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시사IN에 실린 장정일의 서평을 옮겨놓는다. 아마도 격주로 서평이 연재되는 듯싶은데, 이번에 다뤄진 책이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이다. 공역자로서 지난 연말과 올 연초를 함께했던 책이고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니 나로선 인연이 없지 않다(오늘 주문해서 받아보니 지난 7월에 3쇄를 찍었다). 얼마전 도서관 강의에서도 지젝의 폭력론을 다룬 적이 있는데, 중고등학생들을 위해 책의 주장을 쉽게 풀어써줄 용의가 없느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당장은 자신할 수 없지만 능력이 된다면 그렇게 해보고도 싶다. 내주에 나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이 그런 능력을 가늠해보는 척도가 돼줄 것도 같다.

시사IN(11. 11. 12) 명박산성을 지젝식으로 읽는다면?  

어떤 사람이 무엇에 정통했는지 아닌지는, 보기(일례·example)를 만들거나 제시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흔히 자기 혼자서는 알겠는데 남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가 아직 보기를 만들거나 들 수 있을 만큼 알지 못해서다. 대저 무엇을 안다는 사람이 보기를 실어 나르거나 만드는 일에 능하다는 것은, 역사상 위대한 스승이 모두 비유에 능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명제나 논리든, 보기를 만들거나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알고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자신의 현자 같은 능력을 과시하려는 듯이,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년)의 서문 첫머리를 아예 보기로 시작한다.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 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우리는 폭력을 이야기할 때,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눈에 보이는 폭력만 문제 삼는다. 하지만 한눈에 보이는 가시적 폭력보다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은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다.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과, 멀쩡해 보이는 경제체제와 정치체제가 행사하는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꾼이 매일 도둑질했던 게 ‘손수레’였던 것처럼, 뻔히 보이면서도 장물로 감지되지 않는 그런 폭력이다.

사악한 범죄자나 억압적인 공권력, 광신적인 대중운동이 저지른 가시적 폭력만 문제 삼는 시선에는 착취당하는 노동자, 아프리카의 기아,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이 폭력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이처럼 가시적 폭력만을 문제 삼는 사람일수록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라는 신념을 내세우기 쉽다. 이를테면 그들은 빈약한 화력으로 무장한 채 경찰과 대치하는 파업 노동자나 재개발 지역 주민만 폭도로 보지, 그 사람들을 극단으로 내몬 구조적 폭력은 외면한다. 지젝은 이런 위선자들을 향해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구조적 폭력과 다름없다는 것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고용주의 변덕에 직면한 피고용자들의 불안과, 강탈적인 대기업의 공세에 생존권이 위태로운 자영업자의 곤궁한 현실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지젝은 대의민주주의마저도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으로 간주한다. 그는 대개의 선거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관습과 견해의 영향을 받는다면서, 간혹 다수의 사람이 일시적으로 깨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투표를 하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놀라운 선거 결과가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라는 점은 선거가 진리의 수단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자유선거는 체제가 더 부드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지젝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방법이 대의제 말고는 모조리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책임(->폭력)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닫혀 있는 정치 공간이 열린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젝은 이 책의 진정한 주제인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그러기 전에 독자는 이 책의 서문에 적혀 있는 ‘취급 주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거기서 지은이는 폭력이라는 메두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감정을 배제’하고, ‘폭력으로 생긴 정신적 충격을 무시’할 것을 당부한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우리는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에 흡수되고 만다.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 
지젝은 폭력을 긍정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발터 베냐민의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이란 개념을 빌려온다. 신화적 폭력은 법을 만들거나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폭력이며, 이런 폭력의 가담자들은 자신의 책임을 ‘애국’이나 ‘안보’ 따위의 대타자에 전가한다. 반면 신적 폭력은 구조적인 폭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구조적인 폭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행하는 폭력으로, 신화적 폭력과 달리 자신의 폭력을 그 어떤 대타자에게도 전가하지 않는다. 예컨대 신적 폭력은 ‘정의’나 ‘민주주의’ 같은 대타자의 무력함과 무능함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한 주체들은 모든 책임과 위험부담을 홀로 떠안아야 한다. 베냐민은 이런 폭력을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한 폭력’이자 ‘혁명적 폭력’이라고 일컬었으며, 지젝은 거기에 ‘사랑의 역사(役事)’라는 명칭을 달아준다. 

역사에 기록된 많은 폭력은 신적 폭력보다,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폭력이 대부분이었다. 스탈린의 숙청과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대표적인데, 이명박 정권이 휘두르는 ‘법치’니 ‘공안정국’이니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자신의 무능을 가리려는 폭력에 가깝다. 정신분석에서는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을 위장하기 위한 행동을 ‘행위로의 이행’이라고 하는데, 시민운동가의 ‘행동하라’ ‘참여하라’ 따위 권고가 베냐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을 거세한 것이라면, 그것 역시 행위로의 이행에 지나지 않는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한국어판 후기를 새로 써 보냈는데, 여기에는 이런 전언이 담겨 있다. ‘한국인이 지금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명박산성을 넘지 않고자, 그 앞에서 비폭력을 외쳐댔기 때문이야!’ 

놀랍게도 지젝의 삐딱한 시선에 발본색원된 보이지 않는 폭력 가운데는, 민주주의 사회의 미덕으로 권장되어 왔던 ‘관용’과 ‘정치적 올바름’도 포함된다. 그가 보기에 알카에다가 벌인 9·11 테러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군이 벌인 고문 사례는,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과 무관한 야만끼리의 충돌이다. 사태를 그렇게 키운 것은 관용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현대의 이데올로기로, 관용은 ①상대방을 아이로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②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정치를 문화적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질시키는 관용과 자신의 견해는 바꾸지 않으면서 표현에만 신경 쓰는 정치적 올바름은, 미소 띤 얼굴 뒤에 야만을 키워왔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서로를 성인으로 취급하고, 책임을 물리면서, 예의 바른 비판을 하는 것이다.(장정일_소설가) 

11. 11. 12. 

 

P.S. 이번주에 나온 지젝의 신간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이다.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라고 나왔던 책의 재번역판이다. 당초엔 9.11 10주년에 맞춰 9월에 출간하려고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좀 늦어졌다(어쨌든 가을에 맞추긴 했다!). 공역자로 번역 자체에 많은 힘을 보태진 못했지만 번역 출간을 적극 제안하고 번역팀을 직접 구성했기에 새 번역본 출간은 나로서도 의미가 깊다. 직접적인 계기는 물론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를 읽어나갔던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연재였고, 여러 문제점 때문에 새 번역본이 출간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면 또 현실로 이뤄지곤 하는 게 세상이다! 그게 '실재의 사막'이니 그 환영사를 여기에 적어둔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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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topa 2011-11-12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문장에서 '책임'은 '폭력'입니다.
편집부에서 단어를 마음대로 고친 탓에, 지젝의 의도와는 달리, '민주주의는 투표를 통해 이루어진다'가 되고 말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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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선거는 체제가 더 부드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지젝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방법이 대의제 말고는 모조리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책임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닫혀 있는 정치 공간이 열린다고 강조한다.

로쟈 2011-11-12 21:39   좋아요 0 | URL
편집부에선 조사나 어미만 건드리는 줄 알았는데요.^^;
 

지난달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현장에서 행한 지젝의 연설문을 프레시안에서 옮겨놓는다. 연설 소식은 접했지만,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미처 챙겨놓지 못했었다. 지젝에 관한 포스팅조차도 상당히 오랜만인 듯싶다. 이달에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자음과모음, 2011)가 출간되면 다시금 자주 포스팅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 먼저, 일단은 아래 연설문부터 읽어보시길. 지젝의 기본 관점이 압축돼 있다. 영어판 타이틀은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Don’t fall in love with yourself)"이다.   

프레시안(11. 10. 18) [지젝 뉴욕 연설 전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이혼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WS) 시위의 진원지인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했던 연설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젝은 지난 9일 1000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이 연설을 했고, 그 연설은 이번 시위의 상징이 된 '인간 마이크'를 통해 전달됐다. (☞동영상 기사 보기) 다음은 미 <ABC> 방송이 제공한 지젝의 연설문 전문(☞원문 보기)과,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 중의 발언 내용을 종합해 재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카니발은 싸구려가 될 것이다"

카니발은 싸구려가 될 것이다. 여기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여러분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 이 시간들의 진정한 가치를 시험하는 것은 앞으로 닥칠 날들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일상 생활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지치고 피로한 노동자들과 사랑에 빠지라. 우리는 시작이다. 끝이 아니다. 우리의 기본 메시지는 이것이다. "금기는 깨졌다. 지금 우리는 가능한 가장 좋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대안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은 멀다. 그리고 우리는 곧 진짜 어려운 질문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원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어떤 사회 조직이 현존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가? 지난 세기의 대안들은 분명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월스트리트의] 사람들과 그들의 태도를 비난하지 말자.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라 사람들을 부패하게 하는 시스템(체제)이다. 해답은 '월스트리트가 아닌 메인스트리트'가 아니다. 메인스트리트가 월스트리트 없이 기능할 수 없는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적에 대해서만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항의를 희석시키는 거짓 동료의 잘못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카페인 없는 커피를, 알콜 없는 맥주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그들은 우리를 무해한 도덕적 항의자들로 만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겨우 콜라 캔을 재활용하거나, 몇십 달러를 자선 기금으로 내거나,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사면서 수익의 1%가 제3세계의 어려운 이들에게 간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 세계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3세계에]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한 이후, 결혼정보회사가 우리가 데이트하는 것까지 아웃소싱하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정치참여마저 아웃소싱되는 것을 지켜봤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시 찾아오길 원한다.

그들[1%]은 우리가 '비미국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당신들에게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때, 기독교성(Christianity)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 성령이다. 성령이란 사랑으로 결합된 믿는 이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가 기독교성이다. 여기 있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있다. 월스트리트의 저들이야말로 거짓 우상을 좇는 이교도다.

그들은 우리가 폭력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점령' 같은 우리의 말이 폭력적이라고. 그렇다. 우리는 폭력적이다. 하지만 단지 마하트마 간디가 폭력적이라고 할 때와 같은 맥락에서만 폭력적이다. 우리는 기존의 방식을 멈추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 순수한 상징적인 폭력을 매끄러운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폭력에 비길 수 있을까?

우리는 '루저'라고 불렸다. 하지만 진정한 루저들은 월스트리트에 있지 않은가? 그들이 우리들의 돈(세금) 수천 억 달러를 날리지 않았는가? 우리는 사회주의자라고 불린다. 하지만 미국에는 이미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존재한다.

그들은 당신이 사유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의 투기적 행태가 2008년 금융위기를 불러온 결과 사람들이 힘들게 일해 이룩한 사유재산을 날려 버렸다. 우리가 여기서 몇 주 동안 밤낮으로 사유재산을 파괴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 많이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수천 채의 집들이 빚에 넘어간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만약 공산주의가 1990년 무너진 그 체제를 말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권력을 잡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유럽이나 미국의 자본주의보다 더 역동적인 중국 자본주의 말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운영하는 중국 자본주의의 성공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이혼에 이르렀다는 불길한 징조다.

여러분이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있다는 협박에 굴하지 말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끝났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 맥락이 있다면 우리는 '공유'(the commons)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공유, 사유화된 지식의 공유, 생명공학의 공유 말이다. 이들은 현 체제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그들은 당신이 꿈을 꾼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꿈을 꾸는 것은 지금의 방식이 몇 가지 장식만 바꿔 달면 무한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악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꿈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체제가 천천히 스스로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고전적인 만화의 한 장면에 대해 알고 있다. 절벽에 다다른 고양이는 발밑이 허공이라는 것을 모른 채 계속 걸어가다가, 아래의 심연을 내려다본 순간 비로소 추락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은 월스트리트의 권력자들에게 '이봐, 아래를 봐'라고 일깨워주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변화는 가능한가? 오늘날 언론을 보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분포가 이상한 방식으로 돼있다. 개인적 자유의 영역과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점점 가능하게 돼간다. (아니면 그렇다는 말을 들은 것이거나)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is impossible)라는 말처럼, 우리는 온갖 기괴한 섹스를 즐길 수 있고, 모든 음악, 영화, TV 시리즈도 인터넷에서 내려받을 수 있으며, (돈만 있다면) 우주여행도 누구에게든 가능해졌다.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유전자 치료를 통해 강화할 수 있고, 우리의 정체성을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변형시켜 영생이라는 테크노-그노시스적인 꿈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 사회적 경제적 관계에서는 '할 수 없다'의 폭격을 맞을 것이다. 전체주의적 테러를 불러올 것이라는 이유로 집단적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없고, 당신을 비경쟁적으로 만들고 경제위기를 불러온다는 이유로 과거의 복지국가 모델을 고수할 수도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도 없다. 그리고, 그리고…. 긴축정책이 취해지면서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얘기만 반복적으로 들었다.

만일 부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약간만 올리자고 한다면 그들은 경쟁력을 잃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의료 체제를 갖추기 위해 돈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가 되자는 것이냐며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곧 영생도 가능해진다는데 당장의 의료 혜택을 위한 약간의 지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원한다.

어쩌면 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조합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어쩌면 우리가 영생을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더 많은 연대와 건강보험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월 언론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시간여행과 대안적 역사를 TV나 영화, 소설의 소재로 삼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중국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대안을 꿈꾼다는 면에서 좋은 징조다. 중국 정부는 그런 이야기가 진지한 역사적 사건을 경박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안적 현실로의 가상 속에서의 탈출조차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서방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런 금지는 필요치 않다. '이데올로기'는 최소한의 진지함마저 갖춘 대안적 역사 이야기를 막을 충분한 물질적 힘이 있다. 지배 체제는 우리의 상상력마저 막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은 쉽게 떠올린다. 종말론적 영화는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끝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구 동독에서 유래된 오래된 농담이 있다. 동독 노동자 한 명이 시베리아에 일하러 갔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당하기 때문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암호를 정하자. 만약 나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 보통 쓰는 파란 잉크로 글씨가 쓰여 있다면 사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는 부분은 거짓말인 것으로 하자."

한 달 후 그의 친구는 파란 잉크로 쓰인 첫 번째 편지를 받았다. "여긴 모든 것이 완벽해. 가게는 물건으로 가득차 있고 식품은 풍족하고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잘 돼. 극장은 서방에서 온 영화를 틀어주고 예쁜 여자들이 줄을 서 있어. 근데 딱 하나 없는 건 빨간 잉크야."

이게 지금까지의 우리의 상황 아닌가? 우리는 원하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딱 하나 빠진 게 빨간 잉크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부자유를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빨간 잉크의 부족이 오늘날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의 분쟁을 묘사하기 위해 쓰는 모든 용어들, 예를 들어 '테러와의 전쟁',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은 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대신 우리의 인식을 미혹시키는 틀린 용어라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 있는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당신들이 우리 모두에게 빨간 잉크를 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런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여러분이 1년에 한 번씩 만나 맥주나 마시면서 오늘을 떠올리며 '아, 그때 우린 젊었고 참 멋졌지'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달라. 사람들은 진정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정말로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번역_곽재훈기자) 

11.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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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6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7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1-06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 마이크'가 뭔가 했더니 동영상을 보니 알겠네요 ㅎㅎ "여기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여러분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 멋지군요. 그런데 동영상의 연설 내용과 원고 내용이 순서가 좀 다르네요. 나중에 취합해서 따로 정리한 모양이죠?^^

로쟈 2011-11-07 07:53   좋아요 0 | URL
네 편집자의 말이 그렇네요.^^

허스키 2011-11-0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가 기대됩니다.

로쟈 2011-11-07 07:53   좋아요 0 | URL
감사.

허스키 2011-11-07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년여 전의 포스팅에 댓글을 달았는데 아무래도 못 보실것 같아서 여기에 다시 조언을 얻고자 올립니다. 검색을 하다보니 마티에서 나온 김서영씨께서 번역한 <시차적 관점>의 번역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들이 몇몇 보입니다. 로쟈님께서 보시기엔 어떤가요?

로쟈 2011-11-07 07:53   좋아요 0 | URL
저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교정돼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허스키 2011-11-0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교정되어야 할 부분은 이 저서의 구입을 고려하게 할 만한 것인가요? 그정도로 큰 문제는 아닌건가요?

로쟈 2011-11-07 10:51   좋아요 0 | URL
미심쩍은 부분은 원서와 같이 보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도 만만찮은 분량의 책이라 번역본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무네숲 2011-11-0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저공비행을 즐겨찾기 해놓고 가끔 이곳에서 언급해주시는 좋은책을 구매하곤 하는 독자이자 소비자입니다. 우선 왕성한 지적탐닉?활동에 경의를 표하고싶고요, 저에게는 다소 생소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한 길라잡이 역활을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지젝 역시 로쟈님 덕분에 만난(저에게는 다소 난해한 부분도 있는)인연이 되겠는데요, 앞으로도 나름 지식에 눈을 떠가는 혹은 그러하고픈 이들에게 작은 울림이 되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로쟈 2011-11-09 07:45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도움이 되신다니 저도 기쁩니다.^^

은도끼 2011-11-0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나무아빠님의 의견과 똑같은 말을 꼭 하고팠던 사람입니다^^
갑자기 생각난건데 로쟈와 함께 지젝읽기가 나오면 친필사인 이벤트를 하심이....예약구매하겠습니다~~^^

로쟈 2011-11-09 07:46   좋아요 0 | URL
이벤트까진 모르겠지만 조촐한 행사는 있을 거 같습니다.^^

2011-11-29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3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추석 연휴에 묻히게 됐지만 오늘은 9.11 테러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에서 나온 관련서들이 그래도 조만간 몇권은 소개되지 않을까 싶다. 국내서로는 이슬람권 전공자들이 쓴 <이슬람>(청아출판사)이 9.11 이후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책으로 돼 있다. 그밖에 어떤 책들이 있는가란 기자의 질문을 받고 나도 생각나는 대로 몇권을 주워섬겼는데, '추천서'라기보다는 '관련서'로 든 것이었다. 지난주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11. 09. 03) '추악한 전쟁' '경도와 태도' 등 읽어볼 만

"글쎄요. 아직 번역 안 된 해외서적 가운데는 읽을만한 게 더러 있긴 한데." 중동전문가인 인남식 외교안보연구원 부교수는 9ㆍ11 테러와 이후 세계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에 다소 망설이는 눈치였다. 전문가의 머릿속에 이거다 하는 책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국내의 관련 도서층이 빈약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뜸을 들인 뒤 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3권. 우선 미국 abc방송 기자 존 쿨리가 쓴 <추악한 전쟁>(이지북 발행)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지원한 이슬람 테러 조직이 결국 미국에 칼끝을 겨누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경도와 태도>(21세기북스). 9ㆍ11을 전후해 자신이 쓴 칼럼과 일기를 모은 책으로 9ㆍ11로 자살을 감행한 이들은 누구이며 이슬람 세계는 왜 이들에게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지, 미국인들은 왜 분노의 표적이 됐는지에 대한 생각들이 펼쳐져 있다. 최근 출간된 <진리를 향한 이정표>(평사리)도 추천 목록에 들어갔다. 이슬람 과격파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이드 쿠틉이 옥중 집필한 책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의 이념 구조를 알 수 있다. 



인문학 서적을 중심으로 활발한 서평활동을 하고 있는 이현우씨는 슬라보예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테러리즘의 정신>(동문선), 테리 이글턴의 <성스런 테러>(생각의나무)를 추천했다. 9ㆍ11과 테러의 이면에 도사린 철학적인 문제들을 짚어본 책들이다. 지젝의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라는 제목으로 국내 번역출간됐으나 절판된 것을 이씨 등이 새로 번역해 낼 계획이다. 지젝은 책과 같은 제목의 창비웹진 투고에서 9ㆍ11로 분명해진 것은 '이런 폭력은 텔레비전 스크린을 통해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미국이 이제 직접적으로 이런 폭력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슬람 역사서로는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가 쓴 <이슬람문명>(창비), 레바논계 프랑스 소설가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침이슬) 정도가 많이 읽혔다. 최근 출간된 미국 저술가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뿌리와이파리)도 반응이 좋다.(김범수기자) 

11. 09. 11.  

P.S.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 대해선 작년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연재를 통해 다룬 바 있는데, 내달에는 이 연재를 묶은 단행본과 함께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될 예정이다(나는 새 번역본 출간을 제안하고 감수를 맡았다). 나름대로 9.11 10주년의 의미를 생각해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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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9-1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개정판이 나온단 말씀이시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과 엮어 필히 업어와야겠네요!^^

로쟈 2011-09-12 15:01   좋아요 0 | URL
네, 10월중엔 나올 듯해요. 독촉을 받고 있으니.^^;

쉽싸리 2011-09-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연재하신 지젝관련 글을 책으로 내신다니 반갑습니다. 연재를 초반에 좀따라가다가 놓쳤었거든요. 아무래도 책으로 엮여야 든든한거 같아요.^^

로쟈 2011-09-12 15:0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헌내 2011-09-1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재번역이라...ㅋ 기대됩니다!!!!

로쟈 2011-09-12 15:02   좋아요 0 | URL
네, 이번엔 많이 읽히면 좋겠어요...

singing 2011-09-1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또 나오는군요 ^^ 책꽂이에 로쨔쌤컬렉션 자리도 마련했겠다, 이제 준비할 건 질끈머리끈이네요ㅎㅎ. 연재를 미처 따라가지못하구 주저앉았는데...
보드리야르도 어려웠구...겁은 나지만 도전!!^^..

2011-09-17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8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와 함께 '폭력이란 무엇인가' 읽기

엊그제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아르바트거리에 여장을 풀고 이틀째 '출장일'을 보내고 있다. 6시간의 시차는 일상의 리듬을 약간 이상하게 바꾸어놓았는데, 어제오늘 나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어얼리 버드' 노릇을 하고 있지만, 한국시간으론 아침 10시에 일어나는 것이니 한껏 늑장을 부리는 것이기도 하다(그래서 일찍 일어나는 것인지 늦게 일어나는 것인지 헷갈린다).  

Жижек в Кембридже: «Изнасиловали? Давайте обсудим» 

밀린 원고들을 다 싸들고 온 탓에 주로 숙소에 머물러 있다가 어제오늘 낮시간에 내가 한 일이라곤 두 곳의 서점에 들른 것 정도다. 어제는 루뱐카역의 비블리오-글로부스에 들렀고, 오늘은 아르바트의 돔-끄니기에 들렀다. 6년 전엔 비블리오-글로부스가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더 흡족한 쪽은 돔-끄니기이다. 이유야 별것 아니다. 지젝의 <폭력에 대하여>(2010)를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 말이다. 아래가 러시아어본이다.  

 

나는 몰랐던 사실인데, 작년에 유로파란 출판사에서 두 명의 역자가 공역해 펴냈다. 분량은 184쪽. 나로선 한국어본 공역에 참여한데다 이달말부터 한겨레문화센터에서의 강의도 있기 때문에 책의 의미가 각별하다.  

러시아 책값도 그간에 더 올라서 이젠 한국 책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폭력에 대하여>도 250루블(1만원)을 주고 샀다(다른 서점의 정가를 보니 189루블 정도에도 구입할 수 있었다. 여전히 책값은 서점마다 천차만별이다). 

<폭력에 대하여>와 함께 돔-끄니기가 점수를 딴 건 조르주 바타이유 때문인데, <저주의 몫>이란 제목으로 <종교의 이론>(우리말 번역은 <어떻게 인간적 상황에서 벗어날 것인가>), <에로티즘>이 합본된 책이다. 책값은 685루블(27,500원 가량). 세권 값이라고 생각하면 나름 괜찮은 편이다. 6년전엔 바타유의 소설집을 구했었는데, 이 이론서는 2006년에 나왔다.   

그밖에도 책은 여러 권 샀지만(전공서와 영화책을 빼면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적 이성 비판>,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 라캉의 <세미나2> 등이 오늘 구한 책이다) 이 두 권 때문에 어제의 실망을 좀 만회했다... 

오랜만에 모스크바에 왔지만, 짧은 체류에다가 매인 일들이 많아서 예전처럼 '모스크바 통신'을 올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폭력에 대하여>를 모스크바에서 만난 반가움 때문에 소감을 간단히 적었다. 어쩐지 이런 멘트로 마무리해야 할 듯싶다. "이상 모스크바에서 로쟈였습니다." 

11. 02. 11.  

P.S. 러시아에는 어떤 책들이 나와 있나, 혹 궁금해하실 분이 있을 듯해서 약간 덧붙이자면, 돔-끄니기를 두 시간쯤 둘러보고 받은 인상에 불과하지만, 일단 융의 책들이 많아졌다.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 서가를 꽤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푸코의 두툼한 강의록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왼쪽 이미지가 <주체의 해석학>이다). 프랑스 철학자들 가운데에서는 단연 푸코가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갖는 듯싶다. 그리고 헌팅턴이나 후쿠야마 등 미국 학자/논객의 책이 다수 눈에 띄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거의 대부분 번역돼 있는 듯 싶지만, 정점은 지난 듯하고 <1Q84>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상태다(대신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여럿 번역돼 있어서 이채로웠다. 러시아에서도 붐은 타는 듯하다). 러시아문학 작품과 연구서는 생각만큼 늘지 않았고 눈에 띄는 책도 별로 없었다. 러시아 학자의 책으론 바흐친 전집의 4-1, 4-2권이 출간됐는데 모두 그의 <라블레>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로트만과 우스펜스키의 서신 교환집(오른쪽 이미지)이 개인적으론 눈길을 끌었다. 다른 서점도 좀더 다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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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2 0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2 0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2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2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헌내 2011-02-12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러시아 가 계신가 보군요..^^

로쟈 2011-02-12 15:37   좋아요 0 | URL
흠, 대외비인데요.^^

푸른바다 2011-02-1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러시아에서도 책을 사시는군요.^^ 바타이유, 바타유의 혼용은 어떤 의도가 있으신 건가요?

로쟈 2011-02-12 15:37   좋아요 0 | URL
쓰다 보니 혼용이 되네요. 책이 두 종류로 나와 있어서요. 저는 어느쪽이건 통일해주면 좋겠다는 입장입니다. 러시에서도 물론 책은 사지만, 어지간하면 2만원 안팎이라 '재미'는 없습니다.^^;

2011-02-12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2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tty 2011-02-1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모스크바 가셨군요! 치안은 괜찮은거죠?
작년에 모스크바 가려다가 무서워서 ㅠㅠ 행선지를 바꿨거든요.
언젠가 꼭 가보고 싶네요. 건강하게 일정 마치고 돌아오세요~

로쟈 2011-02-13 14:19   좋아요 0 | URL
좀 위험한 곳이긴 하죠. 느닷없이 테러나 폭력 사건이 터지니까요. 사람들 표정도 무뚝뚝한 편이고요. 그래도 고풍의 외관은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처음 온 친구들이 그렇게 말해주네요.^^

hikrad 2011-02-13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 서점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요.
<임상의학의 탄생> 러시아어본 사진도 보고 싶구요^^

로쟈 2011-02-13 14:17   좋아요 0 | URL
러시아 서점이라고 특별하진 않습니다. 푸코의 책은 많이 나와 있는데, 2-3만원씩 해서 사들고 갈 엄두가 안 나네요. 여기도 인터넷서점이 더 저렴할 때가 있구요. <임상의학의 탄생>은 작년에 나왔는데, 252쪽의 슬림한 책입니다. 기회가 되면 사진도 올려놓을게요.^^

람혼 2011-02-13 0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러시아의 로쟈님! ^^ '모스크바 통신'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어놓으셨지만, 왠지 예전의 그 '모스크바 통신' 글들이 그리워지기도 하는군요. 당연히 쓰면서 예상하셨겠지만, 저로서는 바타이유의 러시아어 판본들에 가장 먼저 관심이 갑니다. 좋은 시간 보내고 돌아오시길!

로쟈 2011-02-13 14:14   좋아요 0 | URL
그땐 인터넷 사용이 불편해서 '길게' 쓸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하곤 사정이 좀 다르죠. 실시간을 인터넷을 하다 보니, 러시아 같지가 않아요.^^;

유형원 2011-08-30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지금 모스크바에서 어학연수중인데 비블리오 글로부스에 О НАСИЛИИ있어요 ^^

유형원 2011-08-30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그리고 1Q84는 6월인가 7월에 발간되어서 곳곳에서 쌓아놓고 파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에 대한 서평기사 두 편을 옮겨놓는다. 책에 관심은 있지만 얼핏 읽을 엄두가 안 나시는 분들에겐 참고가 될 만하다.   

주간한국(11. 01. 19)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관심을

MTV철학자,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 지젝에 붙은 이 수식어들은 현재 그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19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통해 영어권 지식사회에 등장한 이후 6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줄기차게 써왔고 지금도 한 해 2,3권씩의 책을 쓴다. 그 입담의 원천은 가장 난해한 사상가, 헤겔과 라캉이다. 그는 헤겔을 통해 라캉의 사유를 읽고, 다시 라캉 언어로 헤겔의 사상을 설명한다. 여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팝음악, 할리우드 영화, 오페라는 그가 자주 인용하는 사례들이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 내듯' 정력적으로 책을 내는데다, 대중문화를 통한 설명 덕분에 지젝은 2000년대 가장 대중적인 사상가 중 하나가 됐다. 



신간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지젝의 이론적 사유를 바탕으로 폭력에 대한 다양한 성찰을 펼쳐놓은 책이다. 저자는 폭력의 개념을 몇 가지로 나눈다. 우선 주관적 폭력, 객관적 폭력이다. 가해의 의미로 쓰이는 일반적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 칭하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폭력을 '객관적 폭력'이라 칭한다. 객관적 폭력은 다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과 경제정치 체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구조적 폭력'으로 나뉜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폭력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의 상투적 이미지에 한걸음 물러날 때만, 인간은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 성찰할 수 있다는 것.

책은 총 6가지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의 차이를 설명한다. 2장에서는 폭력의 궁극적 원인이 공포에 있다고, 이웃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 공포가 언어 자체에 내재된 폭력의 기초를 이룬다. 3장에서는 테러리즘이 가진 원한이란 감정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 정의에 대해 짚고 넘어간다. 원한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표를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될 법한 것들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는지에 더 큰 관심을 쏟아붓는 도착이다. 4장에서는 관용적 이성의 이율배반에 대해, 5장에서는 사회 지배 이데올로기서의 관용의 한계에 대해 설명한다. 6장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이 가진 해방적 면모를 설명한다.

'이 책에서는 폭력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대신 폭력으로 향하는 여섯 가지의 우회로를 일별해보고자 한다. 폭력의 문제를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폭력을 직접적으로 건드리게 되면 폭력은 반드시 신비화된다.' (26페이지)

이 책은 지젝 특유의 '변증법적 화술'로 폭력에 대한 성찰을 논하고 있지만, 지젝의 어느 저작보다 명쾌하게 읽힌다. 만평과 영화 등 친근한 소재를 통한 설명과 명쾌해진 번역 덕분이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로쟈, 이현우 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다.(이윤주기자) 

국제신문(11. 01. 15) 폭력의 실상, 한발 물러서면 제대로 보인다

'괴물 철학자'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악명(또는 명성)에 걸맞게 슬라보예 지젝(62)의 글은 종횡무진과 성역 침범을 서슴지 않는다. 이번에 번역돼 나온 폭력이란 무엇인가(원제 Violence)도 마찬가지다. 칸트, 니체, 알랭 바디우 같은 서양의 어려운 철학자부터 2005년 파리 이민자 폭동, 같은 해 뉴올리언즈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와 잇따른 폭력 사태에 대한 호도 등 현실의 사건을 치밀하게 엮어나간다.

지젝이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먼저 말하는 것은 일단 한 걸음 물러나서 폭력을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폭력을 이렇게 분류한다. 먼저 주관적(subjective) 폭력. 테러, 범죄에 대한 전쟁, 폭동, 국제 분쟁처럼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이다. 두번째가 상징적(symbolic) 폭력이다. 인간 사회의 언어 자체에 들어있는 훨씬 근본적인 폭력을 일컫는다. 세번째는 구조적(systemic)폭력이다. 묘하게도 '우리의 경제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에 해당한다.

두번째와 세번째 폭력은 객관적(objective) 폭력으로 묶을 수 있다. 지젝은 한 걸음 물러나서 보아야 이 같은 폭력의 구조를 식별할 수 있다고 본다. 책 속에 있는 예시를 통해 접근해보자. 자애롭고 선하면서도 부유한 귀족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귀족의 횡포가 심해져 억압받던 이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은 폭력을 동반한다. 이 귀족도 결국 다른 나라로 추방된다. 자애롭고 선한 귀족은 혼란스럽다. "나는 젊잖은 내 삶을 유지했을 뿐인데, 뭐가 잘못된 거지?"

지젝은 '그의 태도는 자신이 누리던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폭력이 지속돼야만 했다는 점에 대해 그가 놀랄 만큼 무감각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썼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폭력에만 매달려 폭력에 대해 사유하는 경향이 강한데, 그런 상황에 갇혀서는 "모든 폭력에 대한 반대"를 외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객관적 폭력을 은폐하기 십상이란 것이 그의 관점이다.

지젝은 책의 전반부에서 영화, 문학, 사건 등을 실례로 들면서 이 같은 주장을 논증해간다. 모두를 품에 안는 척하면서도 결국 그 품안에 안기지 않는 사람은 배제해버리는 기독교의 구조. 이와 유사한 이슬람교. 엄청난 기부를 통해 세계의 위기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계의 위기 자체를 생산하고 있는 세계의 거대 기업과 자선가. 지젝은 때로 깜짝 놀랄 만큼 예리한 시선으로 폭력의 문제에 대한 지평을 넓힌다.

그는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무작정 참여와 실천에 뛰어들기 보다 한발짝 물러나 사유할 것을 권한다. 지젝이 책에서 내놓는 대안과 권유는 때로 불온하고 위험해보이거나 잘 이해가 안 가기도 한다. 그의 제안에 굳이 동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은 세상을 휘감고 있는 폭력에 대해 무척 폭넓고 새로운 관점에서 깊이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매력이다. 유명한 서평 전문 블로그인 '로쟈의 저공비행'을 운영하는 이현우 씨를 비롯해 김희진 정일권 씨가 함께 한 번역도 생생하고 명쾌해서 좋다.(조봉권기자) 

11. 01. 19.  

P.S. 그래도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혼자 읽기가 버거우신 분이라면 관련강좌의 도움을 얻으셔도 좋겠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신촌)에서 2월28일부터 4월 4일까지 6주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19:30-21:30)에 '로쟈의 인문학 여행 :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강좌를 진행한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7&tolclass=&searchword=&subj=F90934&gryear=2011&subjseq=0001&p_selmenu=01). 일정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여섯 장을 일주일에 한 장씩 자세히 읽는 것이다.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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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스크바의 지젝과 바타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2-11 23:49 
    엊그제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아르바트거리에 여장을 풀고 이틀째 '출장일'을 보내고 있다. 6시간의 시차는 일상의 리듬을 약간 이상하게 바꾸어놓았는데, 어제오늘 나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어얼리 버드' 노릇을 하고 있지만, 한국시간으론 아침10시에 일어나는것이니 한껏 늑장을 부리는 것이기도 하다(그래서 일찍 일어나는 것인지 늦게 일어나는 것인지 헷갈린다).밀린 원고들을 다 싸들고 온 탓에 주로 숙소에 머물러 있다가 어제오늘 낮시간에 내가
 
 
2011-05-11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1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