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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자료들을 좀 읽게 되었다고 했는데, 인터넷상에 떠있는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이란 글도 마찬가지이다(바람구두님의 서재에도 옮겨져 있다). 출처는 <녹색평론>(1995년 5-6월호)라고 하니까 10년도 더 전의 글이다. 역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여기 소개하는 것은 '영화에 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영화론의 영어판 <시간속의 조각(Sculpting in Time)>(1989년 개정판)의 결론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같은책의 독어판(1985년)으로부터 김창우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 <봉인된 시간>이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된 바 있다"란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봉인된 시간>(1991)의 맺음말(273-284쪽)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데, 굳이 옮겨놓는 것은 각각 독역본과 영역본에서 중역한 것이라는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문체상의 차이 이상의 여러 불일치점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역본에서 옮긴 글조차도 일부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타르코프스키의 진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교정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이래저래 밀린 일들이 많아서 교정은 다소 시일이 걸릴 예정이다).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은 텍사스대학출판부에서 나온 2003년판이다. 참고로 영역본은 독어본에서 옮겨진 것인데, 1986년에 처음 출간됐고 교정본이 이듬해 출간됐다(1987년판과 2003년판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걸로 안다).

덧붙여서 내가 참고하는 책은 올가 수르코바의 <타르코프스키와 나>(엑스모, 2002) 등이다. 수르코바는 <봉인된 시간>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영화평론가인데,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서문의 말미에서 이렇게 언급해놓고 있다: "보충해서 언급할 것은 이 책이 나 자신의 일기책과 같은 양식, 강연, 영화평론가 올가 수르코바와의 대담을 기초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수르코바는 이미 <안드레이 루블료프> 촬영 당시에 학생 신분으로 참관했으며, 그녀가 추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면서도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바 있다.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내게 많은 도움을 준 그녀에게 감사드린다."(16쪽) 타르코프스키와 가장 가깝게 교우했던 바로 그 수르코바이며, 그녀는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타르코프스키에 대하여>(라두가출판사, 2005)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Тарковский и я. Дневник пионеркиС Тарковским и о Тарковском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

오늘날 예술일반이나 또는 특별히 영화의 기능에 관해 얘기하는 것보다는 삶 자체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삶의 의미에 대하여 의식이 없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언어속에서 아무런 조리있는 발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부딪치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간단한 성찰로써 이 책을 마무리지으려고 결정하였다. 그 문제들은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 우리의 생존에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강조된 구절들이 국역본에 빠져 있다).

비단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과제를 규정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문명이 처한 일반적인 상태와 역사속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의 개인적인 책임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즉, 결론에서 타르코프스키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현 문명의 상태'와 이에 대한 '각 개인의 책임'이다).

우리 시대는 한 전체적인 역사적 순환의 마지막 정점인 듯이 보인다. 사회를 좀더 '정의롭고' 합리적으로 조직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대심문관', 지도자, '뛰어난 인물' 들이 그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왔다. 그들은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아, 새로운 이념적 사회적 사상을 주입하고, 대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삶의 구조를 개편할 것을 요구하였다(*'대심문관'은 국역본에서 '대종교 재판관'이라고 옮겨져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을 가리킨다).

 

도스토에프스키는 타인들의 행복을 위해 책임을 떠맡고자 하는 '대심문관들'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이미 경고를 한 바 있다. 인류의 이익과 보편적 복지를 들먹이며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내세우는 결과가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무참하게 침해하는지, 그리고 '역사적 필연'에 뿌리를 둔 그 '객관적' '과학적' 힘으로써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민중의 삶의 기본현실을 왜곡하는지, 우리 자신이 보아왔던 것이다(*강조한 대목이 역시나 국역본에 빠져 있다).

문명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역사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구원과 인간의 개선을 위하여 이데올로그와 정치가들의 마음속에서 구상되어, 민중에게 제시된 '올바른' 길 ― 매번 좀더 나은 ― 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재편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그때마다 '소수'는 자기들 자신의 사고방식을 취소하고, 제안된 행동지침에 자신들의 행동을 맞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래와 인류를 구원할 '진보'를 위한 역동적인 활동에 그렇게 참여하면서, 개인은 자신의 본질과 개성과 독특성을 망각해버렸다. 일반적인 것 속에 갇혀버린 채 그는 자기자신의 정신적 본질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갈수록 화해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이익에 골몰하여, 그 어느 누구도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참뜻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우선 자기자신을 사랑하여 자기자신속에 있는 초개인적이며 신적(神的)인 원리를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이 원리를 따를진대 나는 탐욕과 이기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고 오히려 아무런 계산이나 군말없이 나 자신을 바치고, 남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한 감각이 있어야 된다. 지구위에서의 내 삶의 중심에 있는〈나〉 ― 자기본위의 욕망이 있을 수 없는 완성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영적으로 성장을 하는 ― 의 객관적 가치와 의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자기자신에 대한 충실성은 끊임없는 일편단심의 노력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의 좁고 기회주의적인 동기에서 조금이라도 초월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진실하게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비상히 힘들다. 그러나〈인간 영혼의 낚시꾼〉들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은 대단히 쉽다. 이른바 좀 더 높고 일반적인 목표를 추구한답시고 자기자신의 유일무이한 소명을 포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자기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적 관계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느끼지 않으면서 타인과 인류 전체의 책임을 묻기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어왔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겸손과 자기희생과 사회건설에 있어서의 역할 수용을 기대하면서도 그들 자신은 그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며 세상사에 대한 아무런 개인적 책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비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더 고결한 목표때문에 자신들의 편협하게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수많은 구실이 발견될 수 있다. 냉정하게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과 영혼에 대한 책임은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함께〉라는 전제위에서, 다른 말로 하면 인류는 어떤 종류의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 있다는 전제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인적인 부담을 회피하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모든 책임을 타인들에게 전가한다. 그 결과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은 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되고, 개인과 인류간의 소외의 벽은 갈수록 높아진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특정인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의〈합치된〉 노력으로 이루어진 사회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은 이념과 야심의 도구로 되든지 아니면 그 자신이 타인의 보스가 되어 개개인들의 권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타인들의 에너지를 이용한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사라져버리고, 잘못 정의(定義)된〈공공선〉― 그 때문이라면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 을 위해 희생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우리 자신의 문제의 해결을 우리가 타인들에게 맡겨버린 순간부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균열은 확대되어왔다. 우리는 타인들이 발전시켜온 사상의 지배를 받는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의 잣대에 순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로부터 소외되어 대립되든지 해야 한다 ― 갈수록 가망없는 처지인 것이다. 기괴하고 음울한 상황이다.

나는 이 갈등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참된 균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일반적인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 사이의 비극적 충돌을 표시하는가? 사회의 장래를 위한 한 인간의 책임감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내적 확신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가 사회발전에 있어서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주입시키면서 남들의 삶을 지도하고, 이용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다면, 그때 개인과 사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쓰디쓴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란 우리가 남들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을 평가할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 선악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양심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의식을 통해 발전되어온 개념들이 모두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양심은 역사적 발전과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의 능력이자 개념으로서 양심은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잘못 구상된 문명에서 나온 사회의 토대 자체를 흔든다. 양심은 이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다. 양심의 표현은 종종 인류라는 종(種)의 이익 ― 또는 심지어 종의 생존 ― 과 어긋난다. 생물학적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양심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어떤 까닭에서인지 양심은 엄연히 존재하며, 인간의 생존과 발전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따라다녔다.

인간의 물질적 확장과 정신적 진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의 물질적 성과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데 우리가 치명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 분명한 시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인류절멸의 위협을 가하는 문명을 만들어내었다.

전지구적 규모의 재난에 직면하여 한가지 제기되어야 할 문제는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느냐, 그리고 기꺼이 희생을 할 용의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책임과 희생에 대한 용의가 없다면 인간은 참다운 의미에서 정신적, 영적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희생의 정신은 외부적으로 강요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있는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 인간생존의 유일하게 적법(適法)한 형태로서 자연스럽게 갖추어진 ― 남들에 대한 자발적인 봉사속에 표현되어 있는 희생정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인간의 관계는 너무나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탐욕스럽게 지키려는 만큼 옆 사람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빼앗아 오려는 충동에 지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의 역설은 우리가 동료 인간들에게 모욕을 주면 줄수록 우리의 만족감은 약화되고 우리의 고립감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진해서 인간적 성취의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온마음과 의지로써 받아들인 우리의 죄값이다.

지금 우리는 정신적인 것은 쇠퇴하고 있는 반면에 물질적인 것이 이미 오래전에 그 나름의 혈관을 가진 유기체로 발전하여, 동맥경화로 마비된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었음을 보고 있다. 물질적 진보 그 자체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치광이처럼 물질적〈성과〉를 올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안내인〉이 말하는 것처럼 현재가 미래와 뒤섞여버린 지경에까지 우리는 도달하였다. 즉, 임박한 재난의 모든 전제조건들이 지금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인간의 행동과 운명 사이의 연관은 파괴되어버렸다. 이러한 비극적인 균열로 말미암아 인간은 현대세계속에서 안정감을 상실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한 인간이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신에게 달려있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체험은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에 오래 젖어온 탓에 그는 자기자신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스스로 아무런 역할도 할 것이 없다는 그릇된, 치명적인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개인과 사회를 맺어주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버린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보다 다시 자신의 영혼을 믿고, 영혼이 겪는 고통을 느껴야 하며, 자신의 행동을 양심에 결합시켜야 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한 양심이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영혼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일에 대한 결정적 책임은 ― 우리 자신이 아니라 ―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라고 하는 안이한 공식을 통한 자기정당화는 사전에 배제될 것이다. 나는 세계에 조화를 회복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오직 개인적 책임감의 재생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란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현존하는 여러 대안 중에서 가장 나쁜 대안을 선택한다고 어디에선가 말하고 있다. 우리의 물질적 생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너무나 맞는 진실이다. 그들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역사가 이상주의의 마지막 남은 몇방울마저 다 짜버리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역사적 과정에서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된 때였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관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원인을 분석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여, 인간은 자신의 영성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역사가 하나의 영혼없는 소외된 기계로 전환되자마자, 인간 생활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봉사하는 나사가 되기를 강요받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동물로서 간주되어왔다. (문제는 사회적 쓸모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활동의 사회적 쓸모를 강조하는 나머지 그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데까지 갈 때,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 비극의 전제조건을 만들어낸다.

자유의 문제는 체험과 교육의 문제를 제기한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현대인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권리가 개인에게 허용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뜻의 개인적 해방은 망상이다. 만일 인간이 그러한 자유를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오직 환멸뿐일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무척이나 길고 힘든 노력이 개개인에게 필요하다. 교육은 자기기율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새롭게 획득된 자유를 오직 속된 소비주의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능력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의 상황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오늘날 서구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민주적 자유가 만끽되고 있는 한편에 그〈자유로운〉 시민들은 기괴스럽고 명백한 정신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개인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여기서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이처럼 심각하게 존재하는가?

내 생각에 서구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유란 결코 ― 단 한푼도 비용이 들지 않는 샘물처럼, 아무런 도덕적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자유를 자신의 삶의 향상을 위해 쓸 수 없다. 자유는 인간의 삶속에 단 한번으로 통합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노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와의 관련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만일 그가 자유의 행사에 필요한 용기와 결심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내면적〉 경험이〈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진실로 자유로운 인간의 자유는 이기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일 수 없다. 개인적 자유도 단순한 집단적 노력의 결과일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의 비용을 ―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남들의 노역과 남들의 고통으로써 지불하는 데 익숙해졌다. 우리는〈이 세계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고려하기를 거부한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유의지와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우연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자유의지를 천명할 기회는 남들의 의지 때문에 제약받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원인은 언제나 내적인 비겁성과 수동성이라는 것, 그리하여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단호하게 천명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에서 사람들은〈인간이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은 새가 비상(飛翔)을 위해 태어난 것과 같다〉라는 코롤렌코(Vladmir Korolenko, 1853 - 1921,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중단편 소설들을 쓴 작가 ― 역자)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내게는 이 말처럼 인간생존의 기초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로서는〈행복〉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만족을 의미하는가? 조화를? 그러나 사람에게는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궁극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특정한 목표물이 아니라 무한 그 자체에 닿아있기 때문이다.〈교회〉도〈절대〉를 향한 인간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조직하는 사회기구들을 모방하거나 심지어 희화화하는 일종의 부속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쪽으로 너무나 무겁게 기울어져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지금까지〈교회〉가 정신적 깨달음에 대한 호소를 통하여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전혀 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가능성의 절대적 자유를 표현하도록 요청받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내 생각에 예술은 언제나 인간정신을 삼켜버리려고 위협하는 물질적인 것들에 맞서는 인간의 무기였다. 거의 2천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예술이 오랫동안 종교적 이념과 목표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의 존재 자체로 말미암아 불협화(不協和)의 인간속에 조화의 이념이 살아남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이상을 육화(肉化)한다. 그것은 도덕적 원리와 물질적 요소 사이에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진 예를 보여준다. 그러한 균형이 이념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실제 현실의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술은 조화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표현하고, 인간이 자신이 갈망하는 균형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자신과 기꺼이 투쟁할 용의가 되어있는 자세를 표현하였다.

예술이 이상적인 것을 표현하고, 인간의 무한성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고 할 때, 소비주의적 목적을 위하여 예술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예술의 본성을 크게 침해하는 것이다. 이상(理想)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관계하지만, 우리의 정신의 세계에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예술작품은 이러한 이상에 주어진 형식이다. 그 이상은 미래에는 마땅히 인류전체에 속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수 ―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에 육화된 이상의 인간적 의미를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간파할 수 있었던 천재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본래 귀족적이다. 예술은 잠재능력의 수준을 구별해주며, 그렇게함으로써 정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개개인에게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으로의 진보를 보증해주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귀족적〉이라는 단어를 쓸 때 거기에는 아무런 계급적 함축이 들어있지 않다. 실은 그 반대이다. 영혼이 도덕적 정당화와 생존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그 추구 과정에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한, 모든 사람은 동등한 처지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두 정신적 엘리트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본질적인 차이는 이러한 가능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예술형식속에 육화된 이상의 빛속에서 자기자신과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도록 초대한다.

행복에 대한 권리로서 인간생존의 의미를 보는 코롤렌코의 해석은 내게〈욥기〉를 상기시켜준다. 거기에서는 정반대의 견해가 표명되어 있다.〈인간이 재난속으로 태어난 것은 불꽃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다른 말로 하여, 고통은 우리의 생존에 고유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만으로부터, 그때그때 우리가 처한 지점과 이상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행복〉에 대한 감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 선악의 균형된 관계가 유지되고, 악의 창궐이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 참된 의미에 있어서 신성한 자유를 위한 투쟁속에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는 일이다.

예술은 희망, 믿음, 사랑, 아름다움, 기도 등 ― 인간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 모두를 긍정한다. 인간이 꿈꾸는 것, 인간이 품고있는 희망.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그의 몸은 살아나기 위한 동작을 시작한다. 예술가도 일종의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예술은 정신적 의미에서 인류를 익사시키지 않으려는 본능으로서 존재한다. 예술작품은 영원하고, 초월적이며, 신성한 것을 향한 인간의 탐구를 ― 흔히 예술가 자신의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 가능하게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것인가 악마의 것인가? 인간의 강점으로부터 오는가 약점으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사회적 조화의 이미지인가? 그러한 것이 예술의 기능인가? 우리가 서로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식의 확인으로서의 사랑의 고백. 참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무의식적 행동 ― 사랑과 희생. 그러한 것이 예술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되돌아 볼 때 인간역사의 도정은 파국과 재앙으로 점철되어왔다. 어째서 이런가? 이들 문명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째서 그들은 숨이 차고, 사랑의 의지를 상실하고, 도덕적 힘을 잃어버렸는가? 이 모든 것이 단지 물질적 결핍 때문에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다. 그러한 발상은 내게 기괴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이제 우리는 역사 과정의 영성적 측면을 고려하는 데 실패한 결과로 또하나의 문명을 바야흐로 파괴하려 하고 있다. 지금 우리를 짓누르는 많은 불운한 일이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게 범죄적으로, 가망없이 물질 본위로 된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과학의 주인공들로 행세하면서, 과학적 객관성을 좀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하기 위하여 우리는 나눌 수 없는 본래 하나인 인간과정을 쪼개고, 그렇게함으로써 거기서 만물의 제1원인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어, 그것을 과거의 잘못을 설명하는 데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청사진으로 이용한다. 아마도 문명들의 붕괴가 뜻하는 것은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역사〉가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지 모른다. 역사가 더이상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지 않고, 그래서 다음번에는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그동안 이루어져온 모든 잘못된 시도를 역사 자신의 족보에서 지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역사는 기다리는지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고, 역사가 무엇을 해왔는지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널리 퍼져있는 견해에는 일리가 있다.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파국적 재난은 분명히 문제의 문명이 잘못 구상되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정신적 영적 완성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예술은 완성된 과정, 완결의 이미지이다. 예술은 역사의 기나긴 ― 아마도 끝없는 ― 길을 뛰어넘어 획득된 절대적 진실(오직 이미지만이지만)의 소유를 모방하는 일이다.

우리는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모든 것을 자기자신과 함께 어떤 총체적인 세계관 ― 예컨대〈베다〉와 같은 ― 에 넘겨주고 싶은 순간이 있다. 동양은 서양보다 진리에 더 접근해 있었다. 그러나 물질본위의 서구문명이 동양을 삼켜버렸다.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을 비교해보라. 서양은 끊임없이 소리친다.〈나야! 나를 보라구! 내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사랑하는지 들어보라구! 얼마나 난 불행한가! 얼마나 행복한가! 내것이야! 나라구!〉 동양의 전통에서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사람은 신과 자연과 시간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있다. 모든 것 속에 자신이 있으며, 자기자신 속에 모든 것이 있다. 도가(道家)의 음악을 생각해보라. 그리스도 이전 600년전의 중국.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최고의 사상이 승리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그것은 몰락해버렸는가? 어째서 그러한 토대위에서 성장한 문명이 역사 과정에서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했는가?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물질주의 세계와 충돌했는가? 개인이 사회와 충돌하는 것처럼 그 문명도 다른 문명과 충돌하였다. 그런 이유로만 그 문명이 붕괴한 것은 아니다. 또다른 이유는 그것이 충돌한 것이〈진보〉와 기술로 이루어진 물질주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 문명은 진정한 지식의 마지막 정점, 이 지구의 소금중의 소금이었다. 동양사상의 논리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갈등은 모두 본질적으로 죄악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상상하고 창조한 대로의 세계속에 산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대신에 그 결함의 희생물이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 실은 간절하게 털어놓는 말이지만 ― 인간이 일찍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창조해온 유일한 것은 예술적 이미지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인간적 활동의 궁극적 의미는 예술적 의식 ― 일정한 목적이 없고 사심(私心)이 없는 창조적 행동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창조능력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일 것이다.

 

커버 아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인터뷰>(미시시피대학출판부, 2006)

Андрей Тарковский. Архивы, документы, воспоминания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자료, 문헌, 회상>(엑스모프레스, 2002)

http://www.youtube.com/watch?v=V27XlEDLdtE

http://www.youtube.com/watch?v=aedXnLpKB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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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6-10-23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숨도 안쉬고 잘 읽었습니다. 부대 특박 중 빈둥거리느라, 눈이 아귀 마냥 하고싶은 거에 눈을 빼앗겨서 잠시나마 (진정)제 시간을 가진적이 없었는데 탈선이 부그러울 정도로 호된 글이군요. 잘읽고 갑니다. 이글 따로 보관해도 되죠?(진작 출력했습니다.)
앞으로의 글이 기다려 집니다.

로쟈 2006-10-2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아직 교정이 덜 끝난 글인데요... 앞으론 숨은 쉬면서 읽으시길(제가 나름대로 문단은 자주 끊어놓는데).^^
 

필요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예전에 읽어본 서평 하나가 눈에 띄길래 옮겨놓는다(밀린 페이퍼들도 많건만!).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무더운 여름에 벽돌쌓기 -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론'이 그것인데, 좀 놀라운 사실이지만 <문화예술>(1991년 7월호)에 게재된 것이니까 15년전 글이다(본문에도 나오지만 타르코프스키의 <희생>도 개봉되기 전이다!). 세는 나이로 33살에 쓴 것.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씨네필' 평론가를 능가하는 영화광(이자 영화도서광)이 등장하지 않은 것 역시 놀랄 만한 일이다(더불어 좀 놀라운 건 임권택 감독과의 대담을 제외하면 그가 아직 단 한권의 영화비평서도 간행하지 않은 사실이다. '책'에 대한 결벽일까?). 글은 각가 1990년과 1991년에 나온 에이젠슈테인의 책 4권과 타르코프스키의 책 1권에 대한 서평인데,  격세지감이 느껴지게도 에이젠슈테인의 책들은 현재 모든 절판됐다. 그의 책들이 다시 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보태면서 다시 읽어보도록 한다. 강조와 덧붙인 말들은 나의 것이다(이런저런 오타들도 수정했다).  

 

예술의 이론에 관한 분야 중에서도 우리에게 영화만큼 그 공허한 여백이 넓은 분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우선 첫 번째로 '영화야 그냥 보면 되지, 뭐 이론까지 알 필요가 있겠어요'라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영화 이론에 황폐함을 더하고 있다. 그래서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뉴 크리티시즘이나 구조주의, 벤야민이나 바슐라르의 텍스트들을 구해서 보기도 하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스타 백과사전이나 영화음악에 대한 '잡동사니' 지식들이 나열된 책들이 서점의 영화난을 메우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두 번째 이유는 영화인 자신들의 문제이다. 한국 영화의 수준이 그야말로 '이론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 구태여 참고도서(?)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 평론가들의 활동을 전문적이라고 부르기에는 현실적으로 일정한 한계가 있다(*요즘은 사정이 좀 나아졌으리라고 본다. 그 사이에 우리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영화감독들이 여럿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이론은 60년대에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성숙하였다. 문학과 미술비평이 이론(더 정확하게는 내러티브와 격자틀, 담론과 표상/재현의 이론)을 받아들여 영화는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터가 되었고(우리처럼 문학이 아니다 !) 잘 알려진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튼, 장 보드리야드, 장 뤽 낭시, 마르슬렝 플레네, 쥴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라이, 데이비드 로지, 질르 들뢰즈 등이 가세하였다. 그래서 영화라는 영토를 철학의 장소이자 정신분석학의 공간, 여성 해방의 억압 장치이자 권력의 이중 시선에 사로잡힌 감옥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이들의 영향권에 놓인 새로운 영화인들이 차례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 팀 버튼의 <가위손> 등은 관객을 당혹시켰고, 영화평 난에는 영화와 아무 관계없는, "고독한 현대인의 사랑과 절망, 그리고…"하는 상투적인 문장만이 가득 메워졌다. 영화는 우리의 논의와 아무 관계없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영화에 관한 이론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몽타쥬 이론이고, 또 하나는 미장-센 이론이다. 그러나 그간 여러 사정으로 미장-센 이론만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몽타쥬 이론은 거의 소개 될 기회를 놓쳤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몽타쥬 이론이 소련 영화감독들에 의해 제창되었으며 게다가 그 근간에 흐르는 역사적 배경이 20년대의 볼셰비키 혁명의 선전 사업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타쥬 이론의 아버지 세르게이 미카이로비치 에이젠슈테인은 명성을 얻은 만큼 실제로 그의 이론과 영화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못하다.

그러나 한·소 수교의 기점으로 해빙무드가 열렸고, 게다가 대학 내에서는 공공연히 '영문판' 텍스트들이 읽히고 수업 교재로 사용되고 기말고사 시험문제로 출제되는 상황에서 번역본 한 권 없을 수 있겠는가라는 각성이 일어 금년 상반기에만 네 권의 번역본이 출판되었다(*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에이젠슈테인이 살았던 시대는 1917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 영화야말로 '선동의 최선의 무기'라고 영화 사업을 부흥시키던 20년대, 그는 당시 '혁명에 흥분한' 청년이었고, 그래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철저한 영화론을 생각해 내기에 골몰했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쥬 이론은 할리우드의 초기 무성영화에서 얻어낸 결론이었다. 당시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일종의 눈속임인데, 그 눈속임의 비밀은 커트와 커트 사이에 숨어 있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A쇼트와 B쇼트를 연결시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놀랍게도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에서 테제와 안티 테제를 통해 진테제가 도출된다는 도식 바로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에이젠슈테인은 이 '발견'을 '조립하다'라는 불어 monter의 명사형montage(몽타쥬)라고 불렀다. 그후 편집/데꾸빠쥬의 연구를 몽타쥬 학파라고 불렀고, 더 나아가 이 방법론은 제3세계 영화인이나 진보적 시네 아티스트들의 좌우명이 되었다(*러시아어에서는 '몽타주' 대신에 따로 '편집'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이후에 나온 책이지만 러시아 몽타주이론에 대한 가장 요긴한 해설은 김용수의 <영화에서의 몽타주 이론>(열화당, 1996)을 참조할 수 있다). 

 

그렇다면 4권의 책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 만일 에이젠슈테인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하고, 그의 영화도 본적이 없다면 <이미지의 모험, 영화론과 영화 작품>(전양준 편집, 열린책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우선 이 책은 친절하다. 전체 구성은 그의 이론적 논문과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동시에 배열해 놓고 있다. 그래서 이론보다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에 대해서만 알고 싶은 사람들은 논문을 생략하고 영화 소개만 쫓아가면 되도록 충실하게 구성해 놓았다. 또한 이론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핵심적 논문인 '영화의 원리와 표의 문자', '영화 형식의 변증법적 접근', '영화에 있어서의 4차원'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에이젠슈테인을 읽는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슨 교훈을 얻을 것인가라는 안내로 영국의 영화학자(이자 감독인) 피터 워렌의 야심적인 저서 <영화에서의 의미와 기호> 제1장 '에이젠슈테인의 미학'을 번역해서 첨가하였다. 이쯤 되면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입문으로서는 가슴 든든한 소개서를 갖게 된 셈이다(*피터 웰렌의 책은 이후에 <영화에서의 기호와 의미>(영화진흥공사, 1994)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원저는 1969년에 초판이 나온, 영화학에 기호학적 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책이다. 영어권에서는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1998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그러나 편저자의 소개처럼 몽타쥬의 이론이 에이젠슈테인에서 시작해서 고다르로 완성되었다면, 고다르의 그 유명한 논문 '몽타쥬', '나의 멋진 근심'은 왜 빠졌는가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독자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아직도 고다르에 관한 '멋진' 책을 시중에서 단 한권도 구해볼 수 없는 것은 매우 근심스러운 일이다. 고작해야 오래전에 절판된 리처드 라우드의 <장 뤽 고다르>(예니, 1991)가 전부인가?).

 

그래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본격적인 논문집 <몽타쥬 이론>(이정하 역, 예건사)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는 실제 작업에서 부딪치는 논쟁적 이슈들, 2부에는 이론적 논문들, 3부에는 몽타쥬론 확립 이후의 작업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꼼꼼하다는 것이다. 번역자는 혹시나 독자들이 에이젠슈테인의 논쟁적 이슈를 쫓아오다가 놓칠까 끈기 있게 주석을 달고 있다. 만일 몽타쥬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국내 번역본으로서 아직 이 이상은 없다(*아래의 책은 현재 러시아에서 새롭게 출간중인 에이젠슈테인 전집 중 <몽타주>(무제이 키노, 2000). 그의 몽타주론을 집성하고 있는 책으로 만일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필독서가 되겠다).  

 

Монтаж

 

몽타쥬론을 처음 발견한 것은 에이젠슈테인이 아니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학교 선생님이었던 클레쇼프는 학생들과 함께 그 유명한 '쿨레쇼프 실험'을 했다. 그는 한 여인의 얼굴을 찍어서 똑같은 필름을 3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필름에 각기 잠자는 아기의 얼굴, 먹음직스런 빵,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연결시켰다. 그 결과 아무 영문을 모르는 관객들은 여인의 연기에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아기의 얼굴에 이어 놓은 여인의 얼굴에서는 자비를, 빵에 이어 놓은 여인에게서는 배고픔을, 그리고 칼에 이어 놓은 여인에게서는 공포를 보았다. 쿨레쇼프의 제자였던 에이젠슈테인과 푸세볼로드 푸도프킨은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푸도프킨은 몽타쥬를 벽돌쌓기라고 불렀다. 그는 영화가 모여서 하나의 의미를 이룬다고 보았다. 반면 에이젠슈테인은 충돌이라고 받아들였다. 전혀 다른 의미의 쇼트를 굳이 '함께 놓아'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한다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은 그의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켰다. 몽타쥬로 충돌뿐만 아니라 견인(끌어당기기, attraction)의 효과까지도 끌어냈다. 이 복합적 개념은 단순히 작가의 의지만이 아니라 관객의 마음까지도 고려하는 것으로, 그는 견인의 구성을 통해 관객의 정신적 과정을 형상화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즉 관객은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공동 창조자가 되는 셈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에 늘 불만을 갖고 있었다. 관객은 영화를 실제 사건처럼 바라보고, 작가는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에이젠슈테인에게 새로운 이론을 근거를 제공해 준 것은 일본의 가부키 연극이었다. 가부키 연극에서는 사실이나 사건의 실제성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사건에 대한 관점이나 해석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즉, 가부키 연극은 플롯이나 동작의 열거로는 이해될 수 없다. 여러 요소들 간에 이루어지는 전체적 조화의 형식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참고로, 불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관련서는 자크 오몽의 <몽타주 에에젠슈테인>이다. 이 책은 영역돼 있다).

 

여기에서 에이젠슈테인의 중립화 개념이 발전하였다. 리얼리티는 더 이상 영화를 통제할 수 없게 되고, 화면의 수많은 요소들로부터 생겨나는 충격, 그 연쇄 작용이 영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영화의 질료인 쇼트 내의 견인들을 편집하는 문제가 남는다. 질료에 대한 통찰력을 가부키 연극에서 얻었듯이 편집 개념은 일본의 상형문자에서 명확해졌다. '새(鳥)'와 '입(口)'이 합쳐져서 '노래한다(鳴)'는 뜻이 되는 것에서 에이젠슈테인은 역동성의 근거를 발견하였다. 상형문자의 한 글자 한 글자가 견인일 때, 견인의 충돌이 가져오는 변화는 도일한 개념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질료가 영화 자체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세포'이고, 이 세포들은 편집을 통해 살아 있는 영화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모든 옳은 이야기라면 현장에서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거기에 답을 주는 것이 <영화 연출 강의>(V. 니즈니 기록, 이경윤 번역, 예건사)이다. 이 책은 에이젠슈테인이 쓴 책은 아니다. 소련의 국립영화학교인 VGIK에서 그가 강의할 때 학생이었던 V. 니즈니가 노트를 다시 복원시켜 강의록으로 펴낸 것이다. 그래서 얼핏보기에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읽는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고리는 모두 놓치는 셈이다. 오히려 쉬운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몽타쥬 이론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간에 나온 몽타쥬 이론을 철저하게 학습한 뒤에 행간 사이의 의미를 추적하는 것이 올바른 독서 방법일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이 '감동'적인 것은 다른 책과 달리 여기서는 선생님으로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그래서 모든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중요한 것은 그 결론이 아니라 결론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그 과정을 연구하고 토론하여 익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다. 

 

이제 마지막 한 권이 남았다. <영화의 형식과 몽타쥬>(정일몽 번역, 영화진흥공사)는 영미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에이젠슈테인의 'Film form', 'Film Sense'(Jay Leyda 옮김, 1975) 두 권을 번역한 것이다. 이미 이 두 권은 부분적으로 발췌되어 나오기는 했으나 한 권으로 완역되기는 처음이다(*역자인 레이다는 초기 소련영화 전문가인데, 그의 <소련영화사1>(공동체, 1988)이 번역된 바 있다. 왜 요즘은 이런 책들도 읽어볼 수 없는가?).

 

이 책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 하나는 위의 책들에 빠져 있는 논문 중에서 중요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에이젠슈테인의 번역 논문 목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러나 영어판의 단점이 그대로 번역되어 있다. 영어판의 번역자인 제이 레이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번역 과정에서 상당 부분을 생략하거나 요약하였다. 그래서 최근에는 영국의 영화전문연구소(BFI, British Film Institute)에서 재번역을 하고 있는 실정인데(*책은 1991년에 출간됐다), 불행히도 이 번역은 제이 레이다 판을 따르고 있어서 충분한 이해 없이 생략된 의미까지 잡아내기 힘들다.

 

 

만일 이 책들을 읽고 결론지어 소련 영화를 모두 몽타쥬 영화라고 부른다면 그건 좀 이르다. 만일 <봉인된 시간>(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저, 김창우 번역, 분도출판사)을 읽는다면 그 반대의 진영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되지는 않았지만 대학 영화 서클이나 비디오 감상회를 통해서 '전 작품'이 소개된 희귀한 경우이다(*타르코프스키는 80년대 대학가의 '전설'이었다. 그의 유작 <희생>이 국내 개봉관에서 처음 상영된 것이 1994년의 일이니까 이 글이 씌어진 시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여전히 '전설'인 셈이었고).

 

 

 

 

 

 

 

 

 

그는 1962년에 <이반의 소년시절>로 데뷔하여 1986년에 유작이 된 <희생>까지 단 7편을 연출한 극단적인 과작의 시네 아티스트이다(*그의 책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과작'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강요된 것이다). 특히 그의 영화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카톨릭의 삼위일체를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려는 예술적 소망은 고통스러우리만큼 끈질기고 황홀하리만큼 기적적인 화면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흔히 그를 영상 시인이라 부르는데, 그 자신은 영화가 시적이라고 불리는 것을 극도로 경멸하고 비판해 왔다. 더구나 근거 없는 상징적 해석에 대해서도 단연코 반대했으며, "제발 부탁인데 화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영화적인 상식으로 보면 그의 영화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철저하리 만큼 러시아 문화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특히 반에이젠슈테인 전통에 서서 편집된 영화보다는 장시간 촬영을 선호하기에, 빠른 영화에 익숙해 있는 관객에게는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서구의 영화 평론가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관객 자신의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그 속에 들어가 앉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만일 <봉인된 시간>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대한 해설이나 자서전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그의 영화에 관한 이론적 서술이며, 에이젠슈테인의 거대한 흐름 아래 자기 선언을 할 수 없었던 그 반대 진영의 변명이기도 하다.

 

타르코프스키의 이론의 핵심은 시간과 공간이다. 그의 지금까지의 영화 이론이 시간을 근거로 한 공간이었지만, 그 자신은 시간을 '조각하는' 공간을 제시한다. 그래서 시간을 정지시켜 세워진 공간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물을 물질적 관념으로 다룬다. 이제 그의 영화에서 몽타쥬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이미지는 자기의 시간과 공간을 획득한다.

 

 

이 책은 독일어판을 원본으로 했는데 영어판에 비해서 차이점이 많다.(더 중요한 것은 독일어 판을 구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번역의 정확성을 따져 볼 수 가 없다). 이를테면 <희생>의 마지막 장면에 6분(정확하게는 6분40초)의 장시간 롱 테이크가 나온다. 번역본에는 "나의 전 작품 중에서 가장 긴 장면, 아마도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긴 장면일 듯한 6분 짜리"(304쪽)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의심스럽다. 영역본에는 "이것이 6분 동안 불이 나는 장면을 지속하여 찍은 이유이며, 달리 방법이 없었다"(227쪽)라고만 되어 있다.

 

(*)영역본에서 이 대목은 "That may be why the fire scene lasts a full six minutes; it could not have been done any other way."로 옮겨져 있다. 국역본은 독어본을 대본으로 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러시아어본이 원본이라는 점이다. 확인결과 <봉인된 시간>의 러시아어본은 2002년에 출간되었다. '희귀본'인지 잘 눈에 띄지 않는 책이며 나도 아직 구하지 못했다.

 

 

혹시 번역자가 인위적으로 해설(?)을 곁들인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영역본에 근거해보자면 그런 의심을 가질 만하다), 더구나 이 영화의 첫 장면은 그 보다 더 긴 14분 15초 동안 지속되며 <향수>에서도 온천장을 횡단하는 9분 20초 짜리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영화사에서 6분 롱 테이크는 길다고 말할 수 없다. 10분을 넘는 지속 장면 영화는 수도 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고다르, 얀초, 오시마, 마이클 스노우, 등등)

 

이러한 몇 군데를 제외하면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과 영화 이론의 보편성을 추구한 이 난잡한 서적을 그렇게 깔끔하게 번역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될 것이다(*영역본과의 대조에만 의지해서 말하더라도 국역본은 생각보다 많은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다. 보다 정확한 교정본이 출간되었으면 싶다). 에이젠슈테인의 책과 함께 읽으며, 우리에게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소련 영화의 깊이와 너비를 음미하는 것도 이 무더운 여름에 안목 있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여름에 읽지 못한 독자라면 가을에라도).

 

 

0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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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사스 2006-10-1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고 퍼갑니다
 

점잖은 제목을 달긴 했지만 원제는 '역자에게 멱살잡힌 사연'이라는 '출판인의 편지'이며, 철학 전문출판사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글이다(전사장의 언론 인터뷰를 이전에 옮겨놓은 기억이 있다). 재작년 여름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것인데(그러니까 내가 한국에 있지 않을 때이다) 뒤늦게 옮겨놓는 것은 담뽀뽀님의 서재에 옮겨진 걸 보고서 '번역 관련'인지라 많은 분들과 공유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해서이다. (인문서) 번역 출판에서의 역자와 편집자간의 관계와 윤리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하는 글이기에.  

교수신문(04. 08. 26) 역자에게 멱살잡힌 사연

번역서의 경우, 책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역자다. 편집자의 역할은 역자에게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윤문을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번역과 편집이라는 것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작업이고 내용을 놓고서 따지는 일이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번역이 바라는 정도의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채 편집자에게 넘어오는 경우, 편집자는 고심해서 결단을 내려야한다. 문제 있는 부분을 다시 번역하거나, 새로운 역자를 찾든지, 아니면 어는 정도 수위에서 교열작업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번역자와 편집자 사이에 마찰이 생기기 마련인데, 제대로 책을 내자는 뜻을 서로 잘 이해해 별다른 대립이나 갈등이 없이 작업이 이루어지면 다행이지만, 서로의 자존심 내지 자신의 의견에 대한 고집 때문에 불편한 관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책이 나오더라도 감정의 앙금이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며, 책의 완성도도 떨어진다.

 

 

  

 


50여종의 번역서를 내는 동안 겪은 몇 가지 경우를 말하려 한다. 먼저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번역하신 진태원 선생을 들고 싶다. 번역자의 원고가 너무나도 공을 들인 결과물이었고, 그 분야를 전공한 사람에게 외주교열자 역시 최선을 다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기에, 편집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교정과 윤문을 하면서 번역자와 의견을 교환했으며,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사실 번역자는 번역이 끝난 후 주변의 동료들과 번역을 같이 읽고서 내용과 용어를 여러 번 고친 후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던 것이다. 이는 분명 번역자와 편집자가 이상적으로 작업을 한 경우이며, 그 이후 2종의 책을 번역하고 있다(*현재까지 출간된 건 <헤겔 또는 스피노자>와 <스피노자와 정치> 두 권이다. 곧 한권 더 출간되는 것인지?).

이와 달리, <서양 철학사>의 경우 어떤 번역자의 원고는 거칠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빠진 부분도 있으며 앞뒤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상태로 넘어왔다. 빠진 부분들을 채우고 내용상 문제 있는 부분들을 고치면서 번역자와 직접 만나 내용을 고치거나 몇 번 교정지가 오고갔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별수 없이 편집진이 달라붙어 하나하나 다시 고치기 시작했고, 몇 달에 걸쳐 작업이 끝났을 때는 사실상 새로 번역한거나 진배없었다. 이 과정에서 번역자의 후배이기도한 편집자는 멱살까지 잡히는 일도 겪었다.

(*)거명된 <서양철학사>는 앤서니 케니가 공저자들고 함께 엮어낸 욕스포드판 철학 개론서이다. 나는 이 글과 무관하게 이 번역서에 문제가 좀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었고 당연히 구입하지 않았었다. 참고로 케니가 단독으로 쓴 <서양철학사>(동문선, 2003)도 번역/출간돼 있다. 알라딘의 리뷰에 따르면, 칸트의 정언명령을 "다만 당신이 할 수 있는 동시에 하게 될 처세법에 따라서 그것이 보편법칙이 될 것을 행동하라", "자신의 몸에 대해서건 다른 사람들의 몸에 대해서건, 언제나 인류를 다루는 방식으로,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늘 목적으로 그렇게 행동하시오"라는 식으로 '독특하게' 번역해놓은 만큼 역시나 손에 집어드는 데에는 무모한 용기와 남아도는 돈이 필요한 책으로 보이지만.

번역자도 편집자도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으며, 결국 대표인 내가 최종 책임을 지고 직접 교열 작업에 들어갔으며, 약 8개월이 소요되었다. 번역자 중 몇몇은 예전부터 꽤나 가깝게 지내던 사이인데, 이 일로 지금까지도 소원하다. 최악의 경우는 도저히 번역이라고 말할 수 없는 원문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진 창작물로 원고를 넘긴 경우로, 고심 끝에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새로이 번역을 맡기게 되었다. 처음의 번역자의 이름으로 책을 낸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경우였으며, 아직 그 책은 출간되지 못하고 번역 중이다. 번역자와 편집자 둘 다 이 일을 떠올리며 몹시 불쾌해하고 있을 것이다(*절친한 사이라면 서로간에 번역과 편집을 맡지 말아야 하는 모양이다. 친구끼리 빚보증 서지 않는 것처럼).

번역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대체적으로 번역자는 해당 분야를 어느 정도 이상 공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번역한 것이 최고이며, 편집자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그런 아집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편집자를 완성도 높은 책이 나오기까지의 동반자로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진정 좋은 책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나오는 번역이니만큼, 번역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번역에 임하기를 부탁드린다. 번역은 몹시 힘든 작업이다. 번역자의 노고에 비추어볼 때, 번역자가 받게 되는 보상은 분명 적다. 하지만 보상은 적지만 번역자가 보람을 느끼게 되는 일은, 편집자와 호흡을 맞춘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편집자의 행복일 것이다(*요컨대, 편집자가 행복한 나라, 그게 번역/출판의 선진국이다!).

0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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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10-18 00:47   좋아요 0 | URL
진선생님의 이름을 보게 되는군요. ^^

로쟈 2006-10-18 01:08   좋아요 0 | URL
지금쯤은 아마 파리에 가 계시겠네요...

바라 2006-10-18 04:04   좋아요 0 | URL
또 나올 그 한권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일지도 모르겠네요...

자꾸때리다 2006-10-18 09:42   좋아요 0 | URL
아직 한국에 있사옵니다.

로쟈 2006-10-18 16:03   좋아요 0 | URL
바라님/ 제 짐작에도 그런 거 같습니다. 고대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완소지윤님/ 잘 아시나 보네요. 북핵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건가요...

자꾸때리다 2006-11-25 00:00   좋아요 0 | URL



왜 이렇게 거짓말이 하나의 진실로서 난무하고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믿고 거기에다 의미까지 부여하는 멍청한 놈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는 지독한 열등감이 사로잡힌, 그러나 매우 똑똑한 자였다고 기억한다. 그가 출판사를 열었을 때 아마도 모두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그것을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념으로 여럿이 철학사 책 하나를 번역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출판계약을 한 적도 없었고, 번역료를 인세로 할 것인지, 아니면 매절로 할 것인지, 매절로 한다면 얼마나 할 것인지조차 계약을 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사실 그런 것들을 따질 필요도 없는 그런 관계였다.




번역 원고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제 날짜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원문과 확인하여 틀린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면서 우리말로 읽히지 않는 것을 우리말에 맞게 고쳤다면 이 원고가 책으로 나오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번역된 원고를 자기 입맛에 맞추어 고치기 시작했다. 고친 원고의 내용이 틀린 부분이 생겨나 다시 고쳐야 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그런 <헛수고>를 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하여튼 예상보다 어렵게 책이 나왔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났던가 <교수신문>에 번역자와 편집자에 관련된 그와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은 선배인 번역자의 하나가 후배인 편집자의 멱살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꾸며 만드는 놈이나 이야기를 퍼 나르는 놈이나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놈들이 이 기사의 내용을 거의 사실로서 간주한다. 이야기를 꾸며 내는 놈은 지가 꾸며 내면서 마치 이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여길 수도 있겠다. 이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놈은 마치 자신이 이 책을 사지 않은 것이 이 책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따라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실처럼 확신하고 있다. 게다가 고약한 것이 이 책의 원래 편집책임을 맡은 철학자의 다른 번역서의 오역까지 지적함으로써 읽기에 따라 이 책이 오역의 온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호기심이 강한 멍청한 인간들이 이 꾸며진 이야기가 감명을 받거나 흥분하면서 마치 진리인 것처럼 간주하고 있다.




번역에 관여 했던 한 사람은 그를 고발하겠다고 흥분했다. 고발의 이유는 인신공격이며, 없는 사실을 마치 있는 사실처럼 날조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 책은 편집책임을 맡은 철학자나 그 글을 쓴 몇몇 철학자가 대단히 유명한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좋은 책은 아니다. 책 가운데 나오는 멋있는 사진이나 그림을 제외하면 그 책이 일반 독자를 의도하는 것인지 전문가를 의도하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게다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번역 부분은 사실 원문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되어 있다. 원문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번역을 해보았자 우리말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적절하게 되어 있지 않은 원문조차 고쳐 나가면서 번역을 했더라면 훨씬 좋아질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런 종류의 책에 그러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번역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지적한 역자 서문조차 그 출판사는 아무런 허락도 없이 바꾸어 버렸다. 한 마디로 그 바뀐 내용은 그 책이 최고의 철학사 책이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출판사가 임의로 바꾸어 버린 내용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다만 거기 이름이 박힌 역자들이 책임을 진다는 사실이다.




매우 오래 동안 나는 그와 친교를 맺어 왔지만, 바로 이 일 때문에 그를 다시 만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교수신문>에서 꾸며낸 이야기처럼 번역과 관련된 그 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그의 성향이 싫었고, 친한 사람에게 오히려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기본적 품격조차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만나 이야기하기에도 바쁜 세상에 인간 아닌 것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시간 낭비일 것이다. 출판사를 만들 때부터 철학책을 간행하자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상업적인 이유를 제시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내 기억으로는 죽어도 철학책을 내지 않겠다는 그가 마치 몇몇 고전적 철학책을 간행한 후에 인문학 부흥의 기수처럼 신문에서 평가받는다. 흘러간 가수의 노래, <거짓말이야>라는 것이 유치하게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게다가 여기에 놀아나는 소위 인터넷 <먹물>들의 거짓말과 허풍이 참으로 비지성적이다. 이 꾸민 이야기에 감격하는 그대여, 인터넷 공간에서 사기 치지 말고 공부하라.

자꾸때리다 2006-11-25 00:00   좋아요 0 | URL
김영건 선생의 글입니다.

로쟈 2006-11-25 00:41   좋아요 0 | URL
정확한 출처를 밝혀주시면 좋겠네요. 친한/친했던 사람들끼리의 티격태격은 관심사가 아니고 독자로선 어떤 책이 제값을 하는 것이지만 궁금할 따름입니다. 역자들 스스로가 별로 좋은 책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 (일반 독자로선) 오역이냐 아니냐도 별 문제일 거 같습니다...

페일레스 2006-11-25 05:21   좋아요 0 | URL
http://blog.naver.com/sellars/100031118805 완소지윤님이 퍼오신 글의 출처입니다. 얼마 전에 저 책에 대해서(정확히 말하면 저 기사에 대해서) armarius.net에서 좀 얘기가 있었습니다. 저 블로그가 김영건님의 블로그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6-11-26 13: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amarius.net에서의 '얘기'는 못 찾겠군요. 여하튼 '동업자들'끼리 '친구'가 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요...

Octopus 2007-08-12 13:17   좋아요 0 | URL
음 이런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이런 상황을 방지하려면 시스템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출판사가 역자를 보는 안목이 있다면(또는 자기 입맛에 맞는 역자를 고를 안목이 있다면), 아니면 적어도 출판사측에 체계적인 계약 원칙이 있어서 먼저 원고의 한 꼭지를 받아보고 그 원고에 대해 평가한 뒤 역자와 서로 대화를 나눠보고 나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한다든가, 미리 받아본 꼭지가 오케이 나올 수준일 경우 공동의 번역-교정 원칙을 먼저 정한 다음에 이후 계약과 작업을 진행한다면 이런 일은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위의 경우 아마도 번역원고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저로서는 먼저 한국의 후진적인 출판 시스템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판사로서는 좋은 역자 만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겠지만 도돌이로 역자가 좋은 출판사를 만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니깐요. 일도 지지리 못하는데다 함부로 전횡 부리는 출판사도 많습니다.

사실 좋은 역자보다 더 귀하고 높이 쳐주어야할 것은 안목있고 유능한 편집자입니다. 대학이 좋은 번역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한 좋은 역자를 발굴하고 북돋워주는 것(공동 작업, 높은 원고료)은 좋은 편집자와 출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 책은 공동 필자의 개론서 같은데, 번역도 공동역으로 여러 분이 나눠 하셨군요. 이런 경우 말썽이 날 가능성이 정말 높죠. 보통 이렇게 학계 인맥에 대충 기대서 기획하고 번역되는 책들은 원고나 출판 과정에 문제가 있어도 인간관계 때문에 출판사에서 대충 넘어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위 출판사 사장님은 아주 용감하게 이를 글에 발표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그만큼 번역자들이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많은 부분 출판사의 책임회피로 보입니다. 애초 이런 기획 자체, 역자 선정 모두 출판사의 몫이니까요.

로쟈 2007-08-12 14:28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 때문에 뒤에서 욕을 먹기도 했는데, 출판사측과 역자들간의 반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경우 같(았)습니다...
 

스웨덴의 전설적인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니크비스트)가 지난달 20일(현지시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다소 뒤늦게 접했다. 향년 83세이고, 외신에 따르면 그는 치매로 인한 실어증으로 치료받던 한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다. 간략한 부음기사에 따르면, 닉비스트는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오랜 파트너로 베리만의 작품 <외침과 속삭임>, <화니와 알렉산더>로 각각 1973년과 1982년 두 차례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았다. 베리만 감독과는 1961년부터 30여년간 일했다. 그는 또 루이 말, 우디 앨런, 로만 폴란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다른 거장 감독들과도 일했다. 대표작으로는 <희생>, <뉴욕 스토리>, <길버트 그레이프>, <테넌트>,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페르소나>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타르코프스키와 작업한 <희생>(1986)이다. 이 두 사람과 <희생>에 관한 몇 가지 관련자료들을 모아 고인의 삶을 추모하고자 한다. 

 

 

 

 

 

 

 

 

씨네21(01. 10. 10) 빛의 관찰자, 혹은 이미지의 모험가
- <처녀의 샘> <희생>의 스벤 닉비스트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순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잊게 된다. 렌즈를 통해 눈앞에 펼쳐진 작은 세상 앞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카메라와의 만남은 내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주었고, 순수한 빛을 갈구하는 나의 노력은 더해갔다.”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느낌을 바르게 해석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창출해내는 것이 촬영감독의 소임이라 여기던 스웨덴 출신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는 이같은 철저한 자기집중 위에 영화의 삶을 세웠다.



근 30년 동안 그와 작업 해온 잉그마르 베리만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립지 않지만, 그와 함께 작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라고 자신의 시각이 되어준 닉비스트를 회상한다. 1998년 <셀리브리티> 촬영을 끝으로 실어증으로 영화계를 은퇴하고, 이제는 초로의 노인으로 묻혀 지내는 스벤 닉비스트의 모습 뒤로 어릴 적 영화에 대한 호기심에 충만한 작은 소년이 오버랩된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버지는 영화를 보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고 아들이 영화관에 가는 것을 엄하게 금했다.

그러나 한번 각인된 스크린에 대한 미련은 신문배달을 하여 모은 돈으로 8mm 카메라를 장만하는 열성을 낳았고, 이후 이탈리아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촬영기사 생활을 시작으로 한 영화와의 인연은 53년 <톱밥과 금속조각>에서 베리만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당시 이 둘이 이루어낸 강렬한 색채의 흑백 화면과 빛의 사용은 그 자체가 도전이자 용기를 필요로 하였으며, 평단의 달갑지 않은 시선 또한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빛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실험정신은 모더니즘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외침과 속삭임>(1974), <화니와 알렉산더>(1984)로 두번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닉비스트의 화면은 단순함에 그 기반을 둔다. 최소한의 빛과 최소한의 색으로 사실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믿음은 그의 화면 어디에서도 복잡한 조명이나 필터나 렌즈를 이용한 테크닉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겨울 빛>의 촬영 당시, 실제 교회에서 5분마다 시시각각 바뀌는 빛을 관찰하여 그 빛을 스튜디오에 세운 교회세트에 반영한 일례는 철저하게 빛을 연구하여 자연광의 효과를 내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 스웨덴의 음산한 숲에서 전망 좋은 경관에 이르기까지 그가 구가하는 화면은 이미 촬영에 들어가기 몇달 전부터 치밀하게 사고된 빛의 탐구에 연원한다.



유독 배우의 얼굴에 관심을 두는 촬영방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미디엄 숏을 배제하고 대담하게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배우들의 심리상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번쩍거리는 조명 대신 부드럽고도 풍부한 그만의 빛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낸다. 애정과 관심으로 세밀하게 빚어낸 화면은 함께 작업을 한 배우들이 그와의 작업을 기쁘게 회상하게 만든다.

물론, 베리만과의 강렬한 인상으로 100여편이 넘는 또다른 그의 작품을 간과할 수는 없다. 우디 앨런, 로만 폴란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필립 카우프만, 리브 울만에 이르기까지 그는 70년대 이후 스웨덴 안팎의 활동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독창적인 영상으로 한번 그와 작업을 한 감독은 또다시 그와의 작업을 기대하였다고 하며, 이는 10여분에 이르는 도입부의 롱테이크가 돋보이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서부터 화려한 촬영감각으로 브룩 실즈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루이 말의 <프리티 베이비>, 쇼비즈니스계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흑백화면을 구가한 우디 앨런의 <셀리브리티>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근 그의 유려한 영상세계를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잉마르 베리만과 스벤 니크비스트>(Light Keeps Me Company, 2000)가 아들 칼 구스타프 닉비스트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그간 함께 일해온 동료들의 인터뷰로 조망된 79살 노장의 어깨 위에 걸린 훈장은 휘황찬란한 조명도 세인의 찬사도 아닌, 자연의 빛을 좇아 한길 영화에 바친 구도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소리없는 색채이지만 큰 울림을 자아낼 수 있는 힘, 그건 바로 빛에 대한 사랑이었다.(이화정/ 자유기고가)  

 

 

Sven Nykvist

On the Shooting of The Sacrifice

Source: "Vördnad för ljuset" (In Reverence of Light), by Sven Nykvist and Bengt Forslund. Albert Bonniers Publishing Company, ISBN 91-0-056316-1, © Nykvist/Forslund 1997. The following comprises pages 181–188 of the book (excluding all photographs), taken from the the chapter "From Tarkovskij to Woody Allen." This excerpt translated from Swedish by Trond S Trondsen of Nostalghia.com. It is translated and published here with the kind permission of the authors. A Japanese (re-)translation is provided by Kimitoshi Sato of Japan. The photo below is taken by Lars-Olof Löthwall, and is used with his permission.

  A personal motto of mine is "It is never too late." Many, as they reach the age of sixty start to feel as if they are at the end of themselves, the official retirement age is fast approaching. Thanks and goodbye.

But, those of us who are freelance and rather independent often do not think along those lines. Creativity surely doesn't cease at a certain age. Many artists, composers, authors, and filmmakers are still active will into their eighties - not to mention actors and actresses.

The fact is that I received some of my most exciting assignments, and did some of my best movies, at an age usually associated with retirement. It began with Andrej Tarkovskij's The Sacrifice, 1985, and continued the following year with Philip Kaufman's film adaptation of Milan Kundera's novel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followed by some years of cooperation with Woody Allen.

I had a great admiration for Tarkovskij (1932-1986) ever since I saw his fresco on the icon painter Andrej Rubljov. It was a true revelation to me when I saw it for the first time. Pure image magic! His exile from the Soviet Union led him, by chance, to Sweden via Italy where he in 1982 did Nostalghia with Erland Josephson in the lead role. They became good friends.

Anna-Lena Wibom of the Swedish Film Institute was also one of his long-time friends. In Cannes in 1984 Tarkovskij was invited to shoot his next film in Sweden. He had several potential film candidates, but in the end the choice fell on The Sacrifice, which was written for Erland Josephson.

My friendship with Erland, combined with Tarkovskij's admiration for Ingmar, resulted in me being asked if I wanted to be the cameraman. It was not a difficult choice at all, in spite of the fact that at the same time I was offered to shoot Out of Africa with Sidney Pollack. Erland and I even invested our artists' fees back into the film and thus became co-producers through our mutual corporation. It was not at all good business, but certain experiences are well worth the money, and, besides, I received a prestigious prize in Cannes for the film.

From a personality point of view, I and Andrej got along very well indeed. We started out by watching each other's movies. His appreciation for Bergman, and mine of his movies, caused us to muse on the many obvious differences. I could see that he obviously was not very interested in lighting. To him, of primary importance were composition, camera movements, the literally moving image.

He was not even interested in the actors. He blamed this on his shyness, combined with language difficulties. The important thing to him became choosing the correct types of people, with a particular kind of look, and to see to it that they had the right way of expressing themselves. Close-ups are also strikingly rare in Tarkovskij's movies. He preferred to see the actors' movements at a distance, almost choreographed, and alway in the center of the frame.

This caused our working relationship to be somewhat strained during the first few weeks of shooting. As opposed to in the case of Ingmar, Tarkovskij had no prior knowledge whatsoever of the location of shooting until he got there and could sit at the camera and plan and direct its movements. This would often take hours.

Add to this, that only when Tarkovskij had made up his mind on how he wanted things, could I come in and set the lighting. And since the shots at hand were more often that not extended tracking shots, things could take an inordinate amount of time. One must deal very carefully with what is only seemingly unchanging exterior lighting. In addition, there were the associated changes in image definition and contrast which the assistant cameraman had to learn to deal with.

But when the images had finally been recorded, there were as a rule a considerable amount of minutes of exposed film in the camera. It was a different way of working and the result bears witness to the fact that one way may be as good as, or better, than another. Great artists go their own ways. And the photographers role is to yield, it is always the director's wisdom that counts - if indeed he knows what he wants.

And Tarkovskij knew what he wanted. He had a scene he had dreamt about doing for a long long time, for ten years, he claimed. It was to be the final scene of The Sacrifice. The main character's house burns down to the ground before his very eyes, he apparently goes insane and is taken away in an ambulance. The entire scene was supposed to be done in one single take while the camera moves along a hundred meter long rail. We had special-effects people brought in from England as there was a requirement in place that the house burn down in eight minutes and ten seconds sharp. Otherwise the film cartridge would run out.

For an entire week this scene was meticulously rehearsed. We had decided to not shoot the scene under sunlit conditions, and so we were forced to get up at two o'clock in the morning, do a few test runs, and then to commence shooting the scene at a carefully selected moment just prior to sunrise.

Approximately half-way through the take, my assistant yells out, "Sven - the camera is losing speed! We got twenty..., now we're at sixteen frames per second! What shall we do?"

Just to be on the safe side, in case problems should arise, I had deployed another camera approximately midway along the rail, so I said, "Swap the cameras!"

Within thirty seconds he had changed the camera and we continued filming. Tarkovskij had not noticed that we had changed camera, nor had the majority of the others. They were all watching the fire, and when it was over and the ambulance had made its exit everybody cheered over the fact that everything had turned out so well.

Then I got to tell about what had happened. Tarkovskij almost cried. The film was immediately developed to see if we in spite of everything could use some of the existing material. But, there was no way. Whatever the case, it was definitely not the sequence Tarkovskij had dreamt about for all these years - and it was even supposed to be the climactic sequence of the movie.

We really didn't have the funds to re-build the house and to do a second take. Long discussions ensued, where even Erland and I were involved in our roles as co-producers. The actors were fortunately still under contract for another while. We received some additional funding through our Japanese co-producer, and in the end we all decided to give it another shot. Nothing is impossible, as Ingmar Bergman was fond of saying. It was his gang behind the camera here. The house was re-built!

This time, however, I requested of Andrej that he agree that we build two sets of rails, and that the shoot should, just to be safe, be be shot simultaneously by the two cameras mounted at slightly different elevations. For an entire day we rehearsed with both cameras to ensure that they both moved in identical manner. We shot the scene one morning when everything seemed just right, but at the same moment Andrej was about to yell "Camera!" the sun appeared.

Tarkovskij shouted, "What shall I do?"

I said, "Look, there's nothing you can do,...! The sun is coming out, the house is already on fire - and we're on our second house!"

Fortunately, it turned out just fantastic. As the smoke billowed forth from the house the sun shone right through it and generated some truly great shading on the ground. It was a lucky strike indeed that the sun appeared - entirely to our advantage, and Tarkovskij was exceedingly pleased when he saw the end result.

While certainly a stubborn perfectionist, he was also willing to be corrected, at least by people that he trusted. It turned out, actually, that he at times was remarkably bound up by what he had once learned at the Russian film school.

I recognized this exact phenomenon from my earlier cooperation with Barabas and Polanski, these also deeply affected by Eastern European film schools, perhaps the best schools in the world, with their much stricter set of ingrained rules than what is commonly found in the western world. At times there were purely practical reasons for such differences. For instance, Barabas and Polanski wanted to do fine tuning of color balance on-the-fly, directly in the camera, as opposed to later in the laboratory, which certainly is better and simpler, but then again the standards of quality at eastern laboratories were hardly the same as in the west. In this case they did yield to my suggestions.

They seem to have been taught that tracking shots should be employed as frequently as possible - I have rarely done as many tracking shots as I did with these three directors - shots which do indeed hold undeniable cinematic value. But in the case of Tarkovskij, the school had taken it so far as to even forbid the use of such a practical tool as the oblique pan.

One of the first images we were to shoot for The Sacrifice was such a shot. We were to pan across from a close-up on a glass of water and then up on Erland Josephson who was sitting at a distance away. Tarkovskij vehemently insisted on first tracking horizontally along the tabletop and subsequently vertically up to Erland, which of course took a much longer time than if we went at an angle up from the glass of water and right on to Erland's face. Only when he saw the alternate take did he admit that this was indeed the better approach.

As a rule, however, it was Tarkovskij's own visions that counted even if he at times had a hard time communicating them, partly due to the language barrier - he had to constantly work through an interpreter - but primarily due to the fact that he first and foremost wanted to communicate emotions, moods, atmosphere. By images, not by words. He wanted to impart a soul to objects and nature. Here he actually went further than Bergman ever did.

Once I understood this, it became a true delight to work with him and we ended up becoming very close friends. He also saw how my lighting had the effect of amplifying his own vision. I remember, among other things, how well we worked together when we after the shooting was completed performed the, to the movie so significant, color reduction in the laboratory. In the same way Ingmar and I did in A Passion, and he himself had done in Nostalghia, we removed from certain scenes almost sixty percent of the color content. A cameraman's work is indeed not done until there is a properly lighted and approved opening-night copy. Good lighting people in a laboratory are invaluable. Nils Melander of Film Teknik has been my great support during all my years of working in Sweden.

This my work on the color reduction on The Sacrifice eventually caused me to meet one of my big director heroes, namely the Japanese Akiro Kurosawa. There were at one time serious plans that he, Fellini, and Ingmar Bergman were to do a period movie together. Ingmar and Fellini met in Rome, but Kurosawa never showed up and in the end the movie never materialized.

Some years after The Sacrifice had been released I received an offer to shoot an industry commercial film in Japan. I had not previously had the opportunity to work there, the job was well-paid, and I saw the opportunity of perhaps running into Kurosawa. So, I took the job.

I am unfortunately a rather shy person, one who does not usually initiate making contact, so when my assignment was all but finished two weeks later, it looked like I would be going home without having met Kurosawa. But, once again, I was in luck. Kurosawa was at that time close to eighty years old (b. 1910) and was about to receive some prestigious national achievement award. A large party was being thrown in his honor. The organizing committee, which had taken notice of the fact that I was in town, actually invited me.

The Sacrifice had, as you know, been a Japanese co-production and the picture had been the object of much attention when it was first screened in Tokyo, which was only shortly prior to my visit. Kurosawa had seen the movie - and lo' and behold suddenly he was the one interested in meeting me! He absolutely wanted to know how we had managed to work out the color reduction.

As soon as we had been introduced to each other he pulled me off into a separate room where we could sit undisturbed during the dinner and discuss color reduction processes. One never forgets such an evening.

I also asked him why he never showed up in Rome. "I was too shy," he said, "Bergman and Fellini are way too big for me."

 

 




필모그래피
<셀리브리티>(Celebrity, 1998) 우디 앨런 감독
<사적인 고백>(Enskilda Samtal, 1996) 리브 울만 감독
<사랑 게임>(Something to Talk About, 1995년) 라세 할스트롬 감독
<라이프세이버>(Mixed Nuts, 1994) 노라 에프런 감독
<온리 유>(Only You, 1994) 노먼 주이슨 감독
<하버드 졸업반>(With Honors, 1994) 알렉 케쉬시안 감독
<길버트 그레이프>(What's Eating Gilbert Grape, 1993) 라세 할스트롬 감독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 1993) 노라 에프런 감독
<채플린>(Chaplin, 1992)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
<옥스>(Oxen, 1991) 스벤 닉비스트 감독
<뉴욕 스토리>(New York Stories, 1989) 우디 앨런, 프랜시드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감독
<범죄와 비행>(Crimes and Misdemeanors, 1989) 우디 앨런 감독
<또다른 여인>(Another Woman, 1988) 우디 앨런 감독
<프라하의 봄>(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1988) 필립 카우프만 감독
<희생>(Offret, 1986)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신의 아그네스>(Agnes of God, 1985) 노먼 주이슨 감독
<스완의 사랑>(Un Amour de Swann, 1984)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
<즐거운 농장>(Cannery Row, 1982) 데이비드 S. 워드 감독
<화니와 알렉산더>(Fanny Och Alexander, 1982) 잉마르 베리만 감독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1981) 밥 라펠슨 감독
<허리케인>(Hurricane, 1979) Jan Troell 감독
<집시들의 왕>(King Of The Gypsies, 1978) 프랭크 피어슨 감독
<가을 소나타>(Hostsonaten, 1978) 잉마르 베리만 감독
<프리티 베이비>(Pretty Baby, 1978) 루이 말 감독
<테넌트>(Le Locataire, 1976) 로만 폴란스키 감독
<고독한 여심>(Face to Face, 1975) 잉마르 베리만 감독
<마법 피리>(Trollflojten, 1975) 잉마르 베리만 감독
<외침과 속삭임>(Viskningar Och Rop, 1972) 잉마르 베리만 감독
<정열>(En Passion, 1969) 잉마르 베리만 감독
<페르소나>(Persona, 1966) 잉마르 베리만 감독
<겨울 빛>(Nattvardsgasterna, 1963) 잉마르 베리만 감독
<침묵>(Tystnaden, 1963) 잉마르 베리만 감독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Sasom I En Spegel, 1961) 잉마르 베리만 감독
<처녀의 샘>(Jungfrukallan, 1960) 잉마르 베리만 감독
<톱밥과 금속 조각>(Gycklarnas Afton, 1953) 잉마르 베리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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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회복제를 먹고 허리에 파스를 붙인 다음에야 기력을 좀 차리고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기사들을 둘러보는데(정작 해야 할일은 이런 게 아니지만), 딱 내 얘기다 싶은 기사가 눈에 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의 '문화비평'이 그것인데, 제목이 얄궂게도 '책을 처분하면서'이다. 제목에 잠시 '놀라실' 분들도 있을까봐('반가워할' 분들일까?) '인문학자의 딸들을 위하여'로 바꾸었다(인용문의 문단들도 다시 조정했다).

실상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겪고 있는 '고초' 또한 '책을 처분하면서'의 소회와 진배없다. 때문에 아래의 '비평'은 '딸아이를 위해서' 지난 겨울 한 차례 책을 처분하고(정확하게는 '위탁하고') 이번에 또 한번 책정리를 하느라 허리에 파스 한 통을 다 붙여가고 있는 처지에서 십분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해서 옮겨온 글이지만 '방주'가 아닌 '창고'에 넣어둔다.   

교수신문(06. 09. 30) 책을 처분하면서

대개의 인문학자들에게 이사는 그 동안 엄청나게 늘어난 책을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고민을 동반할 것이다. 늘 그렇듯이 공간은 협소한데, 책은 많다. 8년 여만에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면서(*나도 내년이면 8년을 채우게 되지만 이사를 꿈꾸기는 어렵다!) 고민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역시 책 보관문제였다. 지금 집에 있는 세 개의 방 중에서 두 개의 방은 그야말로 책 보관소였다(*내 말이 그말이다). 이 방들의 거의 모든 책꽂이는 이미 책이 가득 꽂혀진 공간에 다시 세로로 포개서 보관하는 방식으로 책이 이중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마디로 책 수용의 임계에 도달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할 집의 크기는 같은데 그 중의 방 하나를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사정에 있다(*아으, 인문학자의 딸들이여!). 연구실 역시 책으로 완전히 포화상태이니, 결론은 현재 집에 있는 책의 약 30% 정도를 그게 기부가 되었건 양도가 되었건 어떤 방식으로든지 처분해야 한다는 쪽으로 날 수밖에 없었다(*아래는 나이가 턱에 차서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는 우리집 딸내미이다). 

요 며칠 동안 바로 그 30%에 해당하는 책을 따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책들을 판별하는 기준은 앞으로 내가 평생 동안 볼 가능성의 여부와 그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기준은 대개 비슷한 듯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가'란 기준은 나의 경우에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다 보니, 우선적으로 철지난 잡지와 문예지가 그 30%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소설책과 시집도 이러한 운명을 비켜가지 못했다(그 책의 저자들에게 마음 깊이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고민했던 것은 인문사회과학의 전성시대였던 1980년대에 출판된 무수한 인문사회과학도서였다. 여러 가지 형태의 철학서, 사회과학이론 책들, 사회구성체 논쟁을 다룬 책들, 리얼리즘 관계 이론서들 등등.

아마도 이 책들의 상당수는 내 평생에 다시 볼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게(?) 어떤 방식이로든지 이 책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이런 책들을 나는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는 않지만, 갖고 있더라고 권교수와는 다르게 바로 '처분'했을 것이다. 대학 도서관들에서 쉽게 대출할 수 있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을 가능케 한 것이 그 책들에 내 젊음의 방황과 모색이 진하게 배여 있다는 실존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보다 현실적으로 이제 그 책들을 커다란 도서관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정황이 이러한 선택을 유도한 결정적인 계기였다가령 당시 비평가로서의 삶을 모색하고 있던 내 문학 공부에 많은 지침과 암시를 주기도 했던 파킨슨의 <게오르그 루카치> (현준만 역, 이삭, 1984) 같은 책은 이제 고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다(*내 주변의 도서관은 '커다란 도서관'에 속하는 듯하다. 파킨슨의 <게오르그 루카치> 등도 원서와 함께 소장돼 있다). 

물론 80년대에 출간된 여러 가지 진보적 사회과학 도서들이 지금 현재도 유효한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겠다. 철지난 급진이론이라는 생각도 가능하겠고, 여전히 우리 현실을 읽는데 소중한 참조가 된다는 관점도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 여하를 떠나 내가 이 에세이에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책들을 불과 20여년 후에 구하기 힘든 우리의 경박한 인문적 풍토에 있다.

두루 알다시피 80년대는 혁명과 정치의 시대였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시대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무수한 영세출판사에서 의욕적으로 출간된 다양한 인문사회과학도서들을 생각해 본다. 그 책들은 각각이 지닌 세계관의 한계까지도 포함해서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었다. 가끔은 그 시절이 한국현대사에서 인문학의 진정한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 책들을 모두 양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점은 그 책들을 구하기가 너무나도 힘든 이 시대의 현실이 반인문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인문학을 살리는 길은 거창한 선언이나 ‘인문학 주간’ 같은 일회성 행사로 결코 가능할 수 없다. 한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기억하는가의 문제,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소중한 책들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의 확보가 인문학을 위해서 더욱 필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러니까 굳이 '개인 도서관'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공공도서관이 장서수나 편의성에서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면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기 위해 책들을 처분해야 하는 '서민' 인문학자들의 비애는 재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딸에게 방을 따로 내주고도 책 보관을 위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권성우/ 숙명여대·국문학)

06. 10. 15.

P.S. 대학교수의 처지에서도 그런 고민을 한다면 무슨 '통뼈'가 아닌 강사들의 처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아래는 지난봄 엄마 생일때 딸아이가 내게 전달해달라고 했던(그러니까 아빠는 '우체국아저씨'였다) 축하편지인데, 지난 여름 내 생일 때 아이는 달랑 '아빠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라고만 쓴 쪽지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언어학의 기본 상식을 갖고 있다면 이 두 메시지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형식(여기서는 '분량')이다. 딸아이의 '아빠사랑'은 '엄마사랑'의 발치 정도인 것.

다음주면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고가로 구입한 가구들이 딸아이방에 들어오고 우리는 작은 파티를 해줄 예정이다. 그럼 지난 두달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것. 여하튼 책들을 '고아원'에 '처분'하고 또 정리하면서 내가 갖는 바람은 다른 게 아니다. 고작해야 내년엔 좀더 긴 편지를 딸아이에게 받는 것 정도. "아빠가 없으면 저도 없겠죠." 정도의 구절은 포함된 편지로 말이다(요즘 세상에 누가 '인문학자'를 따로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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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06-10-1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 무척 예뻐요.(저 옴팡 들어간 눈매라니!) 그나저나 엄마 소중한 줄은 알아서^^* 내년 생일도 기대마세요. "아빠가 없으면 엄마 생일 편진 누가 배달하죠?" 이렇게 된다니까요. 참고로, 로쟈님이 당하는 서러운 역할 우리집에서는 제가... 진짜 서럽습니다.

책에 묻혀사는 인문학자들이 아니더라도, 저는 늘 '책 버리는'데 인색하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한답니다. 안 보는 순서대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순서대로 마구 버려주는 센스. 책의 효용은 읽는 것이지,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고, 주변인들에게 설파하면 막 째려봅니다. 저는 가장 큰 방을 책방으로만 쓰고 있어서 공간적 여유가 있는 편인데도 책 처분, 수시로 합니다. 책꽂이에 꽂힌 책 30%이상이 두 번 다시 주인의 손길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라는 게 제 주장이거든요. 그 책들이 날아간 자리에 인문학자는 따님 방을 만들고, 평범한 독자는 새 책을 사넣고 그러는 거지요. 어쨌든, 책이라면 그 어떤 거라도 '소중해서' 못 버린다는 사람들을 저는 살짝(실은 많이) 싫어해요. 그래도 사람이 그 집의 주인이어야지, 책이 주인 행세를 해서야 되겠어요? 유익한 페이퍼, 감사합니다.

서현이는 조오케타. 자기만의 방이 생겨서...

herennow 2006-10-16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아이가 이쁘네요
나중에 남자들 속 좀 태우겠는데요
책 처분을 고민할 정도로 책이 많으신게 부럽습니다

로쟈 2006-10-16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크아이즈님/ 내년 생일도 기대하지 말라구요!(딸들이란 어째 그럴까요?) 물론 저도 책의 주인 행세를 하고 싶습니다. 그럴 만큼 넓은 집을 장만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herennow님/ '대개의 인문학자들'이 갖는 고민입니다. 평생 책과 씨름하는 것도 '서러운데', 그걸 처분하느라 머리를 싸매야 한다니...

기인 2006-10-16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어떤 느낌일지 알것 같습니다. ㅜㅠ

로쟈 2006-10-16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훈련소에선 나오신 모양이군요.^^ '타산지석'으로 삼으시면 되겠습니다...

biosculp 2006-10-16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이 기사 읽었을때, 어 어디서 본글인데 하고 생각해보니 로쟈님서재에서 비슷한 글 읽은것이 생각나더군요.

이네파벨 2006-10-1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의 편지를 읽는데 눈시울이 젖네요.
"엄마 저예요"로 시작하는 서두가 저희 딸내미랑 똑같아서...(전화할때도 꼭 "엄마 저예요." 편지에도 종종 그렇게 쓰지요.)...로쟈님 따님 글에 저희 딸내미 목소리가 입혀져서 읽히더군요.

따님이랑 부인이랑 로쟈님 모두모두 언제나 행복하시길 빌어드립니다....

로쟈 2006-10-16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iosculp님/ '창고'에 다 모아두었습니다.
바람구두님/ 야근을 좀 줄이시면 되지 않을까요?..
이네파벨님/ 그래서 덤덤한 아들 키우는 것보다는 애교있는 딸들이 키울만 하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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