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출판문화진흥원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독서인'의 독서에세이 코너 '독서카페'를 1년간 맡게 됐다. 이달에는 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옥당, 2014)를 읽은 소감을 적었다.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되고 있지만(시청한 일은 없어서 조재현이 정도전 역을 맡았다는 것만 안다), 이덕일의 이 '역사특강' 자체가 드라마의 제작진과 출연진을 위한 특강이었다.

 

 

 

독서인(14년 2월호) 정도전과 그의 시대

 

역사란 무엇인가. <정도전과 그의 시대>(옥당)에서 역사저술가 이덕일은 ‘반성의 도구’라고 말한다. 새로운 말은 아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잘 살피기 위함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가 판이하게 다르다면 과거를 거울로 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란 반문도 가능하다. 어제의 경험이 오늘의 새로운 문제를 사고하거나 해결하는 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다. 역사는 언제, 어떻게 소용이 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새롭고도 새롭지 않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시간이고 새로운 날들이지만, 또 한편으론 어제와 같은 일상의 반복이기도 하다. 반복은 교훈을 낳는다. 앞서 간 수레바퀴 자국을 가리키는 전철(前轍)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된다. 잘못된 길을 가다 엎어진 수레의 흔적은 우리에게 방향을 재조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반복적인 경험과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현명함이다. 반대로 똑같이 잘못된 길을 가다가 또다시 엎어짐으로써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이런 현명함과 어리석음도 역사 속에서 반복돼 왔던가.


이솝 우화에 전하는 얘기가 떠오른다. 전갈과 개구리 얘기다. 어느 날 전갈이 개구리에게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개구리는 전갈이 독침으로 자기를 찌를까봐 두려워하는데, 전갈은 만약 내가 널 찌르면 나도 물에 빠져 죽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킨다. 설마 자살과 같은 행위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믿고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운다. 하지만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전갈은 개구리를 찌르고 결국 둘 다 죽게 된다. 죽어가던 개구리가 왜 찔렀느냐고 묻자 전갈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갈이야. 그게 내 본성이라고.”


이 우화의 교훈은 무엇인가. ‘타고난 본성은 어쩔 수 없다’ 정도로 정리될 수 있겠지만, 전갈의 ‘인지 부조화’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 전갈의 이성은 개구리를 찌르는 행위가 자신의 죽음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문제는 그의 이성이 본성을 통제할 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개구리뿐만 아니라 전갈 자신도 죽음에 이르게 했으므로 이 부조화는 극복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성의 힘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본성의 힘을 직시했다면 애초에 전갈은 개구리에게 강을 건너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기대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성의 힘을 더 키우는 것이다. 가령 본성을 제어하기 어렵다면 필요한 경우 독침에 보호대라도 씌워서 파국을 막는 것도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전갈과 개구리의 우화를 우리의 역사인식과 성찰에도 적용해봄직하다. 과거에 대한 인식과 성찰로서의 역사의식은 과연 우리의 타성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역사의식조차도 결국 반복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아야 할까.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읽으며 줄곧 머릿속으로 헤아려보았다. 저자가 보기에 ‘왕도정치를 꿈꾼 비운의 혁명가’ 정도전과 그가 살았던 쉰여섯 해는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로 부족함이 없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렇다. 외적으로 고려말은 대륙의 주인이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던 시기였고, 내적으로 고려사회는 극심한 빈부격차, 즉 사회적 양극화로 백성의 삶이 파탄에 이르고 있었다. 소수의 권문세족이 나라의 모든 재화를 독차지하고 있었기에 토지개혁 상소문에서 조준은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고 적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려왕들의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선왕과 충숙왕이 시도한 개혁정치가 실패하자 사정은 더 악화된다.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이 등장해 망해가는 고려를 되살리기 위한 최후의 시도를 모색한다. 그는 ‘농토문제와 백성들의 억울함을 분별해 잘못을 바로잡는 기관’이라는 뜻의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지만, 개혁대상인 친원파의 반발로 실패한다. 이후 공민왕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신돈을 앞세우게 되는데, 신돈은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도록 하는 혁신적인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민심을 얻는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민심이 오히려 신돈의 앞을 가로막는다. 신돈은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 양쪽으로부터 공격받았고, 그가 백성들로부터 ‘성인’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자 기분이 틀어진 공민왕은 신돈을 내친다. 저자는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한 것이 가장 큰 과오이며, 이로써 고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고 평한다. 신돈의 실패는 고려왕들이 중심이 돼 시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끝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개혁이 실패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혁명이다. 신흥사대부는 고려 왕실의 처리와 토지개혁 방법론을 두고 온건개혁파와 역성혁명파로 나뉘게 되는데, 온건개혁파의 거두가 이색이었다면 정도전과 조준이 역성혁명파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건국 과정은 혁명적인 개혁사상을 품고 있던 정도전이 변방의 무장 이성계를 찾아가 의기투합함으로써 첫발을 내딛게 된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결합, 그것을 저자는 “극심한 양극화에 시달리던 고려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가진 지식인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무장의 만남”으로 규정한다. 정도전의 혁명사상이 이성계의 군사력과 만나게 된 셈인데, 이때가 1383년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 고려는 패망하고 조선이 들어선다.


고려말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극심한 양극화는 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있어서 빚어진다. 고려말의 권문세족은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를 등에 업고 사익 추구에 몰입하여 경제권력 또한 장악한다. 소수의 권문세족이 정치, 경제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이에 따라 자영농의 대부분이 몰락해간 것이 고려사회를 붕괴로 내몬 당시 상황이었다. 저자는 “한 사회가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체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정도전의 일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메시지라고 말한다. 이것이 전철이다. 우리는 우리가 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잘못된 길에서 제때 돌릴 수 있을까.

 

14. 02. 13.

 

 

P.S. 정도전 관련서가 여럿 나오고 있는데, 조유식 알라딘 대표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휴머니스트, 2014; 푸른역사, 1997)이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고, 김탁환 작가도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전2권, 민음사, 2014)을 선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조선 건국 내지 개창 과정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최근에 구해서 본 건 김당택 교수의 <조선왕조 개창>(전남대출판부, 2012)이다. 학계의 주류적 시각과는 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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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껜가 부산 인디고서원에서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다(확인해보니 봄이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과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를 빌미로 삼은 자리였는데, 강연에서 얘기했던 내용과 질의응답이 정리돼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계간 <인디고잉>(39호)에 실린 걸로 돼 있다. 지면에서는 확인하지 못해서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겠다. <인디고잉>은 최근에 41호까지 나왔다. 품이 많이 드는 게 잡지인데, 대단한 열정이자 지속성이다!..

 

 

 

인디고잉(13년 여름) 청년들이여, 망상하라 
 
우리가 초청한 작가는 ‘로쟈’라는 이름으로 서평을 쓰시는 이현우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국내에 지젝을 소개한 첫 번째 책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쓰셨으며, 이는 선생님을 초청하기로 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함께 읽어오기로 한 책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외에도 선생님의 학문적인 전공이신 러시아문학 및 세계 문학에 대한 책인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등이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남의 장은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지젝 독자로서의 지젝 철학과의 만남에 대해 들려주셨다. 국내에 지젝이 소개된 시기인 90년대에는 문화이론 입문이 대학가에서 많이 읽히던 분위기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선생님도 주요 문화이론이나 철학에 두루 견문을 넓히셨다. 공부를 해나가던 중에, 라캉이나 헤겔 철학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2000년대 초반 지젝의 철학을 접하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셨다. 선생님이 지젝에 관심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라캉과 헤겔을 읽게 해준다는 데서 지젝 철학의 의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젝의 철학 작업은 그러하다. 지젝의 저서 읽기는 선생님에게 삶의 변화를 가져다준 책읽기 중의 하나였다고 하신다. 


선생님은 겸손하거나 소심한 작가의 문학보다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과대망상증 환자 같은 작가들의 문학,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하기 위해 애쓰는 문학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청년들은 ‘잉여’라 스스로를 칭하고 자조하며,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나는 될 수 있는 것이 없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 청년세대에게 선생님은 ‘망상’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돈키호테의 경우, 제정신을 차리며 현실을 자인하는 순간, 삶의 의미가 없어지고, 왜소해지는 반면, 망상을 가지고 나설 때 무언가를 하게 되고, 무언가가 되어간다. 물론 현실에서 패배하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고양된 존재로 만들어가는 에너지는 망상에서 나온다. 

 

망상은 주체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좌표가 정해져 있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면 ‘주체’로서의 삶은 실체를 비우고, 모든 가능성에 열려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체로서의 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피곤하면 자야한다. 반면 ‘주체로서의 나’는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피곤함을 모르며, 러시아의 어떤 소설에서는   그러한 인간을 ‘특별한 인간’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적 이상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네오’와 같이 우리가 새로운 세계의 구원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주어진 몫이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이념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인간은 어찌 보면 미친 인간이지만, 미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젝은 우리의 자기와 실체로서의 우리 자신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기에 ‘틈새’가 있는 것이며, 그것의 이름을 ‘주체’라고 말한다. 인간이 틈새를 가진 것은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다. 우리시대 청년들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실체로서 뿐만이 아니라 주체로서도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며, 우리 안의 광기와 계속해서 화해해나가야 할 것이다.

 

 

Q 지젝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시대에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과학이 발달한 시대의 윤리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의 윤리는 원시적 도덕 감정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인데 그것도 변형될 필요가 있어요. 새로운 기술, 새로운 과학, 새로운 앎은 항상 우리의 윤리적인 반응, 태도를 거기에 맞게끔 변형할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화한 상황은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마이클 센델의 책에서 등장하는 화차문제도 마찬가지죠. 그 문제를 접한 사람들은 한 명보다는 다섯 명의 목숨을 살리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직접 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져요. 그 한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리는 생각을 할 때 본능적인 저항감이 있어요.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스위치를 누른다거나 선로를 바꾸는 방식으로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대해서는 별로 저항감이 없어요. 원시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사람이 죽질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는 도덕적 본능이 작동하질 않아요.하지만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피터 싱어의 주요한 주장은 도덕적 직관을 신뢰하지 말라는 겁니다. 도덕적 추론을 따르라고 말하죠. 저는 그것도 어떤 새로운 문제에 대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적응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사일 버튼 하나를 눌러서 수천 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시대에 우리는 거기에 맞는 거부감, 거리낌 같은 것 대신 이성으로 제어를 해야 하고, 그렇게 제어하도록 훈련을 받거나 해야 합니다.

 

 

 
Q 선생님은 세계문학이 단순히 어떤 ‘책’이 아니라 ‘운동’이며, 민족적인 것을 극복하고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글이 끝날 때, 아직까지 세계문학은 이념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어째서 그러한지,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이 실현된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A  괴테가 얘기한 세계문학은 국민문학의 지양으로서의 세계문학입니다. 이념형의 중간단계, 혹은 빈약한 중간단계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세계문학은 앞으로 도래할 어떤 것이라고 얘기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세계문학’이라고 용어를 사용하다보니 혼동의 여지가 좀 있죠. 세계문학운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현재 서로 경합하는 국민국가의 단계에서 세계국가나 세계 공화국을 지향하듯이, 세계문학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어떤 단계이고, 우리가 그 단계로 애써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계문학운동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성을 보여주거나 그런 요소들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있는 것이고, 그런 작품들이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거죠.

 

또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 공간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막이라고 얘기했는데요, 이런 공간이 달성되려면 우리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소속이란 게 분명히 있죠. 그것과 거리를 두면서 존재할 때, 우리 안에서 사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교통공간이죠. 한국인이긴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고, 저쪽도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아니어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저는 그 공간이 우리가 상상만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그런 만남이라던가 정체성 같은 게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Q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저를 자극하거나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망상들을 하며 저를 토닥이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망상이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망상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 괴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A  돈키호테 얘기를 좀 하자면, ‘맘부리노의 투구’라는 게 있습니다. 저는 이게 좀 특이한 광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일반적인 광기라면 저것은 그냥 이발사의 세숫대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게 어떻게 세숫대야냐. 저건 맘부리노의 투구다. 너는 눈이 삔 것이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할 텐데 돈키호테는 좀 다릅니다. 그 상대성을 인정하죠. “너에게는 세숫대야로 보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투구로 보인다”는 거죠. 저는 ‘망상’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미친다고 할 때,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찮은 존재로 보일 거라는 걸 다 알지만 나는 이런 망상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거죠.  
 
Q 책에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우리다”라는 말을 우리가 의존해야할 대타자는 없다는 말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조금 풀어서 설명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 그래서 구체적으로 청년들이 사회적 상징계의 좌표를 옮기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실천적인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A  대타자의 경우는 하수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도 하나의 대타자인데요. 과거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대의’라는 대타자의 수행자를 자임했어요. 대문자로 역사라고 쓰는 것, 역사의 수행자라는 거죠. 그래서 잔혹한 고문이나 숙청 같은 것도 다 대타자의, 역사의 명령이라며 했습니다. 지젝은 역설적이지만 그 형식 자체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대타자가 있고, 우리는 하수인이라는 형식은 보존하되, 대타자만 지우는 거예요. 자끄 데리다가 말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같은 겁니다. 신이 존재하는 선행은 나중에 보상 같은 것도 있죠. 천국에 가면 정산을 해주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 없이도 우리가 똑같이 선행을 할 수 있어요. 마치 누가 시켜서 하는 것처럼요. 다만 그 자체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공산주의 이념이 가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는 겁니다. 돈키호테에서도 ‘나는 저 세숫대야가 맘부리노의 투구로 보인다. 그렇게 믿겠다’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징계의 좌표를 바꾼다는 것은 경계선을 다시 긋는 것입니다. 보편성의 발견이지요. 그 말은 다르게는 ‘보편적 적대’를 다시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 보편적 적대에서 다른 여타의 적대는 무효화 되는 것이죠. 그런 식의 선을 다시 긋는 게 실천입니다. 그런 것을 요구하는 거죠. 지젝의 경우는 소수자 운동이나 정체성 운동 같은 것에 반대합니다. 보편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 내부의 더 세분화 된, 더 협소한 어떤 정체성을 고집하기 때문인데요, 지젝은 그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천이라는 건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 어떤 체제나 움직임을 중단시킨다는 것 자체도 좌표를 바꾸는 일이에요. 닉슨시대의 중소수교 같은 것도 돌파라고 볼 수 있죠. 남북 간에도 가능하죠. 개성공단이 그런 제스쳐에요. 다르게는 인터뷰집 제목이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죠. 기존의 좌표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을 옮기고, 가능성의 좌표를 바꾸는 겁니다. 그러면 바뀌는 거예요.

 

행위의 또 다른 모델로 바틀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바틀비는 어느 날 변호사가 시키는 일을 거부하죠. 나중엔 변호사가 이사를 가도 사무실에 계속 머무르다가 부랑자 구치소 같은 데로 사람들이 데려가죠. 거기서 먹는 것도 거부해서 굶어죽습니다. 이 ‘바틀비적 제스처’라는 표현을 지젝이 씁니다. 바틀비는 자본주의의 수혜자 밑에서 일을 하고 그 세계 안에 종속되는 것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빠져나오죠. 단지 거부하고 물러나는 겁니다. 그런 게 일종의 행위의 모습이 될 수 있죠.

 

바꾼다는 게 반드시 눈에 보이는 뭔가를 동원하고,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들도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내지는 비폭력 무저항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가능해요. 유명 대학교를 공개적으로 자퇴한 학생이 한명 있었죠? 그것도 일종의 바틀비적 제스쳐입니다.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거죠. 

 
Q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사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의 몸(생계)과 이성의 간극 속에서 삶으로 그 중요성을 연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시몬 베이유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전체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자본주의 속에서 타자성을 회복한 진정한 주체로서 스스로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A  분명히 현실적인 제약이라는 게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모든 가능성을 다 폐쇄시킨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요즘은 여간해선 굶어 죽지 않죠. 우리가 바틀비처럼 전면적인 거부 제스쳐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거예요. 다만 그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저는 거기에 대타자의 카운슬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몬 베이유가 될 수 있냐고 물으셨죠? 우리 안에는 성자가 있고, 그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요. 인간에겐 어떤 비속한 동물성 같은 것도 있지만 특이하게도 성자성도 있어요. 우리는 자신보다 더 지체가 낮은 사람의 발에 키스하거나, 종교 의식에서 발을 씻어주는 그런 거룩한 행동을 할 수도 있어요. 그게 불가능한가요? 그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문제죠. 그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해요. 어쨌든 저는 그게 우리의 선택과 결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그 결단의 자유, 권리는 축소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라캉 식으로 얘기하면, 모든 욕망은 다 타자의 욕망입니다. 나의 본원적 욕망이라는 건 사실 넌센스죠. 본원적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모방이 가능해요. 성자의 욕망을 모방하면 성자가 되고, 거지의 욕망을 모방하면 거지처럼 되는 거죠. 내 안에는 뭔가 있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들여다보면 공백 같은 겁니다. 뇌 과학에서도 불교에서도 얘기하는 거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텅 빈 공허에요. 주체로서의 자기발견이란 그런 겁니다. 진정한 뭔가가 자기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 과연 어떤 작품이 세계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러시아문학을 전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학자나 사상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문학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시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문학 극대주의자’ 입니다. 문학은 전체에 관한,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앎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관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문학전공자가 왜 철학에도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 자체가 어떤 특이한 견해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철학사 책을 보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철학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중요한 인생의 문제를 다루면 철학자입니다. 수단은 상관없어요. 반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그리스 기원의 철학 개념은 어떤 논변을 갖고 있는 걸 철학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사소해도 상관없어요. 관점이 다르죠. 그러니까 철학, 문학이 서로 구분되고, 영역이 구분되기 때문에 침범하면 안 된다는 건 한 가지 견해 혹은 편견이라는 거죠.

 

그 다음으로 어떤 문학이 세계문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번역문학이어야 해요. 가령 영어로 써졌다면, 영어가 아닌 언어로 번역 됐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세계문학 공간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면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언어가 서로 호환되는 공간, 내지는 그 두 언어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어떤 간극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역문학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계문학이라는 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그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죠. 심지어는 우리가 세계문학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을 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과정이 소통의 과정이고, 소통이 좌절되는 과정이기도 한데, 그 사이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경험이라는 게 만들어 진다고 생각해요.

 

또 세계문학의 공간은 아직까지는 도래하지 않은 공간이기도 해요. 실제 우리가 접하게 되는 건 조금 부실한, 많은 부분이 훼손된 그런 공간인데, 그런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셰익스피어 햄릿만 하더라도 수십 종의 번역본이 있어요. 각각을 보면 또 놀랄 정도로 많이 다르게 되어있어요. 셰익스피어는 좀 심한 경우에요. 그래서 여러 종류를 읽어보시기를 권하는데, 굉장히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관적으로 개입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어쩌면 세계문학을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문학이라고도 생각해요.(출처 [인디고잉 39호] 인디고 정원에서_청년 참여형 강의|작성자 인디고잉)

 

14.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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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 네댓 종의 번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성복 시인이 옮긴 문학과지성사판을 책장에서 찾지 못해 을유문화사판과 펭귄클래식판으로만 읽었다. 작가 지드의 말로는 <배덕자>가 배덕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이라면 <좁은 문>은 미덕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배덕자>도 읽을 만한 번역본으로 다시 나오면 좋겠다...

 

 

한겨레(14. 01. 27)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을 막은 것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오랜만에 읽었다.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 얘기다. 알다시피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사촌 관계가 장애물은 아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지드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발단은 제롬이 열네 살 때 벌어진다. 외사촌 누나 알리사는 열여섯 살 때다. 방학 때마다 외삼촌댁에 들르던 제롬이 하루는 외숙모가 자기 방에서 젊은 장교와 희롱하는 걸 엿보게 된다. 알리사의 방으로 가보니 그녀는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알리사의 얼굴을 본 순간 제롬은 자기 운명이 결정됐다고 믿는다. 사랑과 연민에 도취되어 그는 인생의 목적이 알리사를 보호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롬은 외숙모가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외숙모는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미덕은 갖추지 못했다. 외삼촌 가족과 같이 간 교회에서 제롬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를 주제로 한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크고 넓은 길은 그에게 외숙모의 방을 떠올려주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은 알리사의 방문이 되었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제롬은 스스로를 축소하고 모든 에고이즘을 비워내기로 한다. 그 사랑으로 가는 길은 고행의 길이어야 했다. 이것이 제롬의 알리사에 대한 사랑의 형상이다. 암시적이게도 제롬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알리사를 찾아보려고도 않고 교회를 빠져나온다. “멀어짐으로써 그녀에게 더욱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제롬은 알리사와의 결혼을 원하지만 아직 젊은 나이와 불확실한 미래를 핑계로 결혼은 미뤄진다. 게다가 제롬은 약혼 같은 형식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약혼을 재촉하는 사촌동생 쥘리에트의 말에 “서약 같은 건 사랑에 대한 모욕”이라고 답할 정도다. 그런 서약은 사랑에 대한 의혹을 무마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롬의 속내를 읽은 알리사가 먼저 약혼은 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게다가 만남도 자제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에게는 마치 결혼이 ‘좁은 문’처럼 된다. 결혼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한 길이어야 한다!

 

제롬을 짝사랑한 쥘리에트가 잠시 장애가 되지만 쥘리에트가 다른 구혼자와 결혼하자 이제 제롬과 알리사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남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아무 장애물도 없는 상황이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된다. 알리사에게 이르는 사랑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리사에게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포옹도 해보지 못했다. 제롬이 더 적극적으로 구애했더라면 알리사의 태도도 달라질 수 있었을 테지만, 오랜 지체 끝에 결국 알리사는 ‘지상의 행복’ 대신에 ‘성스러움’을 택한다.

 

제롬과의 결혼 대신에 알리사가 선택한 것은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병든 몸으로 집을 떠나 요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은 알리사의 운명이 ‘더 훌륭한 것’에 부합할까. 알리사가 제롬에게 남긴 일기는 그녀가 어떤 고뇌에 시달렸는지 알게 해준다. 알리사는 덕성과 사랑이 하나로 합류될 수 있는 영혼의 행복을 꿈꾸지만 결국 덕성이란 ‘사랑에 대한 저항’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덕성의 함정’이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란 주제를 반어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14.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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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민주(통권 10호)의 '삶과 문학' 코너에 실린 인터뷰를 일부 옮겨놓는다. 이 코너를 맡고 있는 문학평론가 정여울 씨가 제안을 해와서 연초에 동대 근처 카페에서 가졌던 인터뷰다. 전문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블로그(http://blog.kdemo.or.kr/1183)에서도 읽을 수 있다(인터뷰 중에 나오는 <생애 바깥에서>란 시집 제목은 <생의 바깥에서>의 오기다).   

 

 

 

민주(2013년 겨울호)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요구, 그것이 민주주의의 희망이다

 

(...)

 

정여울: 올해 경향신문에서 뽑은 ‘뉴 파워라이터’ 20인에 선정되셨는데, 그 인터뷰에서 ‘나는 문학극대주의자다’라는 표현을 쓰셨더라구요. 어떤 의미인지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이현우: ‘문학은 자고로 시와 소설, 희곡이지’ 이런 식으로 딱 정해진 장르와 분과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문학 극소주의자라면, 역사도 철학도 넓은 의미의 문학이라고 보는 것이 문학극대주의자이지요. 저는 모든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평을 쓰는 것도 문학의 일부이지요. 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문학적 지식에 대한 궁금증이 늘어갔어요. 우리는 문학에 대해 뭘 알 수 있는지, 어떤 작품, 어떤 작가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뭘 알고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 같았어요. 문학이 무엇을 알려주는가에 대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로쟈 버전으로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문학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는 책을 써보고 싶어요. 문학극대주의자이기 때문에 문학이 전부로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문학으로 보여요. 문학은 제가 아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커다란 무엇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것만이 문학이다’라고 주장하는 문학주의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죠.

 

정여울: ‘내가 아는 것들 중에서는 문학이 가장 크다’라는 표현이 문득 뭉클합니다. 과학보다도, 철학보다도, 역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문학이 크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러시아 문학이 바로 그런 문학극대주의자의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주는 것이겠지요?(웃음)

 

 

 

이현우: 그렇죠. ‘문학과 정치’, ‘문학과 사회’, 이런 식으로 나눌 필요가 없어져요. 모든 것이 문학이니까요. 문학극대주의자의 망상이지요(웃음). 러시아 문학이 바로 그래요. 문학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망상보다 더 큰 망상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제가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톨스토이는 합리주의자이면서 문학극대주의자는 아니지요. 제가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이 문학극대주의자의 과대망상증 계보를 잇지요.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문학이에요. 그리고 문학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증도 도스토예프스키다운 것이지요. 문학은 문학으로서만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는 건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쪽이구요. 그래서 톨스토이는 문학을 끝내 버릴 수 있었던 거예요. 톨스토이는 문학이 자기가 원한 것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버릴 수 있었던 거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곳에서 문학을 보았기 때문에 문학으로 인류를 구원하려 했던 거죠.

 

정여울: 저도 사실 그 ‘과대망상증 계보’가 참 좋아요. 아직도 문학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증에 계속 빠져 살아가지요(웃음).

 

이현우: 톨스토이는 영혼의 구원이라는 걸 소설에서 다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건 문학의 임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자신이 쓴 위대한 작품들도 말년에는 다 ‘쓰레기’라고 부정할 수 있었던 거예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이 뭔가 거창한 소명을 떠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위대한 예술은 톨스토이에게 의미가 없었지요.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은 문학이 아니라 사상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작가고 톨스토이는 거대한 작가라는 말이 있어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이라는 것 자체를 위대하게 만드는 작가라면, 톨스토이에게 문학은 너무 ‘작은 것’이었고 그 이상의 뭔가 원대한 이상을 꿈꾼 사람이었던 거죠.

 

정여울: 이 위대한 작가와 거대한 작가가 한 나라에서 났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내심 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중한 만큼 톨스토이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품은 이상은 ‘구원’이라는 거대한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 무기가 ‘문학’인지 문학이 아닌지는 조금 작은 문제라는 생각도 들어요. 문학이 인류를 구원하는 대단한 소명을 다 하지 못할 때 문학을 버리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과도 비슷하네요.

 

이현우: 그렇죠.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면서 톨스토이를 언급하기도 해요. 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이 인류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들에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을 때 문학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었던 거죠. 더 이상 문학으로 세상을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작품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수 있는 작가가 바로 톨스토이였던 거죠.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이 그런 중요한 일을 ‘안 하고’ 있으니까 버린 거고, 톨스토이는 아예 문학은 그런 중요한 일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버린 거죠.

 

정여울: 박사논문에서는 푸쉬킨과 레르몬토프를 다루셨는데요. 푸쉬킨이 선생님의 문학관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지요.

 

이현우: 푸쉬킨은 기본값이예요. 푸쉬킨은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아’, ‘나는 투르게네프가 좋아’라는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지요. 푸쉬킨은 러시아 문학의 수원(水原)이고 러시아 문학의 전부예요. 러시아는 푸쉬킨 공동체지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국민문학의 힘이에요. 푸쉬킨은 러시아 근대문학의 출발점이면서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이지요. 국민문학이라는 것의 개념 자체가 흥미로워요. 물론 국민문학이라는 개념도 판타지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분열이나 모순을 봉합시켜줄 수 있는 판타지라는 점에서 소중하지요.

 

정여울: 푸쉬킨은 기본값이다,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 문학은 푸쉬킨 공동체다, 이 모든 말들이 무척 의미심장하게 들리는데요. 공동체의 분열과 사회모순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이 푸쉬킨 식의 국민문학이라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작품들이 그런 국민문학의 수원(水原)에 속할 수 있을까요.

 

 

 

이현우: 옛날에는 국민문학의 계보로 이광수의 <무정> 같은 작품을 떠올렸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춘향전>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춘향전>에는 사회적 모순이 응축되어 있죠. 그 모순 때문에 사회가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봉합하려는 흔적을 담고 있어요. 양반층의 요구와 천민층의 요구가 결합되어서 묘하게 화해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양반집 규수처럼 수절하겠다고 버티는 춘향이는 그리스 비극의 안티고네를 닮았죠.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서도 양반과 대등하게 대우받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변사또는 권력층에 기대는 악의 무리 중 한 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양반, 선한 양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몽룡을 차별화하기 위한 설정이 아닐까 싶어요. 양반도 천민의 편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양반도 천민도 둘 다 만족시키려는 것이에요. 자아가 초자아와 이드 사이를 중재하는 것처럼 국민문학은 하층계급과 상층 계급을 화해시키고 있어요. 푸쉬킨의 <대위의 딸>도 그렇지요. 민중의 편만 들어주지도 않고 귀족의 편만 들어주지도 않아요. 국민국가라는 판타지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바로 이 통합의 환상, 푸시킨적 판타지이지요. 그건 민주공화국이라는 환상이기도 하구요.

 

정여울: 아, 그럼 러시아 문학이 푸쉬킨 공동체라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춘향전 공동체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푸시킨과 연결시키니까 춘향전이 훨씬 깊이 있는 텍스트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춘향전>은 어쩌면 봉건사회 안에서 민주주의의 테마를 태동시킨 집단무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생각도 들어요.
 
이현우: <춘향전>에 여러 가지 판본이 있지만 춘향이 ‘양반의 서녀’라는 입장과 ‘천기 출신’이라는 입장, 크게 두 가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어요. 성참판의 서녀 성춘향보다는 월매의 딸 천기 출신의 춘향이 훨씬 더 래디컬한 버전이죠. 서녀 신분보다는 천기 신분이 훨씬 더 급진적이고 도발적이고, 더 도전적인 문제제기예요. 이건 거의 세계문학 수준이죠. 성춘향이라는 것은 뭔가 저항의 가능성을 거세시키고, 춘향을 좀 더 양반 쪽에 가깝게 순치시킨 버전이지요. 춘향의 고결한 태도나 수절의 의지를 그냥 핏줄로 해결해버리면, 절반은 양반의 피를 타고났다고 하면, 이것은 양반 쪽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버전이니까요. 하지만 천기 버전의 <춘향전>은 세계문학사의 고전이 될 만해요. 아래로부터의 문학이거든요. 그것보다 더 분명하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것을 말한 텍스트는 고전문학에서는 거의 없어요. 한국문학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텍스트죠.

 

정여울: 그럼 오늘 우리의 대화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춘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정리해도 되겠네요(웃음).

 

이현우: 홍길동만 해도 율도국이라는 별도의 유토피아를 정해서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도피해서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춘향은 체제 내에서 인정을 받아요. 임금이 이몽룡과의 결혼을 허락하고 정경부인으로 봉했다는 것이니까 ‘저 세계’가 아닌 ‘이 세계’ 안에서 천민의 존재가 처음으로 인정받는 거예요. 춘향전의 판본이 이렇게 엄청나게 범람하는 것도 민중들이 보였을 어떤 열광의 흔적이라고 봐요.

 

(...)

 

14.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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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에서 발행하는 반연간지 <연극>(제6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문장을 일부 바로잡았다). 한스-티즈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서평감으로 삼았다. 연극의 새로운 경향과 연극이론의 현재에 대해 조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다.

 

 

 

연극(2013년 겨울) 한스-티즈 레만 <포스트드라마 연극>

 

독일의 연극학자 한스-티즈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현대미학사, 2013)이 번역돼 나왔다. 20세기 후반 현대 연극의 흐름을 ‘포스트드라마’란 개념으로 명명함으로써 새로운 인식틀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저서다. 원저는 1999년에 출간됐는데, 레만의 기본 개념과 관점을 담은 글 한편이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연극평론가 김기란에 의해 이미 2002년에 <공연과 리뷰>를 통해서 처음 소개된 바 있다고 한다. 역자에 따르면 그때 소개된 글이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예술을 이해하기 위하여」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적 전제를 꼼꼼하게 논증한 글이었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초안과도 같은 성격의 이 글에 이어서 역자는 마침내 레만의 대표 저작을 마저 옮긴 셈이 되는데, 저자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영어본이 아닌 독일어 원본을 대본으로 삼았다. “간략하게 편집된 영어본에는 21세기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대응하는 동시대 연극의 내용이 대부분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영어본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이론적 개요를 중심으로 원저를 절반 가까이 축약한 데 반해서 한국어본은 원저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일단 역자의 뚝심과 노고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드라마 연극 개념에 대해선 레만의 책이 번역되기 이전에 이미 국내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중 일부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푸른사상, 2011)으로 묶여서 출간되기까지 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원들이 2010년에 진행한 ‘포스트드라마 연극 세미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레만의 문제의식과 이론적 관점이 연극학자나 평론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독일어로 쓰인 원저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언어 장벽 때문에 소수의 전공자만 접근할 수 있었다. 순서를 바로 잡자면 사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을 읽기 위해서라도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대한 독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번역본의 출간은 그런 기회를 갖게 해준다.


순서는 그렇더라도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에 실린 서문은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개념과 그 한국적 수용 맥락에 대한 사전 이해를 제공해주기에 참고해볼 만하다. 책의 발간 과정과 내용을 소개하면서 저자들을 대표하여 김형기 교수는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약 50년 전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연극에서 발생한 변화의 특질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개념으로 설명한다(레만 자신은 고찰 범위를 대략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로 잡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당시 더 일반적으로 쓰이던 ‘포스트모던 연극’을 대체한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용어는 단순히 시기적인 관점에서 ‘희곡 이후의 연극’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인식론적 관점에서 ‘탈희곡적 연극’을 포함한다”고 덧붙임으로써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번역 용례도 제시한다. 즉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희곡 이후의 연극’이자 ‘탈희곡적 연극’을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희곡이 통상 문학의 한 장르를 가리키기에 ‘희곡 이후’라거나 ‘탈희곡적’이란 표현은 단순하게 ‘희곡 없는 연극’을 의미할 수 있다. ‘드라마 이후의 연극’ 혹은 ‘탈드라마적 연극’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레만 스스로도 진단하듯이 현재의 상황은 연극 담론이 “문학 담론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지만, 문학 담론을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형국”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가 문학과 연극이 동일한 길을 걷고 있다고 한 것은 “연극과 문학은 원래 모사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호적인 것으로 조직된다”는 판단에서다.

 

‘모사적’이란 말은 물론 예술의 미메시스적 성격을 가리킨다. 예술은 외부의 현실을 모방 혹은 재현한다는 것이 예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관점이다. 그런 모방적 성격으로 인해 연극과 문학의 언어는 지시적 기능을 갖는다. 그런데 이 지시적 기능만이 전부가 아니다. 레만이 연극과 문학이 ‘기호적인 것’으로 조직된다고 할 때 그것을 그 언어가 갖는 자기 지시적 기능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겠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시적 기능’이라고 부른 것 말이다. 비유컨대, 예술이 기호적인 것으로 조직될 때, 즉 자기 지시적인 것으로 채워질 때 예술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여기서 ‘드라마’와 ‘연극’을 각각 모사적인 것과 기호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말의 의미가 좀더 구체화된다. ‘포스트드라마’는 그 자체로 드라마와 연극, 두 개념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문제 삼는다. 서양 연극의 전통적 특징이 ‘드라마 연극’이었다고 하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적인 것’과 ‘연극적인 것’이 동일하지 않다면, 이 둘은 서로 결합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분리될 수도 있는 것이 된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가져오는 개념적 충격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지시하는 데 있다. 김형기 교수의 정리에 따르면, “레만에게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희곡의 우세에서 해방되고, 재현보다 현전, 전달되는 것보다 공유되는 경험, 결과보다 과정, 의미화보다 현실, 정보보다 에너지역학을 강조하는 연극이다.” 다르게 말하면, 포스트드라마는 연극 언어의 지시적 기능에서 해방되어 무대적인 것 자체에 더 주목하도록 하는 연극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개시는 드라마 연극의 종말을 뜻하는가. 사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만만찮은 분량에다 연극에 관한 이론적, 철학적 성찰과 현대 연극, 곧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주요 양상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고 있어서 전체를 조감하기 어려운 책이다. 다행스럽게도 길잡이로 삼을 만한 글이 있는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에 수록된 파트리스 파비스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관한 고찰들」이 그것이다. 저명한 연극학자 파비스가 포스트드라마 연극론의 여러 쟁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어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읽는 요긴한 참조점이 된다. 길잡이라고 했지만 그냥 무미한 안내만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매우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어서 오히려 더 요긴하다.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쟁점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개념의 유효성일 수밖에 없는데, 파비스는 세 가지를 문제 삼는다. 첫째, ‘포스트’란 말이 시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론적인 것인지 불분명하다. 레만 자신도 책의 기획 의도가 “새로운 연극 영역의 경계를 설정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경계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모호하다. 드라마 연극의 시대가 끝나고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면, 그 경계는 언제가 될까.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포스트드라마는 애초부터 드라마 연극과 같이 존재했다는 뜻일까. 레만은 이 두 주장이 모순 없이 공존한다고 주장하지만 파비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둘째, 레만은 ‘드라마적인 것’을 부정하면서도 이를 다시 취하고 있다. 그는 한편으론 새로운 연극텍스트가 ‘더 이상 드라마가 아닌’ 연극텍스트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단지 연극의 방점이 드라마라는 문학 장르에서 무대로 이동한 것처럼 말한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드라마의 지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셋째, 만약 드라마가 연극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게 레만의 문제의식이라면 ‘연극’이란 개념의 안정성도 의심해볼 수 있다. 파비스는 유럽 바깥의 문화적 실천들을 고려하면 그리스적 기원의 연극은 더 이상 독점적 개념이 될 수 없다고 암시한다.


이러한 이론적 시비들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개념이 기대만큼 정교화되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개념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연극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정의할 수 있는 범주와 말이 부족하다”는 인식과 그 곤경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라는 데 있을 것이다. 즉 뭔가 새로운 연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게 먼저이고, 그에 대한 이론적 개입으로서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용어는 사후적으로 이를 지칭하고자 한 기술적 개념의 성격을 갖는다.

 


다시 파비스의 도움을 빌려 말하자면, 레만은 1970-1980년대에 독일,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보았던 공연들에서 새로운 변화를 인지한다. 로버트 윌슨, 얀 파브르, 아이너 슐레프, 얀 라우어스 등이 고안해낸 새로운 연극 형식은 그에 걸맞은 주목과 이론적 관심을 요구했다. 당시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포스트모던 연극’이라는 말로 통칭됐지만, 레만의 내기는 이것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개념으로 더 잘 포착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포스트담론을 주도했던 ‘포스트모던’이란 말은 너무 많은 것을 지시할 수 있어서, 거꾸로 그 인식적 내용은 의문스러운 개념이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드라마적 연극과의 구체적인 차이 속에서 윤곽이 그려지기에 훨씬 더 효용성이 큰 개념이다. 드라마적인 메시지 전달보다 무대에서의 퍼포먼스에 주안점을 두기에 드라마적 연극의 ‘배우’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는 ‘퍼포머’가 된다는 비교가 대표적이다. 드라마적 연극이 ‘극적 환영’을 유도하고자 한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는 ‘활동적인 퍼포먼스’ 자체가 연극의 목적이 된다.      


드라마적 연극과 포스트드라마 연극 간의 차이를 이렇게 배치할 수 있다면 드라마적 연극에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으로의 이 이행을 과연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파비스의 근심이기도 한데, 드라마적인 것, 곧 모방적이고 지시적인 기능을 포기할 때 부닥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난점은 연극과 현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당연한 일이지만, 연극이 그 자체에, 무대에, 퍼포먼스에만 주목하도록 요구할 때, 연극과 사회적 현실은 분리된다. “포스트드라마는 더 이상 이론을 세우고자 애쓰지 않으려고 이러한 난점을 이용하며, 극적인 형식들이 더 이상 커버할 수 없게 된 현실에 관한 모든 관점들을 포착하기를 단념한다.”고 파비스는 지적한다.

 

 


현실을 배제함으로써 현실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연극의 독립을 위한 유력한 방책일 수 있다. 어쩌면 그로써 연극이 음악처럼 좀더 높은 순도의 예술로 거듭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사회적 현실에 대한 발언과 책임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포스트드라마가 과연 연극의 진보인지 아니면 퇴행인지 쉽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구성하는 것은 ‘드라마적인 것’과 ‘연극적인 것’이라는 두 항의 관계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까지 포함된 삼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 이후에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정치를 주제로 한 책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문제를 정리하고 있다기보다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극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사고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더 높이 살 수 있을 것이다.      

 

14. 01. 04.

 

 

P.S. 포스팅보단 늦었지만 <연극>이 알라딘에도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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