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寒波)라고 하기엔 포근한 감이 없지 않지만 예년보다 내려간 기온을 핑계로 겸사겸사 외출을 포기했다(외출이라고 해야 학교에 나가는 거지만). 그럼 집에서 뭐하는가? 빨래하고 대충 청소도 하고 라면 끓여먹고 신문 본다. 화요일이라 편의점에서 한국일보를 사들고 와 본다. 로버트 러플린 카이스트 총장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를 고개를 끄덕이며 읽는다. 199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면서(1950년생이니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정상'에 올랐다) "그는 작곡에도 관심이 많으며 그림그리기도 좋아"한다고(올해 피아노 연주회도 가진 적이 있다).


지난 여름에 나온 <새로운 우주 - 다시 쓰는 물리학>(까치글방)이 바로 그의 책이며 그 삽화들을 직접 그리기도 했단다. 역시나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면서 '시인'인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까치글방, 1996)의 저자 로얼드 호프만만큼이나 다재다능한 석학인 듯하다. 러플린의 기고문은 그 자신의 교육 체험담이면서도 우리의 교육관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데, 후반부를 잠시 옮겨오겠다(인터넷판에서 가져오는데, 실제 지면에 실린 것보다 몇 문장이 보태져 있다. 아마도 분량상 지면에는 누락됐던 모양).
-위대한 과학자들이나 발명가들은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에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창조성에 대한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 사람들로 보인다. 때로는 괴팍함과 결합한 덕분에. 그들은 스스로 게걸스럽게 배우는 자들이기도 하다. 토마스 에디슨은 교사가 산만하다고 평가해서 어머니가 집에서 교육을 시켰다. 그는 대학에 가지 않고 대신 문학책이나 과학책을 호기심 가는대로 읽었다. 빌 게이츠는 엄마가 공부하라는 것을 거절하고 마이크로 소프트를 만들기 위해 하버드를 중퇴했다. 아이작 뉴튼의 선생은 그를 매우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평가했으나 그의 끊이지 않는 공상과 그의 관심사를 꾸준히 기록한 것이 큰 일을 해냈다. 뉴튼은 혼자서 유클리드의 '원리'와 데카르트의 기하학을 숙독한 끝에 미적분을 창안했다.(*이 단락은 전체가 지면에서 누락돼 있다.)
-불행하게도 이런 지적인 독립성은 현대 한국에서는 장애물이 많다. 우선 학교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부담스러운데다 국제어인 영어까지 익혀야 한다. 이것은 작은 나라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창의성 세금' 이다. 만일 국제언어를 습득하는데 실패하면 어린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수입이 적다. 그래서 북동아시아에는 뉴튼과 에디슨이 드물다. 문화 때문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에너지를 언어를 배우는데 가장 많이 써야 하는데 따른 부작용이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아, '창의성 세금'이여!)




-대신 북동아시아의 예술가들은 언어습득에 많이 투자하지 않고도 성공한다. 작곡가 가와이 겐지는 '공각기동대'에 음악을 맡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일본에서는 그만의 텔레비전 쇼를 갖고 있다. 오모토 가츠히로는 '아키라'가 서양에서 인기를 끌면서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이 소개되는 문을 열었다. 몇 년 전 나는 '아키라'의 한 장면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 썼다가 반응이 좋길래 코단샤 출판사에 오토모씨와 서명본을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시장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젊은 예술가의 값 차이를 알게 됐다.(*이 단락도 지면에는 누락돼 있다.)
-이런 걸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교육열은 좋은 것만은 아니다. 경제활동에는 좋겠지만 다른 것에는 나쁘다. 기술과 창의적인 독창성을 필요로 할수록 나쁘다. 금융이나 반도체 연구와 같은 복합적인 업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영화나 첨단과학 같은 예술적인 활동에는 불리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고등학생들은 오직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려고 공부를 하고 대학생은 오로지 시험을 잘 치려고 공부를 한다. 지적인 내용은 점수나 등수보다 덜 중요하다. 좋은 시험성적과 등수는 첫번째 직업은 보장해주겠지만 40년 동안의 경제생활을 지탱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가족부양을 위한 재정적인 책임이 최고조에 이른 후반생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경제는 너무 빨리 변해서 익힌 기술은 금새 쓸모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는 일생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데 성실하고 꾸준하게 투자를 해야 한다.
-비행기는 자리를 잡기까지 그 둔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매우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바퀴가 땅을 박차는 순간 비행기는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을 나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뇌와 몸도 이와 같다. 젊었을 때는 매우 이상하지만 어른으로 가는 시기가 오면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뇌와 몸도 배우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뉴튼과 에디슨 같은 이들에게는 성공은 멋진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니 보기에도 참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공부와 창조도 역시 중요한 것이니 우리들의 끈기있는 노동이 경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뉴튼도 에디슨도 그것은 못했다.(*강조는 나의 것이며, '뉴튼과 에디슨' 이하의 문장들은 지면에서 누락돼 있다.)

마지막 단락의 비유가 아주 시적이며 인상적이다. '배우는 인간은 비상하는 비행기처럼 행복하다'란 큼지막한 타이틀은 거기에서 뽑은 것이겠다. 활주로에서만 뭉개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래도 좀 위안이 되겠고(관제사들이 파업이라도 하는 건가?).
이어서 읽은 연재가 '강정의 나쁜 취향'이다. 43번째니까 거의 1년이 돼 가는 이 연재의 이번호 타이틀은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하고도 폭넓은 사생활'이다. 이전에 한국일보 지면의 문학기사를 따다놓고 '요즘 시 어떻습니까?'란 페이퍼를 만든 인연도 있고 해서 강정의 글이 더 눈에 끌렸다. 이번에 사진과 함께 그가 거명하고 있는 네댓 명의 젊은 시인들, 혹은 젊은 '바퀴벌레들'은 흔히 '엽기시적' 경향의 대표 주자들이다.





김민정, 김근, 황병승, 유형진, 이민하 등이 그들, '바퀴벌레들'이다. 강정의 설명: "몇 달 전 어느 매체에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젊은 시인들에 관한 생각을 짤막하게 밝힌 적이 있다. ‘시인공화국’이란 말이 매주 수요일 본 지면에 연재되는 소설가 고종석의 연재 타이틀을 빌린 것이라는 건 새삼 밝힐 필요도 없을 테지만, ‘바퀴벌레’라는 표현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을 듯싶다. 그다지 좋은 뉘앙스가 아닐지 몰라도 내 본의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퀴벌레’를 상찬의 용어로 쓰는 것도 썩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해명컨대 내가 쓴 ‘바퀴벌레’엔 최근 젊은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개인성과 예측불허의 감각적 주파능력 및 그들을 바라보는 문단 안팎의 전반적인 시선 등이 포괄적으로 겹쳐 있다."
그러니까 표현은 '바퀴벌레'이지만 거기엔 '상찬'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 이들이 요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올 한해 불현듯 방생된 물고기떼처럼 득시글거린 바퀴벌레들의 공통된 특징을 찾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반 위대하시고 저명하신 프로이트 박사님께서 ‘빙산의 일각’이라 아슬아슬하게 표현하신 그 지점이 바퀴벌레들에겐 별다른 강박으로 다가오지 않는 듯하다. 통상적으로 무의식은 존재의 내부에 잠재된 외부적 존재라 여겨지지만,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본원적으로 분리할 수 없듯 무의식을 의식의 대자(對自)적 영역으로 파악하는 건 보다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인간 이해를 방해하는 선험적인 금 긋기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바퀴벌레들은 기존의 인문학이 도구함 정리하듯 배치시켜놓은 인간 개념으로부터 일탈하여 자유롭게 날뛰거나 오로지 그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자기만의 사적 신화에 골몰한다. 소위 영상세대니 인터넷 세대니 하는 말들은 그들을 수식하는 가장 손쉽고도 책임 없는 분류법에 불과하지만, 바퀴벌레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고 명명할 줄 안다는 데 있다."(강조는 나의 것)

요컨대, '나는 내가 명명한다' 혹은 '내 이름은 내가 불러준다'는 것. 뭐라고? '고슴도치'(김민정)라고, '뱀소년'(김근)이라고, '여장남자 시코쿠'(황병승)라고, '피터래빗'(유형진)이라고, 그리고 '환상수족'(이민하)이라고. 강정이 예로 들고 있는 시는 이민하의 '사진놀이'인데, '엽기'의 사례로선 너무 얌전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튼 이런 종류이다: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화분에 심었다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화분을 내놓았다 화분 속에서 주렁주렁 사진들이 익어갔다 너무 익은 사진은 바닥에 떨어져 짓물렀다 방안 가득 단물이 고였다 물컹물컹 사진들이 내 발목을 핥았다 한 달 전에도 사진을 찍었다 어제도 찍었다 난간에 매달려 찍었다 화분에서 흘러넘친 필름은 창을 향해 넝쿨처럼 뻗었다”(야콥슨에 근거하면, 시인들이란 인접성 장애를 앓는 실어증 환자들과 유사한데, 가령 그들은 '강낭콩' 대신에 '필름'을 언어의 화분에 심고 '사진놀이'하는 자들이다.)


비록 사진놀이하는 바퀴벌레는 다소 귀엽게 보이지만, 이 '바퀴벌레'들이 거북하고 불쾌하며 혐오스러운가? '한 쇠잔한 바퀴벌레'로서 강정이 옹호에 나선다(그는 한때 <처형극장>의 영사기사였다): "시에 대한 유구한 상식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에겐 여전히 곤혹스럽고 위험천만하게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시를 특정한 언어적 형식과 문학적 불문율 아래 가둔 채 공허한 자기위안만을 반복하는 거짓된 물아일체(物我一體)에의 환상이 내겐 더 곤혹스럽고 위험천만한 시적 무사안일주의라 여겨진다. 내가 아는 한, 대상은 결코 주체에 편입되지 않고 주체 또한 그 자체로 완벽한 통일체로서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다. 시가 궁극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건 그 통합되지 않는 자아와 대상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종의 에너지덩어리로써의 불가능성뿐이다."
이 노땅 바퀴벌레께서 입은 쇠잔하지 않았는지 어려운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만약 당신이 '바퀴벌레들의 사생활'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시적) '무사안일주의자'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들뢰즈식으로 거들자면, 자신의 존재/거처에서 복지부동, 무사안일 만땅으로 안주하는 당신은 모든 (가면적) '생성'의 거부자이며 따라서 반동 꼴통이다! 그러니 받아들여라! "시적 자아란 그 불가능성을 잠정적으로 지시하는 순간적이고도 영원한 가면에 불과하다. 시인에게 시는 늘 삶의 저편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자기 자신의 불분명한 미래이자 수시로 시간 경계를 초과하며 재생성되는 과거일 뿐"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당신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언어의 세상은 바퀴벌레의 온상이 된다: "지구가 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바퀴벌레들처럼 시인이 추구하는 불가능성의 추구는 그 불가능성 덕분에 영원히 유효하다. 그리고 그 유효성은 모든 공식적인 말들을 궁극의 무효로 환원하는 언어의 이중성과 파탄성을 통찰할 때에야 비로소 유효해진다." 만세, 우리의 시인들이여, 우리의 따라깐 따라까노비치여!('따라깐'은 러시아어로 '바퀴벌레'란 뜻이다.)


이상에서 젊은 '바퀴벌레들' 얘기를 소개한 건 공연한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에 그 비유는 제법 적절해 보이며, 한편으론 고전적인 시인관과 분명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시대의 변화를 징후적으로 드러내준다. 어떤 시인관인가? 얼마전에 <김종삼 전집>(나남, 2005)이 새로 나왔지만, 이전까지 김종삼(1921-1984) 문학의 최고 독본은 장석주 편집의 <김종삼 전집>(청하, 1988)이었다. 그의 시 전부와 대표적인 김종삼론을 망라해서 실은 책인데, 소설가 강석경의 인물 스케치는 '문명의 배에서 침몰하는 토끼'란 제목을 갖고 있다('잠수함 속 토끼'는 한때 유행이었으며 박범신은 소설집 제목을 아예 <토끼와 잠수함>이라 붙이기도 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인에 관한 말 중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는데 시인을 토끼에 비유한 말이다. 잠수함에는 늘 토끼가 승선해 있다 한다. 산소량을 측정하기 위해서이다. 산소 희박을 인간이 알아챌 정도면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악화된 상태여서 토끼의 호흡으로 그 경계선이 측정된다. 산소가 모자랄 때 토끼가 먼저 질식하기 때문이다.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일 것이다. 하나는 문명이나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본질의 생명을 시의 몫으로 돌려왔던 고전적 해석에 다름 아니고 또 하나는 속죄양의 측면에서이다. 시인이 삶의 높이, 그 척도가 된다는 것은 큰 은총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또한 형벌이기도 하다. 오염된 현실에서 시인은 누구보다 먼저 고통의 제물이 될 것이므로..."
그런 토끼들은 어떤 시를 썼었나? 김종삼의 '서시'이다(학부 1학년때 국문과에 다니던 한 친구가 기숙사 자기방 관물함에 붙여놓은 시여서 특히 인상에 남았던 시이다. 황동규 시인의 의하면 김종삼의 시들은 '잔상의 미학'으로 수렴되는데, 이 시 또한 그러하다).
헬리콥터가 지나가
밭이랑이랑
들꽃들일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갔으리라.
얼마전, 그러니까 지난달 말쯤에 강정의 글에도 언급된 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들'(39)에서는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민음사, 1979)를 다루었다(황동규의 '잔상의 미학'은 이 시선집의 해설이다). 고종석은 '정신적 귀족주의자의 세계'로 김종삼 문학을 요약하는데, 그것은 달리 '북치는 소년'의 시구처럼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차라리, 김현의 짐작과는 반대로, 김종삼이 추구한 것 자체가 바로 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이 시의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만이 아니라 김종삼의 시세계 전반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시 말해 무구한 아름다움으로 반짝인다. 그 아름다움은 무구한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다. 김종삼의 육체는 남한 땅에 발을 딛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이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따금 그 마음은 두고 온 북녘 고향 땅을 향했고, 자주 위대한 예술가들의 고향인 유럽 땅을 향했다. 아니, 유럽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그의 마음은 그 예술가들의 상상된 마음에 들려 거기 갇혀있었다.
-아니, 이 말도 옳지 않다. 그의 마음은 예술의 세계에 갇혀 있으려 애썼으나, 그는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우주복처럼 월곡(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환 시각 미정”(‘올페’ 전문). 김종삼은 시의 세계에서조차 둥둥 떠 있었다. 그러니까 김종삼을 실향민이라고 할 때, 그가 잃어버린 고향은 황해도 은율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본적이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그는 (거의) 단독자였고, 무적자(無籍者)였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깨닫지 못할 뿐, 단독자와 무적자는 우리 모두의 처지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슈만의 노래도, 조반니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도 들어보지 못한 독자가 김종삼의 시에 푹 빠져들기는 어렵다. 어쩌면 시인은 그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젠체하기는 얄팍한 속물근성이라 비판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외롭고 가난했던 시인의 속물근성에는 좋은 의미의 댄디즘(당디슴)이, (부르주아의 반의어로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적 귀족주의가 버무려져 있었다.(*참고로, 김종삼의 생업은 음악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한 '귀족주의'에 상응하는 것이 남들보다 일찍 죽을 토끼들의 운명이다. 해서 시인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태도는 바로 그들을 (잠수함 속) 토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젊은 바퀴벌레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갖게 된 시인의 모델은 전통적인 '토끼로서의 시인'과 새로운 세대의 '바퀴벌레로서의 시인'이다. 전자는 가장 먼저 고통의 제물이 되길 감수하는 자들이며, 후자는 지구가 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자들이다. 이들이 시인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종족들이고 부락민들이다. 장차 공화국의 패권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당신도 나처럼 혹 그런 게 궁금하다면 좀더 오래 살아두어야겠다...
05. 12. 13.

P.S. 강석경 선생의 글이 에피그라프로 쓰고 있는 것은 에밀 시오랑의 단장이다. 대화체의 이 단장은 이런 내용이다."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나 자신을 견딥니다." 오늘 하루도 남은 시간, 마저 견디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