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3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3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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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의 <애도와 우울증: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무의식>은 소개하기 힘든 책이다. 보통 내가 글을 싣는 지면은 학술지도 아니고 대학원의 학보도 아니다. 그런데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라니! 두 사람이 러시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임은 분명하지만, 김소월과 이상도 아니고 김수영과 김춘수도 아니다. 이 글의 끝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DJ DOC의 전 멤버 한 명이 예전의 멤버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촌극과 그 추이를 접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불특정다수를 위한 '읽을거리'로 변용하는 데 더 오래 애를 먹었을 것이다.- 107쪽

지은이는 이 책의 1장 첫머리를 "예술에 대한 프로이트적 가정에 따르면 예술창조의 전제조건은 삶의 파탄이다. 즉 뭔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느낌 없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감정 없이 예술을 창조할 수는 없다."라는 글을 시작하면서, 특히 낭만주의 예술에서는 예술가의 상실 체험이 가장 큰 창작 동기가 된다고 말하다. 이때 그들의 예술 행위나 창작품은 상실에 대한 위안이거나 보상물이며, 예술가들은 그들의 유년 시절 체험이나 기질에 따라 각기 '애도형 유형'과 '우울증형 유형'으로 나뉜다. 지은이에 따르면 푸슈킨이 전자고, 레르몬토프는 후자다. - 107쪽

애도란 상실을 겪은 주체가 상실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전이시킨 것을 일컫는다. 예컨대 애도란 옛 애인을 새 애인으로 대체시킨 경우로, 새 애인이 옛 애인을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옛 애인의 형상을 차츰 철회한 끝에 아픈 만큼 성숙해진 경우다. 반면 우울증은 옛 애인을 끝내 잊지 못하고 헤어진 옛 애인을 나와의 동일시 속에서 보존하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미운 사람은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버림받은, 못난 '나'이다. 대상과의 분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르시시즘과 자아 분열(혹은 자아 고문)에 빠진 우울증적 주체는 다른 대상으로 전이가 불가능하다.- 108쪽

이 책은 낭만주의를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두 정념적 범주로 해석하려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푸슈킨에게 있어 근원적 상실의 대용품이었던 정치적 낭만주의의 좌절이 미학적 자율성으로 치달아가는 전환점을 포착하고 있다. - 108쪽

사족이다. 자신이 DJ DOC에서 퇴출당한 이유가 '박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 옛 멤버를 고소한 전직 가수는,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장사(葬事)지내지 못했다. 저 사안의 명예훼손 여부를 떠나, 17년이 지나도록 박치라는 말을 스스로 웃어넘기지 못할 정도였으니 애도에 실패한 것이다. 고소장을 들고 경찰서 앞에서 인터뷰를 했던 그는, DJ DOC에서 퇴출당한 이래로 17년 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못했고 노래방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실패한 애도는 우울증이 된다. -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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