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3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요즘 나보코프의 작품을 몇 편 강의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어둠 속의 웃음소리>에 대해서 간단히 적었다. 러시아 작가 나보코프는 1930년대 후반에 영어로 언어를 바꾸고 194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작가로 다시 데뷔하는데, 러시아어로 발표했던 <절망>과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직접 영어로 번역하고, 이어서 첫 영어소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1941)을 발표하게 된다. 미국 작가로 변신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볼 만한 작품들이다. 


 














주간경향(19. 08. 05) 동정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된 파멸


<롤리타>로 유명한 작가 나보코프는 러시아혁명 이후 망명자의 삶을 살았던 러시아 작가다. 1920년대부터 베를린의 망명문단에서 러시아어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하고, 1930년대 말 나치의 위협이 거세지자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다. <어둠 속의 웃음소리>(1938)는 러시아어 소설 <카메라 옵스쿠라>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일부 개작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발표된 그의 첫 소설이었다.


부유한 중년남자가 어린 애인 때문에 아내를 버리지만 애인과 그 정부에게 농락당하고 비참하게 파멸하는 이야기라는 줄거리를 나보코프는 아예 서두에서 소개한다. 그렇게 요약될 수 있는 줄거리란 작품의 창작이나 독서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미리 선언한다고나 할까. 대신에 그의 관심은 이야기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나 기쁨이다. 그것은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주인공 알비누스의 몰락과정을 읽어나가면서 동정하기보다는 짓궂은 냉소, ‘어둠 속의 웃음소리’에 동참하게 된다. 무엇이 알비누스를 파멸로 이끌며 그의 파멸은 어째서 동정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베를린의 부유한 상속자 알비누스는 미술평론가이자 그림 전문가다. 연애운이 따르지 않았던 그는 평범한 결혼을 했고 여덟 살짜리 딸을 둔 상태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로맨스에 대한 ‘은밀하고 어리석은 갈망’도 포기하지 못한다. 그 갈망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도 구분되지 않는다. 어느 날 알비누스는 우연히 영화관에 들렀다가 안내인으로 일하는 마르고트를 보고서 반한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위대한 화가가 음영이 풍부한 어둠을 배경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고 곧바로 매혹된다. 하층계급 출신의 마르고트는 영화배우를 꿈꾸지만 연기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고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다가 영화관 안내일을 하던 터였다. 알비누스는 그녀에게 아파트를 얻어주지만 그들의 관계는 마르고트가 보낸 부주의한 편지 때문에 들통나고 알비누스는 차츰 불행의 길로 접어든다.


알비누스는 영화 제작에 나서며 마르고트를 배우로 데뷔시킨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마르고트는 알비누스의 소개로 옛 애인이었던 화가 렉스와 재회하고 두 사람은 합작해 알비누스의 재산을 빨아내기 시작한다. 알비누스는 둘의 관계를 뒤늦게 알게 되지만 마르고트의 변명에 다시 넘어가고 교통사고로 실명까지 한 뒤에는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처지가 된다. 알비누스는 마르고트의 보살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항상 렉스가 붙어 있었다. “알비누스는 누군가가 작게 킥킥거린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는 물론 렉스지만 이 대목에 이르면 독자 또한 그 비웃음의 주인공이 된다.


소위 ‘예술에 대한 열정’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알비누스는 예술의 대상(마르고트의 이미지)을 실제 현실(마르고트 자신)로 착각한다. 이 착각은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알비누스는 권총을 들고서 뒤늦게 복수에 나서지만 장님인 그의 총구가 제대로 마르고트를 겨낭할 리는 만무하다. 권총까지 빼앗기고 끝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알비누스 자신이다. 이렇듯 알비누스를 파멸로 이끌었지만 마르고트와 렉스는 소설에서 어떠한 응징도 받지 않는다. 도덕적 교훈을 혐오했던 작가 나보코프다운 결말이면서 노동계급에 무너진 어수룩한 자본가 계급을 향한 그의 냉소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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