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사

(The Handler)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번역 : 정태원)

 

 

 

 

레이 브래드버리에 관해서는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는 인기 작가다. 그의 아름다운 환상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이 작품은 조금 잔혹하다. 본 작품이 <위어드 테일즈>(47년 1월호)에 씌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괴기스러운 면도 브래드버리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1]

 

 

 

 

 

 

 

 

 

베네딕트는 아담한 자택을 나왔다. 현관에 선 베네딕트의 눈에는 햇살이 따갑도록 부셨으나 가슴에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 어려 있었다. 영리한 눈을 한 작은 개가 지나갔다. 영리하다는 증거로 베네딕트는 그 개의 시선을 잡을 수가 없었다. 교회 옆의 묘지를 둘러싼 철문 사이로 아이 한 명이 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찌르는 듯한 호기심에 찬 눈을 보고 베네딕트는 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아저씨는 장의사야?”

 

아이가 물었다. 베네딕트는 자신의 껍질 속으로 몸을 움츠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교회는 아저씨 거야?”

 

아이가 또 물었다.

 

“그래.”

 

베네딕트가 대답했다.

 

“이 장례식 하는 가게도?”

 

“그래.”

 

베네딕트는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이 묘지도, 묘석도 모두 아저씨 거야?”

 

아이가 물었다.

 

“그래.”

 

베네딕트는 약간 쑥스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업적인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베네딕트는 오랫동안 밤낮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했다.

 

베네딕트는 사업의 첫 출발점으로 침례파 사람들[2]이 남기고 떠난 교회와 푸르게 이끼가 낀 묘가 몇 구 서 있는 부속묘지를 사들였다. 2단계로 착수한 것은 산뜻한 시체 임시 안치장(물론 고딕풍 건축의)에 자신을 위한 거처를 준비했다. 이것으로 베네딕트는 자신은 언제 죽어도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이들 건물을 차례차례 출입하면서 최소한의 혼란과 최대한의 조직적 축복을 받으며 묻힐 수 있었다. 베네딕트가 조간에 내는 커다란 신문 광고는 ‘화장은 사절!’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교회를 나와 땅 속에 매장되기까지는 휘파람을 불 수 있을 정도로 손쉽게 행해지는 것이다. 보존 장치도 더없이 쾌적한 것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베네딕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바람에 꺼진 양초처럼 참을 수 없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베네딕트는 깊은 열등의식이 있었다. 그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변명할 여지가 없는 우울한 기분에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뜻을 받아들이려고만 했으며 서로 논쟁을 하거나 큰소리를 지르거나 상대의 말을 부정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상대와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베네딕트는 그 콧구멍이나 귀나 머리의 가르마 따위를 수줍음을 담은 눈으로 쳐다볼 뿐 결코 정면으로 상대의 눈을 쳐다보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상대의 손을 마치 그것이 귀중한 선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차가운 양손으로 감싸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던 당신이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상대는 베네딕트가 자신의 말 따위는 한 마디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베네딕트는 현관의 계단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 미움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정말로 착한 아이구나.”

 

베네딕트는 돌계단을 내려가 문을 나섰지만 자그마하고 아담한 시체 안치소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즐거움은 나중에 만끽할 것이다. 모든 사물은 순서가 중요하다. 임시 안치장에서 베네딕트를 기다리고 있는 시체 위에 천부적 재능을 떨칠 기쁨을 지금 떠올린다는 것은 오히려 손해였다. 정말로 그렇다, 우선 정해진 순서대로 시작하는 게 좋다. 먼저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켜야만 한다.

 

어디로 가야 분노할 거리를 건질 수 있을지 베네딕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반나절 걸려서 이 작은 마을의 여기저기를 방문하며 돌아다니고는 살아 있는 이웃 사람들의 우월감에 압도당해 자기 자신을 열등감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리고는 진땀투성이로 만들어 심장도 뇌도 두려움에 떠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을 일상의 일과로 삼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우선 약방 주인인 로저스 씨를 상대로 무의미한 아침인사를 질질 끌며 나누었다. 그러면서 로저스가 내뱉은 모멸한 표현의 억양 하나하나까지를 모두 가슴에 담아 두었다. 로저스는 장례 사업을 하는 베네딕트에게 언제나 자극하는 듯한 말을 퍼부었다.

 

“하하하.”

 

베네딕트는 지금 자신에게 퍼부어진 농담에 웃어 보이지만 그 마음속은 왈칵 울어버리고 싶은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것 봐. 당신은 냉혈동물이야.”

 

오늘 아침의 로저스는 더욱 더 신랄했다.

 

“냉혈동물이라고요, 하하.”

 

베네딕트는 웃어 보였다. 약방을 나온 베네딕트는 스테이브선트를 우연히 만났다. 스테이브선트는 베네딕트와 잡담을 하고 있는 동안에 누군가와의 약속을 꾸며내려고 적당한 시기를 엿보면서 큰소리를 질렀다.

 

“베네딕트, 경기는 어때? 열심히 장사에 힘쓰고 있겠지?”

 

“예, 그저.”

 

베네딕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 일은 잘 돼가고 있습니까, 스테이브선트 씨?”

 

“아니, 당신 손이 아주 차잖아? 오한이 드는 모양이군? 불감증이 있는 여자에게 방부제라도 채우기 시작한 거 아닌가? 나쁜 일은 아니군. 이봐, 내가 하는 말 들리나?”

 

스테이브선트는 이렇게 말하며 상대의 등을 두드렸다.

 

“예, 들리고말고요! 그럼, 이만.”

 

베네딕트는 엷은 미소를 뗬다. 다음 사람들과도 그런 인사가 계속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베네딕트는 온갖 쓰레기가 내버려지는 호수 같았다. 사람들은 맨 처음에는 자갈을 던지지만 베네딕트는 반항의 잔물결조차 일으키지 않는다는 걸 알면 작은 돌에서 벽돌, 둥근 돌 같은 점차 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베네딕트에게는 바닥이 없고 물보라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찌꺼기도 남기지 않았다. 호수에는 반응이 없었다.

 

해가 짐에 따라 베네딕트는 더욱 더 자포자기가 되고 사람들에 대한 노여움을 더해, 건물들을 찾아다니며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속으로는 학대받는 즐거움을 가지고 그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욱 커질 밤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래서 베네딕트는 그러한 어리석고 건방지고 무례한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깊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머리를 조아리고, 위에 집어넣기 전의 비스킷처럼 그 양손을 꽉 쥐고는 그저 냉소당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거 이거, 사람 장사[3] 아니오?”

 

식료품점 주인 프린저가 말했다.

 

“어떻소, 댁의 콘비프나 뇌 절임의 맛은?”

 

여기에 이르러 베네딕트의 열등의식은 극도에 달했다. 귀가 따가울 정도의 모욕과 무시무시한 자기 학대의 절정에 이른 베네딕트는 미친 듯이 손목시계를 보고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고는 홱 발길을 돌려 쏜살같이 거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절정에 선 베네딕트의 심경은 완전히 준비가 갖추어져서 마침내 이뤄야 할 일, 자기 자신의 즐거움에 몰두하기 위한 완전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하루 중 두려운 시간은 끝나고 즐거운 부분이 시작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베네딕트는 부리나케 계단을 올라가 시체 안치소로 뛰어 들어갔다.

 

 

 

 

 

눈이 내린 경치처럼 새하얀 색으로 칠해진 방이 베네딕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하얀 작은 언덕이 늘어서 있고 시트 밑에 누워 있는 것의 윤곽이 희끄무레하게 드러나 있었다. 문을 있는 힘껏 밀쳤다. 베네딕트는 빛의 홍수에 싸인 채 입구에 서서 한쪽 손으로 부자연스럽게 손잡이를 잡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다른 한 손은 높이 들고 연극조의 인사를 했다.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돌아온 것이다. 베네딕트는 오랫동안 무대 중앙에 우뚝 선 채로 있었다. 베네딕트의 머릿속에서는 아마 빗발치는 갈채가 울려 퍼지고 있었을 것이다. 베네딕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다시 머리를 깊이 숙임으로써 너무나도 친절한 관객들에게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베네딕트는 상의를 벗어 걸고 하얀 새 작업복을 걸치고 재빠른 직업적 손놀림으로 소매 단추를 채우고 손을 씻으면서 천천히 주위의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수확이 많은 일주일이었다. 시트 밑에는 기호에 따라 서로 다른 각양각색의 시체가 모여서 자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그들 앞에 서자, 자신의 몸이 점차 커지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도록 치솟아가는 것을 느꼈다. 베네딕트는 스스로도 몹시 놀라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아니지만 점점 더 높이 치솟으면서 호기심도 더해진다!’[4]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양손을 높이 뻗었다.

 

베네딕트는 그때까지도 이 방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그 경이감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기쁨과 동시에 망설임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베네딕트의 꼭두각시에 불과해서 하고 싶은 행위를 그들에게 할 수가 있었고 게다가 상대는, 당연한 일이지만, 베네딕트의 행위에 은근한 협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베네딕트는 옛날처럼 자유롭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쑥쑥 자라나는 것이었다.

 

“오오, 위로 위로, 높이 높이 자란다. 이제 곧 머리가 천장에 부딪칠 것 같아.”

 

 

 

 

- 2부에 계속 -

 

 

 

 

 

 

 

 

* cyrus의 주석

 

 

 

 

[1] 원작 출전은 1947년에 발표된 단편집 <Dark Carnival>, 번역문 출전은 《나의 꿈꾸는 여자 : 환상 미스터리 걸작선》(동숭동, 1993). 이 책은 정태원 씨가 번역했고, 총 12편의 환상소설을 모아 놓은 앤솔로지다. 알라딘에 이 책을 검색하면 출판사명이 '민족사'(주로 불교 서적을 펴내는 출판사가 왜?)로 나온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뿐만 아니라 어거스트 덜레스(August Derleth), 로버트 블록(Robert Bloch), 패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 리처드 매드슨(Richard Matheson)의 소설 등이 수록되어 있다. 환상소설 앤솔로지의 제목은 리처드 매드슨의 작품명이다. 이 책은 이듬해에 《식인 달팽이》라는 괴랄한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는데, ‘식인 달팽이’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명이다.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소개한 짤막한 글은 정태원 씨가 썼다.

 

 

 

※ 어거스트 덜레스와 로버트 블록을 소개한 필자의 잡문

 

* 《공포특급 5》 리뷰

(2016년 4월 25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8452837)

 

* [누가 러브크래프트를 죽였는가?]

(2017년 5월 29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9366364)

 

 

 

 

[2] 침례파

자각적인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를 시행하는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신약성서의 내용에 따라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 때문에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 네이버 백과사전 ‘침례교’ 항목)

 

 

[3] 이 문장에서 나오는 ‘장사’는 ‘물건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가 아니다.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일(葬事)을 뜻한다.

 

 

[4] 베네딕트는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소녀가 몸집이 거대해지는 장면을 자신의 모습에 빗대어 표현한다.

 

 

 

 

 

 

 

 

 

 

 

 

앨리스가 거인이 되는 장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잡문 [거인 앨리스를 사랑한 난쟁이](2017년 8월 29일 작성)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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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 모두 함경도에서 피난 내려온 실향민이라 우리에겐 친척도 하나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그때는 분유도 귀해서 일제 모리나가 분유를 사야 했는데 우리에겐 그럴 여유조차 없었지요…‥.” (공지영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97)

 

 

 

GS25 편의점에 가면 모리나가 밀크캐러멜 맛 아이스크림을 구할 수 있다. 와플 형태의 아이스크림인데 그 안에 캐러멜 시럽이 들어있다. GS25는 이 제품을 대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스크림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회사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리나가는 일본의 업체이다. (GS25일본에 생산되는 아이스크림을 대만 인기 아이스크림으로 둔갑해서 판매하는 이유가 있다. 이유는 곧 알게 될 것이다)

     

1910모리나가 상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고, 1912년에 모리나가 제과 주식회사로 변경되었다. 모리나가가 생산하는 대표적인 제품이 모리나가 밀크캐러멜이다. 모리나가 밀크캐러멜은 1979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였고, 모리나가와 오리온의 기술 제휴로 오리온 밀크캐러멜이 출시되었다. 모리나가와의 기술 제휴로 나온 또 다른 오리온 제품이 초코파이고래밥이다.

     

1949년 모리나가 제과 회사에서 독립한 모리나가 유업은 우유, 분유 등 유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다. 공지영 소설에 언급된 일제 모리나가 분유가 바로 모리나가 유업에서 제조된 제품이다. 1950년대에 모리나가 분유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거로 추정한다. 매일유업1974년 모리나가 유업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맘마분유를 내놓으면서 조제분유 시장에 뛰어들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생각정원, 2017)

    

 

 

모리나가 제과와 모리나가 유업. 이 두 회사가 국내 제과 및 분유 산업 성장에 큰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모리나가 제과가 걸어온 길에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와 관련된 불편한 진실이 있다. 모리나가 제과는 전범 기업이다. 모리나가 제과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일본군에게 전투식량을 대량으로 제공한 전력이 있다. GS25는 모리나가 제과의 전범 이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불매 운동이 펼쳐질 것이고, 제품 판매가 저조해진다. 그래서 GS25은 밀크캐러멜 아이스크림을 대만 인기 아이스크림으로 홍보했다.

 

 

 

※ '모리나가 우유 중독 사건'에 대한 간략한 설명 (환경운동연합)

http://kfem.or.kr/?p=37215

 

 

모리나가 유업이 설립된 지 6년 후에 모리나가 비소 우유 중독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일본 최악의 식품 안전사고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유(환경운동연합은 유아용 분유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는 언급된 우유는 유아용 분유를 포함한 것이다)를 먹은 어린이들이 비소 중독을 일으켰다. 130여 명의 어린이가 사망했고, 환자 수는 약 13,000여 명이었다. (환경운동연합의 소개에 따르면 비소 중독으로 사망한 어린이가 ‘13이라고 한다) 우유에 들어간 식품첨가물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모리나가 유업이 사용한 식품첨가물은 비소가 포함된 공업용 약품이었다. 비소 우유를 먹은 어린이 대부분이 십 년 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는데도 모리나가 유업은 사고가 일어난 지 15이나 지나서야 보상 조치를 마련했다. 1950년대에 모리나가 분유를 먹으면서 자란 우리나라 어린이들도 비소 중독증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시절엔 분유가 귀했기 때문에 분유를 먹은 어린이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모리나가 제과가 전범 기업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리나가 제과의 과자를 먹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모리나가 제과의 불편한 진실을 모르는 채 그 제품을 선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모리나가제과 그룹은 아베 신조 총리의 부인의 외가 집안이 운영하는 기업이다. 하지만 전범 기업이 만든 과자 하나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라고 자극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에게 적대감을 키우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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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9-03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나가가 전범기업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니콘 카메라로 쓰지 말아야 하는데...

cyrus 2017-09-03 08:42   좋아요 0 | URL
최근에 모리나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서야 늦게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스크림 맛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먹을 일이 없습니다.

2017-09-03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3 08:44   좋아요 0 | URL
일본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니까 전범 기업들도 과거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오거서 2017-09-03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리나가, 이름 때문이지만, 셜록 홈즈를 괴롭히는 악당 모리아티를 생각나게 합니다. 전혀 상관 없는 얘기지만서도…
모리나가 아웃!

cyrus 2017-09-04 08:57   좋아요 0 | URL
‘모리나가‘를 자꾸 ‘모리가나‘, ‘모리가라‘로 잘못 쓰는 경우가 있어요. ^^;;

잠자냥 2017-09-0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아이스크림 사먹었는데... 음 이 포스팅으로 많은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감사!

cyrus 2017-09-04 08:58   좋아요 0 | URL
한 두번 먹는 것 가지고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전범 기업 제품이나 식품을 구매한 것을 SNS에 인증하는 행동은 문제 있습니다.

stella.K 2017-09-0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대단하다.
모리나가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기업하는 사람들 정신이 나갔구만.
그런 것도 잘 알지도 못하고...
이거 뭐 삼성이 그모냥인데 더 말해 뭐하냐?
삼성이 정신 차리면 바람잡이 효과로 적어도 3분의 1은
나갔던 정신 다시돌아오지 않을까?
그래도 역시 믿을 건 소비자의 고발정신 같다.
더 많이 난리쳐야 하는데...ㅠ

cyrus 2017-09-04 09:03   좋아요 0 | URL
전범 기업의 제품과 식품에 의존하는 실정이라서 불매운동의 파급력이 촛불 운동만큼이나 나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fledgling 2017-09-03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국내저작류에 대한 리뷰가 점점 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저만 그런게 아니겠죠~ 본격적으로 이제 국내작가들을 섭렵하는 겁니꽈~^^

cyrus 2017-09-04 09:04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fledgling님. 섭렵까지는 아니구요, 내용이 궁금한 책이 있으면 그 기분에 따라 읽으려고 합니다. ^^

또 봄. 2017-09-12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동실에 하이추가 한 박스나 남았는데요.T.T

cyrus 2017-09-12 14:48   좋아요 0 | URL
이미 구매한 것은 버리기가 아까워요. 그냥 먹어야죠. ㅎㅎㅎ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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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셰익스피어)

 

    

 

우리는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주 작은 것에서조차 행복을 찾아내는 마음가짐이다. 마음을 다친 상처가 고통, 수치심, 절망, 불안을 낳고 이러한 것들을 거부하다 보면, 무력이나 분노, 경멸, 실망 등의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형성된다. ‘진짜 나를 무시한 채, 열등감에 휩싸인 자아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의 감정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감정들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상처만을 남긴다. 이 모든 문제가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차분히 생각해보면 나의 문제점을 무엇인지 되돌아 살펴볼 수 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은 시급히 개선할 수 있으며,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까지 생기게 된다.

     

글쓰기는 삶을 더듬어가는 여행이다. 우리 앞에 마련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생 앞에 항상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다. 공지영월춘 장구(越春 裝具)맨발로 글목을 돌다를 통해 우리는 희망이라는 실체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두 편의 작품 모두 작가가 주인공 겸 화자로 등장한다. 월춘 장구는 자신의 내적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가의 세밀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월춘 장구봄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장비를 뜻한다. 불완전한 삶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이 소설을 쓰였다. 삶의 역경을 뜨거운 인내로 녹여낼 때 거기서 싱싱하고 힘차게 자라나는 희망의 새싹이 돋아난다. 작가는 어둡고 쌀쌀한 계절을 의지로 넘길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본질과 이질적인 것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그 상흔으로 인해, 그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픔의 힘으로 우리는 생의 모퉁이를 돌기도 한다. 그것이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블라인드 포인트, 라고 산에 오르던 친구는 말했다. 모퉁이를 돌면 그곳에 무슨 죽음과 무슨 삶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험악한 등정에서 산악인들은 언제나 그 블라인드 포인트를 돌아야 한다고. 그리고 초보자들에게 그것은 대개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고통을 준다고. 거기서 주저앉는 사람이 참 많이도 있다고, 그러나 그 공포를 이겨낸 자에게만 산은 그 정상을 허락한다고. (17~18)

 

 

이 대목에서 맨발에서 글목을 돌다맨발글목의 의미를 재확인할 수 있다. ‘글목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을 의미하는데 작가가 만든 단어다. ‘맨발은 작가 자신을 포함한 상처 받는 존재를 가리킨다. 월춘 장구맨발에서 글목을 돌다의 유사성은 삶의 상처를 진솔하게 묘사하는 글쓰기다. 자기 상처를 드러내며 세상과 대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작가의 성숙함 앞에서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을 독자는 없을 것이다.

     

소설집의 표제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조금은 과장되고 웃음이 섞인 블랙코미디다. 6개월째 사망 선고를 받고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할머니를 관찰하듯이 바라보는 소녀인 화자와 그 가족들의 심리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할머니의 재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가족들은 할머니 곁을 떠나지 못한다.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미음 대신에 흰 쌀밥과 갈비를 먹기 시작하는데, 이 장면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의 감정 상태를 읽을 수 있다. 공포관리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에 관해 생각하면 슬퍼지기보다는 평소보다 행복해진다. 자기 죽음에 관한 생각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행복감을 찾거나 유발함으로써 자각적인 고통에 자동으로 대처하게 된다. 어쩌면 할머니는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평소에 좋아하는 갈비를 입에 댔을 거고, 의도치 않게 생명이 연장된 것이다. 할머니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행위로부터 심신의 안정은 물론 죽음의 공포를 최소화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은 할머니의 생명 연장을 지켜보면서 공포를 느낀다. 다음 장면은 인간의 삶과 죽음, 공포와 웃음, 비극과 희극의 양면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외삼촌과 막내외숙모는 다시 할머니의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그들의 젓가락에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갈빗살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할머니가 웃으면 함께 웃고, 할머니가 호통을 치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들의 얼굴에 눈에 띄게 공포가 어렸다는 것이고, 그 공포를 감추려는 듯 표정은 더 딱딱해지고 있었다. (76)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절망인 죽음을 마주쳐야 하는 할머니가 생의 의지를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블라인드 포인트의 공포를 이겨낸 할머니의 의지인 걸까, 아니면 더 살고 싶어서 살아있는 자들을 억지로 붙잡으려는 집착일까.

    

 

 

 

Trivia

 

* 12

걸레를 빨다 말고 키다리 아저씨를 쓴 오스카 와일드를 생각했다.

 

→ 「키다리 아저씨의 작가는 진 웹스터(Jean Web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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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7-09-03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라인드 포인트‘의 공포를 이겨낸 할머니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지를 잡아당긴 것은 희망의 새싹이구요.^^
‘글목‘이란 말 앞에서 한참 생각이 머뭅니다. 글을 쓰려고 컴퓨터나 종이 앞에 섰을 때마다 긴장이 되거든요. 발상이 떠오를 때 시작을 하지만 제 글이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게 될 지 처음부터 알 수는 없거든요. 다른 이들이나 저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다만 가보는 거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맞닥뜨리는 미지의 감성에 대한 스릴이 있습니다. 이 마음 역시 희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 글이 도달하게 될 곳이 썩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

cyrus 2017-09-04 09:08   좋아요 2 | URL
저도 논쟁이 될만한 주제의 글을 쓸 때면 긴장됩니다. 합당한 비판을 받고 싶어서 제 생각을 소신있게 밝힙니다. 그런데 쓰다 보면 ‘비난‘받을 만한 엉터리 내용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비난 받는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제 글쓰기의 원칙입니다. 그 글은 실패한 글입니다. ^^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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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 그 한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김예슬 선언> 중에서)

 

 

고려대 교정 건물에 붙여진 대자보의 주인공은 대학을 과감히 뛰쳐나왔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며 당돌하게 말이다. <김예슬 선언>을 읽었을 때 심장이 찔렸다. 고통스러웠다. 아팠던 이유는 대자보 속에 우리 모두의 문제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만두고 거부하였던 것은 고작 대학이 아니다. ‘대학이라는 이름 아래 성공과 경쟁만을 강요하는 세상이다. 대학 문제는 우리 모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자리 문제와 교육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김예슬의 외로운 대항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이십 대들을 슬프게 했다. 그 슬픔은 7년이 흐른 오늘에도 전혀 걷히지 않았다. 슬픔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 눈물이 피눈물이 되어 우리 발목을 차갑게 감싸고 있다. 7년 전 대학생이었던 이십 대는 이제 삼십 대가 되었다. 누군가는 결혼했고, 누군가는 여전히 취업을 준비하는 백수이고, 누군가는 직장에 취직해 삶에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가 안고 있었던 고민은 고스란히 후배들에게 넘겨졌다. 영초 언니(문학동네, 2017)를 읽으면 가슴에 답답함을 느꼈던 7년 전 청춘들의 모습이 떠올린다.

 

책의 저자인 서명숙천영초와 함께 데모했던 대학 후배다. 영초 언니는 저자의 젊은 날의 초상이면서도 천영초 한 사람을 위한 자화상이다. 천영초는 70, 80년대 시대의 아픔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녀는 부당한 권력에 당당하게 맞선 운동권의 전설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저자에게 언니를 기억하는 회상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영초 언니는 그 당시 ‘386 운동권 세대가 겪어야 했던 처절한 고통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저자와 천영초는 386 세대가 헤쳐 나온 시대적 운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쯤이면 쉰을 바라보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날의 청년세대가 생각났을까?

 

386세대는 자유가 억압된 70년대와 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차가운 환멸로 돌변한 80년대를 보냈다. 유년기에 유신독재를, 대학 시절엔 전두환 군부독재를 겪으면서 반쪽짜리민주화의 과정을 지켜본 이들이다. 그 시절의 대학은 최루탄과 휴교가 일상이었다. 대학생들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매캐한 거리에 뛰어들었고, 자유를 갈망하는 열정은 빨갱이로 낙인 찍혔다. 386 세대의 부모들은 경찰에 붙들리거나 고문당하는 자식을 볼 때마다 가슴 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성동구치소로 향하는 저자가 호송차 창문 넘어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호송차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가로수의 새잎들이 연녹색으로 간질간질 움트는 5월의 거리 풍경은 눈물겹도록 사랑스러웠다. 지나는 이들의 얼굴도 다들 행복해 보였다. 난 언제나 저 거리, 저 풍경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중에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둔 세상은 피안의 세계처럼 아득했다. (164)

 

 

거리의 중심에서 소리 질렀던 저자는 이제 희망 없는 청춘의 실체를 감지한다. 그녀의 상념은 민주주의라는 공적 가치에 청춘을 바친 바보 같은 세대의 아픈 혼잣말이다. 나아가 희망 없는 청춘을 보냈던 삼십 대 독자들을 슬프게 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지금의 삼십 대는 십 년 전만 해도 ‘88만 원 세대 또는 삼포 세대 등으로 불렸다.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이름이 많지만, 의미가 썩 좋지 않다. 그 단어 속에 취업난과 고용 불안, 치솟는 학비에 시달리며 외로운 생존경쟁을 해내야 하는 이십 대의 차가운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쓸쓸한 외침은 사회 전체를 진동할 합창이 되지 못했다. 기성세대는 울부짖는 청년들을 향해 나약하게 자책하지 말고, 더 노력해라고 닦달했다. 어떤 이는 그들 보고 빨갱이에게 사주받은 미성숙한 세력으로 규정했다. 정당한 분노마저 빨갱이로 몰아가는 작태가 낯설지 않다.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이 세상은 80년대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등장은 반쪽짜리민주화로 귀결되었고, 끝까지 살아남은 정치 기득권 세력은 권력과 부를 불공정하게 독점했다. 정치 기득권 세력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퍼진 적폐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적폐 세력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늘 권력 주변에 기생했고, 권력에서 흘러나오는 단물을 마음껏 빨아대면서 자란 악성 종양이 바로 최순실과 그녀의 딸 정유라. 정유라는 청년세대와 다른 삶을 살았다. 잘난 어머니 덕택에 돈을 걱정 없이 썼다. 그래서 그녀가 돈도 실력이야!”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발언에 가슴 아픈 의문의 1를 당한 청년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비상식적인 세상으로부터 연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은 청년세대는 광장으로 나가 촛불을 들었다. 빛나는 촛불로 그동안의 긴 연패의 굴욕을 잊는 빛나는 1을 추가했다. 빛나는 1이 없었다면 최순실은 떵떵거리며 살면서 민주주의를 우습게 봤을 거고, 서명숙은 영초 언니를 쓰지 못했다. 지금 상상하기 끔찍하지만, 국정 농단 세력의 정부가 뻔뻔하게 지내고 있었어도 저자는 영초 언니를 썼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삶과 청춘을 바친 사람들을 무시한 적폐 세력들은 저자의 이름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추가했고, 영초 언니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했을 게 뻔하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캠퍼스의 일상적 삶을 좌우하던 현실 속에서 대학을 다닌 386 세대의 이야기들이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낯선 무용담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영초 언니는 어려운 시절을 기어이 극복한 화려한 성공 미담을 부각한 386 세대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천영초를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자 시점으로 일관한다. 천영초를 포함한 386 세대가 기성 사회에 어렵게 적응하는 모습이 담긴 심리적 풍경(영초 언니 프롤로그 9)’을 지켜보고 서술한다. 천영초와 그의 남편 정문화는 여전히 사회변혁을 열망했으나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알아주고 동조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운동권의 삶을 살았던 386 세대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평생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 천영초도 예외가 아니다. 정당 생활을 접은 천영초는 혁명자금을 모으려고 다단계 회사에 들어갔고, 똑똑했던 정문화는 경제 감각이 떨어져 궁핍한 생활을 보냈다. 천영초는 운동권 동지로서의 정문화를 사랑했지만,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으로서의 정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자는 기성 사회에 대한 경험이나 준비가 미흡한 386 운동권 세대의 씁쓸한 뒷모습까지도 낱낱이 기록했다. 젊은 날에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꿈꿔야 할 미래를 빼앗겼던 386 세대는 삭막했던 청춘의 슬픈 결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초언니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건 우리 사회 전체를 확 바꿔놓을 혁명자금이 아니라 당장의 생활비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니의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바를 눈앞에서 박살내고 싶지는 않다. (261)

 

 

안타깝게도 삭막했던 청춘은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대물림 되고 있다. 오늘도 청년들은 답답한 도서관 건물 안에서 좋은 직장, 좋은 결혼, 좋은 노후 생활을 위해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다.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될수록 절망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가 사라진다. 경쟁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있다. 영초 언니를 다 읽고 나니 여러 가지 걱정이 든다. 세월이 흘러 나 자신 또한 따뜻한 현실이라는 소파에 파묻히면서 제2, 3의 김예슬을 비웃을까 봐. 수십 년 후에 우리가 한때 열광했던 김예슬이 천영초처럼 잊힐까 봐. 쉽게 변하지 않는 세상을 다행이라 여기며 요즘 젊은이들은 그저 뭘 모르는 것들이라 손가락질할까 봐. 알게 모르게 시간이 지나면 청년세대도 기성세대가 된다. 저자가 천영초를 아직 완전히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물결에 휩쓸려 정신없이 망각해버린, 그럼에도 언제나 의식 한쪽에 찜찜하게 남아 유령처럼 짓누르는 사회적 열망의 냄새를 여전히 맡고 있다. 영초 언니386 세대와 청년세대가 스스로 자신의 삶과 시대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특별한 책이다. 따라서 책 속에 변함없이 젊은 ‘20대의 영초 언니는 절대로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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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0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땅에서,얼마나 많은 ‘영초 언니‘ 가 외롭게 살다 갔을까요..

cyrus 2017-09-02 12:12   좋아요 0 | URL
남성의 역사에 파묻힌 언니들의 기록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북프리쿠키 2017-09-0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글 보고 갑니다^^;

cyrus 2017-09-02 12:13   좋아요 0 | URL
이 책, 정말 좋습니다. ^^

2017-09-01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2 12:1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현재 삶의 질을 과거와 비교해봤자 작은 위안만 얻을 뿐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혐짤이라는 은어가 있다. ‘혐오을 합친 말인데, ‘짤림 방지의 준말이다. 인터넷 게시물이나 블로그 등에 첨부된 사진이나 그림을 뜻한다. ‘혐짤을 쉬운 말로 풀어쓰면 혐오스러운 사진이다. 이 글에서는 혐짤이라는 표현 대신에 혐오 사진이라고 사용하겠다.

 

혐오 사진을 이용해 악의적으로 장난치는 누리꾼들이 많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상관없는 사진을 올리는 것이다. 대개는 음란한 사진을 올려 게시판 이용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또 혐오 사진을 올려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 좀 오래된 일이긴 한데 7, 8년 전만 해도 알라딘 서재에 광고성 음란 게시물만 올리는 회원들이 있었다. 누리꾼들이 주로 공개하는 혐오 사진은 사람이나 동물의 시신이다. 그 밖에 희소병에 걸려 신체가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환자, 대변이나 토사물을 찍은 것도 혐오 사진이다. 혐오 사진 게시물은 익명의 불특정 다수를 노리는 온라인 공간의 테러라고 보면 된다. 혐오 사진을 볼 경우 정신적인 충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친절한(?) 누리꾼은 게시물 제목 앞에 혐짤 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혐짤 주의가 적힌 게시물을 발견하면 못 본 척 지나치면 된다. 그런데 혐짤 주의가 사람의 호기심을 유발하게 한다. 궁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마우스를 클릭하면…‥. 그다음 상황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혐오 사진이 나름 컬트적인 인기가 있다 보니 악명 높은 혐오 사진 또는 게시물을 따로 모아서 목록으로 만든 것도 있다.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 ‘2ch’절대로 검색해서는 안 될 검색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있다. 이 목록에 나온 검색어를 구글(Google)에 검색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충격과 공포를 받는다.

 

 

 

 

 

2ch 유저들은 검색어의 위험성을 측정(객관적이지 않다)해서 숫자로 매겼는데, 위험도 7’은 제일 위험한 수준이다. 검색 한 번으로 트라우마가 생기고, 덤으로 악성 바이러스까지 얻는 상황이다.

 

미술의 세계에서도 보는 이의 눈과 마음에 충격을 주는 괴상하고 무서운 그림들이 있다. 미술의 세계에 아름다운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예술이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추한 그림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절대로 검색해서는 안 될 그림들을 모아 봤다. 물론, 이제 공개할 그림들은 유명 전시관에 소장되어 있거나예술로 인정받은 것들이다글의 제목은 재미있으라고 만든 패러디(parody). 그렇지만, 깜짝 놀라게 하거나 불쾌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으니 심장이 약한 분은 자신의 소중한 심장 꽉 부여잡고 보시길. 심장이 놀라 도망가면 책임 못 진다.

 

 

 

 

* 작가 미상 구상시회권(九相詩繪卷)위험도 : 2~6

 

구상(九相)인간의 시체가 부패되는 아홉 단계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불교 경전에 나오며, 중국의 시인 소동파(苏东坡)는 이를 주제로 한 구상시(九相詩)’를 남기기도 했다. 구상시회권은 구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의 일부를 어디서 볼 수 있느냐면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세종서적, 2005) 2217~218이다. 그림 전체를 보려면 구글에 九相詩繪卷을 검색해야 한다. 그런데 검색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들개와 새가 부패가 심한 시체를 뜯어 먹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나오는데, 살이 뜯어져 나가고 사지가 절단된 시체의 모습이 그로테스크하다.

 

 

 

 

*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위험도 : 1, 2

 

 

 

 

 

 

 

 

 

 

 

 

오딜롱 르동은 상징주의와 초현실주 중간에 서 있는 프랑스의 화가다. 르동은 꿈의 화가. 그가 첫 번째로 제작한 석판화집 제목이 <꿈속에서>였다. 그의 그림에는 현미경에 통해 볼 수 있는 생명체, 고전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들, 목만 남은 사람 등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꿈속에 갇힌 존재가 되어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하는 꿈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서기원 씨는 르동의 웃음 짓는 거미를 오마주한 작품을 제작했다. 르동이 그린 거미는 어두컴컴한 곳에서만 사는 음흉한 괴물에 가깝다면, 서기원 씨가 그린 거미는 정말 해괴한 형태의 괴물이다. 화려한 색채에 얼굴을 과장되게 그렸기 때문에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트라우마를 줄 수 있는 위험도 5’. 어떤 그림인지 궁금한 분은 여기 링크로 보면 된다. 링크 주소를 클릭한 순간, 서기원 씨의 그림이 나오므로, 깜놀 주의.

 

 

※ 관련 링크 (깜놀 주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7601553

 

 

 

 

 

 

*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위험도 : 1, 2

 

 

 

 

 

 

 

 

 

 

 

 

앙소르의 그림에 자주 나오는 단골 소재는 가면해골이다. 그는 인간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했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과 불안을 표현하기 위해 가면과 해골이라는 어두운 도상을 이용했다. 비통한 남자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 배경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 오토 딕스(Otto Dix) 위험도 : 2

 

 

 

 

 

 

 

 

 

 

 

 

오토 딕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참전했다. 철없는 조국애에 도취한 군인 딕스는 빗발치는 포탄 소리를 듣고 전몽(戰夢)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비참함에 치를 떤다. 전쟁이 끝난 후 화가가 된 딕스는 삼면제단화 형태의 전쟁을 제작했다. 제단화의 가운데 그림에 총탄 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병사들의 시체가 참호 속에 널브러져 있다. 서경식 선생은 딕스의 전쟁그림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일반적인 통념을 철저하게 깨뜨린 작품이라고 평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독일인의 우수함을 내세우고 싶었던 나치 정부에 그의 그림은 희생 장병을 모독한 매국노의 퇴폐 그림으로 비난받았다. 2010년 서울대 미술관에 오토 딕스 전이 열린 적이 있다.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위험도 : 2, 3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고기가 어는 과정을 알고 싶어서 실험했다면, 동명의 화가는 고기를 이용해 고통받는 인간이 변형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으로 실험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제목에 습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화가는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고통을 스스로 선택한 직업이었던가. 베이컨의 그림 속에는 화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 상태의 농도가 확연하게 보인다. 극도의 불안함은 역동적으로 온몸을 휘감아 원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의 그림은 공포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미술에서는 모든 것이 잔인해 보입니다. 실재가 잔인하기 때문이죠.”(프랜시스 베이컨,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 H. R. 기거(Hans ‘Ruedi’ Giger) 위험도 : 2, 3

 

 

 

 

 

 

 

기거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기거가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에이리언(Alien)’을 창조한 초현실주의 화가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대단하다면서 엄지를 올렸을 것이다. 반대로 기거의 이력을 알려주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을 보여주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그린 그림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기거가 괴팍한 성격이긴 하지만, 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다. 기거는 한 인터뷰에서 만일 내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 창조적인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미쳤거나라고 말했다. 미치지 않은 사람도, 창조와 거리가 먼 사람들도 기거의 그림을 좋아할 수 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들의 기괴한 분위기를 거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극단적 상상력이 동원된 어두운 본성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 즈지스와프 벡신스키(Zdzisław Beksiński) 위험도 : 2~6

 

벡신스키의 그림은 기거의 그림보다 더 오싹하다. 벡신스키는 자신이 제작한 그림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고, 자신의 그림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무용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냉소적인 태도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유사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의 그림이 와전되어 전해졌고, 세 번 보면 죽는다는 저주의 그림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 그림에도 섬뜩한 벡신스키의 화풍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땅 한가운데에 거울이 달린 거대한 의자가 있다. 의자 위에 창백한 여성의 목이 놓여 있다. 여성의 목이 거울에서 스르르 나타난 것처럼 느껴진다. 벡신스키가 무슨 의도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없다. 도무지 봐도 알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 이게 바로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드는 어두운 아우라(Aura). 벡신스키의 그림들은 위키아트(Wikiart)’벡신스키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무서운 그림을 싫어하는 사람은 안 보는 게 낫다.

 

 

위키아트 https://www.wikiart.org/en/zdislav-beksinski

공식 홈페이지 http://www.dmochowskigallery.net/

https://beks.pl/zdzislaw-beksinski-grafiki/

 

 

 

 

 

 

 

 

 

벡신스키의 그림은 책표지로 사용된 적이 있다. 동서문화사의 책 두 권의 표지로 사용된 어둡고 쓸쓸한 풍경화가 바로 벡신스키의 그림이다. 그런데 출판사는 그림을 제작한 벡신스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두 권의 책 모두 2003년에 나왔고, 벡신스키는 2005년에 사망했다. 과연 출판사는 화가에게 허락받고 그림을 표지로 사용했을까? 저작권을 무시했던 출판사의 행적을 봐서는 그렇게 했을 가능성은 0%. 이익에 눈멀어 저작권법을 무시하면서 책을 만들다간 언젠가 화를 입게 된다. 이 글과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지난달에 저작권법 위반으로 동서문화사 대표가 불구속기소 되었다.

 

 

[, ‘대망개정판 무단발간한 동서문화사 대표 기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8&aid=0003875857

 

 

 

 

 

 

 

 

참고도서

 

 

1. 오딜롱 르동

 

 

 

 

 

 

 

 

 

 

 

 

 

 

 

 

*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상징주의 미술(열화당, 1987)

* 질 장티 상징주의와 아르누보(창해, 2002)

* 김형구 르동(서문당, 2004)

* 르동(재원, 2004)

 

 

 

 

2. 제임스 앙소르

 

 

 

 

 

 

 

 

 

 

 

 

 

 

 

 

* 울리케 베크스 말로르니 제임스 앙소르(마로니에북스, 2006)

* 나카노 교코 무서운 그림 3(세미콜론, 2010)

 

 

 

 

3. 구상시회권, 오토 딕스

 

 

 

 

 

 

 

 

 

 

 

 

 

 

*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창비, 2002)

* 진중권 춤추는 죽음 2(돌베개, 2009)

 

 

 

 

4. 프랜시스 베이컨

 

 

 

 

 

 

 

 

 

 

 

 

 

 

 

 

 

 

 

 

 

 

 

 

 

 

* 크리스토프 도미노 프랜시스 베이컨(시공사, 1998)

* 루이지 피카치 프랜시스 베이컨(마로니에북스, 2006)

* 안나 마리아 빌란트 프랜시스 베이컨(예경, 2010)

* 데이비드 실베스터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디자인하우스, 2015)

 

 

 

 

 

5. H. R. 기거

 

 

 

 

 

 

 

 

 

 

 

 

 

 

* 기거(아트앤북스, 2003)

* H. R. 기거 HR 기거(마로니에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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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01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네요. 하긴, 인류의 진화과정이 돌연변이의 역사이지요. 이렇게 자판 두들기는 손가락도 앞 지느러미가 변형된 거고, 발가락은 뒷지느러미의 변형에 불과하니...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런지.. 돌연변이의 역사!

cyrus 2017-09-01 20:31   좋아요 0 | URL
르동이라는 화가가 괴물 묘사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 중의 하나가 진화론이었습니다. ^^

sprenown 2017-09-01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네요..하긴, 인류 진화의 역사가 돌연변이의 역사죠..앞으로 어떻게 진화할련지.. 희귀병도 많이 생기고, 별 희한한 일들도 많이 생기는 호모사피엔스의 삶이죠.

cyrus 2017-09-01 20:32   좋아요 0 | URL
인류가 진화할수록 상상력도 풍부해지는 것 같습니다. ^^

qualia 2017-09-02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위 ‘혐짤’이란 용어 설명 부분하고 혐오 사진 구경에 대한 경고 부분까지만 읽었습니다. 중간 혐오 사진 부분은 재빨리 내려서 안 봤습니다. ㅎㅎㅎ 근데 맨 아래 부분 H. R. 기거 작품 사진은 살짝 봤습니다.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외계 우주선과 외계인을 H. R. 기거가 디자인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 외계 우주선과 그 조종사인 스페이스 쟈키(space jockey)의 괴기함(혐오감과는 다른 느낌이죠)과 공포유발감은 정말 영화 사상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계 우주선 안에서 알을 까고 나와 변태 과정을 거치는 에일리언 디자인도 역대 최고의 괴물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능가하는 건 아직까진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한 가수의 실황(라이브) 공연 무대도 H. R. 기거가 디자인한 것이 있어요. 그건 그러나 정말 웅장하면서도 어떤 경외감이 들게 하는 명작이었습니다. 전혀 혐오감 같은 건 들지 않는, 그 가수와 그 가수의 노래와 이미지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뭐랄까 신의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그런) 거대 인물상(혹은 신인상)이었죠. 그러나 저는 H. R. 기거의 전모에 대해선 거의 전혀 모릅니다. 서점에서 그의 작품집을 훑어보았던 적이 있는데요. 제 취향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후루룩 넘기면서 보고 말았더랬습니다. 아무튼 깊이 탐구할 만한 문제적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공포스럽고 괴기스럽고 혐오스러운 작품들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습니다. 그에 비해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외계 우주선과 외계인은 일종의 순화된 공포와 괴기스러움으로서 얼마든지 영화적 흥미진진함을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사례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보면 볼수록 온갖 호기심과 상상력이 샘솟는 느낌입니다. 첨언하자면 《에일리언》 유형 이외의 다른 공포 영화는 거의 본 적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저 또한 트라우마에 한번 걸리면 빠져나오기 힘들어 하는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cyrus 님의 경고를 받아들여 윗글 중간을 건너뛴 것이죠. ㅎㅎ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유형의 영화가 저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영화 주제는 매우 철학적이고 의미심장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다시 보고 싶진 않더라고요. 그보다 더 수위가 높은 공포물들은 아예 본 적도 없고 볼 생각도 없고 말이죠. 다른 분들은 공포 감각, 괴기 감각, 혐오 감각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사람마다 수용할 수 있는 그 수위나 임계점은 많이 다를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cyrus 님의 감각 수위는 저와는 많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ㅎㅎㅎ ^^

[처음 댓글 올린 시각 : 2017-09-01 21:53]
[오타 수정해 다시 올린 시각 : 2017-09-02 00:55]

cyrus 2017-09-02 12:30   좋아요 0 | URL
qualia님은 기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기거의 그림을 보면 과거 낭만주의자들이 느꼈던 숭고, 경외감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저도 기거의 디자인을 긍정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

2017-09-01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2 12:32   좋아요 0 | URL
혐오 사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혐오 사진을 보면서 느꼈던 정신적 충격을 상대방도 느껴보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즉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 이런 심리인거죠.. ^^;;

AgalmA 2017-09-0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딜롱 르동 그림은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그림도 많은데 혐오로 많이들 분류하는 게 오딜롱 르동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못마땅합니다ㅜ 그런데 이상하게 혐오쪽을 깊게 건드리면 종교적이기까지 하다는 게 참 아이러니!

cyrus 2017-09-02 20:35   좋아요 1 | URL
르동의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분석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도 르동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