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해 열림원 이삭줍기 5
보리스 필냐크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1921년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회주의 러시아의 안정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20-21년 사이에 볼가강 지역을 휩쓴 가뭄으로 오백만 명 이상의 농민이 죽었다. B. 필냑/필냐크(1894-1937)의 표현을 빌면 말 그대로 ‘벌거벗은 해’였고, “죽음이 삶이나 출생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다. 필냑의 <벌거벗은 해>(1921)는 흔히 소비에트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산문문학은 일단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않은 벌거숭이 상태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해>는 1917년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문화적 혼돈(카오스)과 에네르기를 문학적으로 육화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혁명 직후 러시아의 사회현실적 삶과 정신적 삶의 현실이 문학텍스트 속으로 수축되어 들어간 것이 바로 <벌거벗은 해>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작가 필냑의 고유한 현실관(혹은 세계관)이다. 무엇이 진정 현실적인 것이냐라는 문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식의 헤겔의 말을 비틀자면, 필냑에게선 “반복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반복적인 것이다.” 예컨대, “아들아, 너는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포기하지 말아라. 결혼해서 아이들을 갖도록 해라, 아들아……” “이렇게 하여 집과 가게와 성경과 매질과 마누라와 마슈라 사이에서 4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매일매일이 그런 식이었고, 40년이 한결같이 그런 식이었다.”라거나 “인생의 모든 것은 바로 부메랑과도 같아... 내가 저지른 모든 일이 나에게 되돌아올 거야.” “백만 년 전에도 밤은 있었어. 지금도 밤이 있고 백만 년 후에도 밤이 있을 거야.” “나는 지금의 당신이었고 당신은 지금의 나일 것이다.” 등등의 구절들.

필냑에게서 ‘고대적인 것’이란 테마는 이때 반복적인 것, 반복할 수 있고 반복되어야 하는 것에 해당한다.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18세기) 이전의 러시아, 반(半)아시아적이고, 야만적인 러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한 문학사가의 지적에 의하면, 필냑은 인간은 환경에 의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인간 본질의 불변의 요소>에 대해 항상 언급했다. “그는 단지 출생, 사랑, 죽음이라는 기본적인 과정에 관심을 두었고, 그의 탁월한 작품은 고독, 이성, 절망의 슬픔과 공포, 자연과의 일체감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마음에는 사회의 대변혁을 초월하는 고정된 불변의 요소가 있어서 제국의 몰락, 군중의 폭동, 사회개혁이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이나 혼란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필냑은 항상 암시하였다.”(마르크 슬로님)



20년대에 비교적 평탄했던 필냑과 당국의 관계(필냑에겐 자동차가 2대 있었다)가 30년대에 접어들면서 냉각되고 급기야는 숙청당하게 되는 사정의 밑바탕에는 그의 이런 세계관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벌거벗은 해>에서 ‘볼셰비키’와 ‘코뮤니스트’의 차이. “니체, 로자노프의 사상 및 슬라브주의적 영감을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의 특이한 향취와 혼합한 필냑은 혁명을 부자연스런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대의 종말 및 17세기 모스크바 시대의 부활로 보고 환영하였다. (그에게서) 혁명적 폭발의 거친 원시주의는 단순하게는 일종의 스키타이인과 같은 삶의 방식의 재개를 선언하는 민족적 에너지의 방출이었다. 야만적인 러시아, 스텐카 라진과 푸가초프의 러시아, 필냑은 성적인 열정이나 순수한 애정적 환락의 장면에서 이러한 러시아인의 육체적인 힘을 찬양하고 무력하고 위선적인 유럽과 대비시켰다”(마르크 슬로님) 대략 이런 것들이 필냑이 가졌던 아이디어이다. 그리고 <벌거벗은 해> 등의 나타나는 특징적인 기교들과 기법들은 모두 이런 아이디어의 형식적 등가물이 될 것이다.

<벌거벗은 해>에 등장하는 고대성의 특징적인 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물의 상징성, 알레고리성. 이야기 서술의 주체로서의 근대적 개인이란 것은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린 근대소설의 발명이다. 근대소설은 이 문제적인 개인의 ‘내면’과 ‘심리’에 대한 묘사를 득의의 영역으로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서양 소설의 전통과 엄격하게 단절하고자 했던 필냑은 그의 인물들에게서 심리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인물들에 ‘고대성’을 부여한다. 즉 인물들은 자신의 내적 동기화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입장이나 신념, 관점, 주의, 주장들을 대표하는 자로서 선택된다. ‘누구누구의 눈으로’라는 식의 이야기 토막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해>에는 고유명사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상황이나 모티브가 반복되는 것처럼 인물의 형상 또한 반복된다. 오르드이닌가의 보리스와 글렙이 성자 보리스와 글렙의 이름을 가지는 것처럼.

둘째로, 이야기의 메시지나 이념적 논쟁이 주로 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해서 표출된다는 점. 이것은 알레고리적인 인물이 선택될 경우 당연한 귀결이다. 인물에 성격화가 부여되지 않을 경우 상황묘사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보완하는 것이 바로 대화인 셈이다. <벌거벗은 해>에서 혁명에 대한 인물들의 입장이나 태도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가령, 1917년의 혁명에 대해서 그것이 마르크스(=유럽)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공식을 보여주는 것이냐, 아니면 러시아 민중에게 잠재되어 있는 천년 동안의 믿음이 현실화된 것이냐에 대한 논의. 근대소설의 경우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이런 류의 교술성을 또한 고대문학적 특성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겠다.

셋째로, 의인화되는 자연. 이 또한 눈에 두드러지는 것이지만, 가령 <이고르 원정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해>에서의 자연(특히 눈보라)는 이야기 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발언한다. 그래서 마치 희랍비극에서의 코러스처럼 여기저기 참견하듯이 으르렁거리고 울부짖으며 “비유비유가가 샤샤샥”거리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전범이 되는 것은 동화(=옛이야기)의 세계이다.

넷째로, 연대기적 구성. 사제 실베스트르가 연대기 편찬자로 나오지만, 이미 ‘벌거벗은 해’라는 제목 자체가 연대기적이고 구성 또한 ‘서문’ ‘서술’ ‘결론’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바, 이 또한 연대기의 구성을 모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해>의 작가 필냑은 근대소설의 작가와는 다른 작가적 위치와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인데, 연대기 편찬자로서의 필냑은 재료(material)의 편집자(editor)로서만 이야기 속에 개입하는 것이다. 때문에 혁명에 대한 필냑 자신의 태도는 상대적으로 모호하다.

하여간에 이렇듯 나이브한 상태의 재료들이 텍스트에 편입됨으로써(텍스트는 ‘잡화상’이 된다) 야기되는 결과는 현실과 허구간의 경계가 흐리마리해지는 것이다. “빵도 없고, 철제물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기아와 죽음과 공포와 두려움”뿐인 1919년, 동시대의 상황, 즉 혁명 이후의 2-3년간의 기간은 일종의 무중력적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배적인 체제와 가치의 붕괴가 동반하는 이러한 혼란과 아노미 상태, 카오스모스적인 상태는 일시적으로 역사가 정지된 상태이다. 즉 역사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역사를 꿰뚫어 서술할 수 있는 단일한 시각적 입지(=퍼스펙티브)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해>에 등장하는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분리파교도, 수구세력 등은 저마다의 시각과 가치관의 코드를 통해 혁명과 당대의 현실을 해석하려고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따라서 모든 현실의 파편들, 재료들을 자신의 단일한 코드로 편집, 재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허구적 장르의 지배력은 거의 무력화되는데, 이러한 사정은 작가 필냑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연대기라는 형식이 어떤 의미에선 그에게 강요된 형식일 것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벌거벗은 해>의 고대성의 모티브들이 암묵적으로 제시하는바, 혁명의 눈보라가 몰아친 후 드러나게 될 17세기 이전의 러시아, 아시아적 러시아상은 텍스트 속에서 반복되는 여러 가지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명료하게 정식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비에트 문학 중에서 혁명과 혁명에 참가한 주인공을 서사적인 형식으로 그리고 새로운 소설을 창조하려 한 최초의 시도가 B. 필냑의 소설 <벌거벗은 해>였다. 그러나 새로운 형식과 문체로 있지도 않은 현실을 재현하려고 한 바람에 작가는 인간과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고, 혼란스럽고 절충주의적인 관점만 드러내고 말았다.”(V. 부즈닉, L. 에르쇼프)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 정당하기 짝이 없는데, 소비에트 문학사는 소비에트의 승리, 볼셰비키의 승리라는 역사적 결과를 전제로 하여 서술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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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6-08-23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20년대 자체가 러시아문학에서 그야말로 '문제적인 시대'로 기록될 만하지만, 쟈마친, 올례샤, 필냑, 플라토노프 등의 유수한 작품 중 필냑의 [벌거벗은 해]가 역시나 가장 문제적인 듯. 하지만 이 소설의 온갖 난해성도 늙은 아르히포프가 임종시 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인 "“아들아, 너는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포기하지 말아라. 결혼해서 아이들을 갖도록 해라, 아들아……”(로쟈님이 인용한 부분)를 되새기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싶네요. 실상, 저 말 때문에 이른바 "가죽 재킷"(=공산주의자) 아르히포프가 결혼을 택하는 것이기도 한데... 겸사겸사, 골룹코프 교수의 책도 1920년대 문학의 틀을 잡는 데 아주 유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