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기간에 읽은 건, 아니 아직 다 읽진 않았으니 읽고 있는 건 고종석의 <해피 패밀리>(문학동네, 2013)와 조주은의 <기획된 가족>(서해문집, 2013)이다. <해피 패밀리>는 읽었고 <기획된 가족>은 읽는 중이다. 소설과 보고서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가족'이란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적이다. 그래서 고른 것이기도 하지만.

 

 

<해피 패밀리>는 소설집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 2003) 이후 (소설가로서는) 오랜 침묵 끝에 펴낸 <독고준>(새움, 2010)에 이어진 것이지만, 지난해 절필을 선언한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기도하다. 알라딘에서는 이제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처녀작 <기자들>(민음사, 1989)과 품절된 <제망매>(문학동네, 1997)를 포함하면 '고종석 소설'로 분류될 수 있는 다섯 권의 책이다. '이게 다예요.'

 

아직 안 읽은 독자에겐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기에 어느 정도 수위에서 줄거리를 소개하는지 관련 기사들을 찾아봤다. 인터뷰 기사도 몇 개 읽고. '금지된 사랑'을 다룬 작품이라는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그 일'이라고만 처리하는 건 장편소설 스타일이 아니다. 여백과 휴지로 말하는 <해피 패밀리>는 '장편소설'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독백들의 모음이고, 오히려 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서정적 진실을, 아니 이 작품의 경우엔 '서정적 위선'들을 모아놓은 시. 그 시적 상상력이 극대화되는 건 가장 나이 어린 한지현(2006- )이 외할머니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다. 두 사람은 식구의 경계를 무한히 확장시켜 나간다. 

"응, 따지고 보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 식구지."

"그게 무슨 말이야?"

"위로 위로 올라가보면 조상이 똑같을 테니까."

"단군 할아버지 말하는 거야?"
"단군 할아버지도 그렇고, 또 더 위로 위로 올라가면 세상 사람들 모두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있을 거 아냐?"

"응 그렇구나. 사람들은 모두 식구구나. 그럼 저기 경비 할아버지도 식구고 만둣집 아줌마도 식구고 봄이도 율이도 식구네?"

나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사람들만이 아니란다. 원숭이, 고양이, 개, 사자, 참새, 꽁치, 소나무, 대나무, 장미꽂 이런 것들도 따지고 보면다 식구란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꽁치나 장미꽃이 우리 식구라구?"(182쪽)

이것이 말하자면 식구의 최대 규정이다. 반면에 지현의 아빠 한민형은 식구가 무엇이냐는 딸의 물음에 가족과 친척을 구분하고 부모, 자식과 같이 사는 친척 정도까지만 식구라고 임시로 정의한다. 그것이 최소 규정이다. 가족이라는 사회적 단위는 그 규정들 사이의 위태로운 균형 잡기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 소설에서 서로 가장 불화하는 관계인 어머니 민경화(1953- )와 아들 한민형(1980- )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면, 민경화는 가족의 경계를 과대평가하고 한민형(과 한민희)은 과소평가한다.

 

민경화는 죽은 친구의 딸 한영미(1983- )를 입양하여 딸로 삼지만 절반은 하녀(가사 도우미?)로 대우한다. 식구이지만 식구가 아닌 것. 이런 거리감각은 소설에서 '속물적'이라고 지칭되지만 한편으론 균형감각이기도 하다. 이 균형감각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가? 한민형과 한민희(1977-2006) 오누이의 근친관계가 된다. 17살의 민희는 14살 민형의 콧등에 담배연기를 뿜어대다가 입술에 입을 맞춘다. 

"왜?"

민형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는. 그냥. 오누이끼리 키스를 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197쪽)

한민형이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법대에 진학하는 대신에 인류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건 이 원초적 질문과 금지된 사랑을 감당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서 그는 자기가 원하던 걸 배우지 못한다. 그는 모든 위선을 혐오하는 허무주의자 주당으로 남는다. 이 소설의 교훈은 무엇일까? 나는 가장 어린 지현의 말에서 찾고 싶다. 꽁치나 장미꽃도 다 식구라는 외할머니의 말에 지현은 좀 난감해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할머니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바보가 아닌 것 같았다. 설령 바보라 할지라도 엄마나 아빠만큼 바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꽁치가 내 식구라고? 어떡하지... 나 꽁치구이 좋아하는데...(183쪽)

꽁치도 같은 식구라면 멋진 일일 수 있지만 같은 식구끼리 잡아먹는 건 곤란할 테니까 좀 난감하다. <해피 패밀리>는 이 난감함을 좀 오래 붙들고 있는 소설로 읽힌다.

 

 

여성학자 조주은의 <기획된 가족>은 '맞벌이 화이트칼라 여성들은 어떻게 중산층을 기획하는가?'란 물음을 던지고 그에 답하는 책이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 근간이 된 듯한데, 첫 저작인 <현대가족 이야기>(이가서, 2004)가 석사학위논문은 단행본으로 재구성한 것과 비슷하다. '현대'는 여기서 '현대'라는 대기업을 가리킨다(한자도 똑같이 現代다!). 이번에 <페미니스트라는 낙인>(민연, 2007)과 같이 주문하려고 했더니 절판된 책이다.

 

여하튼 저자의 관심이 노동자 가정에서 중산층 가정으로 이동해온 셈인데, 저자 왈 "나는 사람들에게 '신분 상승의 욕구'로 생산직 노동자 가족에서 중간계급으로 주제를 선회했노라며 자조 어린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다양한 참여자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조사보고서 형식이어서 사회학적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힌다.

 

제목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자면, 행복한 가족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관리되는 것이다. <해피 패밀리>의 가족들이 함께 읽고 독서토론이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13.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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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뚜루의 <카페에서 책읽기>(나무발전소, 2013)다. '뚜루'는 국내 최초 '북 카투니스트'의 필명이고 책은 국내 최초 '카툰 서평집'이다. 어디서 보았는지 그림은 눈에 익은 편이지만 '카툰 서평'이란 건 처음 접했다. 그래도 같은 '서평'인지라 내게 추천사 청탁이 와서 아래처럼 적었다.

 

 

하는 일이 서평이고 ‘카페에서 책 읽기’는 나도 자주 하는 일이지만, ‘카툰 서평’은 처음 읽었다. ‘이런 서평도 가능하구나!’란 생각에 잠시 긴장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구를 떠날 그날까지도 책과 함께하고 싶다는 뚜루의 소망은 나의 소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좋은 카툰이 좋은 서평과 만날 때 얼마나 정겨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는지 <카페에서 책 읽기>는 보여준다. 멋진 동료가 생겨서 기쁘다.

한밤에 좀 무거운 책들을 보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펴든 책에서 장 사이에 들어간 보너스 팁을 발견했다. '용서받지 못할 책'. 뚜루가 용서할 수 없는 책은 일곱 가지 유형이다. 각자 취향은 다르겠지만 한두 가지는 겹칠지 모르겠다. 간추리면 이런 내용이다.

1. 개념 없는 분권

-> 600페이지 될까 말까 한 책을 부득불 갈라서 분권하는 것에 분노합니다.

 

2. 넌 어느 쪽 그림 설명이니?

-> 이미지와 설명이 따로 놀아 연결이 안될 때가 있어요.

 

3. 넌 미주일 수밖에 없었던 거니?

-> 31페이지 주석을 보기 위해 916페이지를 넘겨야 하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4. 표지, 너 습자지로 만들었지?

-> 읽을 때마다 표지가 줄줄 흘러내리는 걸 매번 끌어올려야 하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5. 넌 왜 무려 양장이니?

-> 페이지 수 200쪽도 안 되는 얇은 책을 굳이 양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6. 넌 왜 두꺼운 양장이면서 책갈피 끈도 없니?

-> 두꺼운 만화책에 페이지 수도 없고, 세상에 책갈피 끈도 없는 거에요.

 

7. 광활한 여백의 미

-> 지나친 여백으로 페이지 수만 잡아먹는 책은 용서할 수 없어요.

내 경우엔 1, 5, 7번에 공감한다. 나대로 덧붙이자면,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책은 기껏 필요해서 찾았더니 절판된 책이다(턱없는 가격이 붙은 중고책으로만 남아 있으면 더더욱 용서하기 곤란하다. 약 올리는 격이니까). 독서가에게 최악의 책은 부재하는 책이다. 아예 없는 책이 아니라 있다가 없는 책! 아, 그 변형도 있다. 분명 방안에 있는데, 안 보이는 책들! 오늘도 책 한권을 찾다가 안 보이길래 본때를 보여주느라 다시 주문했다. 누구에게 보여주는 본때인지는 모르겠지만...

 

13. 0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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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123q34 2019-05-08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본때를 보여주느라 다시 주문하셨다니 오전에 빵터졌어요~~ 오늘은 서평집으로 검색해서 놀고있는데 저는 2, 3, 6번과 추가하신 8번에 공감이 가요. 끊어읽을 때가 많고, 주석까지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인듯ㅋㅋ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반 시간 동안 PC가 놓인 책상의 책들과 복사물을 정리하여 겨우 공간을 좀 마련했다. 탁 트인 시야에 모니터가 바로 눈에 들어와서 오히려 생소한 느낌마저 든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들을 책상 가까이에 배치했는데 이들이 말하자면 얼마간 '측근' 노릇을 할 책들이다. 무게감을 갖는 책은 아니더라도 측근이 주는 편안함은 있다. 몇 권의 책에 대해서는 페이퍼를 써도 좋겠다 싶지만 여유가 많지 않은 까닭에 일단 한 권만 거명하면 앤 커소이스와 존 도커의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작가정신, 2013)가 부듯한 독서감을 느끼게 해주는 책. '역사는 픽션인가'가 원제다.

 

 

번역본 제목보다는 원제가 저자들의 문제의식을 더 잘 집약하고 있는데, '역사는 허구인가'라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니 반응은 세 가지였다고 한다. (1)당근이지.(역사는 물어보나 마나 허구라는 반응) (2)말도 안돼.(역사는 역사이고 허구는 허구이며 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반응) (3)글쎄... 역사가 허구인가요? 이런 반문이 가장 많이 보인 반응이라는데, 한편으론 그렇고 또 한편으론 그렇지 않다는 저자들의 답변에 양다리 걸치지 말고 확실하게 답하도록 요구했다고. "역사는 허구인가, 라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복잡한 답을 요구한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은 필요할 것이다."(8-9쪽) 이 책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저자들은 서두에서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던진 질문보다 '역사는 허구인가'란 질문이 훨씬 제한적이긴 하지만, 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진실의 문제, 역사가와 과거의 관계, 사실과 가치, 해석의 문제에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차이점은 두 가지인데, "무엇보다도 우리는 언어와 서술, 상징, 수사법, 풍자를 통해 형성되는 역사의 문학적 측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문학적 형태와 역사적 진실을 향한 열망 사이의 관계를 카와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7쪽) '역사의 문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쪽이 흔히 일컫는 '포스트모던 역사학'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로 지칭하는데, 이 두 사조는 "학문과 직업으로서의 역사의 생존을 위협했다." "과거는 결코 복원될 수 없고 역사연구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역사는 그 자체의 허구에 의해, 다시 말해 역사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터무니없는 믿음 아래서만 존재할 수 있다"(13쪽)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심할 경우에는 역사라는 학문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대표적인 경우가 키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1991)이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는 번역서의 제목이고 원제는 <역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history)>다.

 

하지만 저자들은 젠킨스와 같은 극단적 상대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불어 자신의 연구결과와 해석이 절대적 객관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의 주장 또한 거부한다. 리처드 번스타인의 책 제목을 빌리자면,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가 이들의 입장이라고 할까. "우리는 역사서술에서 허구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인정할 때 진실 탐구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된다고 생각한다"(14쪽)은 진술은 역사학의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의 변증법적 종합으로도 읽힌다.

 

 

 

흥미로운 것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연결시키고 현재와 과거의 연관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인식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역사서술"이 현대의 '포스트모던' 문학과 철학 이론의 발명품이 아니라 서구 최초의 역사서술인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부터 이미 나타난다는 저자들의 주장이다. 헤로도토스야말로 '포스트모던 역사가'의 원조라고 할까. 바로 그런 관점에서 저자들은 '이야기꾼 헤로도토스'를 첫 장에서 다루고, 2장에서는 헤로도토스와 함께 서양 역사학의 토대를 만든 투키디데스를 다루며, 마지막 장에서는 <총, 균, 쇠>와 <문명이 붕괴>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까지 다룬다. 역사학의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일주이자 일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수준의 독자라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 일주에 동행할 수 있을 듯싶다. 마음의 준비가 됐다면,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꺼내들고 이제 1장으로 넘어가는 일이 남았다...

 

13. 01. 27.

 

 

 

P.S.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가 그래도 좀 이론서적인 성격의 책이라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손에 들어볼 수도 있다. 남경태의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메디치미디어, 2013), 박신영의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페이퍼로드, 2013), 그리고 원종우의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역사의아침, 2012) 등이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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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나온 가장 자극적인 독서거리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인데, '자극적'이란 말은 지적 만족과 함께 더 많은 호기심을 갖게 한다는 뜻이다.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과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를 읽은 독자라면 교환양식에 대한 설명은 친숙하다(현재 절판된 <트랜스크리틱>은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9권으로 다시 나올 예정이다). <세계사의 구조>에서 인상적인 것은 지배적 교환양식의 이행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사회구성체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본적으로 바꿔버리는 지배적 교환양식의 이행이다. 첫째로 교환양식A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로의 이행, 둘째로 교환양식B가 지배적인 구성체로의 이행, 셋째로 교환양식C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로의 이행이다. 바꿔 말해, 각각 씨족사회의 형성, 국가사회의 형성, 산업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이다.(71쪽)  

여기서 교환양식A는 호수제(증여와 답례), 교환양식B는 약탈과 재분배, 교환양식C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교환을 가리킨다. 이들 각각이 지배적 교환양식이 되는 이행과정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그런데 고진의 지적대로 뒤의 두 가지 이행에 대해선 많이 논의돼 왔지만 씨족사회로의 이행에 주목한 논의는 별로 없었다. 고진의 핵심 아이디어는 "국가사회나 자본제사회로의 이행에 비약이 있었다면, 씨족사회의 출현에도 비약적 이행이 있었다"는 것이고, <세계사의 구조>는 바로 그 비약적 이행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흔히 씨족사회를 최초의 원시사회로 간주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그 이전에 '유동적 밴드사회'가 있었다(고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씨족사회는 바로 그 유동적 밴드사회를 배경으로 등장하며 그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이해된다. 이 차이가 신석기혁명이 가져온 변화보다도 더 크다는 게 고진의 독창적인 견해다.

한편 씨족사회는 그것과는 대조적이다. 그것은 리니지(혈통)에 근거한 복잡하게 구성되고 성층화된 사회이다. 씨족사회가 국가사회와 다르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들의 차이, 즉 그것을 가져온 신석기혁명의 의의를 강조한다면, 유동적 밴드사회와 씨족사회의 차이, 또는 그것을 가져온 변화의 의의를 강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후자의 변화 쪽이 획기적이기 때문이다.(73쪽)

곧 고진이 보기에 획기적인 것은 씨족사회의 형성이다. 그러한 판단에서 그는 기존의 한 가지 통념에 대해 의심한다. "그것은 고든 차일드가 주장한 농경과 목축에 근거하는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것이다. 즉 농업/목축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정주하고, 생산력의 확대와 더불어 도시가 발전하고, 계급적인 분해가 생기고, 국가가 생겨났다는 견해"이다.

 

 

 

고든 차일드는 '신석기 혁명'이란 말을 만들어낸 영국의 저명한 인류학자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정주생활이 시작됐다는 게 인류학의 통설인데, 고진이 보기엔 그에 의심스럽다. 정주는 농경 이전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재배나 사육은 오히려 정주의 결과,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농업에 앞선 정주야말로 획기적인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물론 그만의 견해는 아니다. 고진이 참조하고 있는 건 인류학자 알랭 테스타이다.  

인류학자 알랭 테스타는 유동수렵채집민과 정주수렵채집민을 구별했다. 그는 전자에서는 수렵채집물이 평등하게 분배되지만, 후자에서는 불평등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 원인은 정주와 함께 생산물의 '비축'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인간불평등의 기원'을 발견했다.(74쪽)

놀라운 건 알랭 테스타의 책이 이미 번역돼 있다는 점(저자가 알랭 떼스타로 표기됐다). <불평등의 기원>(학연문화사, 2006)이 그것이다(다행히 아직 절판되지 않았기에 바로 주문을 넣었다). 고진은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테스타의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요점은 다른 곳에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비축에서 생겨나는 불평등이 계급사회나 국가로 귀결되지 않았다는 쪽이다. 그것은 불평등을 억제하고 국가의 발생을 억제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씨족사회이다." 고진은 이로부터 그만의 통찰을 끄집어낸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출현은 인류사에서 획기적인 것으로 중요시된다. 하지만 오히려 정주=비축과 함께 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제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는 쪽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원리가 호수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씨족사회는 '미개사회'가 아니라 고도의 사회시스템이라고 말해야 한다.(74족)

국가의 출현을 억제하는 원리로서의 호수성. 그것은 한편으로 국가를 넘어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려는 고진의 이론적 시도는 바로 이에 대한 주목에서 시작된다고 보아도 좋겠다. 이 대목을 <세계사의 구조>에서 내가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12. 12. 29.

 

 

 

P.S. 고진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참고하고 있는 책 대다수가 번역본이라는 점이다(우리에게 '고진' 같은 비평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도 나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떠먹을 '수프'가 없는 것이다). 인류학 쪽 저작들도 마찬가지인데, 씨족사회와 정주혁명을 다룬 장에서는 특히 마샬 살린스의 <석기시대 경제학>, 말리노프스키의 <서태평양의 원양항해자>,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구조> 등이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게 유감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는 수 없이 <석기시대 경제학>은 원서를 주문했다. 말리노프스키와 레비스트로스의 책은 분량이 방대해 아직 엄두를 못 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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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리는 주말에 물먹은 창밖을 내다보는 정도면 나쁘지 않은 운수다. 유튜브에서 토크 프로그램들을 연이어 들으며 잠시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다 '행복'에 대한 페이퍼도 하나 써둔다. 최근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다시 읽은 게 계기가 돼 시셀라 복의 <행복학 개론>(이매진, 2012)의 한 장을 읽었다(지난 주말의 일이다). 저자의 이름은 생소하지만 아버지 군나르 뮈르달과 어머니 알바 뮈르달이 모두 노벨상 수상자이고 남편 데릭 복은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20여 년간 지낸 지식인이다. 국내엔 <안락사 논쟁>(책세상, 1999)의 공저자로 먼저 소개됐다.

 

 

번역본의 부제가 '프로이트에서 뇌과학까지, 불안한 시대의 행복 인문학'이라고 돼 있는데, 원제는 <행복의 탐구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뇌과학까지>다. '행복론의 역사'를 적당한 분량으로 정리해주는 책이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아주 요긴한 '개론'에 값한다.

 

 

 

내가 읽은 건 7장 지속성('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까')인데, 프로이트와 러셀의 대조되는 행복론을 다루고 있다. 우연찮게도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과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 1930년 같은 해에 출간됐다(번역본에는 <문명 속의 불안>으로 표기됐다). 두 사람의 입장을 표나게 드러내주는 문구가 저자가 에피그라프로 삼은 "'창조' 계획에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프로이트)와 "불행한 사람들도 대부분 제대로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이 책을 썼다."(러셀)이다.

 

두 사람이 너무나 상반된 견해를 제출한 셈인데, "두 책은 흥미를 갖는 독자가 달라서, 한 독자가 두 책을 모두 읽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나도 좀 예외적인 독자에 속할 모양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차이점만 가졌던 건 아니다. "둘 다 무신론자로 인류와 내세에 관한 신의 의도 같은 종교적 믿음은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야 지속적인 행복은 이 땅 위의 삶하고만 관련되는 이야기였다."(186쪽)

 

그럼에도 기본적인 입장 차이는 확연하다. 저자는 그것이 행복의 지속성에 관한 견해차라고 짚는다.

지속적인 행복이 가능한가를 놓고 두 사람은 생각이 갈린다. 프로이트는 인간 본성에 잠재돼 있는 공격적인 본능 때문에 행복에 관한 모든 희망은 부질없다고 결론 내렸는데, 러셀은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웬만한 행운만 있으면 행복을 얻는 것 또는 '정복하는 것'은 저마다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186쪽)

게다가 행복에 대한 정의도 좀 달랐다. 프로이는 '좁은 쾌락주의'를 주장했고(그에게 행복은 쾌락원칙의 충족이다) 러셀은 '좀더 복잡한 에우다이모니아적 행복관'을 갖고 있었다. 쾌락이 행복을 낳기는 하지만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라는 식이다. 프로이트의 비관적인 숙명론과는 다르게 러셀의 포괄적인 행복론은 사랑과 보람 있는 일 등을 통해서 행복이라는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고 본다.

러셀은 사랑과 일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찬미했지만, 프로이트는 두 가지가 다 행복의 조건으로 알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할 때처럼 상처받기 쉬운 때도 없다. 사랑하는 대상이나 그 대상을 잃어버릴 때만큼 속절없이 불행할 때도 없다"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또 프로이트가 보기에 일의 즐거움이란 불행하게도 적은 수의 사람만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한다.(190쪽)

저자는 프로이트의 비관론이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문명이 재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낌새를 보면서 더 강화됐을 거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고 여러 차례 구강암 수술을 받으면서 육체적 고통 속에서 노년을 보내야 했다. 애초에 <문명의 불행>이라고 지으려고 했던 책의 제목 자체가 "프로이트가 말년에 겪은 불운과 불행을 모두 잘 보여주고 있다."

 

앞표지

 

러셀의 행복론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썼기에 나중에 올려놓기로 하고, 번역본의 한 대목에 대해서만 부연한다. 프로이트와 다르게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 희망을 걸었는데, <행복의 정복>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시셀라 복의 인용이다.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 여기며 우주가 보여주는 장관과 그것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 나중에 올 존재들과 자신이 완전히 분리돼 있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최고의 기쁨은 이렇게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데서 나온다.(188쪽)

이 대목에 대해 저자는 "바로 프로이트가 '대양적 느낌'의 반영이라고 본 것이다. '대양적 느낌은 어린아이가 세계와 자신이 연결돼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라고 지적한다. <문명 속의 불만>의 서두에서 프로이트가 로맹 롤랑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며 '대양적 느낌'이 종교적 심성의 바탕인 듯하다고 한 것을 염두에 둔 지적이다(프로이트 자신은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최고의 기쁨은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데서 나온다"는 러셀의 말이 종교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라는 게 저자의 물음이다.

 

 

시셀라 복은 이 질문에 대해 "테야르라면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라고 답한다(번역본에는 괄호안에 묶였는데, 원저에는 각주로 처리돼 있다). '테야르'라고만 표기한 건 오류인데, 프랑스의 고생물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가톨릭 사제이기도 한 <인간현상>의 저자 '테야르 드 샤르댕'을 가리킨다('샤르댕'이나 '드 샤르댕'이라면 또 몰라도 '테야르'는 뭔가?). 샤르댕은 <행복에 관하여>란 얇은 책에서 '얼추 종교적'인 러셀의 말을 인용한 다음에 이런 식으로 평한다. 러셀은 '유물론자'라서 자기보다 더 큰 뭔가와 하나가 되는 게 우리보다 더 큰 존재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고. 즉 러셀은 '자신이 신자인 줄 모르는 무신론자'라는 게 샤르댕이 촌평이겠다. 하지만 '대양적 느낌'을 '종교적 숭배'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인지는 더 생각해볼 문제다...

 

1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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