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 <기획회의>(291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나인호 교수의 <개념사란 무엇인가>(역사비평사, 2011)를 거리로 삼았다. 주로 개념사의 개념에 대해 정리하려고 했다. 책의 절반은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읽은지라 기억에 남는다. 옮겨오는 김에 오타도 수정해놓는다('1830년대'가 지면엔 '1930년대'라고 나갔다).
기획회의(11. 03. 05) 개념은 역사의 변화를 비추는 거울이다.
“개념은 알겠는데, 개념사는 뭐지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가진 독자라면 바로 펴볼 만한 책이 나인호의 <개념사란 무엇인가>(역사비평사)이다. “대체 개념사가 뭐예요?”란 질문을 서두에 걸고 ‘개념사의 개념’을 일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개념사란 말에서 혹 ‘라인하르트 코젤렉’이란 이름을 바로 떠올리는 독자라면 그래도 개념사에 대해서 좀 들어본 구석이 있는 경우인데(내가 그렇다), 그때도 요긴한 입문서의 출간이 반가울 것이다. ‘역사와 언어의 새로운 만남’(부제)의 자리에 합석하여 챙겨둘 만한 귀동냥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와 언어의 만남? 코젤렉은 아예 이렇게 규정지었다. “모든 언어는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고, 모든 역사는 언어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다.” 그러니까 역사와 언어는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샴쌍둥이처럼 항시적으로 서로 붙어 있다.
사전적인 정의를 인용하자면, “개념사는 언어와 정치․사회적 실재, 혹은 언어와 역사의 상호 영향을 전제한 채 이 둘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탐구하는 역사의미론의 한 분야이다.” 역사의미론의 전제는 언어가 역사적 실재를 구성한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해서 언어가 없다면 역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시각이지만 서구 역사학계에서 이러한 역사의미론이 ‘언어적 전환’과 함께 부상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그 가운데 특히 해석학의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 발전한 것이 바로 개념사이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란 이름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온다(이미 코젤렉이 편찬한 <역사적 기본개념>이란 방대한 저작의 일부가 국내에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다). 그래서 개념사에 대한 분과학문적 정의는 이렇다. “개념사는 1970년대에 독일에서 체계를 갖춘 이후 전세계적 연구 네트워크와 학술지를 갖춘 실험적 연구 분야로 성장하면서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일반 역사학의 새로운 전문 분과이다.” 특히 코젤렉이 기여한 분야는 ‘사회사적 개념사’이다.
‘개념사’가 ‘개념들의 역사’를 뜻하는 말이라면 개념사의 기본단위로서 개념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할 것이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일단 상식을 활용하자면, 개념은 단어이다. 혹은 단어들로 이루어진다. “개념사는 분석 대상을 하나의 개념이나 몇몇 유관 개념들로 한정하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 개념사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왜 단어사가 아니고 개념사인가? 심지어 코젤렉도 개념은 “단어에 포박되어” 있다고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유인즉 개념은 단어를 통해 표현되지만 단어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은 단어가 될 수 있지만, 역으로 모든 단어가 개념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어와 개념을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코젤렉의 말을 더 인용하자면, “단어는 사용되면서 명확해질 수 있다. 반면 개념은 개념이 되기 위해 다의적이어야 한다.”
다의적인 만큼 개념은 해석의 대상이다. 아니 ‘해석의 대상’ 그 이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의적인 개념을 일의적으로 정의하고자 할 때 논란과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자가 책머리에서 미리부터 이렇게 적어놓고 있는 이유이다. “개념의 정의는 오히려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논쟁을 낳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사회적 갈등과 투쟁이 개입되지요. 이처럼 개념은 정치․사회․이데올로기적 투쟁과 갈등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개념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 행위라고 할 수 있지요.”
개념과 단어의 관계가 정리됐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개념과 실재의 관계이다. “개념은 실재의 지표이자 요소”라는 게 코젤렉의 유명한 명제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개념이 실재의 지표란 말은 거울이란 말과 비슷하다. “개념이 한편으로 정치․사회적 사건이나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때의 그 거울이다. 이건 물론 어렵지 않은 생각이다. 한데, 개념이 실재의 요소란 말은 무슨 뜻인가. “개념은 정치․사회적 사건과 변화의 실제적 요소”가 된다는 말이다. 즉 현실의 무언가를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어떻게? 사람들은 개념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행동을 조직하고 감정을 표현하므로 개념은 정치․사회․역사적 실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념은 공적 논쟁에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표출하는 정치적․사회적 도구가 되기도 하고, 지배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되기도 하며, 번역을 통해 문화를 전위시키는 문화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미 개념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정치 행위라고 했는데, 보태자면 개념의 번역 또한 정치적 행위가 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것이 “개념사만이 갖는 독특한 공리”이다. 이 ‘독특한 공리’에 따라 개념은 그 자체의 고유한 역사를 갖는다. ‘개념=실재’라는 단순한 등식, 혹은 소박한 실재론이 일면적인 이유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근대 초 유럽에서 확립되었지만 ‘자본주의’ 개념은 1830년대에 가서야 등장한다. 반면에 ‘사회주의’란 용어는 18세기 후반에 벌써 나타나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출현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책은 1부 ‘개념사란 무엇인가?’와 2부 ‘여섯 개의 개념으로 근대 읽기’로 구성돼 있는데, 마치 ‘이론과 실제’ 같은 인상을 준다. 개념사의 구체적인 적용과 성과를 엿볼 수 있는 2부가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면, 이론적 측면에 관심을 가진 독자를 유혹하는 것은 1부에서 ‘개념사의 다양성’을 정리해주고 있는 장이다. <키워드>(민음사)의 저자인 ‘현대 문화연구의 아버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핵심어 연구도 흥미롭지만, 눈길을 끄는 건 코젤렉의 연구를 더 발전시킨 그의 제자 롤프 라이하르트의 ‘사회사적 의미론’과 브라질의 역사가 호아오 페레스의 ‘비기본개념의 개념사’이다.
특히 페레스는 코젤렉의 기본개념들이 “언어적 논쟁의 형태로 공적인 무대에 등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겪은 일련의 경험들을 제외시킨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그런 관점에서 페레스의 관심은 지리적으로 비유럽적이고 사회적으로 소수자들의 하위문화적 특수성을 포괄하는 개념사를 지향한다. ‘비서구 사회의 개념사’이면서 ‘아래로부터의 개념사’이다. 국내에서도 한림과학원의 주도로 ‘한국개념사총서’가 나오고 있는 만큼 우리의 개념사 방법론에 대해서도 한번쯤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개념사란 무엇인가>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으론 멜빈 릭터의 입문서 <정치․사회적 개념의 역사>(소화)가 있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시리즈와 함께 챙겨두어야 할 책은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문학동네)이다.
11. 03.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