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모드에 빠져 있다가 조금 기운을 내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을 펼쳤다. 화급한 일이 너무 많다 보면 자포자기가 돼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저자는 서장에서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추리소설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 얘기를 꺼내는데, 기억엔 초등학교 때 읽은 듯하다(그러니 30년 여년 전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펭귄클래식으로 새로 나온 <바스커빌 가문의 개>(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해설에 따르면, "여러 측면에서 <바스커빌 가문의 개>는 진정한 네오고딕 양식의 탐정소설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공포영화로 만든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고, 모든 홈즈 소설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흠,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하군. 덕분에 초등학교 3학년 때 반장 겸 독서부장을 하면서 학급문고로 읽은, 나폴레옹 솔로 주인공의 첩보소설들도 잠시 떠올렸다. 원작자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읽으면 얼추 상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JP 모건이 미국 남북전쟁 때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읽다가(북군에게 총을 사들였다가 6배의 가격으로 되팔았다. "한마디로 영약하기 짝이 없는 사기꾼 일당"이었다)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인물과사상사, 2010)에는 어떻게 나오나 살펴봤다. 3권 '남북전쟁과 제국의 탄생'에 잠깐 이름이 비치는데, 론 처너의 책 <모건가>(1990)을 인용하고 있다(참고문헌에 서지가 빠져 있다. <금융제국 JP 모건>(플래닛, 2007)으로 번역된 책이다). 존 피어폰트 모건(1837-1913)에 대한 얘기다.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은, 그는 남북전쟁을 봉사의 기회가 아닌 돈벌이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다... 여느 유복한 집안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피어폰트도 게티즈버그전투 이후 징집되었으나 300달러를 주고 자신의 대역을 고용했다. 불공정한 이 일상적 관행은 1853년 7월에 일어난 징집폭동의 원인이 되었다."

징집폭동이란 링컨의 징집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규모 항의시위가 일부 지역에서 폭동으로 전화된 걸 말한다. 또 한 대목은 허버트 스펜서와 윌리엄 섬너의 사회진화론의 유행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187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에서는 스펜서의 학설이 내리막길에 서게 됐지만 미국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1860년에서 1900년까지 50만권 가량이 팔려나갔는데, 요즘 기준으론 수백만 권에 해당한다고. 이유는 짐작대로, 부자들이나 부자 지망생들에게 어필했기 때문("부자 되세요!"가 인사말인 사회에서 스펜서나 섬너의 책이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이미 체화하고 있기 때문일까?). 

"존 D. 록펠러나 J.P. 모건 등과 같은 거대 부자들이 '가난에서 부유함으로(from rags to riches)'의 본보기로 부각되면서 빈곤은 가난한 사람들의 결함 때문이라는 사상이 풍미했다."

'미국의 스펜서'라고도 불렸다는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1840-1910)는 어떤 인물인가?  

엄격한 청교도인 섬너는 2년간 미국 성공회의 목사로 목회를 한 뒤 1872년 예일대 정치학 및 사회과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대표작으로는 <사회계급들이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것>(1883), <사회적 관행>(1906) 등이 있다.

당면한 사회문제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거나 과학적인 방법으로 진보를 이룩할 수 없다고 믿었다는 섬너의 주장을 강준만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특별한 창조라고 하는 종교적 교리를 포기하면서 확신에 찬 진화론자가 된 섬너는 노골적인 '부자옹호론'을 폈다. 그는 "백만장자는 자연도태의 산물"이며, 그들은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선정된 사회의  대행자로 보는 것이 마땅하며, 그들의 존재는 사회적으로도 이로운 것이라고 단언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로도 분류되는 섬너에게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걸로 간주된다.  

"인간의 삶에 따르는 고통은 자연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의 투쟁을 통해서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고통을 받는다 해서 그것을 이웃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누구도 남에게 도움을 청할 권리가 없고 또 어느 누구도 타인을 도와야 할 부담을 지지 않는다."

몰인정한가? 하지만 더 나쁜 사회는 자연적인 경쟁을 독려하는 사회가 아니라 '강자' 혹은 '부자'를 일방적으로 보호하는 사회다. <미국인의 역사>(비봉출판사, 1998)의 저자 앤디 브링클리의 지적이다.  

"사회적 진화론은 대기업 중심 경제현실과 많은 관련이 있는 이념은 아니었다. 동시에 기업가들은 경쟁과 자유시장의 덕목을 찬양하면서, 자신들을 경쟁에서 보호하고 시장의 자연적 기능을 자신들의 거대한 기업연합의 통제로 대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스펜서와 섬너가 찬양하고 건전한 진보의 근원이라 불렸던 사악할 정도로 투쟁적인 경쟁은 사실 미국 기업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면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권용립 교수에 따르면, 섬너의 사회진화론은 '개인 책임주의'를 역설한 것으로 그는 '자연적 독점'에는 찬성했지만 보호관세나 제국주의 정책 같은 '인위적 독점'에는 반대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인 그가 '반제국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사회진화론의 양면성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사회진화론은 쇠퇴했는가? 경제학자 갤브레이스의 대답은 다르다. "아무도 스펜서나 섬너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아직도 부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거지에게 자선을 베푸는 행위를 억제시키고 있다."(<불확실성의 시대>)  

이런 정도까지 읽고 윌리엄 섬너를 검색해보다가 관련 신간이 나온 걸 알게 됐다. 미국 대공황기의 역사를 다시 짚어본 애미티 슐래스의 <잊혀진 사람>(리더스북, 2010)이다. 뉴딜 정책의 허와 실을 분석하고 있는 책으로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당시 뉴딜 추진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 대신 '유익한 손'을 옹호했다는게 저자의 시각이다. 자유주의 경제를 비도덕적으로 여기며 유권자를 중요시하는 경제정책을 펼쳤다는 것. 소련의 집산주의 모델에서 영향을 받은 전국부흥청이나 테네시계곡개발공사(TVA) 등 규제·원조·구호 기관을 통한 대규모 프로젝트는 미국경제에 치명적인 손실을 초래했다고 본다.

일부 정책들은 경제에 활력을 넣으며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거기에 투입된 정부 지출을 감안할 때 완벽하게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경제 회복에 기여하는 민간 부문의 활동을 억누르는 다양한 제도와 계속되는 세금신설로 기업을 압박했고 기업 활동은 더 위축됐다. 결국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한 뉴딜 정책이 대공황을 더 깊고 오래 유지시키는 데 일조한 셈이라는게 저자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뉴딜 시대의 희생양은 누구인가. 저자는 당시 앨런 그린스펀 격인 앤드루 멜런을 거론한다. 그는 하딩과 쿨리지 및 후버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지내며 시장주의를 고수했지만 정부는 그를 기소했다. 또 뉴딜 담당자들이 대폭락의 책임을 전가한 유틸리티 업계의 거물 새뮤얼 인설, TVA의 전력산업 국유화에 대항했던 민간회사 커먼웰스앤드서던의 웬델 윌키 등도 희생양으로 거론한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시기에 정부정책으로 어린 가축까지 죽여야 했던 농민, 양계업자 등 유명무명의 사람들도 예로 든다. 저자는 이들을 '잊혀진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거시경제적 집단들 틈에 끼여 잊혀져 버린 미시경제적 주체'라고 설명한다.

대공황이 시작되기 50여년 전인 1883년.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예일대 교수는 '잊혀진 사람(The Forgotten Man)'이라는 논문을 통해 정부정책이 평범한 시민들에게 사회적 프로젝트의 비용을 부담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책의 제목 '잊혀진 사람'은 여기서 나왔다.(한국일보, 오미환기자)

 

하여, 예기치 않게도 오늘의 인물은 윌리엄 섬너, 오늘의 상식용어는 '잊혀진 사람'이 됐다. 다시 <제1권력>으로 돌아가거나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다시 읽거나,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어야겠다. 아니 그보다 더 급한 일들을 빨리 처리해야 할 텐데... 

10. 04. 11.  

P.S. '잊혀진 사람' 대신에 '잊혀진 여인(The Forgotten Woman)'을 따로 고르자면, 히로세 다카시가 헐리우드 영화사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언급한 '잇걸It Girl' 클라라 보우(1905-1965)다.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인 육체파 배우였다고. 어쩐지 이미지는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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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4-12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인가 2008년 무렵 이상돈(중앙대 법대 교수)이 월간조선에 연재한 글 중에 잊혀진 사람을 꽤 길게 언급하면서 뉴딜을 비판하더군요.정부의 개입을 반대하고 시장과 기업의 자유를 옹호하는 측에서 보는 뉴딜관입니다.물론 좌파들이 뉴딜을 비판하는 것은 각도가 또 다르지요.

로쟈 2010-04-12 17:29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정상적인 보수라면 '4대강'에도 반대해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입니다. 좌파와는 다른 이유에서요...
 
나루케 마코토-김훈-기타노 다케시

알라딘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마쓰오카 세이고의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추수밭, 2010)를 읽었다. 지난 금요일에 서점에 잠깐 들렀다가 무슨 책인가 싶어 펼쳐봤는데, 우연히도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링크를 늘리는 편집적 독서법'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니시다 기타로의 책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책과 오오시마 유키코의 만화책과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책과 롤랑 바르트의 철학책이 있다고 합시다. 제가 이 책들을 읽고 나면 거기에는 다양한 '메모' '강조' '내용 분류' '인용 대상'이 남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별도의 노트에 각 항목별로 옮겨놓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작업은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해보면 알게 됩니다만, 니시다 기타로와 타르코프스키와 오오시마 유키코와 에도가와 란포와 롤랑 바르트의 일부 구절이나 문장은 놀랄 정도로 같은 항목에 속하거나 인접해 있습니다.(156쪽) 

이전에 읽은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 권을 동시에 읽어라>(뜨인돌, 2009)와는 종류가 좀 다른 책이란 생각이 들어서 수중에 넣기로 했다. 가령 나루케와 달리 마쓰오카는 문학을 존중한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꼭 읽었으면 하는 책'으로 추천하는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에피스드도 털어놓고 있다. 나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읽은 소설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여하튼 타르코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그날 버스 안에서 반쯤 읽고, 오늘 저녁을 먹고 나머지 반을 읽었다. '지의 거인'(나루케 마코토)이나 '독서의 신'이란 평판을 얻고 있는 저자의 독서법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책쟁이'나 '독서가'라면 다른 명망가의 서재를 한번쯤 엿보고 싶은 호기심도 갖고 있는 것이니까. 읽다 보니 '다독술'보다는 그의 '편집공학', 그러니까 저작술이 궁금해서 <만들어진 일본>(프로네시스, 2008)이나 <지의 편집공학>(지식의숲, 2006)도 읽어보려 한다. 다독술 자체는 크게 새로울 게 없지만, 요즘처럼 원고에 치일 때 도움을 받을 만한 뭔까 뾰족한 (편집공학적) 글쓰기 수단이 있을까 싶어서다. 그런 게 있다면 좀 알아두어야겠다(밀린 일들 때문에 휴일마다 '우울증'에 시달리느니!).  

이미 리뷰들이 많이 올라온 책이라 내용에 대해선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두 가지 생각할 거리와 오류에 대한 지적만 챙겨놓도록 한다. 생각할 거리란 건 독서문화와 관련된 것인데, 먼저 북클럽 얘기. 마쓰오카에 따르면 서양과 달리 일본에서도 별로 발달하지 못한 게 북클럽이다.  

"북클럽은 일종의 독자 조직입니다. 물론 책을 읽고 책을 사랑하기 위한 조직이나 모임입니다만, 여기에서 책을 공동 구입하거나 배포하는 행위가 일어납니다. 독일에서는 연간 2,000만 권 정도가 북클럽을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도 이런 북클럽 회원이 약 1,000만 명 이상 활동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258쪽)

일본에서는 왜 이런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는가란 원인을 분석하면서 마쓰오카는 그 중 한 가지로 교육 문제를 든다. "서양에서는 어린이 교육의 중심을 '다독'과 '토의'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260쪽)라는 게 그의 주장이고 나도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경쟁력 교육'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독서 교육'이나 제대로 하면 좋겠다.  

그리고 역자와의 대담에 나오는 것인데, 일본의 대형서점 마루젠 본점에 '마쓰마루' 서점을 오픈했다는 얘기. 마쓰오카의 '마쓰'와 마루젠의 '마루'를 결합한 이름으로 책의 분류나 배열을 모두 마쓰오카가 기획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일반서점의 도서 분류법 대신 새로운 방법으로 책을 배열하고 있습니다. 잡지나 단행본, 문고판, 고서, 수입서가 하나의 책장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책이 똑바로 꽂혀 있지 않고 일부러 옆으로 눕혀 놓은 책도 있고, 겹쳐서 꽂아 뒤의 책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같은 책이 여기저기에 여러 권 꽂혀 있기도 합니다."(293쪽) 

개인 서가라면 모를까 일반서점에서 이런 독창적인 분류/배열을 시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학로의 이음책방 정도가 떠오르는데, 규모가 너무 작다는 아쉬움이 있다. 서점마다 할인율이나 인테리어로 경쟁하기보다는 이런 개성적인 분류/배열 방식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오류라고 한 건 대단한 게 아니라 표기와 정보에 관한 것이다. 73쪽에서 니체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루 자로메'는 '루 살로메'가 우리의 통용 표기이고, 156쪽 각주에서 타르코프스키 소개에 나오는 <버찌 통조림>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작품이다. 무얼 잘못 읽어야 '버찌 통조림'이 되는 것인지? '벤야민'(73쪽)과 '베냐민'(214쪽) 표기에 혼동이 있고, 211쪽 각주에서 푸코의 책 <광기와 비이성>은 무얼 말하는지 모르겠다. <광기의 역사>라면 일본에서도 그렇게 번역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215쪽, 도나 해러웨이의 <원숭이와 여자와 사이보그>는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2002)로 번역돼 있다.  

끝으로, 일본 출판계에 대한 부러움을 갖게 한 책 두 권. 사실 일본책을 종종 들여다보면서 얻는 수확은 서지정보이다. 때론 본문보다도 그러한 '디테일'에 더 이끌리기도 한다. 마쓰오카의 강점은 과학책도 열심히 많이 읽었다는 것인데(하지만 대학은 불문과에 진학하는 '바보짓'을 했다), 그건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다. 어떤 식으로 읽었나?  

"처음에는 이른바 명저라고 불리는 책을 구하거나 도서관에서 찾아 읽어야 할 목록을 만듭니다. 양자역학은 폴 디락이나 도모나가 신이치로입니다. 전자기학은 역시 파인만이고, 상대성이론이라면 아인슈타인이지요."(71쪽) 

 

이런 책들이 처음엔 '이빨'도 들어가지 않지만 다른 참고서나 비슷한 유형의 책으로 보충해나간다는 것.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1965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의 물리학자라 한다. 국내에도 <물리학이란 무엇인가>(사이언스북스, 2002),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범양사, 1994), <양자역학적 세계상>(전파과학사, 1974) 등이 소개돼 있다. 파인만이나 아인슈타인은 물론 국내에도 여러 책들이 나와 있다.    

  

문제는 폴 디락. 교양과학서에서 자주 이름을 접하지만 국내에 디락의 책이나 강의는 소개돼 있지 않다. 찾아보니 일본에서는 폴 디락의 <양자역학>이 1959년에 이와나미에서 번역돼 나왔다. 이게 현재의 '수준차'가 아닌가 싶다. 한 끝 차이일까? 사실을 말하면 두 끝 이상의 차이다. 자신의 독서일기 <센야센사쓰(千夜千冊)>(전7권과 부록으로 일단 간행됨)에 대해 소개하면서 마쓰오카가 다독술의 핵심인 '키북'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그리고 제3권의 10장 '이미지의 극장'에서는 발트루 사이티스의 <환상의 중세>, 루돌프 비트코베어의 <이미지와 상징>, 프란시스 예이츠의 <세계극장>, 그리고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파사주)와 스기우라 고헤이의 <형태의 탄생>이지요. 이 책들에서는 몇 백 권의 책이 연쇄적이고 중층적으로 연결됩니다."(214쪽)

  

거명된 책 중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형태의 탄생>은 우리에게도 소개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권은 먼 나라의 책들이다(비트코베어의 다른 책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원리>(대우출판사, 1997)는 검색이 된다).   

특히 '리투아니아의 상징주의 시인이자 번역가'로 소개되는 '발트루 사이티스Baltru Saitis'란 이름이 눈에 밟히는데, 일단 이름부터가 잘못 표기됐다. '요르기스 발트루사이티스Jorgis Baltrusaitis'다('발트루샤이티스'라고 읽는 게 발음에는 더 가깝다). 이름도 오기할 정도로 생소하니 소개됐을 리는 만무하다. 영어권에도 형태에 관한 에세이 한 권이 소개돼 있는 정도이고, 불어로나 책들이 좀 나와 있다. 아래가 불어본 <환상의 중세>. 이게 일어본으로는 있다는 얘기다.  

  

이런 것도 '격차'라면 앞으로 더 좁혀지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일본에서도 잘 안되고 있다는 북클럽을 좀 활성화해볼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고민들을 해보면 좋겠다... 

10. 04. 04. 

P.S. 독서가로서 마쓰오카 세이고가 떠올려주는 국내인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과 장석주 문학평론가다. 두 사람의 편집공학과 다독술을 결합하면 얼추 마쓰오카가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한기호 소장이 마쓰오카에 대해 소개한 칼럼이 있기에 참고삼아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8. 04)[한기호의 출판전망대] 매너리즘 사고를 뒤집고 싶다면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 4학년 때 아버지가 상당한 빚을 남겨놓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매달 대졸 초임 월급의 2.5배 정도를 갚아도 얼추 5년이 걸릴 정도의 거액이었다. 어머니는 울며불며 네가 빚을 갚아달라고 매달렸다. 순간 이것으로 인생 끝났구나 하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여러 방안을 모색하다 그는 광고대리점에 취직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대리점 사장은 급여는 높게 책정할 수 없지만 커미션(마진)은 나름대로 생각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광고 하나씩 따내서는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생각해낸 것이 두 개씩 한 쌍의 광고를 따내는 것이었다. 맥스 팬터와 전일본항공, 산토리위스키와 토라야, 대의류옥과 BIC볼펜, 학생 원호회와 게키단 사계 등의 조합이었다. 화장품(맥스 팬터)과 비행기 타기(전일본항공)에서 ‘나들이’라는 연결점을 찾아냈듯이 두 회사나 두 제품 사이의 ‘어떠한 관계’, 즉 한 쌍으로 묶을 만한 무언가를 찾아낸 것이다.

문제는 한 쌍을 어떻게 관계 설정하는가였다. 그래서 밤마다 타깃을 몇 개인가 선정해 놓고 한 쌍을 선택해서 기획안을 짰다. 그러자면 전체 스케치도 필요했고 때로는 가상 캐치프레이즈나 카피도 붙여야 했다. 매일 철야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밤을 새워가며 아침까지 준비했다. 준비가 끝나면 두 회사에 기획서와 전체 스케치를 갖고 찾아갔다. 절대 사적인 인맥은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주위의 소개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일은 상상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그렇게 즐기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5년보다 2년이나 빨리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돈보다 더 소중한, 인생 전체를 좌우할 무척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나아가 어떤 기업이나 상품(제품)은 모두 ‘새로운 관계의 상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실태와 책과 정보는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어서 좀이 쑤신 상태이다 보니 정보는 절대로 혼자서 존재할 수 없었다.

오늘날 하나의 업종은 종적 관계로, 시장은 철저히 세분화되어 있어 날개를 펼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날개를 달아도 어디로 날아가면 좋을지를 알기 어렵다. 기업과 상품뿐 아니라 학문과 기술도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어 하지만 좀처럼 연결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광고를 따낸 경험을 통해 이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어떤 질곡이 있음을 느꼈고 그것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어떤 것이든 ‘의미’를 갖고 있겠지만, 현실 사회와 경제에는 이러한 의미가 자유롭게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어떤 영역의 어떠한 사물과 사정에도 적합한 ‘의미 확장 방법’을 생각해서 그 방법을 조금씩 형태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에디팅 프로세스(Editing Process)’라고 말할 만한 의미의 변용과정이 언제나 다이내믹하게, 또한 분류와 영역을 넘어서서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편집공학’(Editorial Engineering)이다. 이 사람은 <지知의 편집공학>(넥서스), <지식의 편집>(이학사) 등의 저서로 국내에서도 지명도를 얻고 있는 마쓰오카 세이고다. 녹슨 가슴과 매너리즘에 빠진 사고 습관을 확 뜯어고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여름에 한번 그의 책을 펼쳐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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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05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 떠오르는 페이퍼네요. 경영할만한 지식도 없는데 무슨 소용에 닿을까 싶어 회의하면서도 각 장을 덮을 때마다 이 책의 가장 훌륭한 리뷰는 실천이라고 다짐했었는데 방법적인 면에서 '편집공학'과 비슷한 것 같아요. 로쟈님의 마지막 문장 특히 '강력하게'에 기대어 반드시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10-04-05 10: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산도 편집공학의 원조쯤 되겠네요. '강력하게'는 제 추천은 아니지만, 지식생산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해요...

2010-04-05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6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상 위에 가득 놓여 있는 책들 가운데, 파란여우님의 <깐깐한 독서본능>(21세기북스, 2009)을 잠시 손에 들었다가 추천사를 쓰기 위해 읽은 대목 중 하나를 다시 읽었다. '파란여우가 생각하는 책'이란 꼭지다. 저자가 자주(?) '우려먹는 이야기'이지만, 펼칠 때마다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이 책이 저자의 '실존을 말하는 책'이기도 하다는 걸 시사해주는 대목이기도 해서다. 알라딘에는 이 책의 '미리보기'가 뜨지 않아서, 한 독자의 재량으로 (저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내가 읽은 대목을 옮겨놓는다. 저자의 말대로, "고향을 잃은 사람, 고향의 정적들로부터 떠나온 사람, 진정성을 의심받고 마음을 다한 기도가 하늘에 닿지 못해 부서진 사람, 세상의 바깥으로 홀로 던져진 사람"에게, 혹은 "종종 심허증으로 앓아눕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분들에게 책을 권한다. <깐깐한 독서본능>을 권한다...  

 

“가련한 넋이여! 짐을 꾸려 토르네오로 떠나자. 어쩌면 더욱 멀리라도 가자. 발틱해의 맨 끝까지라도. 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더욱 더 멀리. 북극에 가서 살자. 거기 태양은 비스듬히 땅을 비추고, 낮과 밤의 느린 교대는 변화를 없애고 허무의 반쪽인 단조로움을 북돋아 준다. 거기서 우리 오래도록 어둠의 미역을 감을 수 있을 것이요. 그동안,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극광은 때때로 우리에게 지옥 불꽃의 반사광처럼 그 장밋빛 햇살 다발을 보내 주리라! 마침내 내 넋의 말문이 터지더니만 슬기롭게도 내게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어딘들 상관없어! 다만 그곳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_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 



자, 이제 내 얘기를 좀 하자.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빗대면 나에게도 책의 역사가 있다. 나도 이거 언젠가는 쓸 테지만(모르죠, 카프카의 유언처럼 모두 불태워 버려! 이런 변덕이 없으란 법도) 내 삶에서의 책은 곧 세상이다. 그것도 그냥 세상이 아니고 새 세상이다. 또 우려먹는 이야긴데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시기는 마흔 살이 된 어느 날부터였다. 남들 마흔과 내 마흔은 다르다. 나는 마흔 살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었고 직장생활도 변변치 못했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객(客) 노릇을 했으니 절친도 없었다. 마흔이 되니까 허무했다. 나는 읽지 않는 책을 사들였다. 단지 샀을 뿐이다. 내겐 장식용이라도 뭔가가 곁에 필요했다. 하필이면 그것이 책이었다. 사들인 책을 책상 위에 쌓아놓고 스위트콘과 양송이와 양파, 피망과 소시지, 블랙 올리브와 피자치즈 등의 토핑이 풍부한 책의 화려한 표지를 눈요기하며 영혼의 허기를 채웠다.   

 

폼 잡고 싶은 허영기를 선풍기 날개처럼 윙윙 돌리는 욕망으로 맨 처음 산 것이 ≪완당평전≫이었는데, 완당의 <세한도(歲寒圖)>가 내게 있어 세한도(歲閑渡)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보들레르가 이 세상 바깥의 그 어디로든 떠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한 절규, 난 그때 그런 심각한 상태였다. 돈도 없고 빽도 없이, 속된 말로 미모도 재산도 권력도 그리고 연인도 없이 시골 면사무소로 출근하는 늙은 여자에게 누가 애틋한 눈길을 주겠는가. 세상 인심이란 것이 내 주머니가 두둑하면 파리, 모기가 배고픈 상어 떼처럼 달려들고 빈 주머니가 되면 빈대까지 나가 버린다. 함께 술 먹을 상대로는 좋았는지 만날 술타령은 원 없이 했다. 변두리에 술집 하나 차릴 만한 돈이 내 지갑을 떠났다. 허무하고 허탈하여 허허로운 때에 책은 내게 왔다. 첫 책인 ≪완당평전≫ 세 권을 읽으면서 다른 건 잊고 완당의 <세한도>만 내게 남았다. 압축완당이다. 고향을 잃은 사람, 고향의 정적들로부터 떠나온 사람, 진정성을 의심받고 마음을 다한 기도가 하늘에 닿지 못해 부서진 사람, 세상의 바깥으로 홀로 던져진 사람. 책은 불면의 밤을 붉은 포도주처럼 흥건히 위로했다.  

 

그때 내가 잠시 근무했던 면사무소 앞마당에는 수령이 백 년이 넘은 고로쇠나무가 있었다. 여름이 가고 쓸쓸한 가을을 지나 무덤덤하게 겨울을 보내고는 다시 봄을 맞는 동안, 늙은 나무는 출퇴근을 서두르는 키 작은 나를 등 굽은 할머니처럼 마중하고 배웅했다. 경칩을 전후한 이른 봄이 되면 종이컵에 담긴 수액이 직원들의 책상으로 배달되었는데 그 맛이 무척 달콤했다. 늙은 나무가 제 몸의 혈액을 외롭고 신산한 세상의 빈혈에 시달린 나를 다독였다. 나는 한 모금씩 천천히 혀를 입 안에서 굴려가며 아껴 마셨다. 세상은 팍팍했고 나는 춥고 허기졌다. 종종 심허증으로 앓아눕기도 했다. 완당의 <세한도>에 나오는 나무가 고로쇠라고 착각했다. 면사무소 앞마당 늙은 고로쇠나무는 내가 잃은 꿈, 간직하고 싶은 꿈을 알고 있었다. 고로쇠나무 아래에서 독백으로 흘린 내 꿈의 파편들을 나무는 말없이 바람에 쓸려 보냈다. 나는 종종 화가 났고 괴로웠고 외로웠다. 검은 상복 같은 정장을 즐겨 입고 기형도처럼 세상을 증오한다고 발광했다. 면사무소의 늙은 고로쇠나무는 내 삶의 어느 한 시점의 완벽한 증인이다.  

그리고 책이 내게 왔다. 뻥쟁이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풍요로운 수다를 듣고 수잔 손택의 윤택한 지성도 만났다. 이탁오를 읽는 동안에는 그의 고독에 전염되어 밤마다 한 모금씩 소주를 마셨다. 책을 읽기 전 온몸으로 세상을 관통하느라 생긴 상처에 책은 빨간약을 발라줬다. 나는 한 차례 쩌릿쩌릿 아프고 나서 새 세상의 문이 쾅쾅 열리는 것을 봤다.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은 없었지만 그것은 마법이었다. 황야에서 뒹굴던 여우는 널빤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툴렀다. 삐뚤빼뚤.  



“결국 인생의 여러 가지 경험들, 이리저리 찢겨지고 갈래갈래 조각난 경험들을 숙고해보건대 내가 참으로 실존의 책상에 임하는 것은 차라리 백지 앞에서, 나의 램프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어 책상 위에 펼쳐진 흰 페이지 앞에서이다. 그렇다. 내가 최대한의 실존, 팽팽한 실존, 앞을 향하여, 보다 앞을 향하여, 또 그 위를 향하여 긴장되어 있는 실존을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실존의 책상에서이다.”
_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중


바슐라르의 책상은 실존의 책상이다. 책상 앞의 나는 어둡고 습하고 아픈 곳을 한 번 더 응시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이 세상이라고 말한다. 책상 위에서 관념을 밝히는 촛불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실존을 밝히는 새 촛불을 켜라고 책은 일러준다. 팽팽한 스트레이트 미문 때문에 소설 말고 에세이를 쓰라고 권유받는 작가 김훈은 밥은 지엄하다고 말한다.   

실존을 말하지 않는 책은 사이비고, 상상력으로 위로해주지 않는 책은 관 속에 넣어야 하고, 최후의 질문조차 남기지 않는 책은 불쏘시개로 끝나야 한다. 밥 먹고 똥 싸고 욕하고 웃고 우는 조촐하고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 책이 열어준 새 세상에서 좀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09. 11. 22.  

P.S. 덧붙여, <깐깐한 독서본능>의 초고를 읽고 내가 쓴 추천사의 초안은 이랬다. 굵은 글씨가 뒷표지에 실렸다.

내가 거주하는 알라딘 마을은 책 마을이어서 모두가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수다를 떤다. ‘고수’도 많고 ‘강자’도 득실거린다. 하지만 이 마을의 ‘면장’이라면 단연 파란여우님이다. 염소치기 면장님이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마을 사람들은 늘 궁금해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 면장님이 드디어 책을 내신다! 당신은 마흔에서야 ‘지각독서인생’을 시작한 ‘종잡을 수 없는 독서가’가 내놓은 ‘뻥 과자’라고 부르지만, 그건 ‘뻥’이다. 책상물림이 아닌 ‘칼을 찬 독서가’의 용맹정진 독서기가 당차게 펼쳐진다. 도저하며 거침없다. 어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여기 한 독서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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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from 뻥 Magazine 2009-11-23 15:49 
    “세상이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인간들의 집단을 말하는 걸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가 있는 걸까요. 그 실체가 뭐가 됐든, 강하고 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나였지만, 호리키에게서 그런 소릴 듣고 나니 문득 ‘세상이란 건 널 두고 하는 말 아니야?’ 라는 말이 혀끝까지 튀어 나왔습니다.”            
 
 
2009-11-22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3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phie 2009-11-2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이루어지는 독서를 하시고 난 평이라 그런 것 같아요. 파란 여우님의 <깐깐한 독서본능> 꼽아놓겠습니다. 읽고 나니 왠지 흐뭇해요. ^^*

로쟈 2009-11-23 00:03   좋아요 0 | URL
네, 어떤 분위기의 책인지 소개가 좀 필요할 듯해서 옮겨놓았어요...

수유 2009-11-2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부러운 책이네요^^

로쟈 2009-11-23 16:12   좋아요 0 | URL
이 참에 저자 대열에 참여하심은?^^

펠릭스 2009-11-2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늘 궁금합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독서가)

치유 2009-11-25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경사가 왠지 우리 가족 경사처럼 행복합니다.
아이들 불러서 자랑시켜주고 흐뭇합니다.
여우님의 깐깐한 독서본능 대박기원~!

책읽는나무 2009-11-2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파란여우님이 '이장'님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단계가 더 높았었군요.^^
님의 글에서 이미 여우성님의 책을 읽은 듯하고,
좀 뭐랄까,
여우님의 모습이 눈에 잡히는 듯하여
마음이 좀 애틋하게 느껴지네요.
실은 내가 사는 이작은 동네 면사무소 한 켠에 여우성님이
고로쇠를 홀짝이고 계실 듯하여 확인하고픈 욕구도 생기구요.
암튼 얼른 사봐야겠어요.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뜨인돌, 2009)를 보면, 끄트머리에 저자가 책에 관한 자신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책은 버리지 않는다, 빌리지 않는다, 빌려주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자칭 '애서가'라고 해도 버린 책들이 몇 박스쯤 되고, 빌려주었다가 분실하거나 돌려받지 못한 책들도 꽤 되는 형편인지라 그의 '원칙주의'가 일면 부럽다. 책을 내버리지 않아도 좋을 만한 소장 공간을 확보하고 있고, 책을 빌리지 않아도 좋을 만한 재력도 갖고 있다는 얘기이니까. 그는 집에 1만 5천 권 가량을 소장하고 있고, 별장에도 그 두 배를 소장하고 있다니까 대략 장서수가 4만 5천 권은 되는 모양이다. 일본에서 장서가의 기준이 어찌 되는지 모르지만, 그 정도면 도서관 규모이고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에 견줄 만하다.   

그런 나루케가 수만 권의 장서 가운데 손꼽는 책이라면 분야에 관계없이 눈길이 갈 만한데, 역사서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 이야기>, 그리고 이와나미 서점에서 나온 <일본역사> 시리즈 등이고 경제서로는 노나카 이쿠지로의 <실패의 본질>, 마이클 포터의 <국가 경쟁 우위>가 필독서라고(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도 이들 경영서와 나란히 언급되고 있어서 이채롭다). 그렇듯 특별히 필독서로 거명되고 있어서 노나카 이쿠지로와 마이클 포터의 책을 검색해봤다. 내가 경영학에 과문해서 그렇지 세계적인 경영학자로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들이다.    

   

노나카는 '지식경영', '지식창조경영'을 주창한 경영학자로 이름이 높은 모양인데, 찾아보니 개인적으론 레스터 서로 등과 공저한 <지식사회의 미래>(매일경제신문사, 2001)에서 한번 대면해봤을 가능성이 있다. 예전에 '지식'이란 주제로 자료조사를 하면서 읽었던 책이다. <지식경영의 시대>(시그마프레스, 2003), <노나카의 지식경영>(21세기북스, 2009) 등 다수의 책이 국내엔 소개돼 있다. 나중에 다시 그런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손에 들어봄 직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경영석학'이라는 마이클 포터의 책도 나루케가 언급한 <국가 경쟁 우위>(21세기북스, 2009)를 비롯하여 '전략 3부작'이 모두 소개돼 있다. <국가 경쟁 우위>는 1135쪽 분량에 액면가가 6만원인 책이다. 이런 별세계도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지만, 세일즈포인트로 봐서는 알라디너들과 거의 무관한 책인 듯싶다.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마이클 포터는 ‘현대 글로벌 경제에서 지속적인 번영의 원천은 무엇인가’ ‘왜 어떤 국가의 특정 산업은 성공하고 다른 국가의 특정 산업은 실패하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미국, 독일, 일본, 한국(!) 등 주요 10개국을 대상으로 4년여의 기간 동안 해당 10개국의 책임 연구자 40명 이상과 함께 100개가 넘는 산업을 면밀히 연구 조사했다. 이 결과를 토대로, 특정 산업에서 경쟁우위를 촉진하는 국가의 특징을 갈무리하고, 그 연구결과가 기업과 정부에 주는 시사점을 담았다. 

나는 별로 읽을 일이 없지만, 한국의 관료들은 이런 정도의 책은 읽어주는지 문득 궁금하다(국민의 권익보다 미국 쇠고기 회사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관료들 말이다). 

나루케의 책 덕분에 일본의 대표적 독서가인 다치바나가 생각이 나서 낮에 동네 도서관에 들렀다가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살도 안되는 100권>(청어람미디어, 2008)도 대출해볼까 했지만 소장도서가 아니었다. 대신에 들고 온 건 기타노 다케시의 책 두 권,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북스코프, 2009)와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씨네21북스, 2009). 기타노 다케시의 일본론을 읽고 나면 다치바나 다케시의 일본론 <멸망하는 국가>(열대림, 2006)를 읽고 비교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루케는 책을 빌려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의 책을 비롯해서 일본 저자들의 책은 대출해서 읽기에 딱 좋다(가라타니 고진이 예외적이다). 어렵지 않고 명쾌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서 범주에 드는 것도 아니기에 오래 품고 있지 않아도 된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서 읽은 책은 기타노의 <생각노트>인데, 내가 알고 있는 비트 다케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 책이다. 특히 "노력해도 안되는 놈은 안된다"(좋게 말하면,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꿈도 있다")고 말하는 그의 교육론은 오타쿠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과 맞물려 제값을 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결과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통념에 불편해 한다("시민 마라톤 같은 데서 간신히 완주한 정도를 가지고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고 말하는 건 오버라고 생각한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것도 아니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동네 마라톤 수준의 기록만 나오는데 요란하게 칭찬하는 것도 꼴사납다."). 가령, 그가 오타쿠의 본질이 무엇인지 지적하는 내용은 음미해볼 만하다.     

"어찌된 일인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됐다, 그래서 포기한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자신을 칭찬하고 오히려 자기만족을 함께 끝을 내다니! 넘버원이 아니라도 좋으니 온리원을 지향하라고 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상당히 묘한 논리다. 온리원이 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일, 즉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귀찮고 번거롭게 경쟁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즉 '온리원'이라는 생각은 '경쟁상대가 아무도 없는 세계를 찾아내면 당신도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최고를 좋아한다. 하지만 경쟁이 없는 세계에서 최고란 건 있을 수 없다. 정말로 의미 있는 일에서 오직 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는 놈이 있으니까 이기는 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기는 싫으니까, 자기 자식에게 지는 걸 인정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노력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느니 하면서 아이들에게 온리원이 될 수 있는 세계를 찾으라고 말한다. 경쟁을 부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최고라는 것에 연연한다. 그러니 오타쿠가 늘어나는 것이다. 경쟁 상대가 적은 세계에 틀어박혀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사람이 오타쿠다. 제대로 된 세계의 제대로 된 경쟁은 한심하다고 하면서 부정한다. 사실은 지는 것이 싫고, 상처 입는 게 싫은 것뿐이면서."(81-82쪽)  

인용한 대목에서 기타노 다케시다운 보수적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우엔 '진짜 보수'다(손을 써서 아들의 병역을 면제시켜주는 게 아니라 일부러 해병대에 보내는 보수 말이다). 김훈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나란히 비교해봄 직하다. 기회가 되면 '김훈과 기타노 다케시'에 대해서도 써보고 싶지만, 일단 힌트만 주자면 둘다 자연사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태어나서 서로 경쟁하며 먹고 살고 짝짓기하다가 죽는 것이 자연사적 삶이고 인간의 삶이라는 것. 그런 생각이 잘 피력돼 있는 김훈의 에세이집 <풍경과 상처>(문학동네, 2009)가 이번에 재출간됐지만, 기타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김훈을 떠올렸다.  

"연어나 철새, 고래 등은 출산을 하기 위해 무지하게 가혹한 여행을 하는 종이다. 인간에 이르기까지 긴 진화과정 어느 쯤에 인간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지 모른다. 언젠가 플로리다 앞바다의 해저를 끝없이 헤엄치는 새우들의 행렬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산란기의 새우들이 엄청나게 떼을 지어 밤을 틈타 일제히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이를 안 물고기들이 새우들의 대열을 덮친다. 새우들은 동료들이 잇따라 죽어나가고, 물어뜯긴 다리가 너덜너덜해져도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갔다. 마치 죽음의 행진 같지만, 그래도 새우들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목적은 단 하나,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느라면 논리를 떠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도 저렇게 힘든 시절이 있었지 하는 옛 생각이 들어서다."(80-81쪽)   

그런 관점에서 기타노는 편하게 얻을 수 있는 안락과 행복에 대해서 근심한다(<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다룬 바 있지만,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표현을 쓰자면 인간은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의 단골식당 주인 구마 씨가 요즘 아이들은 "뭘 먹고 싶니?"하고 물어도 "아무 거나요"라고 대답하는 게 고작이라고 하자, 기타노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지혜열'이라는 말도 있는데, 과연 요즘 아이들을 열이 날 만큼 생각하는 일이 있기나 할까? 무엇이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손에 넣을 수 있다. 떼를 쓰면 좋아하는 반찬이 나온다. 이렇게 천국 같은 생활에서는 생각이란 걸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 천국이라고 해봐야 고작 다베호다이(무한 리필식당) 정도의 천국이다. 하지만 먹을 게 넘쳐나는 다베호다이에서는 오히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먹는 기쁨도 덜하다."(84-85쪽)  

그와는 반대되는 그의 어린시절(우리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겠다). "내가 어렸을 때는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무엇인가를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어린시절의 기쁨은 이런 식으로 거의 포기에 가까운 동경과 그렇게 동경했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아이들도 그렇게 동경하는 게 있을까? 신형 휴대전화나 손에 넣지 못한 컴퓨터 게임? (...) 요즘 아이들도 내가 어렸을 때 느꼈던 것처럼 세상이 새하얗게 반짝이는 듯한 기쁨을 맛보는 일이 있기는 할까?"(61-62쪽)  

부유한 젊은 부모들은 간혹 "내 아이는 고생을 모르고 자라게 해주겠어." "내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건 뭐든지 사줘야지."라는 생각도 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의 능력'을 보여주는 거라고 믿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진화적 본성은 단순하게도, 쉽게 얻은 것에 대해서는 큰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끔 돼 있다. 결핍과 동경이 없다면, 만족과 행복도 없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지만, 고통과 굴욕이 없다면, '나'라는 정체성도 없다. 아빠가 잘해주는 것도 없다고 아이가 불평을 터뜨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그게 아빠의 사랑이란다.' 사실 기타노 다케시의 충고는 한걸음 더 나간다. 

"'마이홈 파파'가 아니더라도 아이들 기분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안다. 어른들도 누구나 옛날에는 아이였으니. 알고는 있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고 아버지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것은 가르쳐주지도 않고 뭐든 잘 이해해주는 아버지가 너무 많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아양을 떨어서 어쩌자는 건가. 결국은 자기한테만 귀여울 뿐이지 않은가. 아버지는 아이가 최초로 만나는 인생의 방해꾼이어도 좋다. 아이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된다."(57쪽)  

그러니 나도 좀더 분발해야겠다!.. 

09. 10. 18.  

P.S. 독서광인 나루케 마코토도 독서에 길잡이가 되는 '책의 달인들'이 있다고 한다. 일본 최대 오프라인 서점이라는 기노쿠니야서점의 '북웹'을 주로 활용한다는 그가 평론가들 가운데는 세 사람을 지목하는데, 그 중 일본의 저명한 편집자이자 저술가라는 마쓰오카 세이고는 국내에도 소개돼 있다. <지의 편집공학>(지식의숲, 2006)과 <만들어진 나라 일본>(프로네시스, 2008)이 그의 책이다. 그리고 <자 놀아보세>(토향, 2008)라는 책에는 '한국과 일본의 제사(祭祀)감각과 샤머니즘'이라는 그의 글이 포함돼 있다. 나루케는 그를 일컬어 '지(知)의 거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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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쓰오카의 다독술과 편집공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04 22:27 
    알라딘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마쓰오카 세이고의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추수밭, 2010)를 읽었다. 지난 금요일에 서점에 잠깐 들렀다가 무슨 책인가 싶어 펼쳐봤는데, 우연히도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링크를 늘리는 편집적 독서법'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니시다 기타로의 책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책과 오오시마 유키코의 만화책과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책과 롤랑 바르트의 철학책이
 
 
나무처럼 2009-10-1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케시와 김훈. 저도 다케시의 생각노트를 읽다가 김훈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매우 엉성한 리뷰 하나 끄적였는데... 무엇보다 저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기쁘고, 물론 저는 아주 얄팍한 인상비평에 그쳤지만^^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제 고민도 깊어졌네요. 한편으로는 엉성한 제 책읽기가 반성도 되고. 흐흐

로쟈 2009-10-18 22:26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어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보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란 게 잘 바뀌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한계라는 게 있고, 좀 저질이고, 하다고 보는 거죠(그래서 좀 허무주의적이고요). 진보는 거기에 대해서 좀더 유연하게 생각하고 많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 거구요(그래서 낙관주의적입니다). 보수나 진보를 팔아먹는 것과는 좀 별개라고 봅니다...

바밤바 2009-10-19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십니다. ㅎ 덕분에 읽어야 할 책이 늘었네요. 로쟈님이 쓰신 책도 조만간 읽을 예정이긴 한데 위에 소개한 책 중 읽은 책이 하나도 없네요 ㅠㅠ

라로 2009-10-19 16:10   좋아요 0 | URL
저는 단 한권 로쟈님 책~.ㅎㅎㅎ

로쟈 2009-10-19 17:38   좋아요 0 | URL
저도 반 이상은 안 읽은 책입니다. 기억해 두는 것이죠. 제 책도 읽으신다니 미리 감사드립니다.^^

다이조부 2010-08-2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치바나 다카시 검색 타고 왔어요 ^^

오타쿠 가상세계의 아이들, 기타노 다케시 생각노트, 로쟈샘 책~ 읽은 책들이

눈에 보이네요. 보통 선생님이 남기는 리뷰에는 모르는 책 투성인데 이렇게

익숙한 책이 많긴 처음이네요 ㅋ

 

이반 부닌의 <어두운 가로수길>에 대한 페이퍼를 적다 보니 생각나는 시가 있다. 박상순의 '자네트가 아픈 날 2'. 기억엔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세계사, 1996)에 수록된 시인데, 그때 읽고 적은 촌평과 함께 옮겨놓는다.     

 

자네트가 아픈 날 2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미술대학에 다닌 솜씨로, 이제는 다 틀어져 버린 솜씨로, 틀어진 항아리를 만든다. 내가 주둥이를 최대한 작게 마감할 동안 그녀는 약을 먹는다.

나는 노래를 듣는다. 약에 취한 그녀의 노래,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나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긴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그녀의 이름을 새기고 그녀의 노래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고, 미술대학에 다닌 솜씨로 뚜껑을 밀봉한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그녀를 묻은 뒤에도 나는 가로수만 생각한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노란 가로수, 불타는 가로수, 그 속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가로수, 노래하는 가로수.

이제는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담겨질 거대한 항아리를 만든다. 담겨질 사람은 없다. 나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거꾸로 서는 가로수, 날개 달린 가로수, 돌덩이를 삼킨 가로수, 항아리를 삼킨 가로수.

나를 긴 줄에 묶어 책꽂이 뒤로 끌고가는 가로수,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나의 가로수.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즉 즐기기 위해서는 ‘항아리’와 ‘가로수’란 두 이미지가 뜻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녀(자네트)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와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가 이 시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항아리’는 한 ‘세계’를 뜻한다. 이때의 세계는 자기만의 예술세계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다. ‘그녀’와의 관계가 문제되고 있으니까 여기서는 가정이라고 해두자. 즉 이 ‘항아리’는 예술작품(Art Work)으로서의 항아리라기보다는 사회적 삶의 표준단위, 즉 가정(Family Life)으로서의 항아리이다.  

그럼 이제 1연을 보자.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만들 수 있는 항아리는 FL이 아니라 AW이다. 굳이 “틀어져 버린” 솜씨가 아니어도 그런 솜씨로는 FL을 만들 수 없다(이 사회적 통념!). 그러는 ‘나’의 옆에서 “그녀는 약을 먹는다”(그녀는 약값이 필요할 것이다). 2연에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니까 FL에 대한 감각이 ‘나’보다 나을 리 없다. 약에 취해 있으니까 더더욱 그렇다. 이 항아리가 제대로 된 항아리, 즉 FL을 보장해줄 수 있는, FL로서의 항아리인가 아닌가를 제대로 분별해내지 못하는 것.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기”는 ‘나’의 행위에서 드러나듯이 이 항아리는 AW로서의 항아리이다. 이건 생활의 터전, 즉 FL로서의 항아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3연에서 결국 이 항아리가 “그녀의 노래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는 옹관묘가 된 것은 당연하다. “내 항아리”는 예술의 세계이고 죽음의 세계인 것...  

그리고 이제 ‘가로수’. 가로수는 버드나무처럼 길가에 서 있는 나무이다. 그것은 중심에 있는 나무가 아니다. 그래서 ‘가로수’는 ‘주변적인 존재, 주변적인 삶’의 은유가 된다. “그녀가 아픈 날”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는 바로 ‘가로수’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4연에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가로수만 생각한다”.  

그는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런 주변적인 자기세계에, 상상적인 세계에 안주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항아리’의 세계는 점점 멀어져 간다. 5연에서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항아리’를 만들어보려고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질 리도 없고, 거기에 “담겨질 사람”도 없다. FL뿐만 아니라 AW로서의 항아리도 그는 이제 만들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그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이 자폐적인 세계는 6연에서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의 세계로 진술된다. 이 ‘가로수’는 이제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것이다. ‘가로수’가 ‘항아리’를 대신하는 것. 이 안쓰러움을 이 시는 은근하게 노래한다... 이게 내가 이 시를 재미있게 읽은 이유이다. 

09.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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