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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빠는 간첩, 엄마는 20살 연하와 바람난 여자, 딸의 남자 친구는 정신병자...
오랜만에 순식간에 읽고 싶었던 소설을 만났다. '빛의 제국'은 단순하지만 복잡한 시간 구성이라는 역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야기의 흡인력을 충분히 자랑할 만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구성은 24시간이라는 시간적 한계에 안에서 주인공들의 기억을 변주의 주제로하여 시공간적 영역을 확대해 간다.
24시간은 3명의 가족 구성원 각자의 시간으로 평면 분할되고,
여기에 간첩인 아빠를 쫒는 공안들의 시간이 일부 개입되며,
주인공들의 기억에 의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으로 다시 수직 분할되어 시 공간적인
뒤틀림의 조화가 적절히 배치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이런 치밀한 시간의 배치로 인해 자칫 진부하고 선정적일 수 있는 소재들이 현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담은 상징적인 주제들로 승화된다.
10년간 잊혀졌고,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된 주인공 기영, 그의 인생에 자기는 없다.
다름 사람의 삶을 연기하며 살수 밖에 없는 기영의 삶은 그의 특수성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자아를 감추고 가면을 쓰고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의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거기다가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
크고 작은 정신적 상처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의 처한 환경에 인간이라면 분노의 감정이 먼저 떠오르는 것
이 당연할 진데 소설 속 기영의 모습에는 분노가 없다.
순응의 기술을 익히고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삶이란 순응하지 못하면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일까?
이런 삶에 대한 순응과 부정의 딜레마는 기영의 처인 마리에게서도 나타난다.
외제차 세일즈맨으로 살고 있는 마리. 국내 유수의 대학을 나왔지만, 직장 선택의 순간의 잘못으로 인해
어느 덧 마리는 자신의 모습과 삶을 비웃고 있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삶의 순간 순간의 선택을 합리화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20살 연하의 애인과 그 친구와 함께 2대 1 섹스를 허용하는 심리적 자포자기 상태에 까지 빠져 있다.
이런 그녀의 심리는 모텔에서 연하 남자 친구가 한명을 더 불렀다고 말하는 순간에 드러난다. '2명을 상대로 했는 데
3명인 들 어떠리...' 물러 서지 말아야할 순간을 지키지 못하면 밑을 알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모텔을 나서는 순간 '나약한 자신'과 '포기하는 자신'과 단호히 결별하고, 남편의 자기 고백을 듣는 순간
여자가 아닌 엄마로서 자식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과감히 단절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며 현실로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로 돌아오는 그녀의 모습은 작가가 쓰러져 가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목소리 같기도 하다
'돌아오라고,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상기하며 비록 힘들고 쓰러지고 싶은 현실이지만 돌아와서 싸우라고....'
소설의 결론에서 전향을 권유받는 기영은 또 다시 자신의 선택이 아닌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싸우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리의 현실과 새로운 아침 소파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살아야 하는 현실과 살아가고자 하는 현실이 만나는 곳 그곳은 한 가정의 거실이었다.
7~80년대의 어느 순간을 대학에서 보낸 한국의 작가들은 '살아남은 자로서 시대에 진 빚'을 절대로 져버릴 수 없다.
이것은 독일의 작가들이 '아우슈비츠'에 진 빚을 져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에 각인되어진 수인 번호와
같은 것이다. 개개인의 번호는 다 다르지만, 그것은 시대의 감옥에서 부여 받은 수인 번호이다.
김영하도 자신의 수인 번호가 있다. 주사파, 주체사상, 북한.. 소위말하는 NL 운동권의 코드,
NL/PD로 양분되었던 8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
진영의 자기 분열 속에 존재하며 시대에 맞섰던 자로서의 수인 번호...
'빛의 제국'. 이 소설의 제목이 가진 의미가 문득 궁금해진다.
'빛'이 가지는 긍정적 의미와 '제국'이 가지는 부정적 의미가 결합된 제목.
모든 것을 '빛'으로 가장하여 다스려 지는 '제국'이라는 의미일까?
빛은 어둠을 밝혀주는 좋은 것이지만 너무 과도한 빛은 오히려 모든 것을 감춰버린다.
어둠 속에 숨는 것보다 오히려 빛 뒤에 숨는 것이 더욱 완벽하게 자신을 감추는 방법이다.
그래서 '빛'의 의미는 역설이 되고, '제국'이라는 단어의 뉴앙스와 잘 매치가 된다.
'빛'은 위선이 되고 '빛'이 지배하는 제국은 '위선이 지배하는 제국'이 된다.
우리의 삶은 '빛'이라는 위선적 가면 뒤어 숨어 있지 않은가?
<기영의 딸 현미의 남자 친구는 '상상의 친구'와 같은 방에서 살고 있다.
그 친구는 해킹의 천재이고 게이 아이템을 팔아서 용돈을 벌어 쓴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친구.
그 또한 '상상의 친구'라는 빛에 의해 자신의 자아가 숨겨진 삶을 살고 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겉보기에는 밝은 빛으로 빛나는 삶이지만
실상은 그 빛에 감춰진 보이기 싫은 모습들을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빛의 제국'은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