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
나루케 마코토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 이건 '내 얘기'다 싶어서 손에 든 책인데(그래서 '열권' 속에 포함된 책인데) 시작부터 거침없는 말투가 인상적이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나 <마시멜로 이야기>, <시크릿>처럼 내가 읽지 않았고 읽을 생각도 없는 책들을 편식하는 독자들에게 "당신은 구제불능이다!"라고 일침을 놓는 것도 '내 말이!'란 동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저자는 내가 안 갖고 있는 가공할 무기까지 들이미는데, 만약 그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당신은 "장담하건대 중산층 이하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단언이 그것이다(흠, 한번에 열권씩 읽는 건 마찬가지인데도 '중산층 이하'인 경우는 무엇인지?).
저자의 약력이 궁금한 대목인데, 사실 그게 이 책의 또다른 핵심이기도 하다. 간략히 말하면 이렇다. 1955년생. 대학 졸업후 마이크로소프트사 입사. "탁월한 업무 능력과 통찰력, 조직력을 인정받아 35세의 젊은 나이에 마이크로소프트사 일본법인의 사장 취임." 더불어, "일본 비즈니스계를 통틀어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독서가 중 하나". 그러니까 그는 재벌 2세가 아니면서 30대에 CEO가 된 신화적 인물이자 샐러리맨들의 '로망'적 인물인 것. 그 '비결'로 꼽는 것이 특이하게도 자기만의 독서법이다.
"내가 서른다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마이크로소프트 일본법인의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철저하게 남과 다른 방식으로 살고 남이 읽는 방식으로 책을 읽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8쪽)
흥미로운 건 모든 부분에서 남과의 차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은 바로 독서법"이라는 것. 거기에 이런 부추김. 책을 읽는 방법만 바꿔도 인생이 백팔십도 달라질 수 있다! 이건 거의 '협박' 수준인데, 솔직히 나로선 부러운 감마저 없지 않다("단 한권의 책밖에 읽지 않은 사람을 경계하라!"는 영국 정치가 디즈레일리의 경구가 이 책의 에피그라프이다).
책에 관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이름이 알려지는 바람에 서평도 자주 끼적이는 형편이지만 나는 한번도 '인생역전'이라거나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원숭이다!'는 말을 입에 담아보지 못했다. '인문학 강사'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는바, 나는 책읽고 떠든는 게 직업인 '특이한 독서가'이지 '부러운 독서가'는 아닌 것이다(흠, '인터넷 서평꾼'이란 타이틀과 운을 맞추자면 '인터넷 독서꾼'이라고도 부름 직하다). 그래서 저자의 어조가 부럽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남과 비슷하게 살면 된다'는 지금까지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부터 버려야 한다. 남이 가는 곳에는 가지 않고, 남이 먹는 것은 먹지 않으며, 남이 읽는 책은 읽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철저히, 꾸준히 실천하면 된다."(7-8쪽)
사실 이 책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이러한 주문에 다 집약돼 있는 듯싶다. 남들이 읽는 책을, 남들이 읽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읽지 말라는 것. 이것이 나루케 마코토식의 '자기에의 배려'이면서 존재미학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란 물음은 그러한 배려와 미학을 당신은 갖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많이 알려진 경구이지만(출처가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이란 건 이 책에서 알았다) "당신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맞혀보겠다."는 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것이 저자의 대전제이다. 그러니 남과 같은 걸 먹으면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남과 같은 책을 읽으면 역시 남들과 구별되지 않는 인간이 된다는 게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렇다고 유독 나만 읽는 책, 나만 읽을 수 있는 책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의 방점은 '남다른 독서법'에 찍히며, 그것이 '열권을 동시에 읽는' 초병렬 독서법이다. "물리학, 문학, 전기 및 평전, 경영학, 역사, 예술 등 전혀 다른 장르의 책을 적극적으로 넘나들며 동시에 읽는 것을 말한다." 개개의 책은 특별하지 않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읽는 책의 조합은, 그것도 열권의 조합 정도 되면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진다(조합의 가능성이 2의 십제곱이니까!).
나도 당장 책상 주변에 있는 책들을 꼽아보았다. 읽고 있거나 당장 이번주에 읽어야(들춰봐야) 하는 책들이다(절반은 강의나 원고와 관련하여 읽는 책이다).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와 몇권의 관련서 + 폴 벤느의 <푸코, 사유와 인간>과 푸코에 관한 책 몇 권 + 밀란 쿤데라의 <농담>과 몇 권의 관련서 + 후카사와 나오토 등의 <슈퍼노멀> +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와 지젝의 책 몇 권 +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 <20세기 러시아소설>(영어본) + 오이겐 핑크의 <니체 철학>과 니체 관련서 몇 권 + 대니얼 데닛의 <자유는 진화한다> + 박홍규의 <그리스 귀신 죽이기> 등. 이런 식으로 각자가 열권의 조합을 만들어보면, 누구와도 같지 않은, 유일무이한 '독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이런 걸 제안하면 저자도 염두에 둔 의문들이 쏟아질 것이다. "하루하루 너무 바빠서 한달에 책 한 권 읽기도 벅찬데요."(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이 딱 그렇다!) "동시에 여러 권을 읽으면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효과가 있겠어요?" 이런 반문에 대해서 나라면 "하긴 그렇기도 해요."라고 맞장구를 치고 말 텐데, 나루케 마코토는 당당하다. "초병렬 독서법을 실천하면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가 풍요로워진다." (굳의 나의 사례를 덧붙이자면,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변모시킬 수 있는지는 극히 의문스럽지만, 그래도 <로쟈의 인문학 서재> 같은 책은 각자가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초병렬 독서법 자체는 나대로도 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 책에서 특별히 건질 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대목은 저자의 궁핍했던 시절에 대한 회고이다. 아마도 독서가들이 공통적으로 겪을 법한 궁상이고 궁핍일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나는 자동차 부품회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3년간 옷도 거의 사 입지 않고 술 담배나 유흥비도 일절 돈을 쓰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박봉이었던 터라 재정적인 여유가 없어 매달 받는 월급의 대부분을 책을 사는 데 투자했기 때문이다."(80쪽)
"입사 2년째에 결혼을 했으니 아마도 아내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는 주로 카레나 두부 등 재료비가 싼 음식 위주로 식단을 꾸려야 했고, 100원이라도 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외식이라고는 결혼한 첫해 12월에 딱 한 번 집 근처의 횟집에서 식사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책만큼은 악착같이 사서 읽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81쪽)
이 정도면 '나루케 마코토 만세!'다(그의 아내도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에 별점을 인색하게 줄 수밖에 없는 건 문학작품을 '인생의 식량이 되지 않는 책'으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문학작품에는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고 거창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명작만큼 '인생의 식량'이 되지 않는 것도 드물다."(165쪽)
다치바나 다카시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런 게 일본 독서가들의 '성공 노하우'인 것도 같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일급 비밀'을 털어놓아도 된다는 것인지? 책의 서문만 읽고 덮어두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나도 일단은 자동차 부품회사에 들어갔어야 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