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리는 주말에 물먹은 창밖을 내다보는 정도면 나쁘지 않은 운수다. 유튜브에서 토크 프로그램들을 연이어 들으며 잠시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다 '행복'에 대한 페이퍼도 하나 써둔다. 최근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다시 읽은 게 계기가 돼 시셀라 복의 <행복학 개론>(이매진, 2012)의 한 장을 읽었다(지난 주말의 일이다). 저자의 이름은 생소하지만 아버지 군나르 뮈르달과 어머니 알바 뮈르달이 모두 노벨상 수상자이고 남편 데릭 복은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20여 년간 지낸 지식인이다. 국내엔 <안락사 논쟁>(책세상, 1999)의 공저자로 먼저 소개됐다.

 

 

번역본의 부제가 '프로이트에서 뇌과학까지, 불안한 시대의 행복 인문학'이라고 돼 있는데, 원제는 <행복의 탐구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뇌과학까지>다. '행복론의 역사'를 적당한 분량으로 정리해주는 책이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아주 요긴한 '개론'에 값한다.

 

 

 

내가 읽은 건 7장 지속성('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까')인데, 프로이트와 러셀의 대조되는 행복론을 다루고 있다. 우연찮게도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과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 1930년 같은 해에 출간됐다(번역본에는 <문명 속의 불안>으로 표기됐다). 두 사람의 입장을 표나게 드러내주는 문구가 저자가 에피그라프로 삼은 "'창조' 계획에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프로이트)와 "불행한 사람들도 대부분 제대로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이 책을 썼다."(러셀)이다.

 

두 사람이 너무나 상반된 견해를 제출한 셈인데, "두 책은 흥미를 갖는 독자가 달라서, 한 독자가 두 책을 모두 읽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나도 좀 예외적인 독자에 속할 모양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차이점만 가졌던 건 아니다. "둘 다 무신론자로 인류와 내세에 관한 신의 의도 같은 종교적 믿음은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야 지속적인 행복은 이 땅 위의 삶하고만 관련되는 이야기였다."(186쪽)

 

그럼에도 기본적인 입장 차이는 확연하다. 저자는 그것이 행복의 지속성에 관한 견해차라고 짚는다.

지속적인 행복이 가능한가를 놓고 두 사람은 생각이 갈린다. 프로이트는 인간 본성에 잠재돼 있는 공격적인 본능 때문에 행복에 관한 모든 희망은 부질없다고 결론 내렸는데, 러셀은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웬만한 행운만 있으면 행복을 얻는 것 또는 '정복하는 것'은 저마다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186쪽)

게다가 행복에 대한 정의도 좀 달랐다. 프로이는 '좁은 쾌락주의'를 주장했고(그에게 행복은 쾌락원칙의 충족이다) 러셀은 '좀더 복잡한 에우다이모니아적 행복관'을 갖고 있었다. 쾌락이 행복을 낳기는 하지만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라는 식이다. 프로이트의 비관적인 숙명론과는 다르게 러셀의 포괄적인 행복론은 사랑과 보람 있는 일 등을 통해서 행복이라는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고 본다.

러셀은 사랑과 일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찬미했지만, 프로이트는 두 가지가 다 행복의 조건으로 알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할 때처럼 상처받기 쉬운 때도 없다. 사랑하는 대상이나 그 대상을 잃어버릴 때만큼 속절없이 불행할 때도 없다"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또 프로이트가 보기에 일의 즐거움이란 불행하게도 적은 수의 사람만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한다.(190쪽)

저자는 프로이트의 비관론이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문명이 재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낌새를 보면서 더 강화됐을 거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고 여러 차례 구강암 수술을 받으면서 육체적 고통 속에서 노년을 보내야 했다. 애초에 <문명의 불행>이라고 지으려고 했던 책의 제목 자체가 "프로이트가 말년에 겪은 불운과 불행을 모두 잘 보여주고 있다."

 

앞표지

 

러셀의 행복론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썼기에 나중에 올려놓기로 하고, 번역본의 한 대목에 대해서만 부연한다. 프로이트와 다르게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 희망을 걸었는데, <행복의 정복>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시셀라 복의 인용이다.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 여기며 우주가 보여주는 장관과 그것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 나중에 올 존재들과 자신이 완전히 분리돼 있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최고의 기쁨은 이렇게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데서 나온다.(188쪽)

이 대목에 대해 저자는 "바로 프로이트가 '대양적 느낌'의 반영이라고 본 것이다. '대양적 느낌은 어린아이가 세계와 자신이 연결돼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라고 지적한다. <문명 속의 불만>의 서두에서 프로이트가 로맹 롤랑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며 '대양적 느낌'이 종교적 심성의 바탕인 듯하다고 한 것을 염두에 둔 지적이다(프로이트 자신은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최고의 기쁨은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데서 나온다"는 러셀의 말이 종교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라는 게 저자의 물음이다.

 

 

시셀라 복은 이 질문에 대해 "테야르라면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라고 답한다(번역본에는 괄호안에 묶였는데, 원저에는 각주로 처리돼 있다). '테야르'라고만 표기한 건 오류인데, 프랑스의 고생물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가톨릭 사제이기도 한 <인간현상>의 저자 '테야르 드 샤르댕'을 가리킨다('샤르댕'이나 '드 샤르댕'이라면 또 몰라도 '테야르'는 뭔가?). 샤르댕은 <행복에 관하여>란 얇은 책에서 '얼추 종교적'인 러셀의 말을 인용한 다음에 이런 식으로 평한다. 러셀은 '유물론자'라서 자기보다 더 큰 뭔가와 하나가 되는 게 우리보다 더 큰 존재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고. 즉 러셀은 '자신이 신자인 줄 모르는 무신론자'라는 게 샤르댕이 촌평이겠다. 하지만 '대양적 느낌'을 '종교적 숭배'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인지는 더 생각해볼 문제다...

 

1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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