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껜가 부산 인디고서원에서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다(확인해보니 봄이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과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를 빌미로 삼은 자리였는데, 강연에서 얘기했던 내용과 질의응답이 정리돼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계간 <인디고잉>(39호)에 실린 걸로 돼 있다. 지면에서는 확인하지 못해서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겠다. <인디고잉>은 최근에 41호까지 나왔다. 품이 많이 드는 게 잡지인데, 대단한 열정이자 지속성이다!..

 

 

 

인디고잉(13년 여름) 청년들이여, 망상하라 
 
우리가 초청한 작가는 ‘로쟈’라는 이름으로 서평을 쓰시는 이현우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국내에 지젝을 소개한 첫 번째 책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쓰셨으며, 이는 선생님을 초청하기로 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함께 읽어오기로 한 책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외에도 선생님의 학문적인 전공이신 러시아문학 및 세계 문학에 대한 책인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등이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남의 장은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지젝 독자로서의 지젝 철학과의 만남에 대해 들려주셨다. 국내에 지젝이 소개된 시기인 90년대에는 문화이론 입문이 대학가에서 많이 읽히던 분위기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선생님도 주요 문화이론이나 철학에 두루 견문을 넓히셨다. 공부를 해나가던 중에, 라캉이나 헤겔 철학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2000년대 초반 지젝의 철학을 접하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셨다. 선생님이 지젝에 관심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라캉과 헤겔을 읽게 해준다는 데서 지젝 철학의 의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젝의 철학 작업은 그러하다. 지젝의 저서 읽기는 선생님에게 삶의 변화를 가져다준 책읽기 중의 하나였다고 하신다. 


선생님은 겸손하거나 소심한 작가의 문학보다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과대망상증 환자 같은 작가들의 문학,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하기 위해 애쓰는 문학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청년들은 ‘잉여’라 스스로를 칭하고 자조하며,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나는 될 수 있는 것이 없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 청년세대에게 선생님은 ‘망상’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돈키호테의 경우, 제정신을 차리며 현실을 자인하는 순간, 삶의 의미가 없어지고, 왜소해지는 반면, 망상을 가지고 나설 때 무언가를 하게 되고, 무언가가 되어간다. 물론 현실에서 패배하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고양된 존재로 만들어가는 에너지는 망상에서 나온다. 

 

망상은 주체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좌표가 정해져 있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면 ‘주체’로서의 삶은 실체를 비우고, 모든 가능성에 열려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체로서의 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피곤하면 자야한다. 반면 ‘주체로서의 나’는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피곤함을 모르며, 러시아의 어떤 소설에서는   그러한 인간을 ‘특별한 인간’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적 이상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네오’와 같이 우리가 새로운 세계의 구원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주어진 몫이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이념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인간은 어찌 보면 미친 인간이지만, 미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젝은 우리의 자기와 실체로서의 우리 자신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기에 ‘틈새’가 있는 것이며, 그것의 이름을 ‘주체’라고 말한다. 인간이 틈새를 가진 것은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다. 우리시대 청년들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실체로서 뿐만이 아니라 주체로서도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며, 우리 안의 광기와 계속해서 화해해나가야 할 것이다.

 

 

Q 지젝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시대에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과학이 발달한 시대의 윤리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의 윤리는 원시적 도덕 감정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인데 그것도 변형될 필요가 있어요. 새로운 기술, 새로운 과학, 새로운 앎은 항상 우리의 윤리적인 반응, 태도를 거기에 맞게끔 변형할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화한 상황은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마이클 센델의 책에서 등장하는 화차문제도 마찬가지죠. 그 문제를 접한 사람들은 한 명보다는 다섯 명의 목숨을 살리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직접 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져요. 그 한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리는 생각을 할 때 본능적인 저항감이 있어요.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스위치를 누른다거나 선로를 바꾸는 방식으로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대해서는 별로 저항감이 없어요. 원시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사람이 죽질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는 도덕적 본능이 작동하질 않아요.하지만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피터 싱어의 주요한 주장은 도덕적 직관을 신뢰하지 말라는 겁니다. 도덕적 추론을 따르라고 말하죠. 저는 그것도 어떤 새로운 문제에 대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적응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사일 버튼 하나를 눌러서 수천 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시대에 우리는 거기에 맞는 거부감, 거리낌 같은 것 대신 이성으로 제어를 해야 하고, 그렇게 제어하도록 훈련을 받거나 해야 합니다.

 

 

 
Q 선생님은 세계문학이 단순히 어떤 ‘책’이 아니라 ‘운동’이며, 민족적인 것을 극복하고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글이 끝날 때, 아직까지 세계문학은 이념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어째서 그러한지,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이 실현된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A  괴테가 얘기한 세계문학은 국민문학의 지양으로서의 세계문학입니다. 이념형의 중간단계, 혹은 빈약한 중간단계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세계문학은 앞으로 도래할 어떤 것이라고 얘기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세계문학’이라고 용어를 사용하다보니 혼동의 여지가 좀 있죠. 세계문학운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현재 서로 경합하는 국민국가의 단계에서 세계국가나 세계 공화국을 지향하듯이, 세계문학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어떤 단계이고, 우리가 그 단계로 애써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계문학운동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성을 보여주거나 그런 요소들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있는 것이고, 그런 작품들이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거죠.

 

또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 공간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막이라고 얘기했는데요, 이런 공간이 달성되려면 우리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소속이란 게 분명히 있죠. 그것과 거리를 두면서 존재할 때, 우리 안에서 사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교통공간이죠. 한국인이긴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고, 저쪽도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아니어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저는 그 공간이 우리가 상상만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그런 만남이라던가 정체성 같은 게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Q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저를 자극하거나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망상들을 하며 저를 토닥이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망상이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망상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 괴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A  돈키호테 얘기를 좀 하자면, ‘맘부리노의 투구’라는 게 있습니다. 저는 이게 좀 특이한 광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일반적인 광기라면 저것은 그냥 이발사의 세숫대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게 어떻게 세숫대야냐. 저건 맘부리노의 투구다. 너는 눈이 삔 것이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할 텐데 돈키호테는 좀 다릅니다. 그 상대성을 인정하죠. “너에게는 세숫대야로 보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투구로 보인다”는 거죠. 저는 ‘망상’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미친다고 할 때,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찮은 존재로 보일 거라는 걸 다 알지만 나는 이런 망상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거죠.  
 
Q 책에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우리다”라는 말을 우리가 의존해야할 대타자는 없다는 말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조금 풀어서 설명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 그래서 구체적으로 청년들이 사회적 상징계의 좌표를 옮기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실천적인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A  대타자의 경우는 하수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도 하나의 대타자인데요. 과거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대의’라는 대타자의 수행자를 자임했어요. 대문자로 역사라고 쓰는 것, 역사의 수행자라는 거죠. 그래서 잔혹한 고문이나 숙청 같은 것도 다 대타자의, 역사의 명령이라며 했습니다. 지젝은 역설적이지만 그 형식 자체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대타자가 있고, 우리는 하수인이라는 형식은 보존하되, 대타자만 지우는 거예요. 자끄 데리다가 말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같은 겁니다. 신이 존재하는 선행은 나중에 보상 같은 것도 있죠. 천국에 가면 정산을 해주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 없이도 우리가 똑같이 선행을 할 수 있어요. 마치 누가 시켜서 하는 것처럼요. 다만 그 자체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공산주의 이념이 가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는 겁니다. 돈키호테에서도 ‘나는 저 세숫대야가 맘부리노의 투구로 보인다. 그렇게 믿겠다’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징계의 좌표를 바꾼다는 것은 경계선을 다시 긋는 것입니다. 보편성의 발견이지요. 그 말은 다르게는 ‘보편적 적대’를 다시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 보편적 적대에서 다른 여타의 적대는 무효화 되는 것이죠. 그런 식의 선을 다시 긋는 게 실천입니다. 그런 것을 요구하는 거죠. 지젝의 경우는 소수자 운동이나 정체성 운동 같은 것에 반대합니다. 보편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 내부의 더 세분화 된, 더 협소한 어떤 정체성을 고집하기 때문인데요, 지젝은 그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천이라는 건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 어떤 체제나 움직임을 중단시킨다는 것 자체도 좌표를 바꾸는 일이에요. 닉슨시대의 중소수교 같은 것도 돌파라고 볼 수 있죠. 남북 간에도 가능하죠. 개성공단이 그런 제스쳐에요. 다르게는 인터뷰집 제목이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죠. 기존의 좌표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을 옮기고, 가능성의 좌표를 바꾸는 겁니다. 그러면 바뀌는 거예요.

 

행위의 또 다른 모델로 바틀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바틀비는 어느 날 변호사가 시키는 일을 거부하죠. 나중엔 변호사가 이사를 가도 사무실에 계속 머무르다가 부랑자 구치소 같은 데로 사람들이 데려가죠. 거기서 먹는 것도 거부해서 굶어죽습니다. 이 ‘바틀비적 제스처’라는 표현을 지젝이 씁니다. 바틀비는 자본주의의 수혜자 밑에서 일을 하고 그 세계 안에 종속되는 것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빠져나오죠. 단지 거부하고 물러나는 겁니다. 그런 게 일종의 행위의 모습이 될 수 있죠.

 

바꾼다는 게 반드시 눈에 보이는 뭔가를 동원하고,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들도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내지는 비폭력 무저항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가능해요. 유명 대학교를 공개적으로 자퇴한 학생이 한명 있었죠? 그것도 일종의 바틀비적 제스쳐입니다.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거죠. 

 
Q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사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의 몸(생계)과 이성의 간극 속에서 삶으로 그 중요성을 연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시몬 베이유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전체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자본주의 속에서 타자성을 회복한 진정한 주체로서 스스로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A  분명히 현실적인 제약이라는 게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모든 가능성을 다 폐쇄시킨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요즘은 여간해선 굶어 죽지 않죠. 우리가 바틀비처럼 전면적인 거부 제스쳐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거예요. 다만 그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저는 거기에 대타자의 카운슬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몬 베이유가 될 수 있냐고 물으셨죠? 우리 안에는 성자가 있고, 그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요. 인간에겐 어떤 비속한 동물성 같은 것도 있지만 특이하게도 성자성도 있어요. 우리는 자신보다 더 지체가 낮은 사람의 발에 키스하거나, 종교 의식에서 발을 씻어주는 그런 거룩한 행동을 할 수도 있어요. 그게 불가능한가요? 그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문제죠. 그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해요. 어쨌든 저는 그게 우리의 선택과 결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그 결단의 자유, 권리는 축소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라캉 식으로 얘기하면, 모든 욕망은 다 타자의 욕망입니다. 나의 본원적 욕망이라는 건 사실 넌센스죠. 본원적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모방이 가능해요. 성자의 욕망을 모방하면 성자가 되고, 거지의 욕망을 모방하면 거지처럼 되는 거죠. 내 안에는 뭔가 있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들여다보면 공백 같은 겁니다. 뇌 과학에서도 불교에서도 얘기하는 거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텅 빈 공허에요. 주체로서의 자기발견이란 그런 겁니다. 진정한 뭔가가 자기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 과연 어떤 작품이 세계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러시아문학을 전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학자나 사상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문학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시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문학 극대주의자’ 입니다. 문학은 전체에 관한,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앎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관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문학전공자가 왜 철학에도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 자체가 어떤 특이한 견해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철학사 책을 보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철학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중요한 인생의 문제를 다루면 철학자입니다. 수단은 상관없어요. 반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그리스 기원의 철학 개념은 어떤 논변을 갖고 있는 걸 철학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사소해도 상관없어요. 관점이 다르죠. 그러니까 철학, 문학이 서로 구분되고, 영역이 구분되기 때문에 침범하면 안 된다는 건 한 가지 견해 혹은 편견이라는 거죠.

 

그 다음으로 어떤 문학이 세계문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번역문학이어야 해요. 가령 영어로 써졌다면, 영어가 아닌 언어로 번역 됐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세계문학 공간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면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언어가 서로 호환되는 공간, 내지는 그 두 언어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어떤 간극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역문학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계문학이라는 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그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죠. 심지어는 우리가 세계문학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을 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과정이 소통의 과정이고, 소통이 좌절되는 과정이기도 한데, 그 사이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경험이라는 게 만들어 진다고 생각해요.

 

또 세계문학의 공간은 아직까지는 도래하지 않은 공간이기도 해요. 실제 우리가 접하게 되는 건 조금 부실한, 많은 부분이 훼손된 그런 공간인데, 그런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셰익스피어 햄릿만 하더라도 수십 종의 번역본이 있어요. 각각을 보면 또 놀랄 정도로 많이 다르게 되어있어요. 셰익스피어는 좀 심한 경우에요. 그래서 여러 종류를 읽어보시기를 권하는데, 굉장히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관적으로 개입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어쩌면 세계문학을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문학이라고도 생각해요.(출처 [인디고잉 39호] 인디고 정원에서_청년 참여형 강의|작성자 인디고잉)

 

14.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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