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 기획회의(370호)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여행서, 어디까지 갈 거니?'란 특집의 한 꼭지로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것이다. 쓰다 보니 특집의 의도와는 좀 다르게 '모든 책은 여행서'라는 결론으로 빠지게 됐다. 말 그대로 여행서를 다룬 다른 꼭지의 글들이 있어서 상쇄는 되는 듯싶다. 여행서 특집까지 나오게 된 건 정여울 평론가의 베스트셀러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홍익출판사, 2014) 때문인데, 이번에 속편으로 <내가 알고 싶은 유럽 TOP10>(홍익출판사, 2014)이 출간됐다. 다들 어디론가 떠나고픈 게 한국인의 공통 심사인 모양이다...

 

 

기획회의(14. 06. 20) 모든 책은 여행서다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에 응하긴 했지만 단서를 좀 달아야 할 것 같다. 일단 ‘여행 안 가는 사람’을 대표할 만하지 않다. ‘여행가’는커녕 대놓고 여행이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들 축에 들지 못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난 여행 반댈세’라고 큰소리칠 만한 여행 반대론자도 아니고, ‘여행은 그냥 싫어요’라며 얼버무리는 여행 기피론자도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여행이라도 떠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시간과 비용을 계산하다가 혹은 아예 그런 계산에 이르기도 전에 여행과는 인연이 멀어지는 부류다. 그렇다 하더라도 등 떠밀려서 떠난 여행이 없지 않아서 인천공항을 드나든 횟수가 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된다. 많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여행 안 가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여행 자주 안 가는 사람’ 정도가 무난한 분류이지 않을까. 하긴 여행 인구가 부쩍 늘어나고 베스트셀러 여행서도 등장하는 보면 ‘여행 좀 가는 사람’에 견주어 ‘자주 안 가는 사람’은 ‘안 가는 사람’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계문학 작품들도 모두 여행서
물론 여행을 자주 가건 안 가건 여행서도 책인 이상 여행서에 대해 한마디 거드는 게 곤란할 건 아니다. 문제는 ‘여행서’의 정의다. 인터넷서점의 도서 분류표에는 ‘여행’ 항목이 따로 있으니 일차적으로는 거기에 속한 책들이 여행서일 것이다. 요즘 가장 각광받고 있는 정여울의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통상 여행안내서나 여행에세이로도 분류되는 책들이다. 하지만 여행의 개념과 범위를 좀 확장하면, 고전적인 여행기들도 여행서에 포함된다. <왕오천축국전>부터 시작해 <동방견문록>과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도 명망 높은 여행기들이다. 그뿐 아니다. 사실 원초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책이 자기계발서로 읽힐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책이 여행서로 읽힐 수 있다. 그러니까 여행서라는 건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화용론적으로 규정된다. 어떻게 쓰느냐, 혹은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 여행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다. 여행의 목적은 천차만별이고, 심지어 ‘그냥 가봤어’라는 식의 여행도 가능하기에 초점은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다른 고장이나 외국으로 안내하는 모든 책이 다 여행서 아닌가. 단적으로 말해서, 강의를 위해서라도 매주 몇 권씩 읽게 되는 세계문학 작품들이 내게는 모두 여행서다. 가령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우리는 19세기 중반 런던과 파리의 여러 역사적 사건과 허구적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허구적’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실제 여행에서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들이다. 실제 경험담과 허구의 이야기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만리장성에 대한 언급도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폴로가 정말로 중국을 다녀왔을까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는 걸 상기해보라. 이 문제는 더 깊이 들어가면 가상과 현실의 차이나 허구세계의 존재론까지 들먹이게 되는데, 실제 여행과 가상의 여행을 구분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라는 것 정도만 지적하자. 중국에 가본 적도 없는 카프카의 단편 <만리장성 축조 때>가 적어도 만리장성에 대해서만큼은 마르코폴로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과 함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여행을 못 가는 사람’이 아니라 소신을 갖고 ‘여행을 안 가는 사람’이라면 여행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다를 것이다. 여행을 못 가는 대신에 여행서나 뒤적이는 부류로 이해해서는 곤란한 이유다. 여행을 안 가는 것이 다른 방식의 여행을 이미 충분히 하고 있어서라면, 혹은 좀 특이한 곳을 여행하고 있어서라면 어떨까. 가령 알베르토 망겔의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이나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있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하나는 사전이고 다른 하나는 안내서이지만, 두 권 모두 ‘여행서’로 불릴 만하면서 1200쪽이 넘는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맘먹고 읽어도 일주일은 걸릴 만한 분량의 책들이다. 그런데 과연 어떤 여행이 이런 책의 독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인천공항에 가본다 하더라도 ‘상상적 장소’나 ‘은하수’ 여행을 대신할 항공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책은 탁월한 여행을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케 한다 
오직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여행도 있다고 하면, ‘여행 안 가는 사람’들의 여행을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럼 이 글의 주제를 ‘여행 안 가는 사람의 독서 여행’으로 슬쩍 틀어도 무방할 것이다. 좁은 의미의 여행서 정의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모든 책을 여행서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책들을 분명 실제 여행이 제공해줄 수 없는 놀랍고도 탁월한 여행을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도 가능하게 해준다(우리에게 필요한 수고는 단지 눈을 뜬 채 책장을 두 손으로 펼쳐 쥐고 있는 것 정도다). 당장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나 <해저 2만리>를 펼쳐보라.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를 따라나서도 좋겠고, 닐스의 이상한 모험에 동반자가 되어도 좋겠다. 혹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인상기>나 카잔차키스의 <러시아 기행>을 옆구리에 껴도 좋겠다. 조금 대범하다면 단테의 <신곡>과 함께 지옥으로의 하강도 시도해봄직하다. 그래, 여행의 정수는 어쩌면 지옥 여행인지도 모른다.

 


단테가 상상한 가상의 지옥만 우리의 목록에 있는 건 아니다. 20세기의 지옥이라 할 수용소 생존자들의 소설과 수기도 서가에는 진열돼 있다. 실제로 스탈린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8년간 복역했던 작가 솔제니친의 데뷔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대작 <수용소군도>는 어떤가(완간됐던 <수용소군도>가 일부만 다시 출간되고 만 것은 유감스럽다. 우리의 간접 수용소 체험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나치의 절멸수용소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여러 책들, 곧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주기율표>를 거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이르는 고발과 증언은 참혹했던 지옥으로 우리를 다시금 안내한다. 역시나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과 <죄와 속죄의 저편>도 마찬가지다. 레비와 아메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시대의 증인들이다. 요즘은 다카우수용소나 아우슈비츠수용소가 관광객들의 여정에 포함돼 있기도 한데, 정작 그런 장소들이 담고 있는 기억을 책으로 먼저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 여행은 눈 뜬 장님의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옥보다는 조금 나은 곳을 찾는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나 체호프의 <사할린섬>은 어떨까. <죽음의 집의 기록>은 작가가 정치범으로 직접 수감됐던 시베리아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소설 <1Q84>에서 언급해 일본에서는 재출간되었던 <사할린섬>은 체호프의 사할린 여행과 현장조사 보고서다. 유형수들의 삶을 조사하기 위해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서 면접카드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쓴 것으로 그에게는 러시아의 현실과 러시아 민중의 삶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책이라면 막심 고리키의 자전 삼부작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시절><세상 속으로><나의 대학>으로 이루어진 이 삼부작에서 고리키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기보다는 그가 만난 사람들을 기억한다. 고리키란 필명의 뜻대로 ‘쓰라린’ 삶을 살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난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다. 그런 만남과 분리된 개인적인 삶이 그에겐 따로 없었다. 이러한 민중의 발견은 미국 작가 스타인벡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가 갖는 의의이기도 하다. 소설이긴 하지만 이 작품 역시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에서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66번 국도를 따라 작가 스스로 이주민들과 같이했던 여정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한 경험에 힘을 얻어 썼기에 1930년대 이주 노동자들의 험난한 여정과 힘겨운 삶이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여행의 목적은 독서 
여행자에게는 모든 장소가 여행을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으로 분류된다면, ‘여행을 갈 수 없는 곳’은 ‘여행을 가지 않는 사람’이 단연 선호할 만한 곳이다. 그런 장소 가운데 내가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곳은 러시아 작가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와 미국 작가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이다. 공통점은 둘다 가상의 공간이라는 점. 가상의 공간이라고 해서 저 우주 바깥이나 허구세계에만 존재하는 공간은 아니다. 실제 공간을 모델로 했지만 두 작가가 새롭게 이름을 붙였을 따름이다. 지상에 건설된 공산주의 마을 체벤구르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플라토노프의 소설 <체벤구르>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문제의식과 깊이 있는 성찰을 집약한 작품이다. 1920년 말에 쓰였지만 러시아에서는 작가 사후 수십 년이 지난 1980년대 말에 가서야 발표될 수 있었다. 부재하는 장소에 관한 소설이기 이전에 아예 부재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플라토노프는 오늘날 가장 심오한 20세기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재평가되고 있으며 <체벤구르>는 그의 대표작으로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포크너는 자기 소설의 배경이 되는 미시시피주 고향 지방(카운티)에 요크나파토파란 이름을 붙였다. <소리와 분노><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압살롬, 압살롬> 등의 대표작들이 모두 제퍼슨을 행정중심지로 하는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요크나파토파 사이클’로 묶인다. 포크너가 소설적 공간으로 새로 고안해낸 지명이지만 요크나포토파는 오늘날 유명한 현실 속 지명이 됐다. 가상의 공간이 현실의 지명이 된 사례 가운데 하나다. 포크너의 소설들에서 요크나파토파는 남북전쟁 이후 몰락해가는 남부의 현실을 집약하고 있는 곳이다. 실제 사진으로 보는 요크나파토파는 낡은 저택들과 황량한 숲으로 우중충한 인상을 심어주지만 그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포크너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고독한 목소리다. 갈 수 없는 곳이지만 가고 싶은 곳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이런 소설들의 힘이다. 

 
프랑스 작가 외제 다비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을 한 쪽밖에 읽지 못한 셈이다.” 이 비유가 적절하다면, 여행의 목적은 독서다. 즉 여행은 세계라는 책을 읽는 한 가지 방식이다. 여행 자체가 독서라면, ‘여행하는 사람의 독서’와 ‘여행하지 않는 사람의 독서’의 차이란 독서 방법의 차이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정리하자. “세계는 책이고 여행은 독서이며 모든 책은 여행서다.” 그러니 애초에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아니라 ‘앉아서 여행하는 사람’이고, ‘여행 가는 사람’이 아니라 ‘돌아다니며 책을 읽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이 왜 여행을 단념했는지도 이해된다. 물론 서부로 가겠다는 그의 결심을 꺾은 건 여동생 피비가 같이 따라가겠다고 울면서 따라나선 때문이었다.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마음이 변했어. 그러니까 그만 울어.”라고 다독거리며 홀든은 피비를 데리고 동물원에 간다. 어릴 적 피비가 회전목마 타는 걸 미칠 듯이 좋아했다는 걸 떠올린 홀든은 피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목마에 태운다. 피비가 목마를 타는 걸 보면서 홀든은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행복감을 느낀다. “너무 행복해서 큰 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홀든의 사례에서 알 수 있지만, 여행서를 읽는 것 말고도 ‘여행 안 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동물원에 가서 동생이나 아이를 회전목마에 태우고 그걸 구경하는 일. 좀 멋쩍어도 홀든식의 행복은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엔 차라리 ‘여행 가서 절대로 읽지 않을 책’에 대해 몇 마디 적어봐야겠다.

 

14. 06. 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