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 <기획회의>(291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나인호 교수의 <개념사란 무엇인가>(역사비평사, 2011)를 거리로 삼았다. 주로 개념사의 개념에 대해 정리하려고 했다. 책의 절반은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읽은지라 기억에 남는다. 옮겨오는 김에 오타도 수정해놓는다('1830년대'가 지면엔 '1930년대'라고 나갔다). 

   

기획회의(11. 03. 05) 개념은 역사의 변화를 비추는 거울이다.

“개념은 알겠는데, 개념사는 뭐지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가진 독자라면 바로 펴볼 만한 책이 나인호의 <개념사란 무엇인가>(역사비평사)이다. “대체 개념사가 뭐예요?”란 질문을 서두에 걸고 ‘개념사의 개념’을 일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개념사란 말에서 혹 ‘라인하르트 코젤렉’이란 이름을 바로 떠올리는 독자라면 그래도 개념사에 대해서 좀 들어본 구석이 있는 경우인데(내가 그렇다), 그때도 요긴한 입문서의 출간이 반가울 것이다. ‘역사와 언어의 새로운 만남’(부제)의 자리에 합석하여 챙겨둘 만한 귀동냥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와 언어의 만남? 코젤렉은 아예 이렇게 규정지었다. “모든 언어는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고, 모든 역사는 언어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다.” 그러니까 역사와 언어는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샴쌍둥이처럼 항시적으로 서로 붙어 있다.   

사전적인 정의를 인용하자면, “개념사는 언어와 정치․사회적 실재, 혹은 언어와 역사의 상호 영향을 전제한 채 이 둘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탐구하는 역사의미론의 한 분야이다.” 역사의미론의 전제는 언어가 역사적 실재를 구성한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해서 언어가 없다면 역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시각이지만 서구 역사학계에서 이러한 역사의미론이 ‘언어적 전환’과 함께 부상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그 가운데 특히 해석학의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 발전한 것이 바로 개념사이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란 이름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온다(이미 코젤렉이 편찬한 <역사적 기본개념>이란 방대한 저작의 일부가 국내에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다). 그래서 개념사에 대한 분과학문적 정의는 이렇다. “개념사는 1970년대에 독일에서 체계를 갖춘 이후 전세계적 연구 네트워크와 학술지를 갖춘 실험적 연구 분야로 성장하면서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일반 역사학의 새로운 전문 분과이다.” 특히 코젤렉이 기여한 분야는 ‘사회사적 개념사’이다.  

‘개념사’가 ‘개념들의 역사’를 뜻하는 말이라면 개념사의 기본단위로서 개념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할 것이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일단 상식을 활용하자면, 개념은 단어이다. 혹은 단어들로 이루어진다. “개념사는 분석 대상을 하나의 개념이나 몇몇 유관 개념들로 한정하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 개념사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왜 단어사가 아니고 개념사인가? 심지어 코젤렉도 개념은 “단어에 포박되어” 있다고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유인즉 개념은 단어를 통해 표현되지만 단어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은 단어가 될 수 있지만, 역으로 모든 단어가 개념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어와 개념을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코젤렉의 말을 더 인용하자면, “단어는 사용되면서 명확해질 수 있다. 반면 개념은 개념이 되기 위해 다의적이어야 한다.”  

다의적인 만큼 개념은 해석의 대상이다. 아니 ‘해석의 대상’ 그 이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의적인 개념을 일의적으로 정의하고자 할 때 논란과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자가 책머리에서 미리부터 이렇게 적어놓고 있는 이유이다. “개념의 정의는 오히려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논쟁을 낳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사회적 갈등과 투쟁이 개입되지요. 이처럼 개념은 정치․사회․이데올로기적 투쟁과 갈등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개념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 행위라고 할 수 있지요.”  

개념과 단어의 관계가 정리됐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개념과 실재의 관계이다. “개념은 실재의 지표이자 요소”라는 게 코젤렉의 유명한 명제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개념이 실재의 지표란 말은 거울이란 말과 비슷하다. “개념이 한편으로 정치․사회적 사건이나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때의 그 거울이다. 이건 물론 어렵지 않은 생각이다. 한데, 개념이 실재의 요소란 말은 무슨 뜻인가. “개념은 정치․사회적 사건과 변화의 실제적 요소”가 된다는 말이다. 즉 현실의 무언가를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어떻게? 사람들은 개념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행동을 조직하고 감정을 표현하므로 개념은 정치․사회․역사적 실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념은 공적 논쟁에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표출하는 정치적․사회적 도구가 되기도 하고, 지배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되기도 하며, 번역을 통해 문화를 전위시키는 문화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미 개념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정치 행위라고 했는데, 보태자면 개념의 번역 또한 정치적 행위가 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것이 “개념사만이 갖는 독특한 공리”이다. 이 ‘독특한 공리’에 따라 개념은 그 자체의 고유한 역사를 갖는다. ‘개념=실재’라는 단순한 등식, 혹은 소박한 실재론이 일면적인 이유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근대 초 유럽에서 확립되었지만 ‘자본주의’ 개념은 1830년대에 가서야 등장한다. 반면에 ‘사회주의’란 용어는 18세기 후반에 벌써 나타나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출현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책은 1부 ‘개념사란 무엇인가?’와 2부 ‘여섯 개의 개념으로 근대 읽기’로 구성돼 있는데, 마치 ‘이론과 실제’ 같은 인상을 준다. 개념사의 구체적인 적용과 성과를 엿볼 수 있는 2부가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면, 이론적 측면에 관심을 가진 독자를 유혹하는 것은 1부에서 ‘개념사의 다양성’을 정리해주고 있는 장이다. <키워드>(민음사)의 저자인 ‘현대 문화연구의 아버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핵심어 연구도 흥미롭지만, 눈길을 끄는 건 코젤렉의 연구를 더 발전시킨 그의 제자 롤프 라이하르트의 ‘사회사적 의미론’과 브라질의 역사가 호아오 페레스의 ‘비기본개념의 개념사’이다.  

특히 페레스는 코젤렉의 기본개념들이 “언어적 논쟁의 형태로 공적인 무대에 등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겪은 일련의 경험들을 제외시킨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그런 관점에서 페레스의 관심은 지리적으로 비유럽적이고 사회적으로 소수자들의 하위문화적 특수성을 포괄하는 개념사를 지향한다. ‘비서구 사회의 개념사’이면서 ‘아래로부터의 개념사’이다. 국내에서도 한림과학원의 주도로 ‘한국개념사총서’가 나오고 있는 만큼 우리의 개념사 방법론에 대해서도 한번쯤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개념사란 무엇인가>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으론 멜빈 릭터의 입문서 <정치․사회적 개념의 역사>(소화)가 있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시리즈와 함께 챙겨두어야 할 책은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문학동네)이다.  

11.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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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북리뷰 가운데 뒤늦게 읽은 건 제이슨 델 간디오의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동녘, 2011)이다. 제목만으론 정체가 다 드러나지 않는데, 부제는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이다. 수사학을 표방한 책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지 않은가 싶은데 실제로 원제 자체가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수사학'이다. 하종강, 목수정, 안진걸, 노회찬 네 분이 추천 대열에 가담한 것만으로도 책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준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다. “언어를 바꾸면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이렇게 모든 것이 바뀌면 사회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 오늘 당신의 언어를 수사학으로 새롭게 무장할 필요가 있다(음, 나도 문체를 좀 바꿔야 할지는 책을 읽어보고 판단해봐야겠다)...  

 

한겨레(11. 03. 05) 언어와 몸, 세상을 바꾸는 무기다 

부조리한 현실, 불공정한 사회…. 세상을 바꾸고 싶다. 마음은 불끈 더워지는데 실제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동지를 모아 혁명을 꿈꿔야 할까? 주먹 꼭 쥐고 거리로 뛰쳐나가야 할까? 과연 이 시대 혁명이란 가능한가? 곧 주저앉고 만다. 바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질적 방안이란 없다! 패배주의의 악순환에 빠져들 뿐이다. 사회뿐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여기저기 속한 크고 작은 그룹 안에서, 변혁의 소망은 쉽게 무너져내린다. 



그러나 바로 여기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외치는 소리가 있다. 정말로? 미국 템플대에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며 실천가로도 활약중인 제이슨 델 간디오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에서 장담한다. 변혁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그의 과격한(?) 주장은 2008년 책에 담겨 세상에 나왔지만, 놀랍게도 지금 여기 지구 한쪽에선 혁명의 불길이 드높이 치솟고 있지 않은가.

그는 혁명의 가능성을 ‘수사학’에서 찾는다. 21세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급진주의자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총도 칼도 돌도 화염병도 아닌 ‘수사’라고 힘줘 주장한다.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곧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는 뜻이며, 이를 위해서는 설득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달하려는 고귀한 ‘내용’에 치중하느라 전달의 ‘방법’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아프리카·중동에서 부는 혁명의 태풍 뒤에는 소셜 미디어가 자리잡고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전세계에 튀지니에서 일어나는 운동의 불길을 알렸고 세계 시민들의 소통과 연대가 혁명의 불을 당겼다. 선동가의 힘찬 연설과 거대 담론으로 혁명이 이뤄지던 시대는 지나고, 블로그의 포스팅 하나, 트위터의 트위트 한 줄이 논의를 촉발시키고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활동가들은 담론과 연설에 매달릴 게 아니라, 소통의 효과적 방식 곧 수사를 연구하고 전략을 세우는 데 힘써야 하는 시대가 됐다. 수사학은 “설득하고 추론하고 분석하고 나아가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지은이가 강조하는 까닭이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의 유별나면서도 매력적인 지점은, 단순히 수사의 중요성을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간디오는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더불어 구체적인 수사 전략까지 제시한다. 한마디로 활동가들을 위한 수사 지침서이자 실용서인 셈이다. 책의 부제가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이며 원제가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수사학’인 것도 그래서다. 



지은이가 수사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데다 2000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항의운동 장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엿본 뒤 본격적인 활동가의 길을 걸으며 현장에서 수사학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68혁명 이후 등장한 신급진주의(소통·수사를 수단으로 변혁을 꾀한다는 생각) 이론을 확장해 실천하는 한편, 집회나 모임에서 소통의 방식을 분석한 결과물로 이 책을 써냈다.

그가 강조하는 혁명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수사는 글쓰기와 말하기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두 가지 수단. 활동가의 글쓰기와 말하기의 전략은 치밀해야 한다. 메시지는 무엇인지, 목표가 무엇인지, 독자나 청중은 어떤 이들인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제안은 매우 구체적이다. 가령 글쓰기와 말하기는 완전히 다르게 준비해야 하는데, 글은 첫문장에 신경을 써야 하고 말은 숫자나 전문용어를 배제한 채 몸짓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

각론으로 들어가면 언어 선택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이를 테면 ‘짭새’와 ‘견찰’, ‘미등록 노동자’와 ‘불법 이주민’ 중 어떤 단어 선택이 더욱 효과적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아울러 권력을 위해 조작된 언어의 본래 의미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역시 활동가의 몫이다. “언어를 바꾸면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이렇게 모든 것이 바뀌면 사회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말의 언어를 넘어 몸의 언어도 지은이는 강조한다. 수사와 마찬가지로 몸의 맵시 역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여기서 수많은 활동가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다. 혁명가는 외모를 가꾸고 몸에 치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선입견이 강하다. 그러나 말하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선 소통이 이뤄지는 공간의 분위기와 연설가의 외적 효과에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상당히 큰 영향을 받는다. 말하는 사람의 겉모습이 낳는 수사적 효과가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속 가능, 윤리적 소비 등을 연상시켜야 할 채식주의자가 뚱뚱하고 기름진 얼굴로 나타난다면 그의 올곧은 주장의 효과도 반감될 공산이 크다. 하다 못해 메시지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플래시몹 같은 거리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것도 효과적인 수사라고 간디오는 강조한다.(김진철 기자) 

11. 03. 09.   

P.S. 수사학이 본래 연설을 위한 기술이었으므로 '명연설'들을 참조해보는 것도 유익하겠다. '세계를 뒤흔든' 연설들이라면 더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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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10 15:10   좋아요 0 | URL
주역에 나오는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 는 표현을 긍정으로 바꿔 읽으면 뜻을(생각을) 먼저 세우고자 하면 말을(메를로 퐁티의 개념을 빌리면 세계와 지각을 매개하는 몸의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군요) 바꾸고, 글을 바꿔야 한다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실천적 영역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영역에서도 의미있는 방법론이라 생각됩니다. 말이 뜻을 전도하는 원래적 의미를 차치하더라도요....^^;

로쟈 2011-03-11 09:26   좋아요 0 | URL
전통적으로 수사학과 논리학은 적대적이었는데, 논리학(주장)이 승리를 위해서라도 수사학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는 걸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해요. 승리할 수 없다면 '공론'이 될 테니까 맞는 말이기도 하지요...
 

소설가 지망생이 많아지면서 소설작법 책들도 드물지 않게 출간되고 있는데, 최신간은 윌리엄 케인의 <거장처럼 써라>(이론과실천, 2011)이다. 서점에서 볼 때는 대충 그렇고 그런 조언들을 담은 책처럼 보였지만, 리뷰기사를 읽으니 생각보단 재미있는 책 같다. 21명의 거장이 너무 많다 싶지만, 여하튼 발자크부터 스티븐 킹까지 21명의 거장들에게 '1일 과외'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은근히 흥분되는 일일 수도 있다.

  

한겨레(11. 03. 05) 거장들의 가르침이 한가득

누군들 거장처럼 쓰고 싶지 않으랴. ‘거장처럼 써라’는 명령이 생뚱맞다. 미국의 영문학자이자 작가인 윌리엄 케인의 책 <거장처럼 써라>(김민수 옮김, 이론과실천 펴냄) 얘기다. 오노레 드 발자크에서 스티븐 킹까지 21명의 문학 거장들이 지은이의 초대에 응해 글쓰기 지도에 나선다. 



지은이가 우선 강조하는 것은 모방의 중요성이다. 지은이는 오늘날 문학 창작 교실에서 독창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나머지 선행 작품들을 흉내내는 것을 금기로 삼다시피 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한다. 모방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장 바람직한 훈련법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모방하는 동안 거장의 문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자연스레 내 문체 속으로 흡수되어 노래처럼 부드러운 작품이 탄생할 것이다.” 물론 모방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최종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맹목적인 모방이나 베끼기, 표절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모방은 위대한 작가보다 나아지고 마침내 그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가령 작가 지망생이 발자크에게서 배울 것은 무엇일까. ‘가능한 한 많이 쓰라’는 것이다. 수다한 작가 지망생들이 공감하겠거니와, “소설을 쓸 때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바로 초고를 완성하는 일이다.” 그러니 발자크한테서 배워라. 발자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을 썼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지치지도 않고 몇 번이고 고쳐 쓰기를 되풀이했다. 발자크처럼 용감하게 일단 시작하라, 그리고 여러 번 고쳐라. “많이 쓸수록 잘 쓰게 되는 것은 명백한 진리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아들과 연인>의 작가 로렌스가 가르치는 것도 발자크의 가르침과 비슷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소설을 쓸 때도 줄거리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물들만으로 우선 시작하고 보았다. 그가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면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은 이러하다. “줄거리는 아무래도 좋아. 난 줄거리를 따라가는 게 지루해. 일단 두 쌍의 연인들을 가지고 시작해봐야겠어.” 



헤밍웨이는 ‘하드보일드’라는 독자적인 문체를 구축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형용사와 부사를 최대한 배제하고 쉼표를 생략하며 접속사로 이어지는 복문을 지양한 그의 단순명료한 문체는 기자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곁가지라 할 요소들을 가능한 한 걷어내고 명사와 동사를 위주로 한 뼈다귀만을 남겨 놓은 결과 표현은 정확해지고 극적인 효과는 배가되었다. 헤밍웨이는 또한 페이지의 전체적인 형태에 신경을 쓴 작가였다. “그는 빼곡하게 글이 들어찬 문단을 싫어했다. 그래서 문단이 옆으로 퍼지면서 뚱뚱해진다 싶으면 슬쩍 대화를 끼워 넣어 여백을 만들었다.” 독자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배려한 것이다. “오로지 상상으로만 만들어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마라”는 것 역시 헤밍웨이의 가르침이다. 허구적 인물을 만들 때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두 사람 이상의 인물이 지닌 특징을 한데 버무리라는 것.

이밖에도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활용하라(디킨스), 장면 전환 때 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보태라(도스토옙스키), 악인의 내면에 선한 면모를 섞어 넣어라(오웰), 주인공 특유의 목소리를 확보하라(샐린저), 운율과 두운을 활용해 시적 효과를 높여라(멜빌) 같은 깨알 같은 가르침이 책에는 가득하다. 자, 거장들의 가르침을 들어 보지 않겠는가.(최재봉기자) 

11. 03. 06. 

 

P.S. 작가들의 글쓰기 가이드로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김영사, 2002)일 듯싶은데,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의 기교>(역락, 2010)도 교본이 될 만한 책이다. 소설의 각 단계별로 모범이 될 만한 예시들을 제시해준다. 그리고 말 그대로 교재형 책은 제임스 스콧 벨의 <소설쓰기의 모든 것>(다른, 2010). '플롯과 구조'를 다룬 1부만 나와 있는데, 몇 부까지 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전형'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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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7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7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상에 가득 쌓인 책을 약간 정리해서(다른 방으로 옮겨놓았다) 정면과 우측에 놓인 책상에 각각 한 뼘씩의 공간을 마련했다. 댓 권의 책을 펼쳐놓을 공간은 되는 셈이어서 마음도 그만큼 넓어진 듯하다. '여유' 공간이다. 당장 강의나 원고와 관련하여 읽어야 할 책들을 눈에 띄는 대로 앞쪽에 배치해 놓으니 무슨 전투대형 같기도 하다. 하긴 지식의 '사무라이'들은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것이지('사무라이'는 크리스테바의 용어다).   

몇가지 '전선'을 생각해보다가 '문학이론' 쪽부터 점검을 해보기로 했다. 러시아에서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창비)의 러시아어본을 들고 온 게 직접적인 계기이긴 한데, 한편으론 '20년 주기설'에 따라(인생은 20년 단위로 반복된다는 설이다. 내 생각이 그렇다) 다시금 읽어볼 때도 됐다는 생각에서다. 학부 때 문학세미나 교사를 하면서 최소한 네댓 번은 읽었던 책인데, 이미 그때 읽은 책은 찾을 수 없어서 최근에 다시 구입했다(2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국역본은 1986년에 초판이 나왔고 이번에 산 건 2010년에 나온 22쇄다. 내친 김에 원서의 3판도 구했다(나는 초판 원서도 갖고 있다). 3판이라곤 돼 있지만 2008년에 나온 25주년 기념판이다. 1983년에 초판이 나왔고, 1996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이건 번역본이 따로 있다), 개정판과 이 3판은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글턴의 기념판 서문이 더 붙었다. 아무튼 국내에서도 그렇고, 영어권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읽히는, 그러니 가장 성공적인 '문학이론 입문서'가 아닌가 싶다. 몇달 전에 나온 <이론 이후>(길, 2010)와 같이 읽으면 구색도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이론 이후>의 원서도 찾아봐야겠다). <문학이론 입문> 원서와 함께 대담집 <비평가의 임무>도 주문했는데, 이 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글턴의 신간은 제임슨, 사이드와 3인 공저로 낸 <민족주의, 식민주의, 문학>(인간사랑, 2011)이다. 정확하게는 아일랜드의 필드 데이 극단이 세 사람을 초청해서 개최한 강연회의 원고를 모아서 낸 책으로 '아일랜드와 모더니즘'이 적절한 부제일 거라고 역자는 말한다. 세 사람 모두 아알랜드의 작가/시인인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를 다루고 있다. 내친 김에 이글턴 자신이 '反자서전'이라고 부르는 회고록 <게이트키퍼(The Gatekeeper)>도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글턴의 책으로 한권 더 챙긴 건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경성대출판부, 2010)이다. 이 또한 최근에 원서를 구했다. 같이 읽을 책으로 고른 건 러시아 문학자 리디야 긴즈부르크의 <서정시에 관하여>(나남출판, 2010). 시 이론서를 읽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다.  

 

시론과 시이론으로 살짝 방향을 튼다면 후고 프리드리히의 <현대시의 구조>(지만지, 2009)도 읽을 거리다(오래전에 <현대시의 구조>(한길사, 1996)로 출간됐던 책이다. 나는 이 한길사판을 갖고 있는데 지금은 소재 불명). 지난달에 러시아에 가보니 러시아어본도 나와 있길래 다시금 떠올린 책이다(이왕이면 사들고 올 걸 그랬다). 권혁웅의 <시론>(문학동네, 2010)까지 곁들이면 '보들레르에서 21세기 한국시'까지다.  

 

거기에 더 보태면, 자크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인간사랑, 2009)가 있다. 최근에 영역본이 나와서 다시금 읽어보려는 책이다. 그리고 읽는 김에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도 이번엔 완독해보려고 한다. 어지간한 지력과 지구력이 없다면 완독하기 어려운 책들이다. 이제, 문학이론과 관련하여 무엇이 남았을까.   

음,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도 다시 읽어봐겠다('1947년 작가의 상황'이 빠진 버전으로 20년쯤 전에 읽은 듯싶다). 러시아어본도 구해온 게 '자극'이 된다. 그리고 새로 나온 바흐친 선집들까지. 이 정도면 최소한 두달 이상은 버틸 수 있을 듯하다. 독서의 범위를 더 확장하는 건 중간시험 기간쯤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그맘때면 봄이 만개하겠군. 혹은 이른 더위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11.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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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3-0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간이 들러 눈팅만 하는데 오늘은 응원의 댓글 남겨봅니다.
소리없이 다녀가는 수많은 블로거들에게 도움을 주는 분이니까요.^^
이젠 제대로 봄이지요~~~~~~ 어제 양지쪽에서 발견한 봄까치꽃이 반가웠어요.

로쟈 2011-03-06 16: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아침저녁은 쌀쌀하지만 봄은 봄이지요.^^
 

아침에 읽은 기사를 연거푸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의 '명강의를 찾아서' 코너에서 읽은 전호근 교수의 연암집 강의 소개이다. 아트앤스터디에서 8주간 진행한 강의는 내일 종결되는데, 나중에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따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아직 연암집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으니 '5000년 최고의 문장'을 만나지 못한 셈이니까...   

한국일보(11. 03. 05) 전호근 경희대 교수의 '5000년 최고의 문장을 읽는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문장가는 누구일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이 질문을 앞에 놓고 전호근(48) 민족의학연구원 상임연구원 겸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가 대중강의를 하고 있다.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인 아트앤스터디(www.artnstudy.com)를 통해 1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이 강의의 제목은 '5,000년 최고의 문장을 읽는다'. 이 강의에서 전호근 교수가 꼽은 우리 역사 5,000년 최고의 문장가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다. 강의는 그래서 박지원의 글을 모은 연암집에서 16편을 골라, 수강생과 함께 번역을 하고 글에 얽힌 사연을 풀어나간다. 연암집은 그 내용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가 거의 없었다.

강의의 제목대로 연암이 과연 최고의 문장가일까. 구한말 학자 김태경은 "연암의 글에는 공자, 맹자, 소동파, 한유, 구양수의 문장이 다 녹아 있다"며 "연암이야말로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고 했다. 역사학자 김성칠, 철학자 박종홍, 북한의 국어학자 홍기문 등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으니 강의 제목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호근 교수가 볼 때 연암의 글은 표현이 생생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나며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그래서 전 교수는 "글 속의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듯 하고 연암 자신이 마치 그 인물이 된 듯 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 교수는 열녀함양박씨전병서(烈女咸陽朴氏傳幷序)의 한 단락을 보기로 든다. "가물거리는 등잔불에 제 그림자 위로하며 홀로 지내는 밤은 지새기도 어렵더라. 만약에 또 처마 끝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거나 창에 비친 달빛이 하얗게 흘러 들며 낙엽 하나가 뜰에 지고 외기러기 하늘을 울고 가며 멀리서 닭 울음도 들리지 않고 어린 종년은 세상 모르고 코를 골면 이런저런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 이 고충을 누구에게 호소하랴. 이럴 때면 나는 이 엽전을 꺼내 굴려서 온 방을 더듬고 다니는데 둥근 것이라 잘 달아나다가도 턱진 데를 만나면 주저 않는다. 그러면 내가 찾아서 또 굴리곤 한다. 밤마다 늘상 대여섯 번을 굴리면 먼동이 트더구나."

전호근 교수는 "연암이 글 중의 과부라도 된 듯 절절한 마음을 드러냈다"며 "글을 읽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연암의 문장은 장자에서 따온 것이 많다. 장자는, 땅이 숨쉬는 것을 바람이라 하는 식으로 스케일 큰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연암은 이런 문장 스타일을 빌리되, 거창한 것 보다는 일상의 작은 것을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연암의 이 같은 문장관은 공작관문고서(孔雀館文稿序)라는 글에서 한껏 드러난다. 그는 글에서 논어를 인용, 글은 뜻만 드러내면 그만이라고 하면서도 진실하게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볼 때 진실한 글은,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거창한 이야기를 쓰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좇게 되지만 평범한 이야기를 쓰면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연암이 거지, 과부 같은 하찮은 인물을 등장시키고 코 고는 소리 등을 묘사한 것은 이런 문장관에서 비롯됐다. 이런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그는 현란하고 구체적이며 비유적으로 표현해 놀라운 글 솜씨를 발휘한다. 연암의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주는 보기로 전 교수는 불이당기(不移堂記)라는 글을 든다. 불이라는 이름의 당(堂ㆍ조선 사대부의 가옥)에서 지내는 친구 사함을 위해 쓴 글인데, 사함이 대나무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원에 대나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연암에게는 고민이었던 것 같다. "사함은 성품이 대나무를 사랑한다. 아, 사함은 대나무를 아는 사람인가. 날씨가 추워진 뒤 내가 또 그대의 마루에 오르고 그대의 정원을 돌아다니면 눈 속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사함의 정원에 대나무는 없지만 사함이 어려움을 겪고도 자신의 뜻을 잃지 않는다면 사함 스스로가 대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비유의 절묘함을 보여주는 사례는 공작관문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시골 사람이 코를 고는 장면을 연암은 이렇게 표현했다.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서 어떤 때는 토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휘파람 부는 것 같고 어떤 때는 탄식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우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불을 부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솥 안의 물이 끓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빈 수레기 덜컹하는 것 같고 숨을 들이 쉴 때는 드르렁 하며 톱질하는 소리가 나더니 내 쉴 때는 마치 새끼 돼지가 씨근대는 소리가 났다."

이런 연암의 글은 그가 활동하던 18세기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 시기 책을 읽어주는 사람, 직업적 필사가, 서점 등이 등장하면서 책의 내용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독자들은 평범한 자기네 이야기를 다룬 연암의 글에 특히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연암의 글을 모두가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정조는 연암의 글이 글 쓰기의 기본을 흔든다고 판단하고 패관소설과 잡문의 수입을 금지하는 등 문체반정을 일으킨다. 전아한 고문으로 글을 지어야 한다고 보았던 정조가 연암의 분방한 문체를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전호근 교수는 그러나 정조가 연암을 아주 미워하지는 않았으며 일종의 애증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연암의 글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쓴 농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극찬하기도 했다. 사실 연암은 마음만 먹었으면 왕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그에게 조정은 과거에 응하라고 권고했지만 분방한 연암은 과거시험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장남 종의가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보려 하자 그것마저 막아 버렸다. 연암은 그의 글만큼이나 호방하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것이다.   

"억지로 교훈 찾기보단 감정을 느끼는 게 중요"

전호근 교수는 2일 서울 마포구 민족의학연구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연암집에는 웃음과 눈물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연암집에서 억지로 교훈을 찾기보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_연암집을 평가해달라.

"조선 사대부의 일반적인 문집은 시, 상소문, 보고서 등을 많이 실은 반면 연암집은 산문이 많다. 열하일기 같은 본격적이고 방대하면서도 자세한 여행기도 연암집에서만 볼 수 있다. 연암집은 1805년 연암이 죽은 뒤 아들 종간이 편집한 필사본을 바탕으로 1900년대에 들어서 어렵게 간행됐다. 열하일기 등 연암집의 글이 오랑캐를 찬양했다는 이유 등으로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쉽게 묶을 수 없었다."

_연암이 지향한 가치관은 무엇인가.

"18세기 조선에서는 중세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새로 들어온 근대적 세계관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 때문인지 연암의 글 역시 부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 가령 1764년 지은 <초구기>에서 연암은 '명나라의 천자는 우리 임금의 임금'이라며 성리학적 사대주의를 드러냈다. 반면 열녀함양박씨전병서에서는 과부가 비참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남편 따라 죽지 못했다는 이유로 열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또 북학의서에서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 가는 사람에게라도 물어보라고 한다.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보자면 모르는 것은 도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지 행인에게 물으면 안 된다. 열녀 이야기나 행인에게라도 물어보라는 것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벗어난 그의 근대지향성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_연암에 필적할 문장가를 꼽는다면.

"연암 스스로 인정한 문장가가 있다. 그와 동시대에 살면서 함께 어울렸던 이덕무다. 두 사람은 글을 주고 받으며 문장을 가다듬었다. 이덕무의 글이 전통적인 문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자 연암이 적극 변호했다."

_연암집은 언제 접했는가.

"대학 다닐 때 연암집에 대해 알게 됐지만 강좌가 없었고 쉽게 익히기 어려웠다. 연암집이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 기왕이면 어려운 것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도전했다. 대학 4학년 때와 대학원 시절 한국고전번역원 교수로 있던 한학자 이진영 선생 집으로 찾아가 연암집을 공부했다. 낯선 한자가 많은데다 내용과 관련한 고사도 찾아야 했으므로 책 읽기가 매우 힘들었다." 
 

연암집을 읽으려면 

연암의 글을 모은 연암집은 한문으로 돼 있다. 따라서 원문으로 읽으려면 한문 독해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워낙 어려운 한자가 많기 때문에 웬만한 실력으로는 쉽지 않다. 그러나 훌륭한 번역본들이 많이 나와 있어 연암 글의 매력을 접하기는 어렵지 않다.



연암집 번역본으로는 한국고전번역원과 도서출판 돌베개에서 나온 것이 유명하다. 둘 다 한학자 신호열 선생과 그의 제자인 김명호 서울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연암집 가운데 열하일기만 따로 뽑아 별도의 번역본을 내기도 했다. 보리출판사는 북한의 리상호가 1955년 번역한 열하일기를 2004년 발행했다. 도서출판 돌베개는 2009년 김혈조 영남대 교수의 번역본을 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씨는 열하일기를 재해석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2003년 그린비출판사에서 출판했다.(박광희편집위원)
 
11.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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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6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6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담이와Anne 2011-03-09 11:40   좋아요 0 | URL
아, 연암선생님 글 참 좋군요.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