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
피터 멘델선드 지음, 김진원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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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지나친 독서로 실명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을 무렵이었다. 보르헤스는 노트도 없이 기억에만 의존해 문학에 대한 사랑을 내보였다. 그의 소설 쓰기는 독특한 상상의 산물이나 현상을 마치 실재했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상상과 사실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한데 모아놓고 독자들이 혼돈과 착각 속에서 삶의 현상과 본질을 탐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칼과 쟁기가 팔의 확장이라면,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말했다. 눈이 멀었으면서도 계속해 책을 사 모았던 그는, 독서를 향한 치명적 열정을 보여줬다. 책은 보르헤스의 존재양식 그 자체였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멀어진다.” 보르헤스가 인용한 괴테의 시구처럼 독서 행위는 실명의 진행 과정과 다르지 않다. 책은 상상의 여러 가능성을 보여준다.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고 있지만, 그러한 경험의 총합이 무조건 진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책은 상상의 공간, 즉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 속 주인공의 얼굴에 그리운 사람의 모습을 불러낼 수 있다. 소설의 이국적 장소를 친숙한 동네 모습으로 탈바꿈해서 볼 수도 있다. 때로는 문장 일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그냥 건너뛰어 넘어가기도 한다. 책 표지 전문 디자이너로 활동한 피터 멘델선드는 독서 행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누구나 당연하게 믿었던 책을 읽는 행위가 실제로는 책을 보는 행위에 더 가깝다고 확신한다. ‘책을 보는 행위에는 독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상상력 등이 동원된다.

 

독자는 책 앞에 서면 장님이 된다. 두 눈으로 글을 보고 있어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눈으로 봤던 내용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책읽기는 두 눈을 감은 세계와 비슷하다. 눈꺼풀 같은 막 뒤에서 일어난다. 일단 펼쳐놓은 책은 눈 먼 사람인 척한다. 두꺼운 표지를 넘기고 책장을 한 장씩 넘겨야 비로소 현상세계에서 나는 떠들썩한 자극을 봉쇄하고 상상은 날갯짓을 한다. (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76)

 

현실적인 세계를 드러내길 좋아했던 플로베르는 소설을 통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완성했다. 플로베르의 소설 속 문장과 단락은 스크린이 되고, 독자는 관객처럼 스크린 속 구체적인 현실을 경험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구절구절 문장을 씹어 먹었어도 독자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마담 보바리의 결말은 책 안 읽는 사람들도 안다. 그러나 마담 보바리를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모두 보바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는 이레네오 푸네스(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가 아닌 이상 모르는 게 정상이다. 푸네스처럼 말에서 떨어지면서까지 기억력의 천재가 되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비록 기억력의 천재가 되지 못해도, 상상력의 천재는 될 수 있다. 독자는 눈뜬장님이 되어 상상의 날갯짓을 활짝 펼치기만 하면 된다. 보바리 부인은 전형적인 프랑스 여성이지만, 독자는 자기가 알고 지낸 모든 여성의 얼굴들을 동원하여 부인의 모습을 자유롭게 상상한다. 보바리 부인이 과거의 첫사랑 모습으로 될 수 있다.

 

나처럼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상대방을 비판할 근거를 취하기 위해 책 읽는 독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는 자기 생각에 혼자서 맞장구치는 정도에 불과하다. 책을 꼼꼼하게, 분석하듯이 읽는 독자는 자신이 한 번 읽었던 책의 내용을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피터 멘델선드의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은 대부분의 독자가 공공연히 알고는 있지만, 확인하면서 해부하고 싶지 않은 은밀한 독서 행위를 정면으로 포착하고 있다. 그래선지 이 책을 보게 되면 자신의 상상 밀실을 들킨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만나고 다니는 동안, ‘눈뜬장님이 되어 딴생각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독자들은 "눈이 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었다. 독서란 단순히 책에 기록된 문자를 추적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가 아니라 문자와 문자로 조형된 세상, 그리고 그사이 행간에 은닉된 세상과의 접촉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 곧 이성인 시대는 지났다. 역시 보르헤스는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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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명하면서까지 독서라니....상상이 안되지만....
그런데 상상불가한 일을 상상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대단하네요..
책은 이성의 시대를 넘어 상상의 이상의 시대로 ^^...

cyrus 2016-11-02 19:18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책에 유명 작가들이 언급되었는데요, 이상하게도 저자가 보르헤스를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보르헤스가 생각났습니다. ^^

stella.K 2016-11-02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고 싶기는 한데
네 글 읽으니까 생각 보다 좀 어려울 것도 같다.

cyrus 2016-11-02 19:20   좋아요 0 | URL
제가 책의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못했군요. 그런데 알라딘으로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요. 거짓말 아니고, 책 내용이 어렵지 않습니다. 저자가 디자이너라서 글보다는 그림을 많이 채워 넣었어요. 정말 글보다 그림이 많습니다. ^^;;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평등한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사회주의가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듯이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기회의 균등을 시장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초석으로 삼고 있다. 물론 기회의 균등을 완벽하게 보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회의 균등이 보장된다면 개개인의 창의력, 능력, 노력에 따라 보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불평등 문제가 심화하여 빈곤층이 늘어나면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사회적 통합이 저해된다. 이는 경제성장력을 잠식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지나친 불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깨뜨리고, 다시 소득과 기회의 불균등을 심화시키는 경제의 악순환을 낳는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불평등이 심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학자들은 많은 수치를 통해 불평등이 성장을 막는 것은 물론 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빈부 격차가 최악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미국식 자본주의를 최고로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방한했던 스티글리츠가 미국식 자본주의를 모방하는 우리나라에 충고한 적이 있다. 90년대 이후 미국은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인해 저조한 성장률을 기록했다. 불평등을 높이는 주요 요인은 부자들을 유리하게 만든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를 허용하는 정치구조다. 경제 규모는 커졌어도 소득과 부가 ‘담장 공동체’ 안에 사는 부유층으로 집중돼 중산층은 줄고, 빈곤층은 증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구조는 미국의 양상과 흡사해졌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세계화가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불평등이 빈곤층의 삶을 위협한다고 한탄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빈곤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과 《새로운 빈곤》이라는 두 권의 책을 통해 실업자, 노숙자 등의 빈곤층이 격리의 대상인 사회의 ‘쓰레기’로 전락하는 경제성장의 이면을 꼬집는다. 담장 공동체 밖에는 다수의 빈곤층이 몰린 쓰레기장이 있다. 과거에는 빈곤층 증가 현상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취급되었지만, 이제는 경멸받는 범죄의 차원으로 바라본다.

 

 

 

 

 

 

 

 

 

 

 

 

 

 

 

 

 

영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차브(Chav)’ 현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무직의 하층계급을 ‘차브’로 규정하여, 복지급여를 부정적으로 타내는 게으른 대상으로 비하한다. 전통과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가벼움과 저속함을 무기로 종종 주류문화에 반격을 가한다. 세련되지 않은, 저급하고 값싼 취향의 패션과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은 ‘차브 족’으로 변신했다. 전문가들은 차브 족의 등장으로 부정적인 의미의 ‘차브’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주목했지만, 싸구려를 자처하는 그들의 모습은 쓰레기더미에서 향기 나는 꽃을 피우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잉여로 전락한 하층민들이 정상인 대접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정치적 기구가 없다는 암울한 현실이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의 또 다른 착각이 GDP(국내 총생산)에 대한 맹신이다. 스티글리츠와 아마티아 센은 GDP가 경제지표로서 유용하지 못한다고 줄기차게 비판했던 경제학자들이다. 이 두 사람은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에 활동하여 GDP의 결함을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보고서를 공동으로 펴내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GDP는 틀렸다》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전 지구적 세계화의 추세에 힘입어 GDP는 국가의 경제성장 수준을 판별하는 공통된 지표였다. 하지만 GDP가 기업의 현금 흐름만 고려할 뿐, 삶의 질, 환경파괴, 불균형한 소득 분배 등을 측정하지 못한다. GDP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도 이미 GDP의 한계를 인정했다.

 

 

 

 

강대국은 GDP를 국력 비교의 잣대로 사용했다. 가난한 나라들은 GDP 실적을 올려 ‘개발도상국’의 굴레를 벗어 ‘선진국(또는 강대국)’으로 도약하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지금도 GDP를 신뢰하고, 대통령들이 경제성장을 약속할 때마다 GDP 실적 목표를 언급한다. 결과와 수치에만 집중해서 알맹이 없는 양적 성장을 본격적으로 경계하는 시각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2030년 GDP 규모 세계 7위’ 도약 목표에 매달리고 있다. 한국 경제가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국민의 행복 지수와 복지 지출 수준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재난 불평등’을 분석한 존 C. 머터는 재해에 큰 피해를 본 빈곤층에 주목했다. ‘담장 공동체’ 사람들은 지배층의 보호 아래 피해를 면하지만, 담장 밖의 낙후된 지역에 있는 빈곤층들은 정부의 무관심과 리더십 부재로 인해 복구 혜택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사망자 수가 많은 대형 재난 소식을 접하면, ‘후진국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생각해서 부끄러워한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사람 역시 재난 피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심지어 재난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못된 사람들도 있다.

 

 

 

 

홍수나 지진처럼 자연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만 통틀어 재난이라고 보지 않는다. 어떤 재난은 인재(人災)로, 누군가의 무관심, 사회적 부조리에서 재앙이 시작된다. 청와대에 4년 동안 숙박한 시녀가 세월호 사고 이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불평등 현상이 경제위기의 본질임을 깨닫지 못한 지도자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청와대 시녀 놀이’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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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나린 2016-11-01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녀=꼭두각시=아바타=하야!

cyrus 2016-11-02 16:26   좋아요 1 | URL
별명이 많은 대통령으로 기억될 겁니다. 박그네, 닭그네, 최순실 꼭두각시, 최순실 아바타, 병신년

yureka01 2016-11-01 1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집안이 나라를 말아 먹는 기분 ㄷㄷㄷㄷ

cyrus 2016-11-02 16:29   좋아요 1 | URL
박 가쪽 사람들은 이제 정계 주변에 얼씬도 못할 겁니다.

감은빛 2016-11-02 12: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뿌리깊은 불평등 구조를 과연 바꿀 수 있을까요?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많은 국민들이 ˝부조리하지만 어쩔수 없어˝가 아니라
˝부조리하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정도가 되어야,
저들도 마음대로 해먹지 못하겠지요.

아직도 오가며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를 옹호하더라구요.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cyrus 2016-11-02 16:3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완전히 해결되기 어려운 문젭니다. 불평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 - 화려한 빅토리아 시대, 더욱 숨어드는 여자 이야기
이주은 지음 / 이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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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단순히 그림 한 장이 아니다.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시끄러울수록 매혹을 더 하는 마르지 않는 예술의 샘이다. 이주은의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는 명화를 살아있는 인간의 이야기로 소개한다. 풍요와 결핍이 공존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과 함께 지나치기 쉬운 여성들의 생활상을 전달한다.

 

한때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알려진 적이 있다. 지구가 돌아 영국 본토에는 밤이 오더라도 세상 어딘가 영국의 식민지 중 하나는 낮이라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은 대표적인 산업 자본주의 국가이자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였다. 또 성 불평등이 극심한 대표적인 나라였다. 빛과 어둠의 시대, 영광의 이면에 잔혹한 착취를 숨기고 있던 시대, 그 시대를 보통 사람들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1837~1901)는 대영제국의 황금기였다. 당시 영국인들은 여왕 폐하 만세!’를 외치는 데 추후도 망설임이 없었다. 또 여인들에게 깍듯하고 극진한 것이 신사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신사의 나라에도 실제는 여성 비화와 차별이 뿌리 깊었다.

 

 

 

 

금반지 안에서 희망이 보인다고? 거짓말, 거짓말이다.” 결혼생활의 실패로 자살한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이렇게 자문자답한 뒤 슬픔만이 거기에 있다고 자신의 한 시에서 단정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런 결혼관이 생긴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서의 결혼상은 빅토리아 시대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결혼은 그리 낭만적이지도, 애절하거나 가슴 뭉클하지도 않은 정치행사이자 사회행사의 일환이었다. 과거에 결혼은 여성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했다. 그러나 남성 지배, 여성 복종이라는 가부장적 질서가 여성을 몸과 마음을 가정에 헌신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강인한 신사의 반대편에는 집안의 천사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이 등장했다.

 

 

 

빅토리아 시대에서는 섹스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 섹스는 단지 은밀하고 어두운 곳에서만 화제에 올릴 수 있었다. 금욕주의와 성애주의는 늘 빅토리아 시대 문화와 사람들 영혼 속에 공존해왔다. 억압에 더욱 강해지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듯이, 이 시대 영국에서는 매춘과 성병이 유독 기승을 부렸다. 금욕을 강조했던 시대에 매춘부들은 타락한 여자로 취급받아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많았다. 물에 떠오른 익사체의 여성이 많이 그려진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이 시대의 여성은 사회적 권리가 없어 늘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감금되어 남편을 기다리고, 만일 버림받으면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충동과 규범의 사이에서 여성의 생활은 지속해서 심리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자식을 홀로 키우면서 세상의 따가운 시선들을 견디는 과부를 그린 에밀리 오즈본의 이름도 없고, 친구도 없고를 보면 그 당시의 시대상이 잘 나타난다.

 

빅토리아 시대는 여왕의 시대였지, ‘여성의 시대는 아니었다. 화려한 옷과 고급스러운 화장으로 치장한 여인들의 그림 속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은밀한 속사정이 숨어있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부여받은 것이다.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관능적이라기보다는 씁쓸하게 느껴진다. 그녀들은 그림 밖 관람객들에게 우리가 행복해 보인다고? 거짓말, 거짓말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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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6-11-0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인 저의 시각에도 관능적이고 아름다움의 프레임이 걸려있다는 거죠~

cyrus 2016-11-01 18:32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좋아했던 회화 양식이 빅토리아 시대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살아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알고 나니까 그림에 대한 정이 떨어졌습니다. 저도 남성들이 만든 아름다움의 프레임에 착각했습니다.

나비종 2016-11-0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한 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가 과거의 한 면만을 보여주듯이, 명화도 마찬가지군요.
하긴 똑같은 장면을 촬영한 사진도 찍는 이의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른 사건으로 비춰지는 걸 보면, 예술이든 어떤 형태로든 모든 기록은 승자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나 봅니다.
「이름도 없고, 친구도 없고」라는 제목이 가슴 아프네요.

cyrus 2016-11-01 19:12   좋아요 0 | URL
책 속에 생소한 화가들의 그림이 많았습니다. 에밀리 오즈본이라는 화가도 여자인데, 남자 화가들이 외면했고, 그리지 않았던 것을 그려냈습니다. 서양미술 책에 많이 소개되는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들은 주로 여성 모델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구도가 많습니다.

달걀부인 2016-11-01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미술사 책들을 읽고 있는데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책이네요. 추천 감사해요. ^^

cyrus 2016-11-02 16:34   좋아요 0 | URL
빅토리아 시대 회화를 주제로 한 책이 많지 않습니다. 이주은 씨의 책은 어렵지 않고, 도판이 많습니다. ^^

북프리쿠키 2016-11-01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양미술사로 미술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어 기뻐요~
그림과 화가를
공부하듯이 외우지 않아도
그림에 담긴 스토리와 시대상에 따른
작가의 스타일에 대한 내용이
흥미롭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느낌이 좋습니다.

앞으로 싸이러스님의 그림에 대한
리뷰~꼼꼼히 읽어볼께요^^;


cyrus 2016-11-02 16:38   좋아요 1 | URL
북프리쿠키님이 서양미술사가 재미있는 이유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림 속에 숨겨진 상징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어요. 그리고 예술가들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제 글은 스마트폰으로 보기가 불편합니다. 글을 짧게 안 쓰거든요. 꼼꼼하게 읽으면 시력이 떨어져요. ^^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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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감각을 열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한 현상 너머의 본질을 캐는 통찰력. 그것이 시인의 주요 덕목 중 하나이다. 허만하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는 이런 통찰력이 잘 스며들어 있는 산문집이다. 시 속에 삶의 풍경은 어떻게 비치고, 함축될까? 시인은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때로는 통일신라의 기와 조각 무늬를 감상하면서 '지도 없는 여행'을 떠나는 공상에 잠긴다. 또 리치먼드의 길을 더듬으며 에드거 앨런 포를 회상하기도 하고, 이인성의 수채 풍경화에서 풍경의 의미를 배운다. 멀리 보들레르까지 가지 않더라도 화가와 시인의 관계를 정의한 예술가는 적지 않다. 강연균 화백이 그랬던가? "시인은 언어로 그림을 그리고, 화가는 그림을 통해 시를 이야기한다"라고.

 

 

 

나는 풍경을 사랑한다. 풍경이란 살아있는 공간이다. 나의 눈길이 닿을 때까지 그 공간은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 죽어있던 공간이 내 시선이 닿는 순간 목숨을 가진 표범처럼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았던 수많은 풍경 - 그 가운데의 어느 하나의 풍경이(또한 한 순간이) 나의 망막을 보이지 않는 인두로 지지는 것이다. 그때 그 풍경은 나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피 흘리는 풍경' 중에서, 38쪽)

 

 

시인에게 있어서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망막세포 하나를 죽여 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의 눈에는 죽어 있던 공간이 하나의 역동적 풍경으로 보인다. 그 공간 안에서 선과 점과 면은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풍경이 그려진 시는 '움직임의 시'이자 '깨달음의 시'다. 얼핏 보면 정적인 시인의 풍경 속에는 움직임과 깨달음의 '가쁜 숨'과 땀방울이 들어 있다. 그 들이켜고 내쉬는 숨과, 솟아나서 떨어지는 땀방울을 새겨 넣는 시인의 손은 섬세하면서도 둔중하다. 거기에는 섣부른 계몽의 교훈이 없고, 그렇다고 화려한 묘사도 없다. 평이한 묘사와 진술만으로 자연의 풍경이자 '나의 풍경'을 빚는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느끼는 풍경은 밋밋해 보이지만 힘차며 그래서 아름답다.

 

풍경을 받아들이면서 체험하고, 성찰한 것을 근거로 완성한 시는 오래 간다. 언어로 묘사된 풍경은 단순히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숨과 땀방울이 스며든 존재로 표상되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소도구가 된다. 숨겨진 부분, 가려진 부분을 보는 제3의 눈을 가진 견자가 시인이라는 점을 되새긴다면 허만하의 언어를 통해 세상의 가려진 부분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자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이다. 딱딱한 기계의 눈으로 결코 읽을 수 없는 그의 언어는 새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허만하 시인의 글은 감정의 묘사에, 자잘한 교훈에 자족하는 오늘날의 언어들에 대한 항변이기도 하다. 그 불완전한 언어의 틈 한가운데를 허만하 시인이 성큼성큼 걷고 있다. 저기 십리 밖 풍경 냄새 맡으러 시인이 걸어간다. 시인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위해선 그가 표식으로 뿌려놓고 간 조약돌을 잘 챙겨야 한다. 낯설면서도 깊은 언어로 뭉쳐진 텍스트의 조약돌(박남수, 릴케, 가스통 바슐라르, 쥘 쉬페르비엘[주])을 줍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주] 허만하 시인은 ‘6월에 바라본 한 시인의 뒷모습’이라는 제목의 글에 쥘 쉬페르비엘(Jules Supervielle, 1884~1960)의 시를 인용했다. 이 글이 쓰인 시기는 2000년이다. 이때 당시만 해도 쉬베르비엘의 시는 널리 소개되지 않았다. 비록 시집은 아니지만, 쉬페르비엘의 소설이 2014년에 《바다 위의 소녀》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이 국내에 유일하게 정식으로 소개된 쉬페르비엘의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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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3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들에게는 없는 것이, 시인들에게는 민감한 안테나가 있는 것이죠....

cyrus 2016-11-01 09:01   좋아요 1 | URL
정말 부러운 능력입니다. 그런데 음흉한 몇 몇 시인은 엉뚱한 안테나로 여성에게 접근했습니다..

매너나린 2016-10-3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들어 시인들의 시를 편견없이 바라보기가 힘들어졌다는 사실에 슬픕니다. . .

cyrus 2016-11-01 09:06   좋아요 2 | URL
반갑습니다. 매너나린님. 저는 한국 작가의 소설이나 시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불미스러운 소식을 접한 이후로 실망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내 문학 작품을 즐겨 읽은 독자들이 더 큰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을 겁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데, 한편으로는 심각한 상황들이 빨리 잊혀질까 봐 걱정입니다.

2016-11-03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03 15:45   좋아요 0 | URL
제 글은 북플로 보기 힘듭니다. 글이 길거든요. 분량을 줄인 게 A4 용지 1장 반 정도 나오는데, 스마트폰으로 보면 눈에 피로감이 금방 생겨요. ^^

마르케스 찾기 2016-11-03 22:43   좋아요 1 | URL
ㅋㅋ 노트북으로 읽어서 괜찮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폰을 거의(아니 전혀라 할 만큼ㅋ) 사용하지 않는 터라ㅋㅋㅋ

다른 리뷰들보다 더 찬찬히 꼼꼼히 읽게하는 힘과 정보가 있어 재밌게 잘 읽었어요.

cyrus 2016-11-04 17:27   좋아요 1 | URL
정성을 담아서 리뷰를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글을 찬찬히 보면 독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
 

 

 

 

 

 

 

 

 

 

 

 

 

 

 

 

 

 

 

 

최순실 대통령의 시녀 박근혜는 우주의 기운이 도와줄 때까지 청와대에 나갈 생각이 없는 듯하다. 최순실 게이트를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무속인이 남한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고 전했다. 최순실이 포함된 비밀모임 ‘팔선녀’가 막후에서 국정개입은 물론 재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언론 보도마저 나왔다. 무속신앙과 정치권력의 결탁으로 인해 우주의 기운이 오기는커녕 국가의 기운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영생교를 둘러싼 최순실과 박근혜의 연결고리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음모론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을 보면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히틀러와의 관계가 떠올린다.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노숙자 신세를 졌다. 에카르트는 헨리크 입센의 희극 《페르 귄트》를 독일어로 각색하여 대박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과 알고 지낸 히틀러에게 《페르 귄트》를 헌정했다.

 

 

 

 

히틀러는 에카르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위해 멋진 프렌치코트 한 벌 사줬고, 베를린 왕립 극장의 연극 공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는 남들보다 책을 많이 있었어도 글쓰기 실력은 형편없었다. 전문적으로 글을 썼던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빨간펜 선생님’이 돼 주기도 했다. 히틀러는 여러 차례 연설할 기회를 가졌고,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서재에 보관되었던 장서들을 조사하여 히틀러의 생애를 추적한 《히틀러의 비밀 서재》의 저자 티머시 W. 라이백은 히틀러가 에카르트의 각본에 따라 ‘가장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히틀러의 주임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1981)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히틀러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썼다. 히틀러는 자신의 추종자나 심복이 많음에도 사적인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운 폐쇄적인 성격이었다. 슈페어는 루돌프 헤스(Rudolf Hess, 1894~1987)의 증언을 토대로 히틀러와 가깝게 지낸 에카르트를 주목했다.

 

헤스는 당시에 단 한 사람만이 히틀러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였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히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우정이라기보다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는 반유대주의 계열에서 가장 저명한 작가였다. 1923년 에카르트가 사망하자, 히틀러가 친한 친구끼리 사용하는 호칭 ‘Du’(2인칭의 친근한 표현, 너)로 부르는 사람은 네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헤르만 에서, 크리스티안 베버,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에른스트 룀이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174쪽)

 

 

에른스트 룀(Ernst Röhm, 1887~1934)은 나치돌격대(SA) 참모장으로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룀은 히틀러의 2인자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히틀러는 그런 ‘친근한’ 룀의 존재감을 부담스러웠다. 1934년 6월 30일 이른바,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룀 세력과 나치돌격대 일원 모두 체포, 살해했다.

 

티머시 W. 라이백은 히틀러의 서재에 발견된 오컬티즘(Occultism) 관련 서적이 히틀러가 오컬트와 신비주의 등에 심취한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로 봤다. 히틀러 음모론 중 절대로 빠지지 않은 필수 요소가 바로 ‘히틀러와 오컬트의 연관성’이다. 박근혜가 ‘우주의 기운’을 믿었다면, 히틀러는 순수 혈통으로 이루어진 아리안(Aryan) 족의 우수성을 믿었다. 두 사람이 간절히 믿었던 대상은 실제로 성립 불가능한 것들이다. 히틀러는 순수한 아리안 혈통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유대인을 ‘세상의 질병’으로 매도했다. 오컬트 마니아들은 히틀러가 ‘신비주의 밀교 조직’에 가입하여 자신을 지배한 사탄을 위해 세계를 파괴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래도 히틀러가 ‘신비주의 밀교 조직’ 비슷하게 분위기를 띤 단체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점은 사실이다.

 

 

 

 

 

 

 

 

 

 

 

 

 

 

 

 

 

1918년 뮌헨에 창설된 툴레 협회(Thule-Gesellschaft)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이지만, 정식 명칭이 ‘고대 게르만족에 관한 연구 모임’이다. 툴레 협회 일원들이 공통으로 연구하는 것은 신비주의인데, 이들은 영적인 힘을 빌려 ‘아리안의 부활’을 기도했다.

 

 

 

 

 

툴레(Thule)는 원래 고대 문헌 및 지도에 언급된 극북(Far North) 지역의 섬을 의미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툴레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했다. 툴레 협회 일원들은 현실에 없는 섬에 관한 고대 전설에 매료되어 그곳이야말로 아리안 민족의 요람지로 믿었다. 히틀러가 툴레 협회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는지 불명확하지만, 히틀러와 툴레 협회의 관심사는 똑같다. 반유대주의자이자 히틀러의 ‘빨간펜 선생님’ 에카르트는 물론,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1929~1945),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 등이 툴레 협회 회원이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즘 옹호 이론가로 활동하여 《20세기의 신화》라는 책을 발간하여 독일 나치스(Nazis)의 중요 인사로 승승장구했다. 이 책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 다음으로 독일 제3제국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앞에 서술했듯이 《20세기의 신화》 역시 잘못된 편견과 망상이 만들어 낸 ‘불쏘시개’에 가깝다. 《20세기의 신화》는 나치스의 이념인 국가 사회주의의 기초를 정립한 문헌이다. 그래서 에카르트와 로젠베르크 등이 활동한 툴레 협회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즉 나치스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하겐크로이츠가 툴레 협회의 공식 엠블럼과 유사하다.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존경을 담아 《20세기의 신화》를 헌정했는데, 정작 히틀러는 이 책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책에 나온 내용은 수십 년간 독서를 통해 히틀러가 이미 정립했던 것들이다. 아니면 누구보다 열등감이 강했던 히틀러가 로젠베르크의 필력에 질투했을 수 있다. 《나의 투쟁》 초판은 겨우 팔릴 정도였다. 실패작에 가까운 책은 권력에 힘입어 히틀러 시대의 필독서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자신 스스로 《나의 투쟁》을 형편없는 책으로 평가했다.

 

 

 

 

 

 

 

 

 

 

 

 

 

 

 

 

 

 

독일의 역사학자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히틀러의 삶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주석으로 ‘결핍’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했다. 히틀러는 중급 공무원에 불과한 친아버지보다 작가로서 부와 명성을 거머쥔 에카르트에 더욱 기대어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준비한 각본을 믿고 따르며 정치가로 변신한 히틀러는 ‘실패한 화가’라는 굴욕적인 인생의 명함을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평생 괴롭히는 상처가 될 ‘결핍’을 채워준 중요한 존재이다. 그렇듯이 최순실은 박근혜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그녀를 도와주었고, 박근혜는 평생 꼬리표로 달라붙은 ‘박정희의 딸’, ‘만년 2인자’를 18대 대선에 승리하여 떼어냈다. 그렇게 의기양양한 최순실은 박근혜를 위해 옷 입은 것부터 시작해서 연설문 작성 등 모든 일에 관여했다. 다만, 최순실이 박근혜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것은 작문 방식이다.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나치스가 독일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만약 에카르트가 건강해서 히틀러의 곁을 지켰다면, 괴벨스(Goebbels, 1897~1945)는 선전장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는 에카르트는 ‘나치 운동의 북극성’이라고 치켜세웠다. 히틀러는 에카르트라는 북극성의 기운을 받아 독일을 장악했다.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말을 빌리자면 “좋든 싫든 독일 제3제국은 히틀러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더 크게 보면, 에카르트의 작품이었다. 독일 제3제국은 극작가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원하던 세상의 무대이며, 그 무대 위에 선 주인공은 히틀러였다. 지금까지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연극했던 4년의 시간은 좋든 싫든 최순실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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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의 독서일기 2016-10-30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 11시쯤에 하는 서프라이즈의 단골 주제가 히틀러거든요. 워낙 띄엄띄엄 봐서 연결이 잘 되지 않던 이야기를 쫙 정리해주시니까 이해가 잘 되네요. 근데 왜 마지막에는 열이 확 받는지.. 그간 찝찝한 부분이 드러나서 이제 시원(?)한 부분도 있는데 그 이상의 분노가 생기는 요즘입니다.

cyrus 2016-10-31 10:13   좋아요 0 | URL
<서프라이즈>가 문헌이나 인터넷 정보를 수집해서 방송 분량을 만드는 것 같은데, 문제는 인터넷 정보 대부분이 음모론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가끔 <서프라이즈>를 보긴 합니다만, 모든 방송 내용을 다 믿진 않습니다. 번거로워도 관련 서적 여러 권 읽는 것이 정확한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

yureka01 2016-10-30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틀러도 웅변술이 일가견있죠.

그에 반해...원고 없이는 안된다는 게,
기자회견 라이브에 질답이 예약이었던걸 보면 뭐..ㄷㄷㄷ

cyrus 2016-10-31 10:16   좋아요 0 | URL
그 분이 기본 능력조차 없는 걸로 봐서는 우주가 그 분을 외면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