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 & 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 미지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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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론자는 “시장은 자유이다”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우리 시대의 삶을 결정하고 있는 선언에 가까운 표현이다. 시장의 자유에 지배되는 사회를 시장경제 사회라고 부른다. 시장경제 사회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단계에 찾아온다. 경제적 측면에서, 발전된 자본주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명명되어 생산의 국제화와 초국적 금융자본의 전 지구적 지배로 특징지어진다. 이제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진, 세계화, IMF, WTO,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은 모두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말들이다.

 

우리 사회에 ‘시장경제’ 체제의 해석을 둘러싼 혼란이 깊어가고 있다. 재계는 될 수 있는 대로 정부의 간섭 없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진보 진영 경제학자 일각에서는 적극적인 분배정책 구사 등 보다 광범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논의가 논쟁을 벗어나 이념 싸움으로 비화해 사회분열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혼란은 궁극적으로 기업의 경영환경 악화로 연결돼 경제 회생을 더욱 더디게 할 수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것이 생산 효율성 증가와 같은 산출요소(output)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식 경제성장’을 앞세워 박정희 대통령을 한껏 추켜세우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대부분 사람은 권위주의적 산업화 모델을 그리워한다. 향수(鄕愁)의 근저에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주춧돌과 촉진제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재벌 위주의 성장정책은 값싼 임금 노동자의 희생과 착취에 기반을 뒀다. 그리고 경제성장의 환경이 박 대통령이 추진했던 산업화 시대와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정부와 기업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버리지 못한다.

 

현 정부의 경제관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트리클 다운(trickle-down, 낙수 효과)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트리클 다운이란 ‘물방울이 뚝뚝 흐른다’는 뜻이다. 열심히 혜택을 퍼 줘서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거기서 떡고물이 물방울처럼 뚝뚝 흘러 국민도 덩달아 잘살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 허접스러운 생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파산선고를 맞았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트리클 다운 정책은 실패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생산만이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이 되지 못한다. 재벌 세습이 관행화된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리 대기업이 성장해도 국민에게 떨어질 떡고물 따위 나오지 않았다. 자유경제원 소속 뉴라이트 학자들은 그저 대기업에 퍼주기만 하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한국 경제의 엄청난 재앙이다.

 

경제학사가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전통에 의한 생산과 분배 문제의 해결이 경제적 변화를 저지하는 ‘거대한 제동 장치’와 같다고 비유했다. 지금은 생산과 성장보다는 일자리의 중요성 등이 강조되는 경제정책 전환기인데 최근 정부의 경제동향을 보면 과거를 답습하고 있다. 위기를 겪고도 과거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답습해 온 것은 경제정책 인프라가 현재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지금 과거에 머물러있다 보니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생산성이 자꾸만 정체되고 있다.

 

하일브로너는 사회경제적 제도가 사회적 노력(경제 성장, 부의 확대 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배분되도록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란 한마디로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면서 시장가격을 통해 자원이 배분되게 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사회는 시장경제를 논할 때 ‘배분’(또는 분배)이라는 단어를 쏙 뺀다. 국민의 불만을 단순히 재분배하는 것으로는 해소하기 어려울 수 있다. 분배의 기회에 뒤처지는 집단이 없도록 평등한 기회 제공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부를 쌓지 못하게 하면서 특권을 얻으려는 불평등은 제한돼야 한다.

 

시장은 완벽하지 않다. 시장은 완전경쟁 상태가 아니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존재이다. 같은 시장경제라도 정부의 성격이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다른 것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쓴다 해서 시장경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성장과 분배는 원칙적으로 같이 가야 한다. 경제 수익을 대기업과 초국적 금융자본에만 편중된다면, 경제적 권력에 주어지는 보상에 불과하다. 고대 사회의 부는 경제적 활동의 보상에 따라서 분배되지 않았다. 오로지 권력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보상이었다. 우리나라 경제의 시곗바늘은 ‘경제’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았던 고대 사회로 거꾸로 향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보통 사람들이 만들거나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현재 겪는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것을 뛰어넘고 싶은 충동은 강할 수밖에 없다. 동서양의 경제사가 이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가야 할 현실의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변화의 고통을 이겨내고 내일의 희망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이성과 분별 그리고 인내심의 발휘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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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4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14 13:17   좋아요 0 | URL
분수효과, 정말 멋진 말입니다. 분수 주변에 아무 곳에 서있기만 해도 분수에 흘러나오는 물을 맞을 수 있으니까요. ^^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 빌려서 읽고 기록하면 입력된 책 데이터가 사라져요. 그리고 ‘읽고 싶은 책‘ 기록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면 다른 분들의 뉴스피드 기록이 복잡해져요. 그래서 ‘읽고 싶은 책‘, ‘읽은 책‘ 데이터는 삭제합니다.

2016-11-14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6-11-13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방울이 될 만한 낙수를
숫제 펌프로 퍼내 가진 자들의 넘치는 저수지에 보탠 구조네요.

특히나
올해 부쩍 늘어난 교통딱지떼는
경찰들을 보며 숨이 막혔어요.원인이 있었네요.
모자른 세수를 가장 큰 저항없는
방식으로 착취하고 있었구요.
그래도 순진한 국민들은 법을 어겼으니
하루일당이 날아가더라도
묵묵히 과태료를 내는 .
정말 서민들 등골 뽑는 정권입니다ㅎ

cyrus 2016-11-14 13:19   좋아요 0 | URL
고액세금 미납자, 순시리 일당처럼 자신들의 이권을 누리려고 나라 예산을 함부대로 써대는 사람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재산 싹다 몰수하는 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

:Dora 2016-11-13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내심이 절실합니다

cyrus 2016-11-14 13:21   좋아요 1 | URL
단기간 내에 정책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이건 아니니까, 없던 일로 하자‘식 반응을 유도하면, 새로운 정책 입안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오쌩 2016-11-14 0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인프라 투자와 복지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어려운 경제시기를 감내하려면 서민들이 자기 최소한 비용으로도 문화적 교육적 혜택을 누릴수 있어야 하니까요.

다만 낙수효과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막혀있다면 흘러가게 해야되겠죠. 그런데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경제구조가 있을까요.
서민부터 잘사는 경제가 있을까요.
어쩔수 없이 당면한 한국사회경제구조는 대기업위주로 편성되어있고 그아래 중소기업들이 뒤를 받치고 있습니다.
소비가 활성화되고 경제심리를 부양시키기 위해서는 어찌되었든 중산층 허리가 두꺼워져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현정부와 수구인사들의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온갖 특혜와 재벌 챙기기는 반대해야겠죠. 불공정거래와 기형적 구조를 타파하고 갑을관계 횡포를 바로 잡아야겠지만
트리클다운이 과연 유효하지 않다는것에는 회의적일수밖에 없네요.

cyrus 2016-11-14 13:32   좋아요 0 | URL
정부의 눈에는 국민보다 기업이 먼저 보입니다. 그래서 낙수효과를 여전히 고집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낙수효과의 경제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기업들의 불만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정부는 기업들의 요구에 부합된 낙수효과의 정책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러면 중산층이 처한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오쌩 2016-11-14 17:49   좋아요 1 | URL
물론입니다. 사이러스님 취지에는 100%동감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대기업처럼 많은 특혜를 누리는 경우는 드물죠.
다만 그들이 법과원칙에 구속되는 정책이라면 낙수효과도 나쁜게 아니라는...생각을 해봅니다.

2016-11-14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1-01-23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만화, 가능성을 사유하다
닉 수재니스 지음, 배충효 옮김, 송요한 감수 / 책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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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드라마보다 재미가 없다. 영화처럼 누구와 눈이 마주쳐 운명 같은 사랑을 나누는 일도 드물고 사는 일이 드라마처럼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뉴스에 등장하는 세상의 현실은 흥미롭고 복잡하고 극적이다. 뉴스가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사건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뉴스가 소설이라는 말은 아니다. 뉴스는 물론 사실의 전달이다. 하지만 단순히 있는 그대로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기자나 편집자에 의해 선택되어 가공되고 배열된다. 기자나 편집자의 시각과 선호도, 편집의 방향에 따라 뉴스의 성격이나 색깔이 달라진다. 자의적 또는 타의적으로 ‘선택되어 가공되는 것’은 프레임(Frame)으로 만들어진다. 어떤 문제를 대하는 관점, 세상을 관조하는 사고방식, 세상에 대한 비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프레임은 특정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유도하지만,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 노릇도 한다.

 

만화가 닉 수재니스는 철학적인 관점으로 ‘고정불변으로 굳게 닫힌 창문’을 열려고 시도한다. 이 마음의 창문이 열리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은 보통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르려는 관습의 힘, 즉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우리는 지도를 볼 때 관습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서 본다. 늘 그러한 것만 보인다. 아래에는 제주도가 있고, 위에는 백두산을 넘어 만주가 보인다. 하지만 지도를 남쪽이 위로 가게, 즉 거꾸로 보면 우리의 시선 위로 넓은 바다가 보인다. 프레임 창문이 활짝 열린 사고는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 사고가 아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사고 과정을 점검하지 않으면 열린 사고를 할 수 없다. 관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기준이 아니다. 관점은 말 그대로 사물을 보는 시선의 위치이다.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가에 따라 사물(또는 현상)의 또 다른 면이 보인다. 더 나아가 숨겨진 면도 볼 수 있다.

 

흔히 이 세상이 개인들의 특성이 너무나도 다른 개성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개성화가 강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좋고 나쁜 것에 대한 표현을 비롯한 자신의 의사 표현이 너무나도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요즘의 실태이다. 지금은 분명 다양성이 추구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구시대적인 발상을 쉽게 버릴 수 없다. 자신의 연령층이나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떨쳐버리기가 매우 어렵다. 이게 오랫동안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로 형성되면, 비판과 또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기회가 상실된다.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한다고 해놓고선 토론 댓글을 차단하는 정부의 수준을 보라. 고정관념을 좋아하는 기성세대의 권위주의는 소통과 대화를 방해하는 벽을 세우기에 급급하다. 경기 고양시의 한 고등학교는 시국선언을 한 학생들에게 징계를 언급했다. 지진이 났을 때도 부산의 고등학교는 학생들을 대피시키기는커녕 자습을 강행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일어난 상황들, 가슴 아프지만 잊어선 안 된 ‘그날’과 닮았다. 세월호에서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변화와 다양성을 두려워한다. 고정관념 밖으로 나가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이들과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논쟁을 손해 보는 전쟁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고정관념에 갇힌 걸 알면서도 더 넓은 갇힘을 향해 진군한다. 그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이다.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이 변화되지 않는 이상 현세대의 고정관념 또한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유지될 확률이 높다. 고정관념에 길들인 다음 세대는 단조로운 생각 밖에 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주사위를 바라볼 때 여러 가지 방향에서 숫자를 바라보듯, 새로운 눈, 참신한 생각, 깊이 있는 논쟁을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보면 열린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닉 수재니스는 논쟁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전쟁이 아니라 역동적인 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맞부딪히고, 때론 부둥켜안을 수 있는 생각의 춤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누구나 참여 가능한 토론 무대를 마련해줘도 직접 나서서 생각의 춤을 추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부끄럼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온라인 무대에서 마음껏 드러낸다. 그들이 표현하는 것이 생각인지 감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냥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들을 한가득 담아 상대방의 생각을 공격하느라 바쁘다. 이 사람들이 세상에 불만을 품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단조롭고 폐쇄적인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다. 타인과 똑같이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하면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면 ‘얕은 지식의 수준’에 머무른다. 프레임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상이 단조로워지고 짜증이 나는 것이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고 내일 또한 오늘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 것을 착각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 또한 오늘 같을 것이란 고정관념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결국,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세상에 대한 불만을 극단적인 분노와 언어폭력으로 표출한다. 고정관념과 권위주의는 이런 상황을 더욱 고착시켜 끝없는 추락의 길로 밀어낸다.

 

《언플래트닝 : 생각의 형태》는 지혜롭게 사는 데 필요한 좋은 프레임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창의적 사고를 형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도 아니다. 저자가 알려주는 생각의 도구들을 교육 목적으로 가르친다면, 미래의 세대들의 정신적 성장을 저해하는 ‘이중 프레임’이 겹겹이 형성하게 된다. 이 책에서 자주 강조되는 시각 및 관점의 전환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보다 먼저 생각을 왜곡하는 원천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것을 하지 못하면 언어는 가시성의 조작자가 되고 이미지는 그 독창성과 순수성을 잃게 된다. 꽉 막힌 세상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에 기죽지 말고 원 없이 실행해야 한다. 단조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숨 가쁘게 벌어지는 변화에 푹 젖어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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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omi 2016-11-12 0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굳이 말해서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할 필요가 있나(분란을 만든다는 뉘앙스)˝에요.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공격, 지적, 시비걸기 등으로 받아들이나 봐요. 그래서 자꾸 자기검열(?)하게 되죠. 말해도 될까, 내가 이상한가, 어조가 공격적인가, 말투가 사나운 건가, 태도가 불손(?)한가 등등. 그러다가 ‘말해서 뭐하나‘ 체념해요.
˝가만히 있으라˝는 게 말하지 말라는 거랑 같은 느낌 들어요. 이상하고 부당하고 잘못된 건데 아무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ㅎㅎㅎ

cyrus 2016-11-12 13:20   좋아요 1 | URL
제가 알라딘 서재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cobomi님처럼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요. 서재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소심하게 지켜보기만 했어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잘못된 상황을 모르는 척하는 제 모습이 답답해보였거든요. ^^;;

지금행복하자 2016-11-12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적으로 가만히 좀 있지 라는 툭 튀어나올때 마다 이게 내 몸에 내 입에도 붙어있구나 싶어요.. 세뇌는 무서워요~ 질기구요~

cyrus 2016-11-12 13:22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그래서 방어적으로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이 나와요.

yureka01 2016-11-12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의에 대해 가만히 있으면 능멸당하죠....역사가 그랬습니다..절대 가만있지 않았으니까요.

cyrus 2016-11-12 13:23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오늘도 집에만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
 

 

 

 

 

 

 

 

 

 

 

 

 

 

 

 

 

 

 

메두사를 잡은 영웅 페르세우스는 보기만 해도 돌이 되어버리는 괴물을 잡기 위해 거울을 사용했다.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비춰줌으로써 메두사의 공포를 잠재울 수 있었다. 자신도 놀랄 추악한 이면을 그제야 메두사가 본 것이다. 본래는 미녀였으나 신의 저주로 괴물이 돼버린 메두사, 그 스스로 바라본 공포는 자신마저도 돌로 만들어버렸다. 메두사의 공포를 거울이 비추듯, 이성을 저버린 폭력의 추악한 본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전부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문명은 자연의 상태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괴한 폭력을 만들어냈다. 여기에는 유형의 폭력보다 더 잔혹한 무형의 폭력도 포함된다. 문명이 온라인 공간으로 확대될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언제 누가 휘두르는지 알 수조차 없는 이 폭력은 갈수록 정교하고 악랄해져 간다. 인터넷의 대중화는 갖가지 무형의 폭력이 번식하는 좋은 환경이 되었다.

 

암살은 인간의 불확실성이 취약할 때 드러나는 유형 또는 무형의 폭력이다. 암살은 종종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길 정도로 엄청난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역사를 봐도 그렇다. 1914년 6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사건으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이 있다. 평범한 주부였던 코라손 아키노는 야당 지도자였던 남편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이 암살당하자 정계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20년 마르코스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는 등 비폭력 시위의 세계적인 선구자가 됐다. 길게 언급하지 않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사건도 한국의 운명을 바꿔버린 결정적인 사건이다.

 

 

 

 

 

세기의 암살자들 대부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사형제 폐지 국가이다. 인권이 인류의 삶을 보호하는 공통의 가치로 자리 잡았음에도 사형제를 추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범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으레 교도소에 구금하는 징역과 같은 자유형을 떠올린다. 자유형은 신체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다. 피해자뿐 아니라 국민도 범죄자가 징역을 살지 않으면 처벌이 적정하지 않은 것처럼 인식하기 일쑤다. 그러나 자유형이 주된 형벌이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오히려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신체형과 사형이 주된 형벌이었다. 사형은 유사 이래 가장 오래된 형벌이다. 최초 성문법인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원칙을 비롯해 25개 죄에 대해 사형으로 처벌토록 했다. 그만큼 사형은 인류 역사와 함께 한 형벌이었다.

 

 

 

 

 

 

 

 

인간의 잔혹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인간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인간의 잔혹성이 문명의 발달과 함께 줄어들 것이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형태의 폭력이나 잔혹성은 사라져가고 있어도 모양이 다른 폭거는 여전히 인간사회에 감춰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잔혹성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지 알고 싶으면 내가 직접 특별한 이름을 붙여준 ‘죽이는 책’들을 보면 된다.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말았는데, 책에 대한 내용의 50%가 서론에 소개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1. 콜린 윌슨
《잔혹》 (구판)
《인류의 범죄사 : 인류의 시작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범죄의 역사》 (개정판)
《현대살인백과》

 

 

 

 

 

 


《아웃사이더》로 영국 문단에 충격을 준 콜린 윌슨은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면서 살인, 불가사의 등 특이한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잔혹》(작년에 나온 개정판 제목은 《인류의 범죄사 : 인류의 시작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범죄의 역사》)과 《현대살인백과》는 《아웃사이더》의 엄청난 명성이 뿜어낸 빛에 가려졌지만, 평소에 접하기 힘든 어두운(?) 지식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흥미를 선사해줄 수 있는 저작물이다. 윌슨은 살인 또는 암살 사건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면서 인간의 잔혹성을 분석하여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한다. 그는 살인이 자기 통제와 자기 파괴의 메커니즘을 통해 발생한다고 봤다. 자기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살인 또는 암살이다. 연쇄살인범과 암살자는 이러한 자기 파괴를 통해 과시욕을 느낀다. 1980년 존 레논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은 암살 직후 “모든 사람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레논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유명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삶 그리고 천재 뮤지션의 삶까지 파괴하려는 그의 끔찍한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존 레논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세상에 널리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2. 칼 시퍼키스 《암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자에 대한 소개가 빈약하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저자가 UIP 통신의 사회부 기자로 한때 몸담았고, 프리랜서 작가로 전향했다고만 소개했다. 이 책의 주제와 내용 구성면만 봐서는 콜린 윌슨의 책과 유사하다. 칼 시퍼키스의 《암살》 역시 콜린 윌슨의 《잔혹》을 펴낸 하서출판사의 책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하트마 간디, 에이브러햄 링컨, 장 폴 마라, 명성황후, 박정희, 육영수, 제임스 1세 암살을 기도한 가이 포크스, 케네디 형제 등 굵직한 인류사의 중심을 관통한 암살 사건들이 백과사전식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역사 교과서에서도 보기 어려운 암살 사건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암살자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기 직전인 미국 뉴욕 시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사진도 실려 있다. 이 사진의 진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미국인들도 이 사건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남미,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까지 소개되었기 때문에 사건항목별 내용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A4용지 1장 절반 분량이다. 어차피 이 책은 절판되었고, 암살의 역사를 정리한 책들이 많이 나왔으니 사서 보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3. 카를 브루노 레더
《세계 사형 백과》 (구판)

《사형 : 사형의 기원과 역사, 그 희생자들》 (개정판)

 

나와 유미오 《일본 고문형벌사》

 

 

 

 

 

이 책도 하서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래서 1990년에 나온 구판의 제목이 《세계 사형 백과》였다. 아마도 이때 출간된 콜린 윌슨의 《현대살인백과》과 짝을 맞추려고 의도적으로 이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인간의 생명가치를 신성시하는 사상은 필연적으로 사형 폐지 쪽으로 이어진다.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아무리 흉악한 살인자라도 사형은 그보다 더 잔혹하고 비인도적이며 인간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오판, 인종적 사회적 차별과 편견이 개재될 위험도 높다. 하지만 사형제 유지 찬성론자들의 주장 또한 완고하다. 강간, ‘묻지마 살인’ 같은 흉악 범죄에 대한 사형은 사회 안정에 기여함은 물론 살인자는 생명으로 죗값을 치러야 세상의 이치와도 맞는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범죄를 억제한다’는 통념에 비추어볼 때 사형 폐지는 범죄 피해자들에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줄 수 있다. 독일의 방송 극작가인 저자는 《사형 : 사형의 기원과 역사, 그 희생자들》을 통해 사형의 부당성을 부각해 사형제가 권력에 의한 살인행위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일본 고문형벌사》는 다양한 일본의 전통 고문 방식을 집대성한 책이다. 주로 에도 시대의 고문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에도 시대 때 그려진 고문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실려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게 느껴지는 그림들이 있으나 흑백 도판인 데다가 크기가 크지 않다. 고어 영화의 잔혹한 장면에 익숙할 정도로 비위 강한 독자는 시기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고문 장면을 묘사한 그림 대부분은 여성들이 가혹하게 당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벌거벗은 상태의 여성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도 있다.

 

 

우리는 폭력을 증오한다. 누구도 폭력 앞에서 겪은 공포와 수치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폭력을 가한 상대를 오랫동안 기억하며 증오하고 저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열광하는 전근대적인 모습을 재현한다. 우리는 폭력을 증오하는 동시에 동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단두대 주변에 모여 사형수의 목이 뎅강 잘려나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과거 사람들과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른가. 폭력이 한갓 호기심 어린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살아 있는 자의 존엄성에도 상처를 내는 것으로 어떤 명분이든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여전히 들끓는 폭력에 대한 증오와 의존의 이중적 감정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애초부터 악마는 없다. 거울에 비추어 보면 누구라도 추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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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1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아,,, 잔혹 이거 진짜 끝내주는 책인데....

cyrus 2016-11-11 18:18   좋아요 0 | URL
콜린 윌슨의 책을 좋아해서 절판본을 구하는 중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6-11-1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보다보니 평소 잘 몰랐던 단두대가 떠오르네요ㅎㅎ
프랑스혁명에 관해 잘 쓰여진 책 한권 추천부탁드립니다. 나폴레옹과 마리앙투아네트까지 잘 곁들여진 재미난
바이블이 없을까요?

cyrus 2016-11-11 18:21   좋아요 1 | URL
어려운 질문이군요. 프랑스 혁명 관련 책 중에 읽은 게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입니다.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의 등장까지의 역사를 소개한 책입니다. ^^

블랑코 2016-11-12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가는 책들이 많은데 전자책으로는 절대 안 나오겠죠? ㅠㅠ

cyrus 2016-11-12 17:23   좋아요 0 | URL
살인, 범죄 주제의 책은 많이 팔리지 않아서 일찍 품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대살인백과》는 한동안 품절되었다가 다시 판매되기 시작한 책입니다. ^^;;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은 여성만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 형식의 문헌이다. 《데카메론》의 작가 보카치오가 썼다. 보카치오의 여성관은 아직 중세의 때를 벗지 못했지만, 이전보다 근대적인 관점을 지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여성논쟁’을 주도한 크리스틴 드 피장은 이 책을 원본으로 삼아 《여성들의 도시》를 집필했다.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효녀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이 책을 참고해서 만들어진 《여성들의 도시》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여성들의 도시》 211~212쪽 참조)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이 있었다. 이 젊은 여성의 어머니는 부모로부터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았지만, 팔자가 사나웠다. 하여튼 알려지지 않은 어떤 죄목으로 그녀는 집정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행정관은 그녀를 세 집정관 중 한 사람에게 이미 내려진 판결대로 형을 집행하도록 넘겼다. 집정관은 그럴 목적으로 간수에게 그녀를 넘겼다. 그녀는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밤에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간수는 인정에 이끌려서인지 아니면 귀족 여성에 대한 동정심에서였는지 모르지만, 그녀를 즉시 죽이기보다는 굶어서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딸이 면회 왔을 때 간수는 혹시 음식을 들여가지 않나 샅샅이 몸을 조사한 뒤 감방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에 출산했기 때문에 굶주린 어머니에게 줄 수 있는 젖이 충분했다. 이 일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 간수는 형을 언도받은 여성이 그처럼 오랫동안 굶어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래서 몰래 이 모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지켜보았다. 그는 딸이 가슴을 드러내고 자기 어머니에게 젖꼭지를 물리는 모습을 보았다. 간수는 딸의 효심과 딸이 어머니에게 젖을 먹이는 희한한 광경에 놀라서는 집정관에게 이 사실을 곧바로 보고했다. 집정관은 행정관에게 보고했고, 그는 시의회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 결과 딸의 효심을 높이 사 어머니의 처벌을 무효로 하자는 데 전부 동의하게 되었다.

 

(조반니 보카치오,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 310~311쪽)

 

 

 

이 이야기를 읽으며 루벤스의 그림 「시몬과 페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손발이 묶인 늙은 죄수가 젊은 여성의 가슴을 빨고 있고, 철창 바깥에선 간수들이 희한한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처음 보면 춘화로 오해를 하게 되는 그림이다.

 

 

 

 

 

 

 

 

 

 

남자가 시몬이고, 여자는 그의 딸 페로이다. 시몬은 처형되는 날까지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딸이 몰래 감방에 들어와 아버지에게 젖을 먹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그녀의 숭고한 사랑에 감동해 시몬을 석방했다고 한다. 시몬과 페로 이야기는 고대 로마 시대 때부터 전해져왔다. 자식이 부모를 젖으로 공양한 이 사례를 그린 그림은 이후 카리타스 로마나(Caritas Romana), ‘로마인의 자비’라고 불렸다. 여러 화가가 이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시몬과 페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화가는 루벤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은 루벤스가 묘사한 부녀의 행각을 퇴폐적인 성행위로 해석했다. 루벤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은 루벤스가 이 그림에 성적 욕망을 투영했다고 봤다. 실제로 그림 속 노인과 여인의 모습은 루벤스와 루벤스의 아내와 비슷했다.

 

 

 

 

 

 

 

 

53세의 루벤스는 첫 부인과 사별한 뒤 4년을 홀로 지내다 자신보다 16세의 아내 엘렌 푸르망과 재혼했다. 루벤스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였다. 그는 벨기에 외교관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사 작위까지 받은 엘리트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의 새 아내와 다섯 명의 자녀를 둘 만큼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루벤스의 가정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시몬과 페로」를 불편하게 여겼다. 루벤스는 「시몬과 페로」 그림에 딸의 헌신적인 사랑, 거기에 아내를 향한 숭고한 사랑의 감정까지 더해져 여성의 아름다움을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천상의 것으로 끌어올리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벤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몬과 페로」는 ‘음란한 그림’으로 오해받았다. 당대에 문제작 혹은 저속한 예술로 평가를 받았던 그림이 현대에 와서 극찬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다. 「시몬과 페로」처럼 한 작품에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루벤스의 그림이 오해받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의 영향이다. 여성의 가슴이 성욕을 불러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누드화에 대해선 사회적으로 찬반이 있었다. 인간의 고상하고 세련된 취미 속에 에로티시즘의 욕망은 숨어 있고, 그것이 곧 대중의 취향임을 옹호하는 측과 엉터리 미술이니 하는 혹평이 바로 그것이다. 남성 화가들은 비현실적이고 비인격화한 알몸에 신화나 성경의 옷을 걸쳐 여체를 탐하는 남성의 욕망을 미화했다. 그래서 누드는 교화의 의미가 담긴 종교화에서조차 교묘히 구사됐다. 남성 화가들은 그림 자체에 성적 뉘앙스를 풍겨야 좋은 반응을 얻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 남성 화가들이 그린 여성의 누드를 보면 필요 이상 풍만하게 강조된 몸을 느낄 수 있다. 여성의 몸은 전적으로 남성 화가의 눈을 통해 걸러진 채 강조와 생략을 통해 재탄생된다. 일부는 젖가슴이나 엉덩이를 극단으로 강조해 관능미를 부각하기도 한다.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참다운 여성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루벤스가 묘사한 페로 역시 남성의 시선에 잡힌 여성상에 가깝다.

 

 

 

 

 

 

 

 

 

 

 

 

 

 

 

 

 

 

독일의 문화사 연구가인 한스 페터 뒤르는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어머니의 가슴 또한 남성들의 에로틱한 시선에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루벤스가 보카치오나 크리스틴 드 피장이 소개한 효녀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어도 남성 관객들의 눈에는 야릇한 이미지만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루벤스의 그림에서 숭고한 효심을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성적 뉘앙스를 찾을 것인지 결국 보는 이들의 몫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술 혹은 외설에 대한 논쟁에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치기보다 정답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태도이다. 이 논란은 끝이 없을 것이고, 정답도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림을 보기 전에 확실히 알아야 할 점이 있다. 남성 화가들의 단골 소재는 단연 여성, 그중에서도 벌거벗은 여성이다. 우리는 남성의 그림에 의존해 여성을 읽고 이해하고 있다. 결국, 완벽한 여성의 아름다움은 허상이며 환상이다.

 

 

 

그림 이미지는 위키아트(wikiart)’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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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1-10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저께 서양미술사 바로크편 동영상 강의를 들었는데 마침 루벤스를 소개해줘서 반가움에 댓글 남겨요ㅎㅎ
로마인의 자비 .. 가슴 아픈 그림입니다ㅠ.ㅠ

cyrus 2016-11-10 21:24   좋아요 2 | URL
여자가 남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정절녀‘, ‘효녀‘가 돼서 이름을 알리는 것입니다. 유교 사회의 조선 시대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yureka01 2016-11-1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싫어 하는 스타일의 남자...마누라 하나 건사 못시키고 술처먹고 쥐 패는 찌질남....경멸하는데..심심찮게 봤으니..아흐...

cyrus 2016-11-10 21:28   좋아요 0 | URL
특이하게 그런 남자를 옹호해주는 친구도 있습니다. ‘안녕하세요‘에 출연하는 문제 많은 남자들 주변에 그런 친구가 있더군요. 남들은 그 사람의 문제점을 압니다. 그가 함께 사는 가족들도요. 그런데 의리 때문인지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

종이달 2022-05-09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국가는 거대한 허구다 국가란 무엇인가 3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1801~1850)는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를 강조한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다. 그는 『법』이라는 팸플릿에서 ‘법의 정의’라는 전제하에 권리와 자유와 안정과 책임의 원칙이 지켜질 때만이 인류는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좋은 경제학자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효과를 동시에 고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정책입안자들은 보이는 것만 본다. 엄청나게 돈을 뿌린다. 개인 또는 국가의 번영은 단기이익과 장기이익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추를 잡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정책입안자들은 단기이익에 몰두하고 있다.

 

정부의 기본 목적은 개인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회를 비롯한 입법기관들은 그 반대의 일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입법기관들은 세금을 부과하여 시민들의 재산을 가져간다. 생산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시민 집단으로부터 세금을 걷어다 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애호하는 시민 집단에 나누어 준다. 의원들은 또한 끊임없이 규제 법안을 만들어낸다. 그런 규제가 시민의 자유를 점점 위축시킨다. 바스티아는 『법』에서 법의 통치가 역전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160여 년 전에 발표된 『법』의 첫 문장을 빌리자면, 오늘날의 법은 ‘타락’했다. 정의와 자유를 실현해야 할 법이 ‘합법적인 약탈’을 조장하는 데 이용되었다. 법은 강탈을 권리로 변모시켰고, 합법적인 방어를 범죄로 변모시켰다. 바스티아는 법이 타락한 원인 중 하나를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보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에 기초한 자유경쟁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늘린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타인의 희생을 발판삼아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누리고 싶어 한다. 도덕보다 부를 우선으로 치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곤 했던 스미스는 이기심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스미스가 구상한 시장은 이러한 인간들의 올바른 덕성과 이익, 부가 조화롭게 구성된 곳이다. 이러한 시장 질서를 유지하려면 정의와 자유를 보호하는 법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야 하는 시장과 법은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 어리석은 이기심에 눈먼 자들은 기득권을 강화해 탐욕의 먹이사슬 구조를 형성하고, 국가는 이를 내버려 둔 채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

 

바스티아는 사회주의자들이 법을 타락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로 규정했지만, 오늘날 그의 논리는 가짜 자유주의자들을 가려내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가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라는 이름을 오용하고 다닌다. 전경련은 박근혜와 최순실을 연결하는 정경유착의 고리로 전락했고, 정경유착의 고리에 얽힌 대기업들은 침묵하는 중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경련이 설립한 자유경제원 역시 모르쇠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경련이 최순실을 위해서 자행한 ‘합법적인 약탈’을 비판하지 못하는 자유경제원 내부에 정말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그 정체성이 의심스럽다.

 

자유경제원은 편향된 역사 교과서를 뿌리 뽑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노골적으로 정치 현안에 간섭했다. 국정교과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바스티아의 또 다른 글 『정의와 박애』를 읽어보도록 권해 드리고 싶다. 바스티아는 통일성을 강제하는 법은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박애를 핑계로 국가가 간섭해 통일성을 세우려고 한다면, 이 국가의 간섭은 억압 즉 불의가 될 것이다. (『정의와 박애』 54쪽)

 

바스티아는 사회주의자들의 잘못된 박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모든 인류가 서로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집단적 이타심이 강박적으로 작용하면 개인의 자유가 규제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결과가 일어난다. 자유경제원은 기업을 옹호하기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외면하는 모습은 잘못된 박애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기업경제원의 박애주의는 아주 특별하다. ‘박정희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박정희 사랑’을 두 글자로 줄여보시라. ‘박애(朴愛)’다.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박정희를 사랑하게 하려면 박정희가 주인공인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 자유경제원은 강제적으로 역사를 하나로 통일된 국정교과서를 고집한다. 국정교과서 반대하는 입장을 ‘종북 좌파’의 선동으로 매도한다. 자유경제원은 ‘박통령 사랑’에 자극받아 법으로 역사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박애 감정에 자극받아 법이 교육을 이끌어가거나 교육을 강요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법이 오류만 이끌어가거나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묻는다. 오류를 강요하기 위해서, 아니 적어도 오류를 강요할 위험이 있는데도 힘에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박애인가? 사람들은 다양성을 두려워한다. 다양성을 무정부 상태라는 이름으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토론, 연구, 실험을 통해 신장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무슨 자격으로 한 제도를 법으로 또는 강제로 다른 제도들보다 우선시하는가? (『정의와 박애』 55~56쪽)

 

자율성 및 다양성을 입각한 역사교과서 발행을 막으려는 정부와 자유경제원은 자유의 기초를 외면하고 있다. 감히 누가 누굴 보고 ‘종북 좌파’라고 말하는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들이야말로 바스티아가 지적한 ‘어리석은 이기심에 좌파’에 가깝다. 역사교과서의 통일성을 세우려고 교육에 간섭하는 정부의 행보를 옹호한 자유경제원은 바스티아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왜 인간은 부를 창출하는가. 같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부의 창출 그 자체에 모든 것이 집중되고 있다. 사회를 존속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원리가 점점 잊히고, 아니 오히려 그 원칙에 거꾸로 가고 있다. 바스티아의 글은 우리가 잊고 있는 그 근본원리를 일깨워줌으로써, 경제학과 경제가 그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심각하게 고민해볼 수 있게 한다. 다만, 160여 년 전에 나온 그의 생각들이 오늘의 현실에 적용되는 건 아니다. 현실 감각이 무디지 않은 자유무역 옹호론자들도 자유무역이 평화 유지에 기여한다고 믿는 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표출해왔다. 바스티아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보면서도 대중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국가의 정책을 찬성했다. 하이에크와 그들을 추종하는 자유경제원이 애덤 스미스보다 덜 알려진 바스티아를 찬양한 이유가 있다. 바스티아가 한반도 안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신자유주의자들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한국에는 진짜 자유주의자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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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당선되었더군요..ㄷㄷㄷㄷ그의 막말에 깔린 심리가 어떨지,,,,,

cyrus 2016-11-09 18:20   좋아요 1 | URL
당선 소감을 봤는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포용하고, 다른 나라와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어요. 당선 소감만 듣고, 트럼프를 지지하긴 그렇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