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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용기와 대담함, 명예,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 이 모든 것들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성성은 때로는 폭력성, 권위주의, 남성우월주의, ‘마초(macho)’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한다. 페미니즘에 무지하면 사회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남성 중심 사고방식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문제는, 젠더 문제에 대한 인식이 남녀에 따라 극심한 격차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성 문제 인식에 대한 남성들의 문화 지체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한마디로 일부 남성들은 아직도 조선 시대에 살고 있다. 잘못된 남성성은 일상생활 속에 슬며시 스며들어 억압과 불평등을 양산한다. 맨박스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 속에 굳건히 뿌리 내린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떻게 형성돼 발전하고, 나아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상세하게 드러내 보인다.

 

강인한 정신으로 고정되는 남성성은 차별화의 도구로 전락한다. 남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은 여성, 동성애자를 억압하고 짓밟는 수단이 된다. 과거의 남성은 늘 강해야 하고 육아와 가사에는 관심이 없다. 남자들은 여자 앞에서 나약하고 슬픈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한다. 어렸을 때 눈물을 자주 보이면 어른들은 감성적인 여성이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에게나 있을 수 있는 유약한 태도라고 가르친다. 남자들은 사춘기 때 여자 같다는 놀림을 받기 싫어서 일부러 술, 담배를 일찍 배우는 위악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슬픔에 대한 감수성을 잃은 남자들이야말로 비겁하다. 이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슬픔을 느끼는 힘이 없다. 정서적으로 교감을 나누는 방식을 잘 모른다. 강압된 남성성이라는 상자, 즉 맨 박스(Man Box) 안에서 성장한 남자는 이성과의 관계 맺기에 서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자들이 여성과의 의사소통에 서툴고 폭력적인 모습까지 보이면서도 이를 정당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여자와 손잡고, 키스하고, 마지막에 섹스하는 것으로 사랑이 표현된다고 남자들은 착각한다.

 

남자들도 소통과 교감에 대한 욕망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맨 박스 안에 숨어서 자신의 감정을 은폐한다. 어릴 때는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학창시절엔 남녀 간 소통이 배제된 폭력적 판타지인 포르노로 성에 눈을 떴다. 더 커서는 상명하복의 군대·회사 등의 조직으로부터 수직적 관계만을 배웠다. 이런 남자들이 정서적 친밀감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남자들은 정서를 교류하는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을 따른다. 관계 맺는 상황에 서툴면 남자는 의기소침해진다. 남자들은 자신에게 약점이 있다고 느끼면, 감추려고 한다. 약점을 숨기기 위해서 강한 남자로 흉내를 내고, 여자와 거리를 두는 관심 결핍상태에 이른다. 관심 결핍에 빠진 남자들은 여성이 처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남자가 일으킨 여성 폭력이나 성범죄가 잘못된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착하고 평범한 남자라서 그 일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맨 박스의 저자 토니 포터는 남자들 스스로 솔직한 성찰과 고백을 표현하고, 여성과 함께 대안을 찾아갈 때 성폭력과 성차별이 근절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맨 박스에 갇혀 지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미숙한 행동에 대해 반성한다. 맨 박스에 살아왔던 남자들이 스스로 마음의 맨살을 보여준다면 남성성에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남성성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던 시대는 지났다.

 

 

남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뭐냐면요. 여자에 대한 인식과 여자를 대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껏 몸에 깊게 밴 인식을 재정립해야 하는 거죠. 전 남자들이 어떤 이슈에서건 여자들의 의견과 생각. 제안, 충고를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남성만큼 존중할 때 우리는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성차별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어요.” (123)

  

 

맨 박스강한 남성성이라는 외투를 입었던 남자로서 자성이 담긴 일종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강압적인 남성성에 의지하는 알량한 고집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자신까지 망가뜨린다. 남성과 여성이 본래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님에도 마치 원수처럼 산다면 인생의 큰 즐거움마저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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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07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우리나라에서 갑질이 가장 심한 연령대가 40~50대 남성이라고 하더군요. 무려 전체 신고의 98%였던 것 같아요. 한국 남자들 사회 구성원으로서 문제가 심각한 상태입니다.

cyrus 2016-10-08 20:23   좋아요 0 | URL
그 연령대 어른들은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미래에 중년층 구성원이 많아지면 지금의 젊은 세대가 갑질을 부릴 수도 있어요.

yureka01 2016-10-07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릴때 폭력에 많이 노출되면 커서 폭력 휘두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되죠.비슷한 이치겠죠.이걸 끊어낼 성찰이 필요한데...학교에서 ,,커서 군대에서...에휴...

cyrus 2016-10-08 20:2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폭력 문화가 예전에 비해서 사라졌다고 해도 어디선가 여전히 되물림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마립간 2016-10-08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인한 정신으로 고정되는 남성성은 차별화의 도구로 전락한다. ; 학벌의 서열화, 아파트(거주지)의 서열화, 직장(예 재벌 기업, 정규직)의 서열화 등도 같은 개념이죠.

페미니즘을 통해 사회개혁이 될지, 아니면 사회개혁을 통해 성평등을 이룰지. ;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죠.

cyrus 2016-10-08 20:29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현재 사회가 페미니즘을 통해 사회개혁을 시도하는 단계에 왔다고 봅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분위기가 식으면 과거의 문제점이 또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고, 또 시간 지나면 열기가 가라앉는 반복된 패턴에 진전이 없습니다.
 

 

 

 

 

 

[1001-12] 오스 루시아다스

 

 

 

일반적으로 ‘대항해 시대’라면 ‘무적함대’라는 별명으로 위용을 떨친 스페인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포르투갈도 대항해시대의 주역이었다. 미지의 바닷길을 개척하고, 그 선상에 있는 섬과 대륙의 땅들을 점령하던 거친 시대의 문을 앞서 열었다. 1415년 엔히크 왕자(1394~1460)가 아프리카 경략에 나선다. 그가 파견한 탐험선은 서아프리카 해안을 하나둘 정복해 가면서 마침내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연다. 한 번도 항해에 나서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 앞에는 ‘항해 왕’이란 호칭이 붙는다. 인도항로를 연 바스쿠 다가마(1469~1524),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한 마젤란(1480?~1521),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처음 발견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1450?~1500)도 포르투갈 사람이다. 희망봉의 원래 명칭은 ‘폭풍의 곶’이다. 1497년 희망봉을 통과하여 인도에 도착한 가마의 항해를 기리기 위해 포르투갈 왕 주앙 2세(1455~1495)가 희망봉으로 바꿨다. 포르투갈은 개척한 항로를 통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인도양의 이슬람 세력을 제압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맞는다.

 

 

 

 

 

 

 

 

 

 

 

 

 

 

 

 

 

포르투갈은 한때 바다를 제패하여 세계를 호령한 만큼 화려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비록 최근엔 경제위기 등으로 과거의 영광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과거가 너무나도 찬란해서일까. 포르투갈인들은 찬란했던 과거 시절을 노래한 서사시에 자부심을 가진다. 그 서사시가 바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다. 루이스 디 카몽이스(Luís Vaz de Camões, 1524~1580)는 이 서사시 하나로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으로 칭송받는다.

 

 

 

 

 

카몽이스는 1547~1548년경에 아프리카의 세우타 항구에서 일어난 무어인(북아프리카에 거주한 이슬람교도)과의 전투에 참전하다가 오른쪽 눈이 실명했다. 그는 순탄하지 않은 생을 살았는데 옥살이를 한 적이 있고, 인도로 향하는 도중 배가 폭풍우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빈곤에 시달린 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우스 루지아다스》의 국내 번역본이 1988년에 나온 적이 있었으나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서사시는 총 10곡(曲)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석영, 최영수 공저의 《스페인. 포르투갈사》(대한교과서. 2005)에 요약한 《우스 루지아다스》의 줄거리가 있다. 이 내용은 ‘네이버 백과사전’ 항목으로도 만들어졌다.

 

 

 

 

 

 

 

 

 

 

 

 

 

 

※ [카몽이스의 ‘루지아다스’]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9392&cid=43036&categoryId=43036

 

 

 

카몽이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하여 포르투갈의 역사와 전성기를 이끈 인물들을 찬양한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와 작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텍스트에 기댔다. 고전의 새로운 해석은 역사를 이끌어갈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가는 기초다. 카몽이스는 신화의 세계를 소재로 포르투갈의 역사를 구현했다. 그래서 《우스 루지아다스》가 장편 서사시라기보다는 영웅 신화에 가깝다. 카몽이스는 가마를 로마의 건국 영웅보다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아이네이스의 명성을 능가한 저 유명한 가마도 있나이다.

 

(제1장 12연, 28쪽)

 

 

영웅은 언제나 악의 세력에 의해 고난을 겪다가 최후에 승리한다. 아이네이스나 오디세우스 등 신화 속 영웅들은 모험을 통해 스스로 고난을 극복하고 초자연적인 힘을 얻는다. 독자는 신화를 보면서 영웅의 탄생과 고난, 승리를 함께하는 즐거움을 찾는다. 주신(酒神) 바쿠스(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는 가마 일행의 항해가 신의 영역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가마 일행의 항해를 방해하는 음모를 꾸미지만, 비너스(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마르스(그리스 신화의 아레스)가 가마 일행을 보호한다. 비너스는 주피터(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게 찾아가 포르투갈에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우스 루지아다스》 2곡). 머큐리(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는 가마의 꿈에 나타나 위기 상황을 미리 알려준다. 신들의 비호를 받는 가마의 모습은 ‘완벽한 영웅상’과 거리가 멀다. 가마는 자신의 여정을 이야기하면서 장거리 항해의 어려움을 토로한다(《우스 루지아다스》 5곡). 카몽이스는 가마를 유약하게 그리기보다는 온몸으로 고난에 부딪히면서 한계를 겪는 인간적인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켰다.

 

 

 

 

 

 

 

 

 

 

 

 

 

 

 

 

 

카몽이스가 묘사한 가마의 항해 여정은 조셉 캠벨이 제시한 영웅 모험 단계 진행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 모험의 소명(인도 신항로 개척)을 받아 특별한 세계(아프리카)로 진입해 협력자(말린디의 왕)와 적대자(무어인, 몸바사의 왕, 말라바르의 재상 카투알)를 만나고 시련을 이겨낸다. 또 하나의 현실적인 관문(희망봉의 정령 아다마스토르)을 거쳐 부활을 경험하고 성공적으로 (포르투갈로) 귀환한다.

 

 

 

 

 

 

 

 

 

 

 

 

 

 

 

 

《우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을 넘어 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장편 서사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하면 카몽이스의 과장법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지리상의 발견’이 나 ‘세계탐험’이란 미명 아래 비참하게 죽어간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운명은 세계사에서 이 시대가 가진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럽의 식민주의의 양대 무기는 군대로 상징되는 총칼과 선교사가 대표하는 기독교다. 탐험가들은 벼락부자를 꿈꿨고, 선교사들은 기독교 전파라는 소명감이 높았다. 엔히크 왕자는 무력으로 아프리카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고, 노예무역을 정당화했다. 이슬람 국가들에 의해 동방으로 가는 육로가 막히자,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유럽 국가는 이슬람인들을 적대시했다. 세계의 승리를 가져오겠다는 기독교적 사명감이 이슬람과의 대립에 불을 지폈다. 유럽인들은 이슬람으로부터 오랫동안 위협의 공포에 떨었던 시절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앙금은 《우스 루지아다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카몽이스는 무슬림을 ‘오류투성이 종파의 신자’라고 표현하는 등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없는 주피터는 이교도를 물리친 기독교가 종국적으로 승리할 것으로 예언한다. 이 구절에 기독교 세계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카몽이스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딸(비너스)이여, 그들(루지타니아인 : 포트루갈인)에 의해서 요새와 도시들과

또 높은 성곽이 세워짐을 볼 것이요.

너무도 호전적이며 거친 터키족이 그들 손에서

영원히 괴멸됨을 볼 것이요. 인도의 제왕이

자유와 안전을 찾아서 강력한 대왕 앞에

복종함을 볼 것이다. 또 모든 것의 상전이 될

그들로 해서 종국엔 그 땅에 가장 좋은 율법(기독교)이

제공될 것이야.

 

(제2곡 46, 47연 주피터의 말 62~63쪽)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은 ‘강력한 대왕’이 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나타났다. 카몽이스와 유럽인들이 원하던 희망은 제국주의의 수탈을 알리는 폭풍이 되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 계몽주의의 신화로 식민지를 만들었다. 토인비는 ‘한번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자신의 능력과 방법론을 우상화하는 과오’를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신의 영역을 넘보는 오만함은 쇠퇴의 원인이다. 천년만년 영광을 누리며 번성할 것 같던 포르투갈은 현재 유럽 변방의 낙오자로 전락했다. 잃어버린 영광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포르투갈인들은 《우스 루지아다스》를 보며 위안으로 삼을 것이다. 허나 부질없는 일이다. 보르헤스는 ‘루이스 디 카몽이스에게’라는 제목의 시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상기시킨다. 영광은 종이 속에서만 영속되어 있을 뿐이다.

 

 

 

 

 

 

 

 

 

 

 

 

 

 

 

 

 

일말의 연민과 분노도 없이

시간이 영웅적 칼들을 갉아먹네.

아, 대위여, 당신은 슬픔에 잠겨

향수 어린 조국으로 가련히 돌아왔지.

조국에서 조국과 더불어 최후를 맞으려고.

마법의 사막에서 포르투갈의 꽃이 낙화하고

과거의 패배자였던 냉혹한 스페인 사람이

찢긴 그의 옆구리를 위협하였네.

나는 알고 싶네.

네가 최후의 강변인 그곳에서

겸허하게 깨달았는지.

모든 상실된 것, 서구와 동방, 창검과 깃발이

네 루시타이나판 아이네이스 속에서만

(인생사 우여곡절과는 무관하게) 영속하리라는 것을.

 

(보르헤스 「루이스 디 카몽이스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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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07 19:37   좋아요 1 | URL
인터넷에 `대항해시대`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뜨는 것이 게임입니다. ㅎㅎㅎ

저 말고도 매일 꾸준히 리뷰를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화제의 서재글`이 알라딘의 전부가 아니죠. `화제의 서재글` 밖을 둘러보면 묵묵히 리뷰를 쓰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

겨울호랑이 2016-10-0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몽이스의 애꾸눈을 보니 위나라 하후돈이 생각나네요 ㅋ

cyrus 2016-10-07 19:38   좋아요 1 | URL
눈깔 사탕으로 생각하면서 씹어드신 분이죠. ㅎㅎㅎ

비로그인 2016-10-25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항해시대에 관한 책들이 많군요.
관심이 갑니다.

cyrus 2016-10-25 18:40   좋아요 0 | URL
대항해 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의외로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
 
에로티즘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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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와 르네 마그리트. 그들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때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을 이끈 앙드레 브르통과의 불화가 원인이 되어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두 사람에게 가슴 아픈 가정사가 있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몸을 던져 자살했고, 바타유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기도했다.

 

 

 

 

 

 

바타유는 마그리트의 그림 「강간」을 볼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마그리트는 여자의 신체 부위와 얼굴을 절묘하게 조합했다. 여자의 가슴은 눈, 배꼽은 코, 입은 여성의 성기로 에로틱하게 변형되었다. 이 그림 제목은 상대 여성의 얼굴을 쳐다보면서도 섹스를 떠올리는 남성의 은밀한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욕은 식욕, 수면욕과 함께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이다. 섹스의 본질적인 목적은 종족 번식이다. 그러나 바타유는 섹스를 진화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에로틱한 욕망이 죽음에 이르는 황홀한 극치감이라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마그리트의 「강간」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그리트가 여자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몰라 당혹해 한다. 반면 바타유는 그림을 보는 재미에 지루할 틈이 없다. 그는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자신이 정의한 에로티시즘을 발견했기 때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든다. 우리는 성행위 후 다시 옷을 입으면서 에로티시즘의 수치심을 가린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성욕을 금기하는 관습적인 사고를 배신했고, 금기시돼온 일탈을 「강간」을 통해서 과감하게 드러냈다. 종교가 에로티시즘을 부도덕한 감정의 일탈로 규정해도 성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굳이 잘 알려진 사례를 언급하지도 않아도 우리는 에로티시즘이 금기를 위반하게 만드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안다.

 

성욕은 오해받거나 거절되고 혹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도 하다. 때로는 ‘추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때로는 동물에 가까운 수치스러운 본능으로 인식된다. 노동은 성적 일탈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노동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노동력을 팔아 생활을 유지한다. 노동의 생산성을 지향할수록 성욕은 잊혀진다. 섹스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허용돼야 한다는 통념이 형성된다. 여기에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적 금기까지 더해지면서 성을 은밀한 곳에 꼭꼭 숨겨놓고 억압해왔다. 현실적 제약과 결핍은 성욕을 반감시키기는커녕 배가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성욕을 섹스로 풀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치환한다. 카니발리즘(식인 풍습)은 매년 노동과 금기 속에 붙잡혀있던 인간들에게 허락되는 유일한 향락의 시간이다.

 

 

 

 

 

에로티시즘은 단순한 쾌락의 도구가 아니다. 인간의 생멸(生滅)을 확인하게 만드는 감정의 증거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생명은 오직 인간뿐이다. 성적 환희의 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인간은 죽음, 즉 ‘작은 공포’를 깨닫는다. 마그리트는 성욕과 죽음의 연결고리를 절망적으로 묘사했다. 천으로 얼굴을 뒤집어쓴 채 입을 맞추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성욕의 불안과 공포를 전달한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으로 하얀 속옷의 천이 얼굴을 가린 어머니의 주검을 접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마그리트에게 천은 ‘작은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인 대상이다. 수없이 두려워하던 긴 시간의 축적이 화가 기억의 심연에 있다. 이 기억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죽음까지 인정한 에로티시즘’(《에로티즘》 11쪽)이 있다. 우리는 날마다 아름답게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의미 있는 삶이 연속적으로 흘러갈 것만 같지만, 죽음이 언제 우릴 가로막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연속적인 존재’이다. 죽음의 공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성적 쾌락에 탐닉해봤자 소용없다. 섹스는 ‘가장 진하면서도 의미 없는 발작’(《에로티즘》 117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종교의 힘이 희미해진 지금, 현대인은 음란함과 폭력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류는 감금되고 폐기되어야 했던 성적 욕망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범죄로 규정한다. 오늘날의 에로티시즘은 ‘쾌락에 이르는 부정적 욕망’이다. 성범죄의 위험이 커질수록 에로티시즘의 본질은 왜곡되고 있다. 또다시 에로티시즘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하는 '건강하지 않은' 금기가 된다. 바타유는 여자를 물건처럼 대하는 남자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과 폭력성이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바타유가 추구했던 정상적인 에로티시즘로 회복하는 일이 아직은 요원하게 느껴진다.

 

 

 

 

책머리 8쪽에 바타유는 지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남겼다. 그가 언급한 지인 중에 자크 앙드레 부아사르라는 이름이 있다. 그런데 역자가 이름 표기를 잘못 적었다. 자크 앙드레 부아파르(Jacques-Andre Boiffard)’가 맞다. 부아파르는 브르통과 함께 초현실주의 그룹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으며 브르통의 소설 나자의 삽화를 그렸다. 하지만 부아파르도 브르통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그는 바타유와 함께 브르통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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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10-07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과 죽음을 포함해 사랑은 떼어낼 수 없는 존재죠.
욕망의 건강한 분출을 응원합니다.

cyrus 2016-10-07 14:54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랑보다 욕망 분출을 먼저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순간의 쾌락에 집착하면 건강뿐만 아니라 인생마저 파괴됩니다.
 

 

 

서양 속담에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라는 말이 있다. 행복했던 우리의 삶에도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으로 고통이 찾아올 때가 더러 있다. 키르케고르는 나는 고통스럽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고통은 결코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평균 수명은 45세였고 사람들은 살면서 자주 죽음을 의식해야 했다. 죽음은 그저 전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보일 뿐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지금의 우리는 죽음을 잊고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고 싶어 한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현대인이 죽음을 숨기고 회피하는 모습의 원인을 문명의 혜택에서 찾는다. 고대 사람들은 살아있음과 죽음을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의학기술과 건강 식단이 발달한 오늘날 죽음을 떠올리는 것들은 철저히 배제한다. ‘푸드 포르노먹방 열풍은 일단 먹고 즐기자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현대인들은 톱니바퀴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듯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정서적 안정감을 느낀다. 죽어가는 자는 쓸쓸한 중환자실로 격리된다. 그는 일상으로부터 멀어진 고독한 존재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눈을 감는 날까지 생명을 연장하는 데 주력해야 할까?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하버드 의대 교수 아툴 가완디는 노화와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삶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사들은 노화 과정을 삶의 일부로 보기보다는 고쳐야 할 질환으로 인식한다. 의사들은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것이 의사들의 의무이다. 하지만 환자의 병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죽음이 임박한 환자의 심정을 읽지 못한다. 아툴 가완디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의사 폴 칼라니티는 환자가 여생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단순한 수명연장보다 자신에게 부여된 수명을 항시 건강하게 유지하고 긍정적인 죽음에 도달하면 성공적인 노화로 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공적인 노화를 맞을 수 없다.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절대적 고독이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전혀 쉽지는 않다. 자신의 과거 인생이 후회스럽거나 인생을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죽음을 분노와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프로이트, 수잔 손탁 같은 유명 인사들도 죽음이 코앞에 둔 상황 속에 죽음을 타협할 것인지 말 것인지 스스로 결정했다. 프로이트는 구강암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진통제를 거부했다. 손탁은 유언장 작성을 거부함으로써 끝까지 죽음 앞에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들처럼 거역할 수 없는 죽음에 항거할 수 있다. 폴 칼라니티처럼 놀라운 참을성을 보이며 차분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만, 자기 인생에 미진한 부분이 남았거나 질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 종종 죽음을 부인한다. 살아있는 자들의 눈에는 죽어가는 자의 고군분투하는 저항이 집착으로 보이겠지만, 이러한 행위 역시 인간답게 사는 모습의 일부이다.

 

세상이 더 좋아질수록 우리는 죽음의 강박관념으로 점점 내몰게 될 것이다. 인간은 개별적 주체가 되어 고독에 쉽게 휩싸인다. 불안과 허무주의가 개인을 집단으로부터 단절시킨다. 개인의 죽음이 일상의 배후로 밀려나면서 고독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가벼운 대화 소재로 삼아서 쉽게 얘기하는 성향이 있다.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에 눈먼 상태다. 죽음에 대한 무심함은 타인의 죽음을 비하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다 갈 권리를 주는데 너무 인색하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을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단지 조금 늦게 죽는다는 이유 하나로 정말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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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05 2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산다고 사는 기계처럼 습관적으로 사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부단하게 삶도 비워야죠. 다만 할일이 있고 의무가 남아 있을때 가버리면 무책임한 거니까요.

요즘 자살이 너무 많아서요,,죽음이 도피가 되는 걸 보면 사는 것도 죽는것도 쉽지가 않죠.

cyrus 2016-10-06 13:10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죽음으로 도피하는 선택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롭게 합니다.

달걀부인 2016-10-06 0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죽음도 개인적 죽음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적 상황은 더욱 그렇죠. ..인간답게 살 권리도 주지않는데.. 인간답게 죽을 권리도 주지 않은 현실. 그래서 제목을 바꿔서 읽어봅니다. 시대의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로요.

cyrus 2016-10-06 13:16   좋아요 0 | URL
우리 사회가 타인의 죽음을 너무 가볍게 봅니다. 인간답게 죽지 못하면 온전히 죽은 자의 문제로 돌립니다.

안녕반짝 2016-10-14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툴가완디는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읽고 팬이되어서 책은 다 샀는데 요즘 신간중에서 바람이 숨결이 될때가 가장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cyrus 2016-10-17 11:22   좋아요 0 | URL
폴 칼라니티의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 해부학실에서의 경험담이었습니다. 끔찍하다기 보다는 숙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를 정의해 달라는 물음에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시가 곧 삶인 시인들에게 시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만큼이나 난처한 질문임이 틀림없다. 에드거 앨런 포에게 시는 고독의 노래다. 비참한 삶을 살았던 포는 <애너벨 리>, <갈까마귀> 같은 우수와 연민으로 가득한 시를 남겼다. 포의 시를 읽는 것은 고독 속에 깊이 잠겨 서늘한 속살을 더듬는 것이다. 포는 육체에 각인된 고독을 고스란히 시화함으로써 서늘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하지만 싱거워 보이지 않는 포의 시적 언어를 읽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특히 시에 묘사된 감각의 깊이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시의 운율을 고스란히 구현해내는 일이 번역의 관건이다.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see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nd my bride,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ide of the sea.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애너벨 리중에서, 정규웅 역, 애너벨 리14)

 

    

 

 

달빛 비치면, 어김없이 예쁜

애너벨 리 꿈을 꾸고

별이 뜨기 무섭게, 어김없이 예쁜

애너벨 리의 밝은 눈 느끼네.

그렇게, 밤새도록 나는 누워 있네

내 사랑내 사랑내 목숨 내 신부 곁에

그 바닷가 그녀의 묘에서

파도치는 바닷가 그녀 무덤에서.

 

(김천봉 역, 19세기 미국명시 5 : 에드거 앨런 포79)

 

 

 

 

달빛은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면 따라오고

별들이 뜨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가

내 눈으로 들어오는 걸 느껴요.

그래서 이 밤에 나는나의 사랑이며, 내가 사랑하는,

내 생명인 내 신부 곁에 누워 있어요.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옆에

바닷가 옆, 내 여인이 누워 있는 곳에.

 

(김경주 역,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 애너벨 리)

 

 

 

 

왜냐면 달이 비추면 반드시, 가져다준다 내게 꿈,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그것들을;

그리고 별들이 뜨면 반드시, 내가 느낀다 그 밝은 눈,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그것을:

그리고 그래서, 밤 밀물 내내, 내가 누워 있다 곁,

나의 사랑하는나의 사랑하는나의 생명이자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돌무덤의

소리 나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의.

 

(김정환 역, 에드거 앨런 포 시선집124)

    

    

 

김정환 시인은 꾸밈 있는 시 번역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다. 어려운 문장을 쉽게 고치는 것을 틀린 번역이라고 주장한다. [참고] 나는 김정환 시인의 입장을 반대한다. 운율을 갖춘 문장의 본뜻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라면 의역도 필요하다고 본다. 김정환 시인은 원문에 충실히 하려고 직역을 시도했지만,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게 나왔다. 경우에 따라 직역과 의역, 이 두 가지를 적절히 버무릴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참고]검은 고양이의 우울하고 깜깜한 시편들 (한국일보 20163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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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름다운 애너벨 리
    from You're Yeah! 2016-10-05 16:57 
    #. 0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see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
 
 
yureka01 2016-10-0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단순히 문장 번역은 가능하겠지만 시의 메타포나 운율 등 이런건 어떻게 이입이 될 수 있게 번역이 가능한지 참 궁금했어요..

cyrus 2016-10-05 16:08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영시를 번역한 사람들은 운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우리말로 옮긴 시를 읽으면 운율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번역가 입장에서도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겁니다. ^^;;

시이소오 2016-10-05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정말 원문으로 읽어야지. 번역자들마다 제 멋대로 번역이라
지금 읽고 있는 <필립 라킨>시 역자가 김정환 씨인데,
이분 연세가 지긋해서인지 시 번역이 제게는 너무 올드하게 느껴지네요.
더군다나 문장을 만들지 않아서 문장 순서들이 다 엉망진창입니다.

외국 시는 정말이지 각자가 해석해서 읽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시 번역 잘 하는 거 정말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


cyrus 2016-10-05 16:14   좋아요 0 | URL
외래어 표기명도 오래된 느낌이 나죠. ㅎㅎㅎ 국내 시집이 많이 안 팔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외국 시집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도 많이 저조할 겁니다. 정말 아쉬워요. 많이 알려지지 못하고, 너무 일찍 절판되기도 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6-10-05 1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를 번역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봅니다. 우리말로도 너와나의 감성이 다른데...
그래도 좋은 시가 멋진 감성으로 많이 번역되면 좋겠어요~
어차피 원문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테니까요~

cyrus 2016-10-05 16:1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관심 받지 못한 번역 일을 하는 분들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안쓰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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