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혜원 월드베스트 22
A.P.체호프 지음 / 혜원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899)은 중년의 사내와 젊은 유부녀 사이의 불륜이 '이제 막 시작인 사랑'으로 전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마흔이 조금 안된 이 중년의 사내는 드미트리 구로프이고, 스물을 갓 넘긴 이 젊은 유부녀는 안나 세르게예브나이다. 이들은 휴양지 얄타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지만, 서로를 잊지 못하는 바람에 다시 만나게 되고 결국은 진짜 사랑, 그리고 행복한 미래의 문턱에 서게 된다.

그래서 '해변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었다.'의 이야기의 시작은 이런 결말을 가지게 돼버렸다: '조금 기다려보면 해결책이 찾아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되면 새롭고 아름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종점이 아직 멀고도 멀었으며, 가장 복잡하면서도 힘든 일이 아직 남아 있음도 분명하게 느꼈다.'

해결책이란 무엇이고 이 복잡하고 힘든 일이란 무엇일까? 짐작에, 그것은 두 사람의 원만한 이혼과 재결합의 과정일 터인데, 이는 자식이 셋이나 딸린 중년의 사내 구로프는 말할 것도 없고 안나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삶의 새로운 공간 앞에서 이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체홉이 독자인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바로 거기까지이다. 사랑의 힘을 막무가내로 믿기에는 현실의 관성이란 것이 너무 막강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체념하고 주저앉기에는 다시 그 '새장 같은 삶'이 지겹고 두렵다.

이 단편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일상화된 '불륜'을 목격한다. 안나는 남편을 속이고 지방에서 모스크바로 와서는 호텔방을 잡아놓고 구로프를 부르고, 구로프는 안나에게 가는 길에 딸을 학교까지 바래다 준다(이게 생활이다!). 남들 앞에 내놓고 사는 공적인 삶과 그들만의 비밀스런 삶(사생활)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안나는 자신들의 밀애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으리란 두려움과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처량함에 울음을 터뜨리고 이젠 문제는 조금 복잡해졌다는 걸 두 사람은 직감한다.

구로프는 안나를 어루만지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어느 것이 진짜 구로프인가?). 이미 머리가 희끗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되다니. 그것도 서로가 각각의 새장에 갇힌 채. 이젠 어떡해야 하나? 그래서 우리는 다시 결말에 이른다. '조금 기다려보면 해결책이 찾아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되면 새롭고 아름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종점이 아직 멀고도 멀었으며, 가장 복잡하면서도 힘든 일이 아직 남아 있음도 분명하게 느꼈다.'

체홉의 서술자 또한 이 장면에서 이야기를 중단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제 막 새로운 삶의 공간, 문턱에 이른 이들에 대한 배려이자 예의일 것이다. 비록 낙관적인 장래를 장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이들은 이전과 같은 삶은 계속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작가 체홉이 즐겨 다루는 '또 다른 삶'이다. 사랑은 이런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소재이다. 그 다른 삶이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이것도 승화되면 사랑이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두 주인공을 탓해야 할까? 불륜을 미화시키고 있다고 작가를 비난해야 할까? 그럴 만한 권리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굴레를 떨치지 못하는 것을 두고 도덕이라 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부도덕, 비도덕이 편이 되어야 할 것이기에. 반대로, 삶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삶의 가능성을 향유하는 것을 우리가 도덕이라 부를 수 있다면, 안나와 구로프는 이제 비로소 도덕적인 삶의 길에 들어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새로운 시작(아직은 막막한 불행의 시작)을 축하해 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도덕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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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tomlady 2004-10-2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 남겨주셨더군요.. 제 리뷰를 러시아문학 전공자나 전문가는 읽지 않고 지나치길 바랬습니다.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남네요 ^^;

비로그인 2010-02-07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이건 끝이건 불륜이 어떻게 하면 '승화'되는 건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