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문학기행을 헝가리 사정(루카치 아카이브의 폐쇄)으로 보류한 이후 몇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다가(어려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내년봄(3월하순)에는 스위스문학기행을 진행하기로 했다(구체적 공지는 10월에 나갈 예정이다).

스위스문학기행에는 토마스 만과 헤세와 관련한 일정이 들어 있기에(<마의 산>과 <페터 카멘친트> 등) 독일문학기행의 보충이면서, 도스토옙스키(<백치>)와 나보코프(몽트뢰)에 관한 일정도 포함돼 있어서 후년의 러시아문학기행 예고편이기도 하다(러시아문학기행은 두번째로 가는 것인데, 2021년은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다). 아, 취리히에서는 조이스의 발자취도 찾아볼 예정이다(그의 무덤도 취리히에 있다).

스위스문학기행이라고는 하지만 스위스 작가는 로베르 발저 한 명이다(아, 헤세도 국적은 스위스다). 그럼에도 발저문학관을 찾을 예정이라 기대가 된다. 국내에 소개된 발저의 작품들을 이번 기회에 두루 읽고 강의할 예정이다. 덧붙이자면 ‘제네바 사람‘ 루소의 기념관도 둘러볼 예정이고 실스마리아의 니체하우스도 당연한 목적지다. 찾아볼 장소들이 많아서 이동거리가 길지 않음에도 스위스 곳곳을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같은 제목의 페이퍼를 아마도 내년 문학기행 때 적을 터인데 미리 예고편으로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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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선생의 1주기를 맏아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난다)이 재간되었다. 지난해에 적었던 것 같은데 저자는 그의 책들과 함께 사후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선생도 마찬가지다. 이 사후의 삶이 진정한 불멸의 삶이다. 이미 갖고 있는 책이지만 쪽수만 보면 분량이 좀 늘어났다. 글이 추가된 것인지 편집상의 차이인지는 실물을 봐야 알 것 같다. 장서용으로 다시 주문.

강의에서 나는 곧잘 ‘잘 표현된 불행‘이란 말을 인용한다. 문학이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유력한 답변이라고 생각해서다. 오늘 강의에서 다룬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작품도 약간 응용하자면 ‘잘 표현된 절망‘의 사례다. ‘잘 표현된‘ 불행과 절망이 우리를 불행과 절망에서 구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불행과 절망이건 간에 그것이 잘 표현된다면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학의 신앙이고 내기다. 비록 불행을 행복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놓을 수는 없더라도 잘 표현된 불행과 절망은 우리를 위로한다.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거지‘에서 적선을 하고자 주머니를 뒤져보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당황해하는 화자에게 그것만으로도 적선을 받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는 거지를 떠올리게 된다. 문학과 독자는 그런 ‘빈 적선‘을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닐는지.

이번에 <잘 표현된 불행>과 함께 나온 책은 파워 트위터리언이었던 선셩의 트위터글 모음집이다.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난다). 이런 종류의 책이 처음은 아닌 듯하지만 분량으로는 기록이지 않을까 한다. 무려 668쪽. 얼마만큼 열정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는데(중독?) 그 정도면 불문학 교수와 비평가라는 직함에다 트위터리언을 더 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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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8-0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읽자마자 기헝도가 떠오르는~

로쟈 2019-08-10 11:00   좋아요 1 | URL
좋은 사례죠.
 

지난주 한겨레에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지난달 말에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에 대해서 영화와 함께 강의를 진행했고 요지를 간추렸다(분량상 자세히 적지는 않았다). 내게는 법과 문학의 관계를 성찰하게끔 해주는 탁월한 사례로 읽히는 작품이다. 
















한겨레(19. 08. 02) 판사는 삶을 어디까지 인도할 수 있는가


‘법과 문학'은 대학의 교양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하는 주제다. 상징적 의미에서건 실제적 의미에서건 법은 우리 삶의 많은 일에 관여하며 개입한다. 동시에 우리는 법에 의해서 신분과 권리를 보장받는다. 당연하게도 법의 문제를 다룬 문학작품이 적지 않은데 최근에 읽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 <칠드런 액트>다. 수년 전에 번역돼 나왔지만 에마 톰슨 주연의 영화가 개봉되면서 뒤늦게 손에 들었다.


소설은 제목부터 법의 문제를 작심하고 다루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읽게 한다. ‘칠드런 액트'가 ‘아동법'을 뜻하기 때문인데, 여기서 ‘아동'이란 말은 18살 미만의 미성년자를 가리키기에 우리식으로는 ‘아동청소년법'에 해당한다. 작가는 아동법의 핵심 조항을 제사(題詞)로 삼았다. “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단할 때 (…)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핵심은 ‘아동의 복지'에 있다. 그 복지를 최우선적 가치로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동법의 목적이고 역할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국 고등법원의 판사 피오나 메이는 아동법의 대역이고 화신이다. 법정에서 그녀의 판결은 곧바로 구속력을 갖는다. 그녀는 가정사의 온갖 법적 분쟁을 조정하는데, 이는 부모의 의사에 반해서 샴쌍둥이 분리수술을 명령하는 일도 포함한다. 독실한 신자인 부모는 두 아이 모두 죽게 놔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피오나는 비록 한 아이를 죽이는 것이 될지라도 자생능력이 있는 다른 아이를 살리는 것이 차악의 선택이라고 본다. 아동의 복지를 우선 고려한다는 아동법에 따른 판단이다.


공인으로서 피오나는 유능한 판사이고 그녀의 유려한 판결문에 대해서는 대법원장도 경탄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피오나는 아이들을 갖지 않았고 오랜 기간 신뢰해온 남편과 관계도 소홀하게 된다. 급기야는 대학교수인 남편이 피오나의 무관심을 지적하며 공개적인 외도를 선언하고 집을 나간다. 가정이 위기에 봉착했지만 피오나는 또 다른 긴급한 재판에 내몰린다. 백혈병 환자인 한 청년이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수혈을 거부해서, 병원이 강제치료를 허용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피오나는 이례적으로 직접 병원을 찾아가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갓 바이올린을 배운 그의 연주에 맞춰 노래까지 부른다(영화에서는 바이올린이 기타로 바뀌었다). 이후에 피오나는 청년이 부모와 교회는 물론 그 자신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한다고 판결한다. 그의 존엄성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근거에서다.


판결에 따라 청년은 강제수혈을 받고서 생명을 건진다.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진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청년은 은인인 피오나를 마치 신처럼 숭배한다. 자신이 쓴 시와 일기를 편지로 보내고 애정을 고백한다. 예순의 문턱에 있는 피오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행동이다. 발단은 피오나가 이례적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법원은 미성년자의 수혈거부에 대해서 병원 편에 선다. 피오나가 병원에 가보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같은 판결을 내렸을 것이다. 즉 피오나의 행동은 일시적으로 법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며 최소한 청년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결국 둘의 이야기는 슬픈 결말로 이어진다.


아동법이 아동의 복지를 고려한다지만 그 복지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청년에게 새 삶을 살도록 해주었지만 피오나는 그의 삶을 어디까지 더 인도할 수 있는가. 작가 매큐언이 문학의 이름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19.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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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3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요즘 나보코프의 작품을 몇 편 강의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어둠 속의 웃음소리>에 대해서 간단히 적었다. 러시아 작가 나보코프는 1930년대 후반에 영어로 언어를 바꾸고 194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작가로 다시 데뷔하는데, 러시아어로 발표했던 <절망>과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직접 영어로 번역하고, 이어서 첫 영어소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1941)을 발표하게 된다. 미국 작가로 변신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볼 만한 작품들이다. 


 














주간경향(19. 08. 05) 동정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된 파멸


<롤리타>로 유명한 작가 나보코프는 러시아혁명 이후 망명자의 삶을 살았던 러시아 작가다. 1920년대부터 베를린의 망명문단에서 러시아어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하고, 1930년대 말 나치의 위협이 거세지자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다. <어둠 속의 웃음소리>(1938)는 러시아어 소설 <카메라 옵스쿠라>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일부 개작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발표된 그의 첫 소설이었다.


부유한 중년남자가 어린 애인 때문에 아내를 버리지만 애인과 그 정부에게 농락당하고 비참하게 파멸하는 이야기라는 줄거리를 나보코프는 아예 서두에서 소개한다. 그렇게 요약될 수 있는 줄거리란 작품의 창작이나 독서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미리 선언한다고나 할까. 대신에 그의 관심은 이야기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나 기쁨이다. 그것은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주인공 알비누스의 몰락과정을 읽어나가면서 동정하기보다는 짓궂은 냉소, ‘어둠 속의 웃음소리’에 동참하게 된다. 무엇이 알비누스를 파멸로 이끌며 그의 파멸은 어째서 동정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베를린의 부유한 상속자 알비누스는 미술평론가이자 그림 전문가다. 연애운이 따르지 않았던 그는 평범한 결혼을 했고 여덟 살짜리 딸을 둔 상태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로맨스에 대한 ‘은밀하고 어리석은 갈망’도 포기하지 못한다. 그 갈망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도 구분되지 않는다. 어느 날 알비누스는 우연히 영화관에 들렀다가 안내인으로 일하는 마르고트를 보고서 반한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위대한 화가가 음영이 풍부한 어둠을 배경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고 곧바로 매혹된다. 하층계급 출신의 마르고트는 영화배우를 꿈꾸지만 연기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고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다가 영화관 안내일을 하던 터였다. 알비누스는 그녀에게 아파트를 얻어주지만 그들의 관계는 마르고트가 보낸 부주의한 편지 때문에 들통나고 알비누스는 차츰 불행의 길로 접어든다.


알비누스는 영화 제작에 나서며 마르고트를 배우로 데뷔시킨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마르고트는 알비누스의 소개로 옛 애인이었던 화가 렉스와 재회하고 두 사람은 합작해 알비누스의 재산을 빨아내기 시작한다. 알비누스는 둘의 관계를 뒤늦게 알게 되지만 마르고트의 변명에 다시 넘어가고 교통사고로 실명까지 한 뒤에는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처지가 된다. 알비누스는 마르고트의 보살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항상 렉스가 붙어 있었다. “알비누스는 누군가가 작게 킥킥거린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는 물론 렉스지만 이 대목에 이르면 독자 또한 그 비웃음의 주인공이 된다.


소위 ‘예술에 대한 열정’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알비누스는 예술의 대상(마르고트의 이미지)을 실제 현실(마르고트 자신)로 착각한다. 이 착각은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알비누스는 권총을 들고서 뒤늦게 복수에 나서지만 장님인 그의 총구가 제대로 마르고트를 겨낭할 리는 만무하다. 권총까지 빼앗기고 끝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알비누스 자신이다. 이렇듯 알비누스를 파멸로 이끌었지만 마르고트와 렉스는 소설에서 어떠한 응징도 받지 않는다. 도덕적 교훈을 혐오했던 작가 나보코프다운 결말이면서 노동계급에 무너진 어수룩한 자본가 계급을 향한 그의 냉소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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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으로 우산을 챙겨서 나왔는데 햇빛이 드는 걸 보니 비가 오긴 글른 것 같다. 마치 읽지 못할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 같다. 시간 나면 읽어볼 심사로 아침에 챙겨넣지만 그대로 귀가하는 책. 이제 그런 책이 만권이 훌쩍 넘어간다면? 내가 구입하거나 손에 들어본 책은 수만 권이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 들고 다니는 우산 같은 책들이다. 갑작스런 소나기라도 온다면 보란듯이 펼쳐들겠지만 십중팔구 인연이 닿지 않을 책들.

체력과 의욕이 떨어지면서 책들과도 작별할 궁리를 한다.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이 책들과 동거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다. 분산보관도 근본대책은 아니다. 읽은 책들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책을 내는 것이 좋은 방도이지만 노아의 방주 같아서 극히 일부만 구제할 수 있을 따름이다(신의 대홍수는 얼마나 무자비했던가!). 가끔 들를 수 있는 도서관 정도를 어딘가에 세우거나, 더 현실적으로는 기증하는 게 차선이다. 책들과 작별하면 몸이 좀 가벼워지려나. 어차피 모든 인연과의 작별은 필연인 것이니.

러시아나 중국에서는 기술적으로 인공강우를 내리게도 한다는데 우리도 그러는지 모르겠다. 강의가 일상이다 보니 나는 읽으려는 책을 강의 커리로 삼는 일이 많다. 강제독서다. 때로는 자기혹사로 여겨질 때도 있다. 읽은 책과 읽어야 하는 책의 안배가 무너지면 일주일에 다섯 권을 새로 읽어야 할 때도 있어서다. 그런 고비들을 넘겨야 일년에 한두번 정도 휴가를 갖게 된다(문학기행을 제외하고). 이런 만감을 적는 것도 휴가 분위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만감이라 적으니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이 떠오른다. 첫 작품집을 유작이라 생각하고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은 치기이지만 놀랍게도 다자이는 그런 치기로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조금 바뀌게 될까. 일본의 아베에게 추천해줄 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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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9-07-30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쌤, 책 정리는 70세부터요...
아무 것도 안하는 휴가가 끝나면 공간이 떠억 생기지 않을까요?^^
저는 지금 일을 시작하면서 주로 혼자 있으니까 책 서핑하고 많이 샀지요...
언젠가 자의든 타의든 일 그만두면 구입량이 줄어들거라고 믿습니다^^*
그땐 책들을 집어야겠죠. 눈이 피로하면 자연주의 요리책, 흐린 날엔 얇은 소설,
심심하면 추리물, 화가 날 땐 과학과 철학서를~~

허걱, 제가 다자이 오사무를 하나도 안읽었네요!^^

로쟈 2019-07-31 17:46   좋아요 1 | URL
저는 이미 포화상태라 그렇게 미루기가 어렵네요. 책정리가 인생정리 같아요..

2019-07-30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31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1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2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2 0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2 0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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