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일부 오탈자를 수정했다). 내주에 수능시험도 있는지라 최근에 읽은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웅진지식하우스, 2009)을 잣대로 삼아 학생들의 '독서력'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았다(사이토 다카시는 일본의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저명한 학습법 멘토로서 국내에도 수십 권의 책이 소개돼 있다). 공부와 독서를 양자택일 관계로 만드는 현행 입시제도에 대해서 재고해보자는 제안도 담고 있다. 대학에서는 독서를 장려하고 독서력을 길러주는 강좌와 교육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으로서 독서력이 '공부'의 핵심이라면 말이다.  

교수신문(09. 11. 02) 필독 리스트와 독서력! 

해마다 비슷한 통계가 나오지만, 작년 한국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은 11.9권이었다. 한 달 평균 한 권 정도의 책을 읽는 셈인데, 주로 읽는 책이 소설(21.4%)과 수필/명상집(7.4%), 경제/경영서(5.9%) 순이었다. 대학생이라면 사정은 좀 나을지 모르겠지만, 평균적으로 한국인의 독서량은 ‘경제수준에 걸맞은 문화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민족의 유전자엔 강한 문화적 기질과 욕구가 있다”고 한다면 독서에 대한 욕구 또한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혹 그러한 기질과 욕구를 억압하는 잘못된 사회적 제도와 여건에 있는 건 아닐까.

올해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예년의 경우 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은 하고 싶은 일들 가운데 하나로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것’을 꼽았다. 학교시험과 수능시험 등에 매달리다보니 정작 책을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게 학생들이 현실이라는 얘기다. 사정은 일본도 비슷한 모양이어서 교육심리학자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웅진지식하우스)에 보면, 저자 또한 독서가 부정되는 입시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아예 독서력을 묻고 평가하는 것이 입사시험이나 대학입시의 중요한 전형방식이 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시험방식이 공부 방식을 결정하는 현실에서라면 그의 제안을 우리의 처지에 맞게 적극적으로 고려해 봄직하다. “대학, 특히 문과 계열의 공부는 책을 읽는 것이 핵심이다. 설사 이과 계열이라도 논리적인 사고를 단련하는 데 독서는 필수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높은 수준의 독서력을 갖추고 있으면 그만이다.” 같은  그의 주장을 우리도 반박하기 어렵다면 말이다.

교육 현장에서 사고력과 상상력은 언제나 강조돼 왔다. 하지만 독서력의 경우는 어떨까.  독서가 자아 형성을 위한 양식이고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로서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시켜준다고 보는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력 형성’이 학교교육의 최대 과제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우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교육의 목표와 과제에 대해 다시 설정해볼 필요가 있다. 공부와 독서를 따로 분리시키는 시험방식을 고수하면서 독서를 권장하는 것은 입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궁극적으론 학생들을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책을 안 읽는 인간과 책을 못 읽는 인간.”(김경욱, ‘위험한 독서’)이란 분류법에서 못 벗어나게 만들 것이다.   

물론 제도적인 차원의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장에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서력의 기준을 제시하고 독서를 장려하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사이토 다카시는 ‘문고본 100권과 신서본 50권’을 독서력의 기준으로 제시하는데, 우리의 상황에 맞게 바꿔보자면 ‘문학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 정도가 된다. 여기서 ‘문학작품’은 가벼운 읽은 거리가 아닌 ‘고전’ 수준의 작품을 말하고, ‘교양서’는 과학교양서를 포함한 인문·사회과학서적을 가리킨다. 이런 분량의 책을 4년 정도의 기간 안에 독파하는 것이 독서력 형성의 지름길이라고 사이토 다카시는 말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각 대학별로 필독 고전의 리스트는 많이 제시하고 있다. 다만 독서를 학생들의 자발적인 의지에만 내맡겨두는 것은 효과가 적지 않나 싶다. 관련강좌를 개설하거나 여러 유인책을 통해서 학생들의 독서의지를 적극적으로 북돋아줄 필요가 있다.

사이토 다카시의 강의 사례도 그런 경우다. 그는 자신의 강의실을 학생들이 ‘동아리’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고 한다. ‘독서부’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에게 지도를 받으면 꽤 높은 수준의 책도 읽게 되더라는 것이 그의 경험담이다. “내 강의실은 운동부 학생들로 붐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책을 거의 잡아본 적이 없다. 그래도 역시 대학생인 만큼 나와 함께 독서토론회를 하다 보면 석 달 안에 도스토옙스키나 니체 등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일주일 안에 너끈하게 읽게 된다.”

독서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독서력이 붙고 독서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 대학에서의 공부는 평탄해진다. 다양한 수준의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독서력을 지속적으로 단련시켜나가는 일이 남을 뿐이다.

이 독서력의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 음식에 패스트푸드와 풀코스 요리가 있는 것처럼 책에도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충분한 책과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그리고 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건너뛰면서 읽어도 좋은 부분과 천천히 정독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독서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이러한 단계까지 거친다면, 마지막으론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수준이 된다. 여러 권의 책을 기어를 바꿔가면서 읽을 수 있다면 대학생의 독서력으론 더 바랄 게 없다. 그들은 사회인이 돼서도 꾸준히 자신의 독서력을 단련하고 세계관을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인의 연평균 독서량도 조금 다른 수치를 보여주게 되지 않을까. 독서강국으로서의 문화국가를 잠시 꿈꾸어본다. 

09.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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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1-02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한국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은 11.9권이었다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네요.하지만 출판사 3만개중 91%가 일년에 책 한권 출간하지 못하는 현실을 볼때 대한민국이 독서 강국이 되기는 참 요원해 보입니다.

로쟈 2009-11-02 23:00   좋아요 0 | URL
독서강국의 지표라면 최소 일주일에 한권은 돼야 할 텐데요.^^; 그래봐야 하루 30분 정도의 독서시간입니다...

펠릭스 2009-11-03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에게 맞는 독서법도 중요할듯 해요

로쟈 2009-11-03 20:29   좋아요 0 | URL
그걸 찾아야 하지요...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의 칼럼이 얼마전부터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으로 바뀌었다.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서 다시 '전공'인 말들의 세계, 언어학의 세계로 돌아온 것.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을 읽고서 '아, 고종석!'이라고 무릎을 쳤던 나로선 반가운 일이다. 이런 칼럼이 일간지에 연재된다는 사실 자체도 고무적이고. 그가 세 차례에 걸쳐 나눠 실은 '번역이라는 고역'을 옮겨놓는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용어들을 소개하면서 용어번역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숙고해보도록 한다.    

한국일보(09. 10. 12) 번역이라는 고역(苦役) (上)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ㆍ1903~1978)라는 일본인 언어학자가 있습니다. "고바야시 히데오? 들어본 이름이군!"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고바야시 히데오는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가 아니라 예술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ㆍ1902~1983)이기 쉬울 거예요. 성(姓)은 같지만, 이름의 한자가 다릅니다.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름이 닮은 한 살 위의 평론가만큼 20세기 일본 지성사를 요란스럽게 살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언어학사 책 한 구석에 흐릿한 윤곽으로 웅크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를 일으켜 세워 양지바른 곳으로 불러내 봅시다.

스물다섯 살 때인 1928년,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CLG)를 일본어로 옮겨 출간했습니다. 고쇼인(岡書院)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이 일본어판 CLG의 표제는 <겐고가쿠겐론(言語學原論)>이었습니다. <겐고가쿠겐론>은 1916년 로잔과 파리에서 초판이 나온 CLG의 첫번째 번역본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어로 쓰인 CLG의 첫 번역본은 일본어판이었습니다. 오늘날 CLG는 한국어를 포함한 스물 남짓의 자연언어들로 번역돼 있습니다.

유럽어 번역본이 일본어 번역본보다 시기적으로 늦은 데는 유럽인들이 일본인들보다 프랑스어를 읽기가 더 쉬웠다는 사정도 개입했겠습니다만, 그 사실 때문에 고바야시 히데오의 높은 안목을 지나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서가 나오고 10여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프랑스어권 바깥의 어느 언어학자도 굳이 번역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CLG가 일본인 청년 고바야시의 눈에는 단번에 '고전(古典)'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겐고가쿠겐론>은 1939년 출판사를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으로 옮겼고, 1972년 고바야시가 직접 개역(改譯)하면서 표제를 원서 제목에 맞추어 <잇판겐고가쿠고기(一般言語學講義)>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고바야시 히데오 이래 수많은 CLG 번역자들은 소쉬르 고유의 프랑스어 용어들, 곧 우리가 지난번에 살폈던 '랑그' '파롤' '랑가주' '시니피앙' '시니피에' 따위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맞춤한 역어(譯語)를 찾기 힘들다는 핑계로 우리처럼 프랑스어 단어를 그대로 썼을까요? 아니면 억지로라도 그 대응어를 찾아냈을까요? 역자들 대부분이 그 용어들에 대응함직한 말을 제 모국어에서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그 애씀의 과정은 소쉬르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론의 영역을 넓힌 이들이 새로운 개념을 담기 위해서 고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새 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적 복제자'(replicator)라는 개념을 담기 위해 '밈'(meme)이라는 말을 새로 고안해냈습니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경우는 이미 사용되고 있는 일상어에 특별한 뜻을 담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랑그'(langue), '파롤'(parole), '랑가주'(langage)가 전형적입니다.

일상 프랑스어에서 '랑그' '파롤' '랑가주'는 평이한 말입니다. '랑그'는 그저 '언어'라는 뜻입니다. 랑그 마테르넬(langue maternelle)은 '모국어'이고, 랑그 알망드(langue allemande)는 독일어입니다. '파롤'은 그저 '말'이라는 뜻입니다. 파롤 드 디외(parole de Dieu)는 '하느님의 말씀' 곧 복음(福音)입니다. '랑가주'는, '랑그'보다 조금 무거운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역시 '언어'라는 뜻입니다.

랑가주 나튀렐(langage naturel)은 '자연언어'이고, 랑가주 아르티피시엘(langage artificiel)은 '인공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의 쓰임새가 다르기는 하지만, 본디부터 그 말들에 각각 언어의 추상적 측면, 언어의 구체적 측면, 언어활동 전체라는 뜻이 또렷이 담겼던 것은 아닙니다. 이 말들에 그 특별한 개념들을 담은 것은 소쉬르지요.

이 때, 프랑스어의 일상어 단어들(여기선 '랑그' '파롤' '랑가주')에 거의 대응하는 일상어 단어들을 갖춘 자연언어로 소쉬르 용어를 옮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해당 일상어를 그냥 가져와도, 어차피 CLG에 소쉬르의 설명이 있으니, 독자들이 오해할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스페인어가 그런 경우입니다. 소쉬르의 '랑그'를 '렝과'(lengua)로, '파롤'을 '아블라'(habla)로, '랑가주'를 '렝과헤'(lenguaje)로 옮기는 데, 스페인어 배경의 언어학자들은 거의 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만 해도 일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일상 이탈리아어에는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링과'(lingua)와 '링과조'(linguaggio)가 그것입니다. 그러니 소쉬르의 '랑그'를 '링과'로, '랑가주'를 '링과조'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파롤'에 있습니다. 물론 일상 이탈리아어에는 일상 프랑스어 '파롤'에 얼추 대응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파롤라'(parola)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 '파롤라'는 그저 '말'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낱말' 곧 '단어'(프랑스어의 mot)라는 뜻으로 더 자주 씁니다.

소쉬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프랑스어 '파롤'과 이탈리아어 '파롤라'는 가치(valeur)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CLG에는 '단어'(mot)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그러니, '파롤'을 '파롤라'로 옮겨 버리면, 프랑스어 '모'(motㆍ단어)를 번역할 말이 없어집니다. 이런 혼돈을 무릅쓰고 소쉬르의 '파롤'을 '파롤라'로 번역하는 이탈리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탈리아 언어학자들은 소쉬르의 '파롤'을 고스란히 가져와 그냥 '파롤'이라고 씁니다. 본문의 다른 단어들과 체(體)를 달리해, 외국어 단어라는 것을 드러내줄 때가 많지요.

프랑스어 '랑그'와 '랑가주'의 (형태적) 구별이 없는 자연언어의 경우, 소쉬르가 특별한 의미를 담은 이 두 단어를 구별하는 것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영어가 그렇습니다.(일본어나 한국어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는 둘 다 일상 영어의 '랭귀지'(language)에 해당합니다. 웨이드 배스킨(Wade Baskin)이라는 언어학자는 CLG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랑그'를 '랭귀지'로, '파롤'을 '스피킹'(speaking)으로, '랑가주'를 '스피치'(speech)로 일관되게 옮겼습니다. 로이 해리스(Roy Harris)라는 언어학자의 전략은 전혀 달랐습니다. <소쉬르 읽기(Reading Saussure)>라는 단행본 소쉬르 연구서를 내기도 한 해리스는 CLG를 영어로 옮기면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 할 '랑그'를 그때그때 맥락에 따라 달리 번역했습니다.

소쉬르가 특별한 의미를 담은 '랑그'는 '랭귀지 스트럭처'(language structure), '링귀스틱 스트럭처'(linguistic structure), '링귀스틱 시스템'(linguistic system) 따위로 옮긴 반면에, 일상적 의미의 '랑그'는 앞의 관사를 변화시켜 가며 '랭귀지'로 옮겼습니다. '랑가주' 역시 그저 '랭귀지'로 옮겼지요. 해리스는 또 '랑가주'를 '스피치'로 옮긴 것(배스킨이 그랬지요)이 엄청난 오역이라고 공박하면서(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들도 공감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스피치'를 '파롤'의 역어로 삼았습니다. 해리스의 주장과 실천이 그의 옳음을 증명해주지는 못하지만, 번역이라는 행위의 어려움을 증명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무런 선례의 혜택도 입지 못한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 용어들을 뭐라 옮겼을까요? 그는 '랑그'를 '겐고(言語)'로, '파롤'을 '겐(言ㆍ말)'으로, '랑가주'를 '겐고가쓰도(言語活動)'로 번역했습니다. 또 '시니피앙'은 '노키(能記)'로, '시니피에'는 '쇼키(所記)'로 옮겼습니다. 고바야시의 선례를 따라 한국어판 CLG(들)도 '랑그'를 '언어'로, '랑가주'를 '언어활동'으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각각 '능기'와 '소기'로 옮겼습니다. 한국어판에서는 '파롤'을 주로 '화언(話言)'이라 옮기는데, 이 말 역시 일본식 조어(造語) 냄새를 풍깁니다. 게다가 고바야시의 '겐'이 일상어인 데 견주어, '화언'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너무나 먼 말입니다. '화언'은 소쉬르가 '랑그'와 대립시켜 거론한 '파롤'의 역어로밖에 쓰지 않는 말이고, 그래서 프랑스어 '파롤'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말입니다.

청각이미지와 개념을 각각 가리키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역어들은 더욱 그렇지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역시 일상 프랑스어치고는 조금 무거운 말이지만, '능기'와 '소기'에 댈 게 아닙니다. '기표'나 '기의', '기고보(記號母)'나 '기고시(記號子)' 같은 다른 한일(韓日) 역어들도 그렇습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말을 그냥 쓰느니만 외려 못하게 돼버렸지요.  

한국일보(09. 10. 19) 번역이라는 고역 <中> 

소쉬르 용어의 번역 문제를 조금 더 짚어봅시다. 언어활동('랑가주')의 개인측면과 사회측면을 각각 '파롤'과 '랑그'라고 부르면서, 소쉬르는 일상 프랑스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가 자신의 일반언어학 용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에 너무 깊이 간섭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는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로 나누어 논한 뒤, 얼른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정의한 것은 사물이지 낱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겠다. 그러므로 언어에 따라서 몇몇 용어들이 모호해져 서로 깔끔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립한 구별에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고 나서 소쉬르는 독일어와 라틴어의 예를 듭니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지요. "가령 독일어 Sprache는 '랑그'와 '랑가주'를 뜻한다. Rede는 '파롤'에 얼추 대응하지만, 거기에 '디스쿠르'(discoursㆍ담화)라는 특수 의미를 보탠다. 라틴어 sermo는 외려 '랑가주'와 '파롤'을 의미하는 한편, lingua는 '랑그'를 가리킨다. 어떤 낱말도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개념들 중 하나에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낱말에 내려진 모든 정의(定義)는 헛되다. 사물을 정의하기 위해 낱말에서 출발하는 것은 나쁜 방법이다."

<일반언어학강의>(CLG)의 라틴어 번역본은 없습니다. CLG가 출판된 20세기 초는 라틴어가 이미 유럽 지식사회의 공용 문어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니 그럴 만합니다. 독일어 번역본은 당연히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지닌 것은, 헤르만 로멜(Herman Lommel)이라는 사람이 옮긴 <그룬트프라겐 데어 알게마이넨 슈프라흐비센샤프트(Grundfragen der Allgemeinen Sparchwissenschaft)>입니다. 1967년 베를린에서 나온 책이군요. 원본 표제의 '강의'(Cours)가 로멜의 독일어 번역본에선 '근본문제'(Grundfragen)로 바뀐 게 눈에 띕니다.

그렇다면 로멜은 소쉬르의 '랑그' '파롤' '랑가주'를 뭐라 옮겼을까요? 독일어에 능숙했던 소쉬르의 조언을 따랐을까요? 곧이곧대로 따르진 않았습니다. 로멜은 '랑그'를 '슈프라헤(Sprache)'로, '파롤'을 '슈프레현(Sprechenㆍ말)'으로,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menschliche Rede)'로 옮겼습니다. 독일어 감각이 무디니, 이 번역이 잘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을 삼가겠습니다.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 곧 '사람의 말'로 옮긴 데서, 로멜이 겪었을 고충이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에 (의미적으로만이 아니라 형태적으로) 대응하는 낱말을 제 어휘목록에 지닌 자연언어들(지난번에 살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가 그랬지요) 이외의 언어(영어가 그랬지요)로 이 두 용어를 구별해 옮기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와 독일어가 그럴진대, 일본어로 이 둘을 구별해 옮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고바야시 히데오가 그것들을 '겐고(言語)'와 '겐고가쓰도(言語活動)'로 옮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두 역어는, '랑그'와 '랑가주'처럼, 형태적 공통인수를 지녔습니다. 그리고 '랑그'가 '랑가주'의 부분집합이듯, '겐고'가 '겐고가쓰'의 부분집합임이 한눈에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가주'보다 일상 일본어의 '겐고가쓰도'가 조금 무거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번역이라는 병치레가 수반하는 발열(發熱) 증상 정도로 생각합시다. '파롤'을 '겐(言)'으로 옮긴 것도 잘된 번역 같습니다. "겐(言) 오 마타나이"(말할 것도 없다, 자명한 일이다) 같은 예에서 보듯, 일상 일본어 '겐'은 일상프랑스어 '파롤'에 얼추 대응합니다.

그러나 '파롤'의 한국어 번역어 '화언(話言)' 앞에선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군요. 물론 이 말을 표제어로 올린 한국어사전도 있긴 합니다. 예컨대 이희승 국어대사전엔 '화언'이 "말을 함. 이야기함. 또, 그 말이나 이야기"라 풀이돼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 한국어에서 '화언'은 죽은 낱말, 없는 낱말입니다. 반면에 '파롤'은 일상 프랑스어에서 싱싱하게 꿈틀거리는 낱말입니다. 그 두 말 사이의 거리는, 일상 독일어 '페어슈탄트(Verstand)'나 일상 영어 '언더스탠딩(understanding)'과 한국어 '오성(悟性)'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어 보입니다.

'오성'이라는 말도, 철학적 맥락 바깥에선 쓰지 않는 탓에, 부적절한 역어의 대표적 예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립니다(사실 일본사람들이 '고세이ㆍ悟性'로 옮긴 것을 그냥 베껴온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화언'은 '오성'보다 더 굳어있는 말입니다. '파롤'을 '화언'으로 옮기는 것은 그 말을 아무 의미 없는 소리뭉치로, 예컨대 '비디비디'나 '쿵빠짜'로 옮기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비디비디'나 '쿵빠짜'가 한국어 공간에서 생명 없는 말이듯, '화? 역시 방부제로 처리한 주검이나 다름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파롤'을 차라리 '말'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 말이 소쉬르 언어학의 맥락에선 언어활동의 개인측면을 가리킨다는 것이 어차피 명시될 테니 말입니다. '말'이라는 말이 영 내키지 않았다면(도무지 학술용어처럼 들리지 않았다면: 사실 이건 커다란 편견이지요. 학술어는 흔히 일상어의 특별한 사용일 뿐이니까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그냥 '파롤'이라고 놔둘 수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예를 따르려 합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나아가려 합니다. '파롤'은 물론이고 '랑그'나 '랑가주'라는 말도, 소쉬르의 맥락에서는, 그냥 가져다 쓸 생각입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능기'와 '소기', '기표'와 '기의'라는 말의 생기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말의 생기보다(심지어 한국어 텍스트 안에서도) 덜하다고 여겨서입니다.

소쉬르 번역과 관련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용어가 또 있습니다. '음성학'과 '음운론'입니다. 지금의 언어학자들에게 음성학은 '포네티크(phonetiqueㆍ영어로는 phonetics)'의 대응어이고, 음운론은 '포놀로지(phonologieㆍ영어로는 phonology)'의 대응어입니다. '포놀로지'와 '포네미크(phonemiqueㆍ영어로는 phonemics)'를 구별하는 언어학자도 있는데, 말소리에 관한 이 학문들의 분류와 그 내용은 언젠가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선 음성학과 음운론의 차이를 짧게 얘기하고, 이 용어들이 소쉬르 번역에서 왜 문제가 되는지만 살피겠습니다.

음성학은 음성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음운론은 음운(이라기보다 차라리 '음소'라고 해야겠네요. 음운과 음소의 구별에 대해선 뒷날을 기약합시다)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음성은 말소리 일반을 가리키고, 음소는 한 자연언어에서 실현되는 말소리 가운데 의미와 관련이 있는 말소리들을 가리킵니다. 아주 거칠게 도식화한다면, 음성학은 파롤의 언어학에 속하고, 음운론은 랑그의 언어학에 속합니다.

'동물의 살'을 뜻하는 한국어 낱말은 '고기'입니다. 이 단어의 첫 자음과 둘째 자음은 다 'ㄱ'으로 표기됐지만, 서로 다른 소리로 실현됩니다. 즉 첫 자음은 [k]로 실현되고 둘째 자음은 [g]로 실현됩니다. 둘째 자음도 본디는 [k]였지만, 두 모음(두 유성음) 사이에서 유성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들에게 이 두 소리는 똑같이 들립니다. 한국어 음성학은 이 [g] 소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거기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어에서 [g]는 독립된 음소가 아니라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물고기'에서는 첫 'ㄱ'이 /k'/로 실현됩니다. 이 경우의 /k'/도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이긴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g/와는 달리 /k'/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굴'[kul]과 '꿀'[k'ul]의 비교에서 보듯, 한국어에서 {k'}는 {k}와 대립해 의미 차이를 만들어내는 버젓한 음소이기 때문입니다.

CLG 서론의 마지막 장(章)과 그 부록은 'phonologie'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런데 소쉬르가 여기서 실제로 논의하는 것은 (음운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음성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겹칩니다. 소쉬르의 phonologie는 오늘날의 phonologie와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 때 이 'phonogie'를 '음운론'이라 옮겨야 할까요, 아니면 '음성학'이라 옮겨야 할까요? CLG의 한국어판 둘 가운데 한쪽은 '음성학'을 골랐고, 다른 쪽은 '음운론'을 택했네요. 영어로는 이 'phonologie'를 'phonology'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phonetics'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웨이드 배스킨은 'phonology'라 옮겼고, 로이 해리스는 'physiological phonetics'라 옮겼군요.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한국일보(09. 10. 26) 번역이라는 고역 <下>

방부 처리한 주검에 '파롤'의 한국어 역어 '화언'을 견주며, 저는 번역자의 무성의와 무감각을 탓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정한 비판이었을까요? 부분적으로만 그렇습니다. 소쉬르의 '파롤'이 일상어의 특별한 사용이었듯, 한국어에서도 특별한 사용을 통해 전문용어 노릇을 겸할 수 있는 일상어를 찾아냈다면 좋았겠지만, 번역자 처지에선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사실 적지 않은 (전문용어들의) 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애를 시작합니다. 운이 좋아 거기 생기가 깃들이면 그 낱말이 일상어로 자리잡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말은 전문용어 사전 속에만 숨어있게 됩니다. '화언'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메이지(明治) 시대 초기의 일본인들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화언'이란 말에서 느끼는 낯섦보다 더 지독한 생경함을 '샤카이(社會)'라는 말에서 느꼈을 겁니다.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영어 낱말 society를 대뜸 '샤카이'에 대응시킵니다. 일본사람들을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인들도 society를 즉시 '사회'에 대응시킵니다. 그렇지만, 일본어에서 '샤카이'가 society의 역어로 정착된 것은 18세기 말 이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의 일입니다.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큰 것 하나는 일본 전통사회에 society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동료들끼리의 결합을 뜻하는 society는 전통 일본에도 있었지요. 그러나 가장 넓은 범위의 서로 모르는 개인들이 모여 이룬 집단을 뜻하는 society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이 단어의 번역은 쉽지 않았고, 최후의 승자로 남은 '샤카이'조차 처음엔 '방부 처리한 주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생기를 얻은 것은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 말을 society라는 의미로 사용한 덕분입니다. '샤카이'가 운이 좋았던 거지요. 현대 일본의 정신적 초석을 놓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ㆍ1835~1901)만 해도, 1868년 영어로 된 경제학 교과서를 <세이요지조 가이헨(西洋事情 外篇)>이라는 표제로 일역하며, society를 '닌겐고사이(人間交際)' '고사이(交際)' '구니(國)' 따위로 옮겼습니다. 세이후(政府)나 세조쿠(世俗), 소타이진(總體人) 같은 낱말도 그 시절 '샤카이'의 경쟁어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한국어 문장이나 현대일본어 문장은, 심지어 그 문장들이 한국학이나 일본학을 논하고 있을 때조차, 압도적으로 '번역된 유럽'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에는 한두 세기 전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주로 한자어)이 많은데, 그 말들은 대개 유럽 사회에서 태어난 개념들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 번역의 주체는 18세기의 란가쿠샤(蘭學者ㆍ네덜란드어 문헌들을 통해서 유럽 문화를 연구하던 이들)와 19세기 중엽 이래의 에이가쿠샤(英學者ㆍ영어 문헌을 통해 서양 문화를 연구하던 이들)를 비롯한 일본인 번역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두 세기 남짓 기간에 걸쳐 유럽(아메리카까지 포함한) 문화 전체를 한자로 옮겨내 제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된 유럽'은, 19세기 말 이래 반세기 이상 한국이 일본문화권의 일부를 이루면서, 고스란히 한국어에 이식됐습니다. ('란가쿠[蘭學]' 이래 일본인들이 수행한 번역활동을 비롯해 번역행위의 세계문명사적 의의와 그 양상은 졸저 <감염된 언어>[1999]의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에 비교적 소상히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번역된 유럽어'로 독자 여러분과 소통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란가쿠샤 이래의 일본인 번역가들은 유럽을 한자어로 옮기면서, 이미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비슷한 개념어를 가져다 쓰기도 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 신조어들은, 대체로, 우리의 '화언' 같은 주검 상태로 일본어 세계에(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어 세계에)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신조어들 가운데 수많은 말이 살아남아 지금 현대일본어와 현대한국어 어휘부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새 번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기를 얻는 과정을 야나부 아키라(柳父章)라는 일본인 번역학자는 '카세트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카세트'는 보석상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잠깐 들어볼까요? "새로 만든 말은 카세트를 닮았다. 그 말 자체가 매력이다. 그리고 속에 깊은 의미가 틀림없이 담겼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사람들을 끌어서 자꾸 그 말을 쓰도록 부추긴다.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 신조어는 그 반복 사용 과정을 통해 이윽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처음엔 단지 아름다움 때문에 보석상자를 찾던 사람들이 끝내 보석을 간수하는 데 그 상자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미나 역할이 아니라 말 자체에 매혹되는 첫 체험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보석상자 같은 것이다."(<번역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야나부에 따르면 수많은 신조어들이 처음엔 빈 보석상자였다가 나중엔 보석이 담긴 상자가 되는 겁니다. 물론 끝내 빈 보석상자에 머물러 사람들의 손길에서 멀어지는 경우도 많지요. 영어 단어 'society'의 역어 자리를 놓고 '샤카이'와 경쟁하던 '닌겐고사이'나 '소타이진'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샤카이'라는 카세트에 보석을 담았던 것입니다. '파롤'의 역어 '화언'은 아직 빈 카세트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안에 보석이 담길 것 같지 않습니다. 보석을 담게 될 카세트는 차라리 '파롤'이라는 외래어 같군요. '카세트 효과'는 신조어에서만이 아니라 외래어에서도 나타납니다. 처음 듣는 외래어는 빈 카세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거기 매혹된 사람들이 자꾸 쓰다 보면 언젠가 보석을 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시나브로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화언'이 영원히 빈 카세트로 남게 된다 해도, 역자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번역의 역사에서 끝내 빈 카세트로 남게 된 말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오히려 그 번역의 시도를 상찬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번역은 한 세상에 또 한 세상을 들여놓아 세상을 입체화하는 엄청난 일이니까요. 란가쿠 이래 일본인들의 번역활동이 일본에(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에) 유럽 전체를 들여놓아 일본인들의(그리고 이내 한국인들의) 세계인식을 크게 확장시켰듯 말입니다.

번역이 늘 인식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욕망에서 실천되는 것은 아닙니다. 번역은 때로 일종의 배타적 종족주의, 문화적 국수주의를 연료로 삼기도 합니다. 모국어 순화운동이 그 전형적 예입니다. 일본인들이 '메이시(名詞)'라고 옮긴 영어 낱말 noun을 우리 역시 '명사'라고 옮깁니다. 그러나 언어민족주의자들은 이 번역어를 다시 '이름씨'로 번역합니다. 일본인들이 '도시(動詞)'라고 옮긴 영어 낱말 verb를 우리 역시 '동사'라고 옮깁니다. 그러나 언어민족주의자들은 이 번역어를 다시 '움직씨'로 번역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이중번역에 커다란 뜻이 있을까요?

물론 개인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민족 수준에서도 자존감은 매우 커다란 심리적 자산입니다. '명사'나 '동사'라는 말이 '메이시'나 '도시'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베낀 것은 분명하고, 그것이 언짢아 '이름씨'나 '움직씨'라는 말을 만들어내 쓰고 싶어하는 마음을 깔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름씨'나 '움직씨'가 '명사'나 '동사'보다 '혈통적으로' 한국어에 가까워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이름씨'나 '움직씨'는 한자로 표기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명사'와 '동사'가 '메이시'와 '도시'를 고스란히 베껴낸 것이라면, '이름씨'와 '움직씨'도 '명사'와 '동사'를 고스란히 베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번째 번역을 통해서 인식의 지평이 조금이라도 넓어졌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말하자면 '이름씨'와 '움직씨'는 지적 작업의 결과라기보다 말놀이의 결과입니다. '메이시'와 '도시'가 지적 작업의 결과인 것과는 크게 다르죠. 지적 작업에 이르지 못하는 이 말놀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낱말의 생명력이 반드시 '혈통'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시 야나부의 말투를 빌려오자면, '명사'와 '동사'는 이제 보석을 가득 채운 카세트입니다. '이름씨'와 '움직씨'는 민족주의자들의 수십 년 열정을 비웃듯 아직도 빈 카세트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언젠가 보석이 담길 거라 자신할 수도 없고요. 

09. 11. 01. 

 

P.S. 칼럼에서 주로 언급되고 있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두 종류의 한국어본이 있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최승언 역의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가 유일하다. 바로 이 책에서 '파롤'의 번역어로 '화언'을 쓰고 있다. 발췌본인 김현권 역의 <일반언어학 강의>(지만지, 2009)에서는 어떤 번역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제자들이 받아적은 강의록을 옮긴 <일반언어학 강의>와 달리 뒤늦게 발견된 소쉬르 자신의 노트를 대본으로 한 <일반언어학 노트>(인간사랑, 2007)는 <일반언어학 강의>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독해볼 만한 책이다. 나도 작년쯤 구입만 해놓은 상태이지만.   

  

고종석이 인용하고 있는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나부 아키라의 책으론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이 있다. 그의 다른 책들도 소개됐으면 싶지만(칼럼으로 봐서는 <번역이란 무엇인가>란 책도 있는 듯하니까) <번역어 성립사정>마저 절판된 게 우리의 궁색한 현실이다. 고종석의 <감연된 언어>도 물론 같이 읽어봐야 하는 책이며, 한권 더 덧붙이자면 이연숙의 <국어라는 사상>(소명출판, 2006). 일본에서의 '국어' 개념의 성립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의 근저를 밝히고자 한 책이다. 1996년 이와나미서점에서 출간되어 이듬해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에서 화제를 모았다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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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ne 2009-11-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한국의 경우 소쉬르 연구의 깊이는 굉장히 얕은 상황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랑그, 파롤, 기표등의 용어가 알려지면서 그 개념이 모호해지는 측면이 있는거 같습니다. 사실 라캉은 소쉬르를 추켜새우긴 해도 그가 쓰는 개념과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다른 의미로 이 개념을 쓰고 있는데 말이죠...

로쟈 2009-11-01 20:37   좋아요 0 | URL
소쉬르보다 라캉이 먼저 소개된 건 아니구요, 국내에서 소쉬르 연구가 라캉 연구보다 깊이가 얕은 것도 아닙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지만,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이 없었다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정신분석학의 언어학적 전회)도 어려웠겠죠...

2009-11-01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1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rk6 2010-03-1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민음사)를 읽고 있습니다.

이글을 통해 소쉬르 읽기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ㅎㅎ

이런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컨디션 저하로 기운을 못 차리고 있다가, 저녁을 먹고 책더미 속에서 내주에 해야 할일을 챙기는 데만 두어 시간을 보냈다. 책상을 보니 다음주에 강의할 플라토노프의 <구덩이>(민음사, 2007)와 함께 어제 구입한 움베르토 에코의 책 두 권이 놓여 있다. 일들의 바다로 입수하기 전에 잠시 여담을 늘어놓고 싶어진다.  

이번에 나온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운 책은 <일반 기호학 이론>이었지만 교보에 들렀을 때 제목만 보고 같이 손에 든 책은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이다. '애서가' 내지 '독서가'로 분류되는 이들에겐 당연히 어필할 만한 제목. 한데, 표지도 맘에 들길래 나는 내용도 보지 않고 계산대로 갔고, 버스에서 책을 펼치고 나서야 책이 예전에 나온 <미네르바 성냥갑>(2004)의 신판이란 걸 알았다('미네르바 성냥갑'은 잡지 이탈리아의 '레스프레소'에 연재된 에코의 칼럼란 제목이다). 두 권으로 나왔던 <미네르바 성냥갑>이 이번 컬렉션에선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로 각각 옷을 갈아 입은 것. 다행히 나의 에코 컬렉션에는 포함되지 않은 책이어서 크게 억울할 일은 아니지만 예전 그대로의 타이틀이었다면 눈길이 덜 갔을 것이다.  

제목이 궁금해서 찾아봤지만 책에는 표제가 된 칼럼이 따로 들어 있지 않았고 짐작엔 맨앞에 실린 '책이 삶을 연장시키는 이유'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잠시 훑어보고 내가 밑줄친 대목. 인류가 최초로 의미 있는 소리들을 내뱉기 시작하면서 종족과 가족들은 그들에게 사회적 기억을 전수해줄 노인들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그 덕분에 "이제 스무 살 젊은이가 마치 5천 년을 산 사람처럼 되었다"고 에코는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다.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19쪽) 

책을 읽는 의의로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그럴 듯하다(아주 새롭진 않다!). 책에는 그보다 더 '유혹적인' 타이들이 그득하다. '자신의 하찮음을 과시하는 방법' 같은 제목을 보게 되면 자연스레 눈길이 가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일반 기호학 이론>에 대해 몇 마디 하자면, 이건 예전에 <기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1985)이라고 나왔던 책의 새 번역본이다. 역자는 이 책에 대해서 "영어판 A Theory of Semiotics(Indiana University Press, 1976)는 우리나라에서 <기호학 이론>(이론과실천, 1985)으로 이미 번역되었다. 이 번역본에서 일부 문제점들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기호학이 거의 생소한 분야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522쪽)고 적었다(출판사를 오기했다). 사실 기호학의 수용 초창기였다곤 하지만 흠이 너무 많은 번역서라서 이해할 만하더라도 결코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아직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         

   

에코는 이 기호학 이론 입문서를 영어로 먼저 집필하고 나중에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는데, 출간은 이탈리아본이 1년 더 빨랐다고 한다. 이번에 나온 <일반 기호학 이론>은 이 이탈리아어판을 참조하여 영어본을 옮긴 것이다. 에코는 그 전에 <구조의 부재>(1968)란 책을 먼저 쎴는데, 불어판이나 러시아어판은 이 책을 옮긴 것이다. 그것이 이번 마니아 컬렉션에서는 원제를 살려 <구조의 부재>라고 재출간됐다. 예전에 <기호와 현대예술>(1998)이라고 번역됐던 책.  

  

소설가이기 이전에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면서 저명한 기호학자인 에코의 전모를 담으려고 하는 이번 컬렉션에는 '기호학자 에코'를 상기하게 해주는 책이 여럿 포함돼 있는데, 대표적으론 <기호: 개념과 역사>, <기호학과 언어철학>, <칸트와 오리너구리> 등을 들 수 있다.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에코가 <일반 기호학 이론>의 속편으로 쓴 것이다.   

 

<기호>와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예전에 출간된 바 있으므로(나도 그 책들을 갖고 있어서 이번 '마니아 컬렉션'판은 구입이 망설여진다. 책은 더 폼나게 나왔지만) 새로울 게 없지만, <기호학과 언어철학>은 반가운 책. 이 또한 예전에 <기호학과 언어철학>(청하, 1990)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다. 역시나 읽기에 어려움이 많었던지라 새 번역본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밖에 기대를 모으는 '뉴페이스'는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호의 개념을 추적하면서 완벽한 진짜는 완벽한 가짜와 통한다고 말하는 <가짜전쟁>, 텍스트 비평, 철학 및 기호학에 관한 글을 모은 <예술과 광고>, 그리고 언어와 사고에 관한 기이한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나간다는 <언어와 광기> 등이다(아직 컬렉션에는 포함돼 있지 않은데, 내가 궁금한 에코의 책 중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를 다룬 초기작 <조이스의 시학>(1965)이다). 아무려나 이 책들은 여유가 닿는 대로 구입해볼 생각이다. 출판계에서는 국내의 ‘에코 마니아’를 1500명 안팎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하므로 나는 그 '1500명 가운데 1인'이라고 해야겠다. 뭐, 책으로 천년을 산다는데 어쩔 것인가!.. 

09.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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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김화영 선생의 새 평론집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문학동네, 2009)도 이번주 신간인데, 나는 서점에서 보고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는 <소설의 꽃과 뿌리>(문학동네, 1998) 이후 11년만에 나온 평론집이란 점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분량이 300쪽이 채 되지 않는다는 점. 지난 10년간 발표된 국내 소설들을 거의 다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으므로 저자의 게으름과는 무관하다. 길을 묻고자 하는 '소설의 숲'이 울창하지 않았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적어도 저자가 보기에는.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9. 10. 31) “소설가 늘었지만 훌륭한 장편 없어”

문학평론가 김화영(68·사진)씨가 새 평론집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문학동네)를 묶어냈다. 프랑스문학 전공자로 유려한 미문과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한국 문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왔을 뿐 아니라 번역자로서도 성가가 높은 그가 최근 10년 동안 읽어온 한국 소설에 대한 평문들을 집적한 책이다. “육체는 슬프도다, 오호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읽었노라”는 말라르메의 시 첫 구절을 인용하며 “지난 10여년 동안 나는 이 나라에서 발표되는 거의 모든 소설을 다 읽었다”고 서문에 밝힌 그에게 그 기간 동안 한국 소설을 공통으로 관류한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신중한 답변이 돌아왔다.  

“긍정적인 건 소설가 수가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작가들이 많다 보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겠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다보니 너무 쉽게 쓰고 쉽게 책을 내는 환경이 돼버렸어요. 단편소설에 너무 진을 빼다 보니 이렇다 할 장편소설이 많지 않아요.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신경숙의 ‘리진’과 조경란의 ‘혀’, 윤대녕의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를 집중적으로 분석했고 2부에서는 박완서 박범신 은희경 하성란 오정희 전경린 김영하 윤성희 김연수 편혜영 정한아 등 그가 10여년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선정작업에 참여하면서 특별히 주목했던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을 담아냈다. 마지막 3부는 한국의 시단과 독서계를 짚어보는 글을 모았다.

그는 서문에서 “이 나라 대학이 팽창하면서 문학비평이 일종의 ‘제도’ 속에 흡수 정착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경화현상”을 적시하면서 “소설은 비평적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예문들의 저장고가 아니라 비평이 그 생명줄의 빨대를 박고 길을 찾아가야 할 실물대의 지형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수입 이론에 꿰어맞추기 위해 작품을 이용하는 행태에서 벗어나 “소설은 그 소설을 읽는 방법을 그 속에 암시적으로 내장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읽기와 쓰기를 거듭해왔다는 부분은 각별히 인상적이다. 그는 토도로프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학비평가, 문학교수, 그 밖의 전문가들은 단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김화영씨는 1986년부터 시작한 알베르 카뮈 전집 번역작업을 올해 안에 끝내고 내년 카뮈 사후 50주년을 앞두고 전20권을 완간할 예정이다. 그는 “카뮈는 평생 정의와 자유가 어떻게 서로 화해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래도 정의 이전에 자유의 편이었다”며 “세월이 흘러도 결코 낡지 않은 작가”라고 상찬했다. 월간 ‘현대문학’에 번역 연재 중인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앞으로도 최소한 10년 이상 걸릴 작업이란다. 그는 “남은 인생에서도 읽고 쓰고 번역하는 일은 여전히 중심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조용호 선임기자) 

09. 10. 31.  

P.S. 카뮈 전집 출간에 이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역하겠다는 저자의 계획이 눈길을 끈다. <현대문학>에 너무 조금씩 연재되고 있어서 '완역'되진 않을 걸로 알았는데, 10개년 계획이다! 원로 불문학자 홍승오 선생의 번역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으며 프루스트와의 만남은 10년 뒤로 잡아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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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9-11-01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평론집이 나온것도 반갑고..프루스트를 완역하겠다는 계획도 반갑군요..
"길을 묻고자 하는 '소설의 숲'이 울창하지 않았다는 반증으로 보인다."..동갑입니다.

2009-11-01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lyot 2009-11-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요즘 책방에 가면 나와있는 11권 짜리는 어떤가요 ? 너무 읽고 싶은 작품이지만, 번역이 어떤지 몰라서 늘 미루어 두었었는데요 ...

로쟈 2009-11-01 11:32   좋아요 0 | URL
나쁘진 않은 걸로 압니다. 하지만 7권짜리가 11권으로 쪼개진 게 마음에 안 들고(제가 갖고 있는 건 7권짜리이고요), 더 나은 번역으로 읽고 싶은 마음에 새번역을 기다리게 됩니다.
 
"동아시아 100권의 책"

어제 읽은 흥미로운 기사는 동아시아 100권의 책 선정 소식이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에서 동아시아 독자들이 함께 읽을 현대의 고전 리스트를 만들고 공동 번역 사업에 나선다는 것인데, '동아시아'란 게 무엇이며, '동아시아인'이란 정체성이 어떤 내용을 갖게 될는지 비로소 구체화될 듯싶다. 이후에 '동아시아의 소설들' '동아시아의 사회과학서들'이 더 기획될 수 있을 거라고 하니까 이제 첫걸음이다. 리스트를 보면 번역작업이 아주 지난하지 않을까 싶은데, 일단은 한국 선정 도서 26권의 리스트를 눈요기 해본다. 나머지 74권의 선정 도서가 차례로 번역돼 나오길 기대하면서...     

한국일보(09. 10. 30) 동아시아 독서 공동체, 끊겼던 맥 다시 잇는다 

동아시아의 독자들이 함께 읽게 될 현대의 고전 100권이 선정됐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 동아시아 인문출판사들의 협의체인 동아시아출판인회의(회장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29일 전북대에서 제9회 동아시아출판인대회를 열고 '동아시아 100권의 책'을 발표했다.

100권의 책은 각국의 선정위원회가 고른 근ㆍ현대의 대표적 인문 도서로 한ㆍ중ㆍ일 각 26권, 대만 15권, 홍콩 7권으로 구성됐다. 이 책들은 2010년 선정 경위와 개요를 담은 해제집 발간을 시작으로, 각국 정부의 번역 지원을 받아 출간될 예정이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2005년 결성,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회 때부터 100권의 책 공동 출판 사업을 추진해 왔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는 한자를 기반으로 상당히 넓은 지적 교류를 해왔지만, 근대화와 냉전을 겪으며 그 교류가 끊어졌다. 현대 동아시아가 위치한 지적 기반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좋은 책을 읽는 일이 시급하다"고 사업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언호 회장은 이날 대회 개회사에서 "책은 공유됨으로써 빛난다. 100권의 책 프로그램은 세계 출판계에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져줄 것"이라고 말했다.

100권의 책에 포함된 한국 도서 26권은 <백범일지>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국의학사> 등 3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1970년대 이후에 출간된 책이다. 한경구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동아시아출판인회의 저작권위원장)는 선정 기준에 대해 "1950~60년대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산업적 토대를 구축한 한국 출판계가 본격적 인문 단행본 출판을 시작한 시기"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이 밖에 ▦상업성보다 한국 사회에 지적ㆍ사회적 영향을 끼친 책 ▦한국적 특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책 ▦번역이 가능하고 너무 전문적이지 않은 책 등을 선정 기준으로 들었다.

한국의 경우 2008년 7월 이후 학자, 출판평론가, 출판사 대표 등이 참여한 선정위원회를 운영해 왔다. 한 교수는 "모두가 만족하는 목록은 불가능했다. 숱한 토론과 타협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며 선정 작업이 지난했음을 털어놨다. 한국 선정 도서에는 이밖에 <한국 음악사> <한국 근대 문예비평사 연구> <한국 수학사> <지눌의 선 사상> <한국 유학 사상론>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등 철학, 사회, 예술에 대한 현대의 저술이 다양하고 고르게 포함됐다.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것은 김구(1876~1949)의 <백범일지>이며, 가장 최근의 것은 2006년 출간된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에세이 <풍경과 마음>이다.

26권 가운데는 정치ㆍ사회적으로 진보적 관점에서 저술된 책도 눈에 띈다. 따라서 공공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해외에 소개되는 것을 놓고 논란도 예상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흔들리는 분단체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등이 목록에 포함됐다.

한 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의 1970~80년대는 민주화를 떼어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포함된 책은 산업화ㆍ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책들이다. 오히려 사상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중국의 독자를 고려해 걸러낸 책도 있다"고 밝혔다.

중화권(중국, 대만, 홍콩)과 일본이 선정한 책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저술한 학술서와 고급 교양서가 주를 이뤘다. 일본의 류사와 다케시 전 헤이본사 대표편집국장은 "'동아시아의 독자들이 공유해야 할 책이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 선정 기준이었다"며 "목록에 포함된 책들은 근래 50년 동안 발간된, 일본에서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들"이라고 설명했다. 동슈위 전 중국출판집단 싼롄서점 총경리는 "중국은 (문화대혁명 등의 이유로) 학술서가 출판되지 못하던 시절이 있어서, 1980~90년대 이후 신진 학자들의 저작이 많이 포함됐다"고 말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저작권ㆍ판권이 확보되는 책부터 순차적으로 100권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출간 작업은 각국에서 독립적으로 진행되지만, 표지 디자인이나 편집 등에서 통일성을 추구할 방침이다. 한성봉 동아시아출판사 대표는 "번역은 무척 힘들고 중요한 작업이라 언제 완간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출판인회의에 소속되지 않은 출판사에게도 발간의 기회는 열려 있다"고 말했다. 

미국 예일대 출판사를 비롯한 비아시아권 출판계에서도 100권의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은 "100권의 책은 계속되는 프로그램"이라며 "'동아시아의 소설들' '동아시아의 사회과학서들' 등 다른 이름과 형태로 사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유상호기자) 

 

09. 10. 31. 

P.S. 한국 선정도서들의 이미지를 나열해본다. <한국문학통사>만 제외하면 초판출간연대순이다. 한국의 인문서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죽은 책'들도 여러 권 눈에 띈다. 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는 책은 제외했다(*표시를 했다).  

1. 백범일지  

 

2. 뜻으로 본 한국 역사 

 

3-6. 한국의학사, 한국과학사, *한국음악사,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7-9. 한국수학사, 지눌의 선사상, 한국유학사상론 

 

10. 한국사회사연구

  

11. 갈릴래아의 예수

 

12.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3-15.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흔들리는 분단체제

  

16-17. 한국사신론,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8-19. 시간과의 경쟁,  전쟁과 사회

 

20-22.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한국미술의 역사, 운화와 근대 

 

23-25. 한국인의 신화, 눈과 정신, 풍경과 마음 

 

26. 한국문학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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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아시아 100권의 책 - 중국 쪽 선정도서
    from 일방통행로 2009-11-01 05:43 
    동아시아 출판인회의를 조직하여 "동아시아 100권의 책"을 선정한다는 말을 일전에 들었는데 29일에 선정 및 발표되었다. 동아시아 격변기 세계관 바꾼 ‘현대의 고전’ 한겨레 “거대한 독서공동체 복원 첫걸음” 한겨레 한·중·일 이어줄 ‘100권의 책’ 중앙일보 책에서 동아시아 문화 유전자 찾는다 중앙일보 내가 번역한 책도 후보에 올라와 있어 출간을 약간 미루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최종선정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후보 명단에 올라와 있던 책들은 지금..
 
 
바밤바 2009-10-3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자 조선일보를 보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100권을 선정할 때도 말이 많았거늘 26권으로 우리를 오롯이 드러내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더군요. 무엇보다 선정도서의 편파성에 대해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더군요. 선정 도서 목록을 몰라 왜 그러나 했는데 로쟈님 글을 보니 왜 그런지 알겠네요. ㅎ 조선이 좀 더 포용력을 가졌으면 합니다~ ㅎ

로쟈 2009-10-31 15:11   좋아요 0 | URL
전체적으론 통사류의 책이 너무 많아서 '책'보다는 '한국'에 더 초점을 맞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동아시아'나 '세계'를 다룬 책이 거의 없다는 점도 눈에 띄고요. 제한된 목록이니 모든 걸 충족시킬 수야 없겠죠...

열매 2009-10-3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이 자기 입맛대로 책을 추천해된다면 그게 바로 '불한당들의 세계사'가 되지 않을까요^^;;

로쟈 2009-10-31 23:53   좋아요 0 | URL
자체적으로 구미에 맞는 목록을 뽑아서 문화부 지원하에 사업을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방송도 진출하는 마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