인 리스트의 앞자리에 놓인다.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정치신학>이 김항(고려대 HK연구교수)씨의 번역으로 나왔다. 슈미트는 ‘나치 법학자’로 낙인찍혔지만, 그의 사상의 독창성과 심원함이 지닌 힘은 이 낙인을 뚫고 슈미트라는 이름을 지식세계의 복판에 다시 세웠다. 특히 샹탈 무페(<정치적인 것의 귀환>), 조르조 아감벤(<예외상태>) 같은 급진적 좌파 이론가들이 이 보수반동적 학자의 사상을 되살리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슈미트 사상은 그만큼 중층적이고 급진적인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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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 사상은 1918년을 기점으로 하여 변화의 급류를 탔다. 그 전까지 한스 켈젠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자유주의 법학의 흐름에 한발을 담그고, 다른 한편으로 아나키즘적 낭만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보였던 슈미트는 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해 승전국들의 굴욕적 강압 속에서 베르사유체제가 성립하고 이어 국가의 혼란이 거듭되는 상황을 겪으며 국가주의와 권위주의가 결합된 ‘결단과 독재’의 사상가로 나아간다.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그는 나치즘의 법학적 대변자가 된다. 나치에 가담하기까지 그의 사상의 변신과 도약은 당대의 논적들을 공격하는 정치적 팸플릿 성격의 저술 작업으로 나타났다. <독재>(1921)에서 예외상태를 뚫고 나가는 수단으로 ‘독재’라는 제도에 주목하고, <정치적인 것의 개념>(1927)에서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라고 선언한다. 또 <헌법의 수호자>(1931)에서는 당시 비상대권에 의지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탱하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헌법의 수호자’로 옹호하고, <합법성과 정당성>(1932)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이라 할 다수결주의의 무능을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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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 펴낸 <정치신학>은 10여년에 걸쳐 급진화하는 이 보수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슈미트는 주권이론을 새롭게 세워 이 이론을 거점으로 삼아 자유주의 이념을 규탄하고 나아가 극좌이념을 비판한다. 이 책은 ‘주권자란 무엇인가?’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이 명제는 힌덴부르크의 통치 사례로 설명될 수 있다. 바이마르 헌법 48조가 보장하는 ‘대통령의 비상대권’에 의지해 힌덴부르크는 1929년 이후 몇 년 동안 ‘긴급명령’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의회의 기능이 고장난 이런 예외상태에서 대통령이 사실상 주권자로서 정치적 결정을 임의로 했던 것인데, 여기에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명제의 엇비슷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슈미트는 19세기 스페인의 반혁명적 보수사상가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1809~1853)를 불러내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운다. 코르테스는 1830년 7월혁명으로 등장한 프랑스의 7월왕정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정부로 규정하고, 이 정부의 자유주의적 어정쩡함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 ‘정치신학’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들의 신학이 7월왕정의 정치학과 상동관계에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코르테스는 ‘이신론’, 곧 신은 세계를 창조했지만 운행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부르주아의 신학으로 제시한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는 신을 원하지만 이 신은 활동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는 군주를 원하지만 그 군주는 무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코르테스의 자유주의 부르주아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부르주아지는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면서도 교양과 재산에 따라 선거권을 유산계급으로 한정할 것을 요구한다.” “부르주아지는 혈통 및 가계에 기초한 귀족지배를 폐기하면서도 가장 파렴치하고 저급한 금권적 귀족지배를 용인한다.” 코르테스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토의하는 계급’이라고 정의하는데, (예외상태에 봉착해) 결단을 행해야 할 시점에 토의를 개시함으로써 결정을 회피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모든 정치적 활동을 의회의 논의에 내맡기고 진정한 투쟁을 거부하는 자들, 영원히 대화만 하는 자들, “결정적 대결,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의회의 토론으로 바꿀 수 있고 ‘영원한 대화’를 통해 영원히 유보상태에 머물 수 있다”고 기대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슈미트는 보수주의자 코르테스에게 ‘불구대천의 적’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무신론적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그 불구대천의 적들이 자유주의적 어정쩡함을 거부하고 결단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들의 “악마적 위대성”을 존경했다. 이 점에서 코르테스와 슈미트는 하나다. 슈미트는 의회주의의 어정쩡한 틀 안에 모든 정치적 적대를 뭉뚱그려 넣고 회피하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을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치이념을 압도하여 ‘진정한 정치’를 없애버리는 현대 부르주아 국가를 규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급진주의 이론이 슈미트를 주목하는 이유가 발견된다.(고명섭 기자)
10.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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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슈미트의 정치신학에 대한 도전적인 독해로는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샌트너,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이 공저한 <이웃>(도서출판b, 2010)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의 부제가 '정치신학에 관한 세 가지 탐구'이다. 일부만을 읽었었는데, <정치신학>이 나온 김에 마저 읽어볼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