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폭력이란 무엇인가' 읽기
엊그제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아르바트거리에 여장을 풀고 이틀째 '출장일'을 보내고 있다. 6시간의 시차는 일상의 리듬을 약간 이상하게 바꾸어놓았는데, 어제오늘 나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어얼리 버드' 노릇을 하고 있지만, 한국시간으론 아침 10시에 일어나는 것이니 한껏 늑장을 부리는 것이기도 하다(그래서 일찍 일어나는 것인지 늦게 일어나는 것인지 헷갈린다).
밀린 원고들을 다 싸들고 온 탓에 주로 숙소에 머물러 있다가 어제오늘 낮시간에 내가 한 일이라곤 두 곳의 서점에 들른 것 정도다. 어제는 루뱐카역의 비블리오-글로부스에 들렀고, 오늘은 아르바트의 돔-끄니기에 들렀다. 6년 전엔 비블리오-글로부스가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더 흡족한 쪽은 돔-끄니기이다. 이유야 별것 아니다. 지젝의 <폭력에 대하여>(2010)를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 말이다. 아래가 러시아어본이다.
나는 몰랐던 사실인데, 작년에 유로파란 출판사에서 두 명의 역자가 공역해 펴냈다. 분량은 184쪽. 나로선 한국어본 공역에 참여한데다 이달말부터 한겨레문화센터에서의 강의도 있기 때문에 책의 의미가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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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책값도 그간에 더 올라서 이젠 한국 책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폭력에 대하여>도 250루블(1만원)을 주고 샀다(다른 서점의 정가를 보니 189루블 정도에도 구입할 수 있었다. 여전히 책값은 서점마다 천차만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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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하여>와 함께 돔-끄니기가 점수를 딴 건 조르주 바타이유 때문인데, <저주의 몫>이란 제목으로 <종교의 이론>(우리말 번역은 <어떻게 인간적 상황에서 벗어날 것인가>), <에로티즘>이 합본된 책이다. 책값은 685루블(27,500원 가량). 세권 값이라고 생각하면 나름 괜찮은 편이다. 6년전엔 바타유의 소설집을 구했었는데, 이 이론서는 2006년에 나왔다.
그밖에도 책은 여러 권 샀지만(전공서와 영화책을 빼면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적 이성 비판>,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 라캉의 <세미나2> 등이 오늘 구한 책이다) 이 두 권 때문에 어제의 실망을 좀 만회했다...
오랜만에 모스크바에 왔지만, 짧은 체류에다가 매인 일들이 많아서 예전처럼 '모스크바 통신'을 올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폭력에 대하여>를 모스크바에서 만난 반가움 때문에 소감을 간단히 적었다. 어쩐지 이런 멘트로 마무리해야 할 듯싶다. "이상 모스크바에서 로쟈였습니다."
11.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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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러시아에는 어떤 책들이 나와 있나, 혹 궁금해하실 분이 있을 듯해서 약간 덧붙이자면, 돔-끄니기를 두 시간쯤 둘러보고 받은 인상에 불과하지만, 일단 융의 책들이 많아졌다.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 서가를 꽤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푸코의 두툼한 강의록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왼쪽 이미지가 <주체의 해석학>이다). 프랑스 철학자들 가운데에서는 단연 푸코가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갖는 듯싶다. 그리고 헌팅턴이나 후쿠야마 등 미국 학자/논객의 책이 다수 눈에 띄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거의 대부분 번역돼 있는 듯 싶지만, 정점은 지난 듯하고 <1Q84>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상태다(대신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여럿 번역돼 있어서 이채로웠다. 러시아에서도 붐은 타는 듯하다). 러시아문학 작품과 연구서는 생각만큼 늘지 않았고 눈에 띄는 책도 별로 없었다. 러시아 학자의 책으론 바흐친 전집의 4-1, 4-2권이 출간됐는데 모두 그의 <라블레>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로트만과 우스펜스키의 서신 교환집(오른쪽 이미지)이 개인적으론 눈길을 끌었다. 다른 서점도 좀더 다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