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디션 저하로 기운을 못 차리고 있다가, 저녁을 먹고 책더미 속에서 내주에 해야 할일을 챙기는 데만 두어 시간을 보냈다. 책상을 보니 다음주에 강의할 플라토노프의 <구덩이>(민음사, 2007)와 함께 어제 구입한 움베르토 에코의 책 두 권이 놓여 있다. 일들의 바다로 입수하기 전에 잠시 여담을 늘어놓고 싶어진다.
이번에 나온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운 책은 <일반 기호학 이론>이었지만 교보에 들렀을 때 제목만 보고 같이 손에 든 책은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이다. '애서가' 내지 '독서가'로 분류되는 이들에겐 당연히 어필할 만한 제목. 한데, 표지도 맘에 들길래 나는 내용도 보지 않고 계산대로 갔고, 버스에서 책을 펼치고 나서야 책이 예전에 나온 <미네르바 성냥갑>(2004)의 신판이란 걸 알았다('미네르바 성냥갑'은 잡지 이탈리아의 '레스프레소'에 연재된 에코의 칼럼란 제목이다). 두 권으로 나왔던 <미네르바 성냥갑>이 이번 컬렉션에선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로 각각 옷을 갈아 입은 것. 다행히 나의 에코 컬렉션에는 포함되지 않은 책이어서 크게 억울할 일은 아니지만 예전 그대로의 타이틀이었다면 눈길이 덜 갔을 것이다.
제목이 궁금해서 찾아봤지만 책에는 표제가 된 칼럼이 따로 들어 있지 않았고 짐작엔 맨앞에 실린 '책이 삶을 연장시키는 이유'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잠시 훑어보고 내가 밑줄친 대목. 인류가 최초로 의미 있는 소리들을 내뱉기 시작하면서 종족과 가족들은 그들에게 사회적 기억을 전수해줄 노인들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그 덕분에 "이제 스무 살 젊은이가 마치 5천 년을 산 사람처럼 되었다"고 에코는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다.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19쪽)
책을 읽는 의의로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그럴 듯하다(아주 새롭진 않다!). 책에는 그보다 더 '유혹적인' 타이들이 그득하다. '자신의 하찮음을 과시하는 방법' 같은 제목을 보게 되면 자연스레 눈길이 가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일반 기호학 이론>에 대해 몇 마디 하자면, 이건 예전에 <기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1985)이라고 나왔던 책의 새 번역본이다. 역자는 이 책에 대해서 "영어판 A Theory of Semiotics(Indiana University Press, 1976)는 우리나라에서 <기호학 이론>(이론과실천, 1985)으로 이미 번역되었다. 이 번역본에서 일부 문제점들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기호학이 거의 생소한 분야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522쪽)고 적었다(출판사를 오기했다). 사실 기호학의 수용 초창기였다곤 하지만 흠이 너무 많은 번역서라서 이해할 만하더라도 결코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아직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
에코는 이 기호학 이론 입문서를 영어로 먼저 집필하고 나중에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는데, 출간은 이탈리아본이 1년 더 빨랐다고 한다. 이번에 나온 <일반 기호학 이론>은 이 이탈리아어판을 참조하여 영어본을 옮긴 것이다. 에코는 그 전에 <구조의 부재>(1968)란 책을 먼저 쎴는데, 불어판이나 러시아어판은 이 책을 옮긴 것이다. 그것이 이번 마니아 컬렉션에서는 원제를 살려 <구조의 부재>라고 재출간됐다. 예전에 <기호와 현대예술>(1998)이라고 번역됐던 책.
소설가이기 이전에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면서 저명한 기호학자인 에코의 전모를 담으려고 하는 이번 컬렉션에는 '기호학자 에코'를 상기하게 해주는 책이 여럿 포함돼 있는데, 대표적으론 <기호: 개념과 역사>, <기호학과 언어철학>, <칸트와 오리너구리> 등을 들 수 있다.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에코가 <일반 기호학 이론>의 속편으로 쓴 것이다.
<기호>와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예전에 출간된 바 있으므로(나도 그 책들을 갖고 있어서 이번 '마니아 컬렉션'판은 구입이 망설여진다. 책은 더 폼나게 나왔지만) 새로울 게 없지만, <기호학과 언어철학>은 반가운 책. 이 또한 예전에 <기호학과 언어철학>(청하, 1990)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다. 역시나 읽기에 어려움이 많었던지라 새 번역본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밖에 기대를 모으는 '뉴페이스'는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호의 개념을 추적하면서 완벽한 진짜는 완벽한 가짜와 통한다고 말하는 <가짜전쟁>, 텍스트 비평, 철학 및 기호학에 관한 글을 모은 <예술과 광고>, 그리고 언어와 사고에 관한 기이한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나간다는 <언어와 광기> 등이다(아직 컬렉션에는 포함돼 있지 않은데, 내가 궁금한 에코의 책 중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를 다룬 초기작 <조이스의 시학>(1965)이다). 아무려나 이 책들은 여유가 닿는 대로 구입해볼 생각이다. 출판계에서는 국내의 ‘에코 마니아’를 1500명 안팎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하므로 나는 그 '1500명 가운데 1인'이라고 해야겠다. 뭐, 책으로 천년을 산다는데 어쩔 것인가!..
09.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