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나온 가장 자극적인 독서거리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인데, '자극적'이란 말은 지적 만족과 함께 더 많은 호기심을 갖게 한다는 뜻이다.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과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를 읽은 독자라면 교환양식에 대한 설명은 친숙하다(현재 절판된 <트랜스크리틱>은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9권으로 다시 나올 예정이다). <세계사의 구조>에서 인상적인 것은 지배적 교환양식의 이행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사회구성체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본적으로 바꿔버리는 지배적 교환양식의 이행이다. 첫째로 교환양식A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로의 이행, 둘째로 교환양식B가 지배적인 구성체로의 이행, 셋째로 교환양식C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로의 이행이다. 바꿔 말해, 각각 씨족사회의 형성, 국가사회의 형성, 산업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이다.(71쪽)  

여기서 교환양식A는 호수제(증여와 답례), 교환양식B는 약탈과 재분배, 교환양식C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교환을 가리킨다. 이들 각각이 지배적 교환양식이 되는 이행과정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그런데 고진의 지적대로 뒤의 두 가지 이행에 대해선 많이 논의돼 왔지만 씨족사회로의 이행에 주목한 논의는 별로 없었다. 고진의 핵심 아이디어는 "국가사회나 자본제사회로의 이행에 비약이 있었다면, 씨족사회의 출현에도 비약적 이행이 있었다"는 것이고, <세계사의 구조>는 바로 그 비약적 이행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흔히 씨족사회를 최초의 원시사회로 간주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그 이전에 '유동적 밴드사회'가 있었다(고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씨족사회는 바로 그 유동적 밴드사회를 배경으로 등장하며 그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이해된다. 이 차이가 신석기혁명이 가져온 변화보다도 더 크다는 게 고진의 독창적인 견해다.

한편 씨족사회는 그것과는 대조적이다. 그것은 리니지(혈통)에 근거한 복잡하게 구성되고 성층화된 사회이다. 씨족사회가 국가사회와 다르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들의 차이, 즉 그것을 가져온 신석기혁명의 의의를 강조한다면, 유동적 밴드사회와 씨족사회의 차이, 또는 그것을 가져온 변화의 의의를 강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후자의 변화 쪽이 획기적이기 때문이다.(73쪽)

곧 고진이 보기에 획기적인 것은 씨족사회의 형성이다. 그러한 판단에서 그는 기존의 한 가지 통념에 대해 의심한다. "그것은 고든 차일드가 주장한 농경과 목축에 근거하는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것이다. 즉 농업/목축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정주하고, 생산력의 확대와 더불어 도시가 발전하고, 계급적인 분해가 생기고, 국가가 생겨났다는 견해"이다.

 

 

 

고든 차일드는 '신석기 혁명'이란 말을 만들어낸 영국의 저명한 인류학자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정주생활이 시작됐다는 게 인류학의 통설인데, 고진이 보기엔 그에 의심스럽다. 정주는 농경 이전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재배나 사육은 오히려 정주의 결과,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농업에 앞선 정주야말로 획기적인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물론 그만의 견해는 아니다. 고진이 참조하고 있는 건 인류학자 알랭 테스타이다.  

인류학자 알랭 테스타는 유동수렵채집민과 정주수렵채집민을 구별했다. 그는 전자에서는 수렵채집물이 평등하게 분배되지만, 후자에서는 불평등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 원인은 정주와 함께 생산물의 '비축'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인간불평등의 기원'을 발견했다.(74쪽)

놀라운 건 알랭 테스타의 책이 이미 번역돼 있다는 점(저자가 알랭 떼스타로 표기됐다). <불평등의 기원>(학연문화사, 2006)이 그것이다(다행히 아직 절판되지 않았기에 바로 주문을 넣었다). 고진은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테스타의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요점은 다른 곳에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비축에서 생겨나는 불평등이 계급사회나 국가로 귀결되지 않았다는 쪽이다. 그것은 불평등을 억제하고 국가의 발생을 억제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씨족사회이다." 고진은 이로부터 그만의 통찰을 끄집어낸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출현은 인류사에서 획기적인 것으로 중요시된다. 하지만 오히려 정주=비축과 함께 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제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는 쪽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원리가 호수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씨족사회는 '미개사회'가 아니라 고도의 사회시스템이라고 말해야 한다.(74족)

국가의 출현을 억제하는 원리로서의 호수성. 그것은 한편으로 국가를 넘어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려는 고진의 이론적 시도는 바로 이에 대한 주목에서 시작된다고 보아도 좋겠다. 이 대목을 <세계사의 구조>에서 내가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12. 12. 29.

 

 

 

P.S. 고진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참고하고 있는 책 대다수가 번역본이라는 점이다(우리에게 '고진' 같은 비평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도 나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떠먹을 '수프'가 없는 것이다). 인류학 쪽 저작들도 마찬가지인데, 씨족사회와 정주혁명을 다룬 장에서는 특히 마샬 살린스의 <석기시대 경제학>, 말리노프스키의 <서태평양의 원양항해자>,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구조> 등이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게 유감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는 수 없이 <석기시대 경제학>은 원서를 주문했다. 말리노프스키와 레비스트로스의 책은 분량이 방대해 아직 엄두를 못 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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