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시간 동안 PC가 놓인 책상의 책들과 복사물을 정리하여 겨우 공간을 좀 마련했다. 탁 트인 시야에 모니터가 바로 눈에 들어와서 오히려 생소한 느낌마저 든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들을 책상 가까이에 배치했는데 이들이 말하자면 얼마간 '측근' 노릇을 할 책들이다. 무게감을 갖는 책은 아니더라도 측근이 주는 편안함은 있다. 몇 권의 책에 대해서는 페이퍼를 써도 좋겠다 싶지만 여유가 많지 않은 까닭에 일단 한 권만 거명하면 앤 커소이스와 존 도커의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작가정신, 2013)가 부듯한 독서감을 느끼게 해주는 책. '역사는 픽션인가'가 원제다.

 

 

번역본 제목보다는 원제가 저자들의 문제의식을 더 잘 집약하고 있는데, '역사는 허구인가'라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니 반응은 세 가지였다고 한다. (1)당근이지.(역사는 물어보나 마나 허구라는 반응) (2)말도 안돼.(역사는 역사이고 허구는 허구이며 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반응) (3)글쎄... 역사가 허구인가요? 이런 반문이 가장 많이 보인 반응이라는데, 한편으론 그렇고 또 한편으론 그렇지 않다는 저자들의 답변에 양다리 걸치지 말고 확실하게 답하도록 요구했다고. "역사는 허구인가, 라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복잡한 답을 요구한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은 필요할 것이다."(8-9쪽) 이 책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저자들은 서두에서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던진 질문보다 '역사는 허구인가'란 질문이 훨씬 제한적이긴 하지만, 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진실의 문제, 역사가와 과거의 관계, 사실과 가치, 해석의 문제에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차이점은 두 가지인데, "무엇보다도 우리는 언어와 서술, 상징, 수사법, 풍자를 통해 형성되는 역사의 문학적 측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문학적 형태와 역사적 진실을 향한 열망 사이의 관계를 카와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7쪽) '역사의 문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쪽이 흔히 일컫는 '포스트모던 역사학'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로 지칭하는데, 이 두 사조는 "학문과 직업으로서의 역사의 생존을 위협했다." "과거는 결코 복원될 수 없고 역사연구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역사는 그 자체의 허구에 의해, 다시 말해 역사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터무니없는 믿음 아래서만 존재할 수 있다"(13쪽)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심할 경우에는 역사라는 학문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대표적인 경우가 키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1991)이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는 번역서의 제목이고 원제는 <역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history)>다.

 

하지만 저자들은 젠킨스와 같은 극단적 상대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불어 자신의 연구결과와 해석이 절대적 객관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의 주장 또한 거부한다. 리처드 번스타인의 책 제목을 빌리자면,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가 이들의 입장이라고 할까. "우리는 역사서술에서 허구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인정할 때 진실 탐구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된다고 생각한다"(14쪽)은 진술은 역사학의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의 변증법적 종합으로도 읽힌다.

 

 

 

흥미로운 것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연결시키고 현재와 과거의 연관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인식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역사서술"이 현대의 '포스트모던' 문학과 철학 이론의 발명품이 아니라 서구 최초의 역사서술인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부터 이미 나타난다는 저자들의 주장이다. 헤로도토스야말로 '포스트모던 역사가'의 원조라고 할까. 바로 그런 관점에서 저자들은 '이야기꾼 헤로도토스'를 첫 장에서 다루고, 2장에서는 헤로도토스와 함께 서양 역사학의 토대를 만든 투키디데스를 다루며, 마지막 장에서는 <총, 균, 쇠>와 <문명이 붕괴>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까지 다룬다. 역사학의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일주이자 일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수준의 독자라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 일주에 동행할 수 있을 듯싶다. 마음의 준비가 됐다면,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꺼내들고 이제 1장으로 넘어가는 일이 남았다...

 

13. 01. 27.

 

 

 

P.S.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가 그래도 좀 이론서적인 성격의 책이라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손에 들어볼 수도 있다. 남경태의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메디치미디어, 2013), 박신영의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페이퍼로드, 2013), 그리고 원종우의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역사의아침, 2012) 등이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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