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바슬라프 니진스키 지음, 이덕희 옮김 / 푸른숲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 시인 츄체프의 시구인데, 고골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작품들 속에서 ‘황당한’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비단 문학작품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란 나라의 자연적/역사적 조건에 대한 약간의 상식만 갖고 있으면 이 나라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혁명 이전 전세계 육지의 1/6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와 한랭한 기후가 이 나라의 자연적 조건이라면, 3세기에 걸친 이민족 몽고의 강압적인 지배는 그 역사적 조건이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잔혹한 삶(러시아적 삶!), 그래서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은 ‘인내’였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이 자인한 바 있듯이 러시아적 영혼이란 달리 ‘노예적 영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노예적 상태란 단지 정치적 부자유나 신체적인 구속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인간 실존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폭력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류사의 역사적 조건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조건에 대한 인내의 '폭발'에서 광기의 계보학은 태어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1866)에는 어린 로쟈가 학대받는 늙은 말의 목을 껴안고 흐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유일한 심리학자’라고 일컬은 바 있는 철학자 니체는 1889년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학대받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이후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00년에 사망한다. 1889년에 태어난, 20세기초 러시아가 낳은 전설의 발레리나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디오니소스적인 영혼의 소유자는 철학을 하는 대신에 춤을 추었을 뿐.

그는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정신병원에서 보냈는데, ‘영혼의 절규’란 이름을 새로 얻은 그의 ‘일기’는 그가 정신을 놓기 직전인 1919년초 6주간에 걸쳐 씌어진 기록에 근거한다. 한 민감한 영혼이 삶의 고통과 싸운 이 쟁투의 기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 니체적 흐느낌이 가득 배여 있다.

그는 고기를 먹으면서 울고, 사랑의 시를 적으면서 울고, 아내의 울음 때문에 또 운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전설적인 발레리나’ ‘위대한 예술가’라고 했지만, 그 자신에 의하면 그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은 단순한 사람”이며, 그는 “그리스도도 내가 평생에 걸쳐 받은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그가 받은 고통은 그 자신의 몫만이 아닌 전 인류의 고통이기 때문은 아닐까? 한 시인을 위해 울어주던 버드나무처럼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운다. 그의 일기는 이 울음의 기록이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정신의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병명은 정신분열증, 더 정확하게는 ‘자기애적 인격의 분열적 정서 혼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자기애적’이란 진단은 절반만 옳다. 브로일러나 프로이트 같은 당대의 대가들조차도 치유할 수 없었던 그의 병증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앓았고 또 니체가 앓았던 병, 곧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병증의 치유는 자기만의 구원이 아닌 전인류의 구원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병증의 환자들은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맨마지막에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경전과도 같은 이 책에서 니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지 짐승이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나 역시 결점들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나는 신이 되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다.”(348쪽) 당신도 그런 목표를 갖고 있는가, 라고 니진스키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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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4-12-0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을 잘 쓰시는군요.러시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 부럽습니다. 니진스키 저도 읽어볼까요? 행복한 12월 되세요~~

알고싶다 2005-07-01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보니 매우 간결하게 잘 쓰셨습니다. 다만 정신분열병에 대한 제 의학적인 지식으로 볼 때 맞지 않는 부분이 보여 지적해드리고 싶습니다. 흔히 정신과의 의료 기록(Chart)에서 쓰이는 진단 용어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언어와는 맥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일종의 의료 기술적인 접근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용어죠. 일단 니진스키를 정신분열병 환자로 규정하면서, 의사가 그에 대한 진단을 '자기애적 인격의 분열적 정서 혼란'이라고 했다는 전제를 둔다면, 여기서 '자기애적'이라는 용어는 '자신을 사랑한다'라는 사전적인 용어가 아니라 의학적인 용어로 이해하여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자기애적 방어 기제(Narcissistic defense)의 줄임말이죠. 이것은 니진스키의 심리 상태에서 투사적 동일화와 같은 내적 긴장의 완화 기교가 인식되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자기애'적이라는 진단이 절반만 옳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로쟈님이 이 글을 통해서 쓰신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병'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말씀하려고 하신 바는 이해가 가지만, 의료 용어에 대한 정확하지 못한 이해 혹은 해석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적드립니다. 인명도 틀리군요. 브로일러가 아니라 블로일러(Bleuler)가 맞습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당시 블로일러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열병을 치유하지 못했더라도 그때(19세기~20세기 초반)는 정신의학의 태동기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죠. 지금은 항정신병 약물을 복용하면 치유 가능성이 충분히 높은 병증입니다.

로쟈 2005-07-20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투사적 동일화와 같은 내적 긴장의 완화 기교가 인식되었다는 뜻"이 어떤 뜻인지 좀 모호한데('완화 기교'는 무엇이고, 누구에게 인식되는 건지요?), 조금 자세하게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