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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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소설은 그가 즐겨 사용한 상징인 미로와 같이 독자들을 혼란 속에 몰아넣습니다. 『픽션들』은 그 어떤 철학서적보다 난해하고 어렵죠. 보르헤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스핑크스처럼, 자신의 독자에게 알쏭달쏭한 말로 질문을 던집니다. 보르헤스는 원래 은유와 상징, 암시를 이용해 죽은 은유와 같은 일상 언어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수수께끼와 같은 이유는 그가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단편소설 속에도 수많은 상징과 은유, 낯선 조합으로 이루어진 개념들을 삽입했기 때문이죠. 사실 보르헤스의 소설은 그의 말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독자가 그의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만나는 독자 스스로를 향한 낯선 질문 때문에 난해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픽션들에 수록 된 단편중 「바빌로니아 복권」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서평을 올려 봅니다.

 

 

「바빌로니아 복권」의 배경인 ‘바빌로니아’는 성서에 등장하는 바벨탑이 세워진 도시로 바벨의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시뮬라르크가 지배하는 세계이죠.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총독과 노예, 감옥생활까지 전능함과 치욕을 경험하며, 인생의 바닥부터 윗세계의 온갖 경험들을 하며 살아온 한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펼쳐집니다. 현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자신의 몸에 주홍빛으로 새겨진 두 번째 글자‘베트’의 두가지 속성에 대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주홍색 문신은 19세기 미국 작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소설 『주홍글자(The Scarlet Letter)』를 연상하게 합니다! (맞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전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헤스터는 간통죄로 평생 달고 다녔던 간통(adultery)을 뜻하는 주홍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다니는데 이후,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진실함과 선한 성품에 점차 마음을 움직여 이 글자의 의미를 천사(angel)를 뜻하는 ’A'로 인식하게 됩니다.

 

 

 

찢어진 내 망토사이로 배에 새겨진 주홍빛 문신이 보인다. 이것은 두 번째 글자인 ‘베트’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이 글자는 내게 기멜을 새기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지만, 알레프를 새긴 사람들에게는 나를 종속시킨다.

 

 

 

이처럼 이 현자의 몸에 새겨진 주홍 글자 ‘베트’역시 두 가지 속성을 가진 글자입니다. 이 글자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죠. 이와 같이 그는 합리성을 믿는 그리스인들은 모르고 있는 ‘불확실성’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헤라클레이데스가 말한 피타고라스의 환생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이 순환하는 잔인한 운명의 원인인 복권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된 복권은 원래 ‘ 그 어떤 도덕적 가치도 없었고 단지 인간의 희망만을 겨냥한’ 시시한 복권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누군가가 복권의 속성에 ‘불운’의 요소, 두려움의 속성을 더하자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이 복권에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이 모험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겁쟁이로 간주되기 시작했죠. 이 복권을 발급하는 ‘회사’는 인간이 가진 공포와 희망을 이용하는데 능한 종교처럼 바빌로니아 시민들의 운명까지 휘두르는 거의 신의 능력과 가까운 막강한 힘을 갖게 됩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논리와 심지어는 대칭까지도 매우 좋아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행운의 숫자들은 돈으로 계산되고, 불운의 숫자들은 구금 날짜로 계산된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좋아한 탓에 ‘행복’이나 ‘불행’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조차도 수치화 시켜버렸습니다. 이는 그들의 논리성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 낱 복권이 그들의 인생의 형태와 방향을 결정짓게 된 것이죠.

 

 

대부분의 경우, 어떤 행복들을 단지 우연의 소산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결과들을 과소평가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회사’의 요원들은 암시와 마술을 사용하곤 했다. 그들이 어떤 길을 밟았는지, 그리고 어떤 음모를 짰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그들은 우연의 지시를 따르고…복권의 미로와 같은 법칙을 연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것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회전하는 천체에 대하여 연구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바빌로니아 시민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복권의 추첨 결과는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회사’의 요원들에 의해 치밀하게 ‘조작된’ 우연의 결과입니다.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공포, 목숨까지 바친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그 동일성의 원리에 아무런 ‘합리적’기반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복권제도가 가진 이면적 속성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죠.

 

 

‘회사’의 자애로운 영향 아래서 우리들의 관습은 이제 우연으로 가득하다.…혹자는 ‘회사’가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 삶 속의 신성한 혼돈은 단순히 물려 내려온 것이며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무례하게 강조한다.

 

 

 

‘우연’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닿을 수 없는,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회사’가 ‘바빌로니아’라는 세계에 주입한 우연적 사고방식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행운과 불행, 예기치 못한 사건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와 제도를 저항할 수 없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죠. 마찬가지로, ‘회사’의 지배체제 또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데 유용했습니다. 그들의 복권제도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그의 저서 『시뮬라시옹(Simulation)』에서 말한 미국의 디즈니랜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디즈니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디즈니랜드의 상상 세계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실재의 허구를 미리 역으로 재생하기 위하여 설치된 저지기계이다…즉 <실제의> 세상이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진정한 유치함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Baudrillard, 44)

 

 

 

바빌로니아의 복권 제도는 ‘회사’라는 한 지배체제가 통치를 위해 고안한 질서의 ‘임의성’을 숨기기 위한 ‘조작된 우연’ 즉, 하나의 교묘한 장치입니다. 신과 같은 ‘회사’가 세상에 도입시킨 혼돈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진실을 볼 수 없도록 방해합니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소설의 말미에서 제기된 문제로, 이 질서를 만든 ‘회사’의 존재 여부와 그 기원조차 모호하다는 것이죠. 사실상 이 가공의 질서는 근원조차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인 것입니다.

 

 

 

제목부터 그 유사성을 암시하고 있는 픽션들 중 수록된 가장 유명한 작품「바벨의 도서관」과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동일하게 디스토피아(dystopia)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의 의미와 우주의 질서를 파악하고자 하지만 우리 눈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조작된, 혹은 가정된 허구의 세계일뿐이라는 거죠. 인간이 고안한 이 허구의 세계는 단순히 진리를 가리는 어둠일 뿐 아니라「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나타난 것처럼 인간의 생명과 운명까지 위협하는 것이죠. (으아, 쓰다보니 너무 회의적인 리뷰가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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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시 no.6 #6 무한도시 no.6 6
아사노 아쓰코 지음, 양억관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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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순간 서로의 마력에 이끌리고, 겨우 한번 봤지만 운명적 만남임을 확신하는 신통한 예지력과 불타는 사명감을 가진 두 주인공! 일본 애니적요소를 듬뿍 버무린 오글거리는 대사 ,그 누구에게나 항상 매력을 어필하는 두 소년간의 므흣한!! 애정 반응! 게다가 셰익스피어 극과 같은 고전의 심오함과 비극적 애수가 함께 녹아있는 미래소설!



얼핏 보면 다소 유치찬란 소년들의 영웅담이고 한 발짝 들여다 보면, 철학적 담론들로 무장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푸코의 판옵티콘 해석 조지 오웰의『1984』 연상시키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보입니다!



두둥!! 그럼 여기서 독자는 이런 관문에 이르게 될테죠.☞ “이건 뭐임?” 말하자면 “이 책을 가볍게 읽고 말 것인가? 아님, 좀 젠체하며 유식한척하며 읽을 것인가?” 게다가 2권과 3권 마지막 장 뒤에는 직접 작가가 나서서 ‘빈곤, 전쟁과 기아’, ‘부의 불균형’, ‘테러와 살인,폭력’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죠! 우리가 이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게 되는 것이 작가는 이러한 문제들을 소설속에 녹여놓고 이것들을 바라보는 두주인공들의 상이한 반응과 이 문제인식을 통해 나아가는 그들의 행동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때는 No.6 에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덕택에 온실의 화초처럼 귀하게 자랐지만 극악범죄자 신분으로 도주 중인 생쥐를 도와준 혐의로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위의 세계에서 쫓겨나고 말죠. 그의 천성적인 착함이 바로 그를 곤경에 쳐하게 만든 것이죠. 이런 선한 마음에, 매력적인 은빛 머리칼과 예쁜 눈을 가진 이 아이, 이름도 참 예쁜 시온! 사실 그의 이름 이 시온은 하나님께서 지정한 거룩한 성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하심이 있는 성의 이름입니다. 즉 유대 민족의 이상향이라고 볼 수 있죠. 이 평화로운 이름을 가진 인물답게 여린 몸과 마음을 가졌음에도, 시온은 평화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줄아는 사려 깊은 아이입니다. No.6의 거대한 음모와 감시체제, 지배 야욕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고 끔찍한 기생벌의 존재를 알게 되는 시온은 어둠에 가린 그 악의 실체를 향해 정의감의 손을 뻗습니다. 쭈욱-! ^^;; 시온의 심성답게 그의 유토피아 지향 방식도 디스토피아 자체를 폭력과 살상으로 파괴하고 무찌르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고담시의 수호자 배트맨이 영화 내내 적들의 목숨에는 해를 가하지 않았던 것처럼요.(그냥 한방맞고 벌러덩 자빠지거나, 다리가 부러지거나, 수갑에 채워 경찰서 앞에 고스란히 배달해준 정도?흐흐) 시온은 편안한 울타리를 벗어난 후에야 알게 된 험한 세상과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도 여전히 호기심과 희망을 가진 존재죠. 그러나 이런 시온의 행동과 말들은 생쥐에게 철없고 무지한 것으로 여겨지죠. 한 마디로 ‘뜬 구름을 잡는 소리’이며, ‘뻘짓’이라는 겁니다. 대신 이름 처럼 쥐새끼...처럼 약삭빠른! 생쥐는 언제나 빈틈없는 계산을 거쳐 일들을 계획하죠. 달달한 시온처럼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보다는, 까칠한 마초적 냄새를 풍기며 상대를 이용하기위해 매수하고, 유혹하고 협박합니다. 그에게 세상 인간들이란 믿을 놈 하나 없고, 기댈 놈 하나 없기 때문에 철저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무장하고 단련하려고 하죠. 그는 명민한 두뇌와 더불어 민첩성과 강함을 갖춘 체력을 가졌지만 인문고전을 통해 뭘 배웠는지 인문학적 감수성과 인간애는 좀 덜 한듯합니다. 인간과 삶에대한 애정을 갖기엔 그가 겪어온 삶이 너무나 메마르고 잔인했기 때문이겠죠. (그는 아마도 셰익스피어 비극에 녹아있는 허무주의와 인간언어의 타락, 비애감에 매료된 듯합니다.) 이런 그에게 던지는 시온의 숱한 질문들과 요상스런 행동은 점점 생쥐의 닫힌 맘을 열어갑니다. 시온의 무한한 애정이 생쥐의 차가운 마음의 벽을 허물어가기 시작한 것이죠. 동시에 시온은 유약한 맘과 몸을 단련시켜가며 현실적 대안에 눈을 뜨고 있네요.





네! 이 소설을 하나의 미래세계의 영웅담이라고 본다면 둘 각자는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인물들임에 동시에 영웅적 특성을 나눠 가진듯합니다. 시온의 사랑과 배려 그리고 이상주의! 생쥐의 이성적 판단능력,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과 현실주의! 아직 완결까지 읽은 것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두 주인공들이 서로 닮아가면서 온전한 영웅의 모습을 갖출 듯 합니다. 그리고 깨알같이 끼어드는 로맨스의 진행도 짐작이가구요. 로마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늑대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쌍둥이 형제처럼 개 젖을! 먹고 자란 개장수와 두 주인공의 삼각관계말이죠... 또한 에리우리아스 여왕과 왠지 관련이 있을 듯한 최첨단 기술?로 겁나게 아름다워진 사후의 운명도 기대되구요.(저의 방정맞은 추측이랍니다.)



아, 제가 잡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6권까지 읽은 독자들은 교정시설에 침입한 두주인공들의 활약상을 기대해야겠네요! 뿅.





결론은...가볍고 진지하게? 또 재미나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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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민음사 모던 클래식 47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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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탈, 그리고 영원한 타인들과 살아가기

바흐의 음악관처럼 악보에 충실하게 제대로 쳐진 건반으로,  제대로 된 음이 발생되면 연주는 악기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바흐의 음악관을 해석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대로 이미 확립된 원칙속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는 건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온전한 음악으로 빚어지는 건가?


결국 나의 삶은 진정한 내가 될때,




나만의 본질적인 '음'




즉, 내가 갖고 태어난 나의 '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선율 같은 하나의 온전한 노래로 온전한 나의

삶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는

여기에 필연적으로 덧붙여... 협주곡이 되어야 한다.




하나의 음만으로는 온전한 음악이 될 수 없으니.





 




인생이라는 악보위에서 우리는 갖가지 음표들의 본연의 음들과 어우러져야 한다. 그들과 음을 잇고 박자를 맞추고 정해진 강약과 템포에 맞추어 충실히 하나의 노래로 이루어 가야한다..







안타깝게도 인생이라는 악보에서는 그 아름다운 협주곡을 이루기란 너무나 어렵다. 왜냐 우리는 그 강박적인 질서를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게 모두의 행복을 위한 정해진 자리일지라도말이다. 끊임없는 불협화음과 음이탈로 우리의 삶은 늘 나와 타인간의 삐걱댐으로 상처와 진물로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심지어 한 지붕아래 살 냄새를 섞고 사는 가족들 간에도 그 불협화음은 존재한다. 완전히 타인이라고 부르기엔 때론 꺼림칙하도록 밀접한 관계의 '가족'이란 그 이름 때문에 더 괴로운 그 불협화음. 차라리 남이라면 좋으련만 내 가족이기 때문에, 지리하도록 얽혀있는 내 가족이기 때문에 ..


이 소설에는 많은 부부들이 등장한다. 토머스와 토니, 하워드와 클로디어, 레오와 수지, 브래드쇼 부부까지. 이 부부들 사이에선 공통적으로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있다. 더 슬픈건 그 불협화음속에 익숙해져버렸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상대방에 대한 기대나 소망을 품지 않는다.




두 사람사이의 공기가 떨리는 듯 하고, 그 분위기는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어두운 씨앗 같다. 그는 무언가가, 사랑이든 폭력이든, 주어지기를 기다린다.

.  

그는 아내의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는다. 끔찍한 공허감이, 성큼성큼 다가와, 차갑게 그를 감싼다.   

.  

이미 틀어져버렸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비스킷의 달콤함은 더 이상 느낄수없다. 그는 차가 식게 내버려둔다. 해가 진후에 집으로 들어와 그대로 싱크대에 부어 버리고, 비스킷은 깡통 안에 다시 넣는다.


 

내게는 이 소설 속에서 브래드쇼 부부들의 바로 이 모습이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비극적인 장면으로 다가왔다. 좋아하던 비스킷의 달콤함이 무뎌지듯 상대에 대해 차갑게 식어버린 그 애정. 인생의 황혼의 끝에선 부부. 오랜 세월 함께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며 모진 풍파의 세월을 견뎌온 이 부부의 삶의 막바지 모습이 결국 이런 것이라니. 아무리 부부지만 결코 한 몸이 될 수없는 영원한 타인에 대한 요원한 거리감, 소외감.


 

우리는 사실 타인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다. 나의 존재감은 상대방에 의해 자극 되고 발견된다. 그러나 그 상대가 익숙해지면 즉 상대가 나의 모든 것에 충실히 반응하는 백지 상태가 아니라면 점점 내 속의 나와 상대방의 자아가 충돌을 빚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서로에 대한 지루함과 체념을 낳는다. 우리 모두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완 부인은 자신의 모든 말에 순진하게 반응하는 손녀에게 애정을 쏟고 토마스는 클라라의 엄마.. 비올라를 켜는 그녀에게 끌리고.. 토니는 적극적인 젊은 교수의 유혹에.. 흔들린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아직은 알고 싶고 맞추어가고 싶은 여지가 많은 다른 이에게.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애정일까? 브래드쇼씨의 말대로 익숙해진 물건을 다른 새것으로 바꾸고 싶은 그 욕망이 과연 맞는걸까?




이 소설의 중심을 이끌어 가는 부부는 토머스와 토니이다. 토머스는 회사 일을 접고 한 대학에서 학장을 맡은 교수 아내 토니 대신 딸을 돌보며 살아간다. 그는 종종 날짜를 잊을 정도로 집안에서의 무료한 생활, 별 의미 없는 하루에 무뎌진 남자다. 그는 그 무의미한 삶의 공허함과 결핍을 예술적 에너지로 채우고 싶지만 늘 그 예술이라는 것은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아내의 성공이 확실해져갈 수록 정작 자신의 입지는 불안하게 느껴지고 인생이라는 무대 위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닌 늘 연극 관객의 입장으로 살아간다. 그는 삶이 무료하다, 힘들다 하면서도 어쩌면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에 직면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가 뭘까?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도 자신이 누군지 여전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예술을 하는 이들을 늘 동경해온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혹은 하나의 목적에 예술혼을 불태우고 자신의 삶과 예술이라는 가치를 하나로 모으고 살아가는 그들을, 그들의 몰입의 순간을, 그들의 열정을 흠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런 삶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토니 역시 동료에 의하면 바이러스 같다는 문학을 전공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문학의 예술성과는 동떨어져있고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와 지위에 부응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지쳐있다. 삶에 대한 절실함과 생명력을 잃어버린 주인공들의 삶과 그들의 지루한 가정사의 세세함을 작가는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때론 그 모든 묘사와 말들 속에서 독자도 함께 지쳐간다.




사실 내게 이 소설이 버거웠던 것은 소설에서 주로 그들의 삶은 아직 이십대 대학생인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의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사실적이라도 느낄 수 있는 건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아직 겪어보지 않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미리본것이  조금은 괴로웠다.




모두가 이렇게 살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일상과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런 삶의 시점을 맞이하기전 나는 어떤 삶을 계획하고 어떤 삶을 그려야할까? 내안에 무엇으로 어떤것을 채워가야 할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토머스부부는 딸아이의 아픔으로 인해 다시 서로를 돌아보게 되고 서로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다. 결혼 전 달콤함, 설렘 영원할 것 같은 그 로맨스 후, 함께 살아가게 된 타인들은 결국 이렇게 지루한 싸움 끝에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이해하므로 진정한 사랑을 빚어가게 되는 걸까?




영원한 타인의 벽은 결국 닮아감과 이해함으로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걸까...

협주곡이 아닌 변주곡으로?

 

당신과 나의 음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충돌들이 빚어낸 새로운 음악..

협주곡이 아닌 변주곡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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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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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낯설지만 결코 친밀할 수도 없는...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사실이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그 ‘죽음의 때’이다. 하루에도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TV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무미건조한 톤으로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듣고 혹은 가끔 주변 사람들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는다. 때론 그 죽음이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어떤 이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때론 가볍고도 갑작스럽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 죽음 앞에 진지해지기가 어렵다. 나의 죽음이란 언제나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생각해보면 우린 절대 그 죽음에 대해 익숙할 수도 없고 또 부인할 수도 없다. 생각해보면 지금 현재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해져본 적이 없는듯하다.



소설 알리스는 큰 굴곡이나 극적인 장치 없이 그저 흘러가는 줄거리 속에 주인공 알리스를 둘러싼 주변 이들의 죽음 사건으로 이루어져있다. 마치 진짜 우리의 인생처럼... 사실 우리의 삶이란 드라마나 영화처럼 사실 그렇게 극적이지 않으니까. 별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삶에서 어느 순간 끼어드는 죽음의 그림자. 이 소설은 바로 그 점을 사실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알리스 그녀의 인생에서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었던 이들이 하나 둘씩 그녀를 떠나갈 때마다 그녀는 소리 내어 한 번 크게 우는 모습도 없이 살아남은 자로 여전히 세상에 남겨진 자로 떠나간 이의 흔적들을 되새기며 살아간다. 소설 속 죽음의 장면 속 계속 비집고 들어오는 유행가소리들, 변함없이 각자의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소중했던 한 사람의 죽음 후에도 여전히 세상은 그 시간 위를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이따금 그들의 의식 속을 파고드는 떠난 이에 대한 기억과 흔적을 보듬고 또 그렇게 살아있는 자의 생활을 살아간다.


결국, 이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살아있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계속 혼자 걸으려고 했는데, 아직 똑바로 걷지 못하고 삐뚤빼뚤 걸었다.’(p.14)


미햐는 죽어가고 있고 미햐가 세상에 남긴 또 다른 생명, 그의 아기는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인생이라는 무대는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면서 수녀는 방에서 나갔다. 저렇게 환자 얼굴이 마르면 오래가지 않거든요.’(p.18)


‘그리고 움직이는 숫자들을 심사숙고하듯 환자 기록표에 적어놓고는 도망치듯 병실을 나가버렸다. 간호사는 자기가 체온을 재는 동안 미햐가 숨을 거둘까봐 겁을먹은 것 같았다.’ (p.27)


누군가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단정 짓고 예견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고 또 누군가에는 무서울 만큼 낯선 것이다.


알리스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맞닿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삼촌의 죽음 이후 알리스가 태어났으니까.


소설 속 그녀의 마지막 연인 라이몬트 죽음이외에 알리스는 나머지 넷의 죽음을 전부 소식을 통해 듣거나 이야기를 통해 ‘전해’들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죽음을 마주하는 그런 방식 그대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은 알리스를 통해 연인 라이몬트의 죽음을 전해듣게 된다. 죽음이라는 것, 그 의미,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그 심정... 뭐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기엔 참 복잡하다. 작가 유디트 헤르만은 우리가 느끼는 그 죽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막장 드라마속 백혈병, 위암 같은 그런 죽음의 그런 극화된 모습도 아닌..그냥 있는 그대로.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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