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내용은 작품의 줄거리 및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7)은 김지영을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으로 끝이 난다. 독자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다. 김지영의 삶을 따라가며 진행되던 소설은 정신과 의사가 작성한 진료 기록의 일부였다. 결국, 김지영의 발화 행위는 실패한 셈이다.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으로(The personal is the political,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구호)’ 확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가 그녀의 상황을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의 목소리와 일상을 사적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적 시선을 유지한다. 의사는 김지영을 산후우울증과 육아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로 진단하고,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한다.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의 얘기를 바탕으로 김지영 씨의 인생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 정도다. 김지영 씨는 일주일에 두 번, 45분씩 상담을 받고 있는데, 증상이 나타나는 빈도는 줄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당장의 우울감과 불면증에 도움을 주기 위해 김지영 씨에게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했다. (169쪽)

 

 

 

나는 의사가 김지영에게 처방한 항우울제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프로작(Prozac)일까, 아니면 졸로푸트(Zoloft)[1], 세로작트(Serozat)일까? 국내에 유통된 항우울제 종류가 생각보다 많다.

 

 

 

 

 

 

 

 

 

 

 

 

 

 

 

 

*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궁리, 2017)

 

 

 

방금 언급한 세 가지 항우울제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s)다. 우울증은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의 화학적 불균형 때문에 발생한다. 세로토닌은 신경 세포로 재흡수 되는 것을 차단해 몸속의 신경전달물질을 적정하게 유지한다. 프로작은 졸로푸트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항우울제였다. 졸로푸트는 다른 약물과 상호작용이 거의 없어 필요할 경우 병용 투여가 가능하고 부작용이 거의 없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SSRIs계 항우울제는 우울증뿐만 아니라 불안장애, 생리 전 불쾌증후군 등의 치료제로도 사용됐다.

 

세상엔 완전한 만병통치약이 없다는 것은 SSRIs계 항우울제도 마찬가지다. 항우울제의 부작용이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SSRIs계 항우울제 중 일부 약은 투약을 중단하기가 어렵고 갑자기 투약을 중단했을 때 초조 불안 등의 금단현상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미국과 영국에선 중독성 관련 논쟁이 일기도 했다. 단기적으로 항우울제가 유용할지 몰라도, 장기복용 시 효과는 아직 밝혀진 게 없다. 항우울제의 사용량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임상적 증거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제약회사들의 적극적인 광고 전략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항우울제의 효과가 상당 부분 ‘불확실성의 영역’을 안고 있다. 우울증의 원인을 사회 · 심리적 요인, 유전적 요인이 신경전달 물질과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서 찾는 것처럼, “우울증의 치료도 항우울제 복용 같은 약물치료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지적은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미국의 작가이자 법조인인 엘리자베스 워첼(Elizabeth Wurtzel)《프로작네이션》(민음인, 2011)에서 자신의 몸과 영혼을 갉아먹은 우울증과 항우울제의 위험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크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후 우울 증세를 보였다.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느꼈고, 자기 혐오와 무력감을 느끼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각한 임상적 우울증 상태에서 느끼는 고통은, 본능적으로 빈 공간을 채우려는 인간 본성의 몸부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비어 있는 상태를 못 견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의지와 목표를 가지려 애쓴다 해도, 심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깨어서 걸어 다니는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 (37쪽)

 

 

그녀는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복용해온 프로작이 우울증을 낫기 위한 확실한 해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 항우울제 처방을 권하는 의사를 ‘박사학위를 딴 마약 거래상’이라고 비난한다. 아마도 이런 의사들은 마음이 아픈 여성의 증상이 어떤 병명인지 몰랐을 것이다.

 

 

 

 

 

 

 

 

 

 

 

 

 

 

 

 

 

 

*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이매진, 2005)

* 안미선, 김보성, 김향수 《엄마의 탄생》(오월의봄, 2014)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은 전업주부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을 하는 사례가 급증하자, 우선 동창들을 인터뷰하면서 문제점을 밝혀냈다. 그녀는 미국 사회 중산층 주부들이 앓고 있었던 불가사의한 증상을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여성들을 신비화하는 가부장적 관념, 즉 현모양처와 모성애가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가부장제가 여성을 외롭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의 여성, 즉 ‘엄마’가 된 여성들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에 걸린다. 결혼과 출산을 하기 전 여성은 자아실현이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지만, 출산 이후에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좋은 엄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만들어내고 때로는 강요하는 고정된 성 역할일 뿐이다.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여성들은 머리 아프고, 혼란스럽다. 모유 수유부터 신생아를 건강하게 돌보는 방법까지 산후조리원이 가르쳐준 대로 학습한다. 아이가 아파도, 잘 안 먹어도, 공부를 못해도 “다 엄마 탓”이라는 지적을 혼자 감당한다. 이제는 숨만 쉬어도 ‘맘충(mom蟲)’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는 ‘혐오 대상’이 된다. 자신과 자녀가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특히 남성들)은 산후 우울증, 육아 우울증이 신체적 및 정신적 증세가 작용해서 일어나는 병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울증의 환경적 요인까지 고려하지 못한다. 과도한 시집살이, 경제적 압박감, 자녀 출산 및 육아에 대한 과도한 부담감 등이 우울증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많은 연구 자료가 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를 죽이고 자살한 엄마의 비극적 소식을 접하면 ‘비정한 엄마’라고 비난한다. ‘기레기’라고 불리는 수준 낮은 기자들은 기사 조회 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소식을 자극적으로 보도한다. 자살한 엄마의 앞뒤 사정을 확인하지 않은 채 엄마를 '천륜을 어긴 사람'이라는 프레임(frame)을 씌운다. 이 억지스러운 프레임이 재생산되면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말 못 하는 고충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여성의 우울증은 사회가 만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알지 못한 채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 ‘정신과 의사’가 정말 많다. 대중은 ‘무허가 정신과 의사’가 되어 자신의 입맛대로 여성의 정신 상태를 판명한다. 여성이 조금만이라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 피해망상, 우울증이라고 성급하게 진단을 내린다. 그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약을 권한다. 우리 사회는 여성이 왜 아픈지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약 권하는 사회’이다.

 

 

 

 

 

 

[1]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 『프로작이 과연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을까?』 편에 보면 항우울제 이름이 ‘졸로프트’라고 나와 있다. ‘졸로푸트’와 ‘졸로프트’ 둘 다 써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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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1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도 약이지만 술 권하는 것도 문제지.
하긴 알콜도 약이라면 약인가?

cyrus 2017-09-17 19:5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특유의 술 문화 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셔야해요. 술을 못 마시면 사회생활 못한다고 착각하는 시선이 사라져야해요.

transient-guest 2017-09-18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의료업계의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우울증처방남발과 약사용은 90년대를 규정짓는 현상들 중 하나로까지 이야기될 정도로 당시엔 어린애, 심지어 개까지 우울증운운하던 때였다고 History Channel아니면 CNN 다큐인 90s에서 본 것 같습니다. 중증의 우울증은 약으로 일단 조절을 해야하지만, 테라피를 병행해야 근본치유가 가능한 걸로 지금은 많이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한때는 정말 비타민처럼 이런 약을 먹었다고 하네요.

cyrus 2017-09-18 09:53   좋아요 0 | URL
‘비타민처럼 약을 복용’했다는 표현을 들으니까 미국인들이 얼마나 항우울제에 지나치게 의존했는지 실감이 납니다.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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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움직이지 않고 목소리를 내 마치 인형이 말하는 연기를 복화술이라고 한다. 남성 작가가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복화술이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당대 남성 작가들은 겉으로는 여성에게 목소리를 부여해 발언하게 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남성 작가의 복화술은 여성의 발화를 원천 봉쇄한다.[1] 주체적으로 표현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한 여성은 가부장제가 만든 울타리에 갇힌 채 ‘메아리 없는 절규’를 외친다. 조남주《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7)은 이 시대 텅 빈 여성의 잃어버린 목소리, 그 메아리 없는 절규를 받아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 여인의 삶을 깨뜨리는 냉소적인 담화로 가득 차 있다. 여성이라면 이 소설을 읽을 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담담한 문체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네 살의 기혼 여성 김지영이다. 이름만 보면 그리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소설은 지영이 어느 날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시작한다.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친정엄마로 빙의해 가슴 속으로 꾹 삼켰던 말들을 쏟아 내뱉는다. 때에 따라 죽은 대학 동아리 선배가 되거나 어렴풋이 아는 다른 여성이 되곤 한다. 기이한 언행을 하는 아내가 걱정된 남편은 그녀의 정신 상담을 주선하고, 지영은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어린 시절부터 학창 생활, 회사 업무 그리고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지영의 삶의 궤적을 사실감 있게 보여준다.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김지영이란 사람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이해할 수 없던, 그녀 주변의 남성들이 공감하지 못했던 여성으로서의 비감(悲感)이 느껴진다.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의 현실이 아닌 자신들의 여성 판타지에만 공감하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무시해버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일상화돼 있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성범죄는 곳곳에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십 년 전에도 그러했고 어제도 그랬다. 스마트폰이나 초소형 카메라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사진 · 영상을 촬영하는 ‘몰카(몰래카메라)’ 성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몰카 성범죄는 공중화장실, 사우나, 수영장, 탈의실 등 특정 장소는 물론이고 출퇴근길의 지하철이나 버스 안처럼 많은 사람이 밀집된 공간에서 자신이 찍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촬영이 되어, 불특정한 수많은 피해자를 낳는다. 몰카 성범죄 경우 다른 성범죄인 강간이나 강제추행보다 가벼운 혐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영이 다니는 회사의 여자 화장실에 설치된 몰래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남성 직원들은 몰카 성범죄를 ‘가벼운 일탈’로 생각한다.

 

 

“조사받은 남자 직원들이 우리한테 너무했대. 자기들일 몰카를 설치한 것도 아니고,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나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좀 본 거 가지고 성범죄자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사진 유포했잖아. 범죄를 방조했잖아. 근데 그게 잘못인 줄도 몰라. 완전히 개념이 없더라니까.” (155쪽)

 

 

남성 직원들은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남자 보안 요원이 찍은 사진을 돌려 봤다. 그들은 야동을 보며 멋대로 키워오던 성적 판타지를 실현했다. 그들의 말과 의식 속에 성범죄는 따로 있다. 성범죄는 너무나 더럽고 추악하고 끔찍한 것이기에 정신병자의 소행이 분명하다.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한 이 ‘가벼운 일탈’을 성범죄로 문제 삼는 피해자가 신경과민이다. 따라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라는 결론을 낸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 익숙한 남성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데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남성 직원들은 성범죄의 방관자 혹은 공모자다. 이런 주장 뒤에는 남성들의 반발이 아우성칠 것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두려움과 선입견을 품고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피해의식 프레임과 결합하여 반남성주의적 담론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82년생 김지영》이 ‘물 만난 고기’처럼 잘 팔린 책이 되었다고 말하여 어떤 이는 ‘여성의 피해의식으로만 가득한 최악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평가하는 것과 아예 안 읽은 상태에서 평가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남성 독자들이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읽어보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있잖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던 중간부터 읽던 계속 읽어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차별과 편견이 보이리라.

 

남성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붕어빵 기계로 찍어놓은 듯 ‘판박이 남성성’에 맞춰 살아왔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이 남성성이라는 정해진 틀을 강요당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성’을 비판할 뿐, ‘남성’ 자체를 악의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부 남성들은 페미니스트가 ‘평범하고 착한 남성’들을 잠재적 성범죄 가해자로 매도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착한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착한 남성’은 여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만든 ‘남자다운 남성성’의 변형이다. ‘착한 남성’ 프레임은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한다. 따라서 이들은 일상 속 성차별, 성범죄를 묵인한다.[2] 짝꿍인 남자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한 지영은 이미 어렸을 때에 ‘착한 남성’ 프레임이 여성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 방해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던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41쪽)

 

 

이 장면을 잘 살펴보면 데이트폭력을 당사자 간의 애정 문제로 가볍게 치부하는 인식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학교는 그릇된 성차(sexual difference)를 재생산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착하다고’ 믿는 부모는 자식이 여자아이를 심하게 괴롭히는 것을 단지 여자아이를 ‘좋아해서 시작한 아이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아이에게 괴롭힘당하는 여자아이와 남자친구가 휘두르는 주먹에 얼굴을 맞는 여자는 그 행위가 ‘폭력’이라고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을 향한 관심의 표현이고 과한 애정 때문이라는 생각에 개인이 감당해야 할 상황으로 받아들인다. 성차에 기인한 젠더 폭력(gender violence)이 ‘착한 남자’ 프레임에 가려지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비단 남성이 저지르는 착각의 제가 아니다. 여성도 프레임의 덫에 한 번 빠져버리면 성차 문제에 둔감해진다. 혼자 귀가하다가 자신을 쫓아오는 남학생에게 봉변당할 뻔한 지영의 곁에 있어 준 여자의 위로는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가벼운 말이 아니다.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69쪽)

 

 

이 ‘좋은 남자’라는 표현은 자신을 ‘착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성들이 선호하는 단어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 혐오와 폭력 앞에 서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착하고 좋은 남자’들은 여성 문제를 몇몇 나쁜 남성, 예외적 남성이 저지르는 일이라고 본다.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을 표방한 소설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온건적 페미니즘)’에 위치한다. (물론, 내 주장이 옳다고 볼 수 없다. 책과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강조한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성공을 가로막는 관습적, 법적 제한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의 원인으로 보고 줄기차게 비판한다. 작가는 이야기에 각종 도서, 신문 기사, 통계 보고서 등 객관적 자료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여성을 불편하게 만드는 다양한 사회 문제를 부각하는 작가의 의도는 좋다. 하지만 작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암시하는 복선이나 결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작가는 여성을 억압하는 그릇된 사회 구조를 직시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개인의 자아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3]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 이것이 ‘급진적 페미니즘’ 관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82년생 김지영》의 한계다.

 

김지영의 잃어버린 목소리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여성’의 것인가.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 여성, 귀화 여성도 여성 혐오 대상이 되고, 가정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 아내는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 문제로 한국인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외국인 아내의 취약성(발화불가능)을 담보로 한 불평등한 부부관계가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망하기 사흘 전에 스물두 살(1986년생, 그녀가 현재 살아있다면 서른 한 살이 된다)의 베트남 여성 쩐타이란 씨는 일기장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녀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한국에 온지 1주일 만에 이혼했다.[4]

 

 

“자기들이 필요해 베트남으로 와서 결혼하자고 한 게 아닌가. 우리는 누구나 똑같은 인간이다. 단지 국적만 다를 뿐이다.”

 

 

여성이 살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냉혹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도식화된 이분법에 익숙한 남성중심 사회에 분노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여성의 목소리이자 '정당한 무기'다. 하지만 이 ‘여성의 무기’를 손에 대지 못한 채 소외되는 여성들도 있다. 과연 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김지영’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공감한 사람들은 ‘우리 모두의 김지영’이 된다. 조남주 작가와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86년생 쩐타이란 씨도 ‘우리’에 포함되는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양하고 복잡한 섹슈얼리티 이슈와 얽힌 고민의 끈을 계속 부여잡는 일이다. 페미니스트는 인종과 계급을 넘어 여성이 연대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 여성=김지영’이라는 도식적인 형태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김지영 신드롬’이 진지한 성찰 없이 ‘한국 여성들만의 공감과 분노’에 그친다면 《82년생 김지영》은 실패한 페미니즘 소설이다.

 

 

 

 

 

 

[1] 엘리자베스 D. 하비 《복화술의 목소리》 (문학동네, 2006)

 

[2] 토니 포터 《맨 박스》 (한빛비즈, 2016)

 

[3]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이매진, 2005)

 

[4] [죽거나 죽이거나 ‘이주여성 잔혹사’]

(시사인, 2009년 3월 5일 / '북플'에서 링크 기능 X)

이 기사에 언급된 '쩐타이란'은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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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7-09-15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도 방금 이 책의 리뷰를 썼습니다. 비슷한 내용인 듯합니다. 남녀는 공존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욕먹을 남정네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일반화할 수는 없으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7-09-16 15:00   좋아요 0 | URL
리뷰로 쓰기 어려운 책이었어요. 왜냐하면 이 책을 읽고 느낀 독자들의 생각이 거의 비슷하거든요.

북프리쿠키 2017-09-16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으로 독서토론을 했습니다.
모임에서 전 주로 이 책의 한계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는데요.
싸이러스님께서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셨네요^^
하지만 많은 남성들이 거부감없이 접근할 수 있게 마케팅한 부분은 성공적이라 생각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러한 담론들이 차근차근
많은 남성들에게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구요.
대결구도가 아닌 좀더 성숙한
방향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아쉬움 또한 크답니다^^














cyrus 2017-09-16 15:06   좋아요 1 | URL
페미니스트 입장에서는 말로 해도 귀 담아 듣지 않는 남성들이 답답해 보일 겁니다. 그래서 공격적인 ‘미러링’을 시도하게 되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미러링을 시도하게 만든 가장 큰 일차적 원인이 페미니즘을 무시했던 남성들의 태도입니다. 그래도 미러링의 역효과를 지적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남성 독자들의 공감을 유도하는 책이라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블랙겟타 2017-09-16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정성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 저는 페미니즘운동의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이 많은데요. cyrus님의 글에서 힌트를 얻고 갑니다.

cyrus 2017-09-16 15:06   좋아요 1 | URL
목표점은 같아도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갈 수 있는 길이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 학문이 페미니즘입니다. 길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싸울 필요 있나요? 이 길도 가고, 저 길도 가보면서 살아야죠. ^^

yamoo 2017-09-1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모 중고서점에서 천원 코너에 있었는데..아니다, 굿윌 양천점이었구나...구매할까하다가 한국소설책드을 처분하는 마당에 구매하면 바로 나가야해서 구매안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 현대작가 작품은 안 읽는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얻는 요즘입니다. 정말 좋은 작품들이 널렸는데...한국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낭비 같은 느김이 자꾸들어서요.

그럼에도 사이러스 님은 이런 소설을 읽고 이리도 정성스런 리뷰를 써 주시네요~ 재밌든 없든 꾸준히 한국작품을 읽고 리뷰 쓰시는 사이러스 님이 존경스럽습니다!

cyrus 2017-09-16 15:09   좋아요 1 | URL
제가 외국 소설만 읽게 되니까 국내 작가들의 활동을 모르게 되더라고요. 국내 문단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아요. 그런 문단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국내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내 소설을 잘 안 읽던 독자가 국내 문단을 까면 설득력이 떨어져 보여요. ^^;;
 
남성성/들 이매진 컨텍스트 42
R. W. 코넬 지음, 안상욱.현민 옮김 / 이매진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한 남자가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수많은 감정의 기복을 겪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믿음.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남자가 그까짓 일로 울면 안 된다라는 시선 때문에 감정을 수축시키며 살아왔다. 특히 한국 남성들은 강한 남자가 돼야 한다는 경쟁심리 속에서 살아왔고, ‘남성성은 어느새 이들의 삶을 살아가는 인식의 지도가 되었다. 남성이 쥐고 있는 이 낡은 인식의 지도가 시대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어떻게 만들었는지 추적한 책이 R.W. 코넬남성성/(이매진, 2013)이다.

 

천지개벽이니 상전벽해니 하는 말로도 어쩌면 부족할 것 같다. 기나긴 세기 동안 있었던 남성성의 형성 과정을 묘사하려면 말이다. 근대의 남성성개념은 한 사람의 행동을 여성성과 견주어서 규정한다. 남성성과 거리가 먼 사람은 종종 부정적인 것(‘눈물이 많은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으로 폄하됐다. 그렇지만 남성성을 성격과 행동 등 개인성(individuality)을 근거로 단순하게 정의하는 것은 젠더 분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젠더가 육체적 경험, 인격, 문화가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면 남성성은 애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 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실천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젠더는 사회적 실천이며 사람들은 남성성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젠더를 배치한다. 저자는 젠더를 배치하는 실천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재생산의 무대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남성 중심적, 남성 우월적 가치평가,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 구조의 재생산적 구조 등을 들 수 있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자란 사람은 가부장제 사회관계를 재생산한다. 헤게모니(hegemony, 주도권)를 잡은 남성들은 여성을 현모양처의 틀에 가둬놓았고, 동성애 남성에게 남성성에 배제된 비정상적 존재라는 낙인을 새겼다. 헤게모니 남성성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특성을 보인다. 국가는 신체가 건강한 남성에게 나라를 지키는 애국심 강한 군인으로, 기업은 일할 수 있는 남성에게 국가 경제의 기둥이라는 이름으로 남성성을 전시하고, 남성에게 주도권을 부여한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 ‘국가 경제의 기둥에 배치되지 못한 동성애 남성과 여성의 능력은 무시 받고, 자연스럽게 사회적 지위가 격하된다. 동성애 남성, 트랜스 남성(female-to-male transgender)은 헤게모니 남성성을 실천하는 재생산의 무대에서 추방당하는 종속된 남성성 된다.

 

최근에 와서 전통적인 성역할 구분은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에 장애요인이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성역할의 이상적인 모델로서 심리적 양성성의 개념을 제시한다. 심리적 양성성이란 한 개인이 강인한 남성성과 섬세한 여성성 모두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양성적인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남성적 역할과 여성적 역할을 융통성 있게 적절히 수행할 수 있다. 잃어버린 남성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대안 중 하나가 심리적 양성성이다. 현실에서 무너진 헤게모니 남성성(실추된 권위)심리적 양성성으로 보상하려 한다. 하지만 심리적 양성성을 중심으로 한 남성 운동은 기껏해야 단순 논리 차원에서 남성의 권위만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출 뿐이며 가부장적 구조의 기반을 다시 세우는 데 일조한다. 또 성차별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다.

 

남성성은 헤게모니 남성성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젠더 질서에 가장 높은 정점에 위치한 헤게모니 남성성은 남성성의 모범으로 자리 잡아 동성애 남성이나 트랜스 남성 같은 특정 유형의 남성성을 차별하고, 혐오한다. 헤게모니 남성성을 수호하는 남성은 자신이야말로 진짜 사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진짜 사나이란 없다. 오늘날 혐오와 차별을 양산하는 재생산의 무대위의 주인공은 남성이다. 그들이 입고 있는 무대복은 헤게모니 남성성이다. 이제 여성들도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남성을 위한 연극을 끝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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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15 22:35   좋아요 1 | URL
살아있는 존재는 서로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관계축이 한쪽으로 쏠리면 문제죠. 그렇다고 다른 존재를 아예 없으면 평형 관계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sprenown 2017-09-1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모두 남성성과 여성성을 같이 갖고 있지 않나요? 상황에 따라 그 성향이 발현되고요..다만 남성성이 지나치게 우세하고, 그걸 장려하는 사회문화가 문제라는 것은 알지만요.

cyrus 2017-09-16 05:18   좋아요 1 | URL
칼 융이 남성과 여성이건 모두 적어도 남성성과 여성성 일부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주장을 선호합니다. 남성 운동론자들이 이 주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문제는 남성이 유리하도록 해석합니다. 양성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전히 레즈비언의 남성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 남아 있습니다.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 - 과학과 사회를 관통하는 생각의 힘을 찾다!
김동광 외 지음 / 궁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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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미래’를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미래’라고 하면 어두운 불안보다는 무엇인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희망을 떠올린다. 현재는 비록 어둡고 괴롭더라도 언젠가 가능성의 미래가 있기에 참고 이겨나가는 것이 인간사가 아니던가. 과학은 세상의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를 좀 더 바람직한 상태로 변화시키는 과정에 기여한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과학은 세상을 분명한 것으로 그려냈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해당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은 언제 어디서 ‘불확실성’이라는 괴물로 변할지 모른다. 아무리 과학기술을 잘 활용하여 변화를 촉발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변화가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 어떠한 결과와 영향을 가져올지 명확하게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사회 현상을 일으키는 복잡한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과학 지식을 우리가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불확실성으로 충만해 있다. 따라서 정부 관료나 과학자 등 권위를 가진 전문가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내놓거나 정책을 입안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과학센터’에 소속된 총 여덟 명의 과학기술 사회학(science technology & society, STS)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주적 논의와 토론’을 강조한다.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궁리, 2017)는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여덟 가지 사회 문제(구제역, 변형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유전자변형식품 논란, 화학물질 규제, 우울증 치료법, 핵발전소의 안정성,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 기후 변화 대응 방안)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진지한 생각 거리를 던져준다.

 

구제역은 전염성이 강해 세계동물보건기구가 인정한 가장 위험한 A급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다. 구제역은 일단 발병하면 불가항력적이다. 정부는 전염병 확진 판정이 난 농장은 물론 주변의 돼지와 소, 염소, 양, 사슴을 모두 살처분한다. 2010년 최악의 구제역 사태 당시, 살처분에 참여한 공무원의 70% 이상이 환청이나 불면증 등 정신적 후유증을 겪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대응은 극히 제한적이다. 정부의 조치는 소독과 이동제한, 살처분이 고작이다. 무자비한 가축 살처분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김동광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연구소 연구원은 구제역의 피해에 대한 판단을 독점하고, 가축 방역에 대한 낮은 의식을 가진 정부의 자세를 비판한다. 가축전염병으로 인해 수조 원의 피해가 발생했지만 가축방역 전담조직은 미미하다. 체계적인 방역 장비 및 시스템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다. 정부는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의 대책을 내놓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건 큰 문제다.

 

김병수 시민과학센터 부소장의 글은 유전자변형식품을 둘러싼 찬반 입장이 균형 있게 정리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GM 어류에 내용이 나온다.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 유전자를 조작시킨 식품개발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이의 유해성에 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문제는 유전자변형식품이 인체 내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가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연식품의 경우 인간이 오랫동안 섭취해온 것이라 인체가 완벽히 적응된 상태다. 그러나 유전자변형식품은 인체로서는 전혀 접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어서 인체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다는 게 과학자들의 지적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유전자농작물로 만들어진 가공식품에 유전자조작 여부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유전자농작물의 수입, 판매를 금지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유전자변형식품 표시제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소비자의 알 권리를 크게 제한할 소지가 있다.

 

막대한 건설비, 안전성, 핵폐기물 처리 문제 등을 둘러싸고 원전의 안전성과 장래에 대해 끊임없이 논란이 일고 있지만, 원전은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전원(電源) 중에서 효율성과 경제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에너지 자원이 없다시피 한 우리나라로서는 원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박진희 시민과학센터 소장과 이영희 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한계와 필요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원전 딜레마’를 풀기 위해서는 원자력을 다루는 사회적 합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정-발표’로 이어지는 정부의 권위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시민 사회와 정부, 원자력 사업자가 함께 원전 문제 및 탈핵 대안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는 과학 논리만으로 다 해명되지 않는 과학 안의 갈등, 논쟁, 권위 같은 사회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과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과학지식의 절대적 권위에 익숙하고, 과학기술을 마치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예상 가능한 확실성으로 착각하는 이들에겐 낯설기까지 하다.

 

정치 세력 혹은 정치적 이념이 과학에 의지하면 돈 혹은 명예를 누리려는 기회주의자들이 빌붙게 마련이다. 이런 세력이 퍼뜨리는 거짓 정보에 속지 않으려면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무지가 낳은 편견은 어떤 자기 검열 과정을 무시하고 거짓과 교만을 먹이 삼아 자란다. 집단적 편견이 지배 담론으로 일방적으로 행세하는 사회가 되면 사회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활성화하지 못한다. 사회적 갈등에 대해서는 그 갈등을 야기한 쟁점을 충분히 공론화해서 이해당사자들뿐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 숙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숙의란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하는 자세이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논의와 사회적 학습이 중요하다. ‘확실한 해답’만 찾으려는 논쟁은 타협할 수 있는 값진 학습기회를 포기하는 일이다. 그 결과 사회의 불확실성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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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적 논의와 토론’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죠.

cyrus 2017-09-14 19:09   좋아요 0 | URL
당연한 건데, 우리 사회의 현 상황을 봐서는 힘들어 보입니다. ^^;;

표맥(漂麥) 2017-09-14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 ‘미래’는 밝음이었지만... 지금은 우울할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항상 한 귀퉁이를 붙들고 있습니다... 과학을 공부하면 불안이 좀 줄어들까요? ^^

cyrus 2017-09-14 21:00   좋아요 0 | URL
과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아직 과학이 풀지 못한 현상이 많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만능 열쇠‘가 될 수 없습니다. ^^

감은빛 2017-09-1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과학자 혹은 전문가에게만 맡겨서는 절대 안된다는 걸
황우석 사태 때 뼈저리게 느꼈을텐데,
지금 핵마피아들은 또 똑같은 말들을 반복하고 있네요.
그들이 소위 전문가라면,
탐욕에 눈이 멀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스스로 깨우쳐야 하지 않을까요?

cyrus 2017-09-15 22:4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원전’, ‘핵폐기물 처리’ 문제를 다룬 두 편의 글이 나옵니다. 그런데 탈핵 문제를 심도 있게 접근하는 감은빛님의 수준을 생각하면 아주 기본적인 내용만 소개하는 글로 보일 수 있습니다.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어요. ^^;;

sprenown 2017-09-15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과학의 조직된 회의주의 정신은] 과학이 다른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저항의 원천이 된다. 종교계 쪽에서의 저항은 경제나 정치적 그룹의 저항에 비해서 이제 덜 중요해졌다. 최근 저항들은 과학의 특정한 발견이 종교, 경제, 정치의 영역에서의 도그마를 부인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저항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최근의 저항들은 과학의 회의주의가 기존 권력의 분배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타나는 상당히 모호하지만 넓게 확산되어 있는 양상을 띤다. 머튼, 「과학의 규범적 구조」 (1942) 중에서

cyrus 2017-09-15 22:48   좋아요 0 | URL
지나친 회의주의는 과학을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학문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저는 과학의 회의주의가 삶을 즐겁게 해주는 상상력까지 제한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화성 연대기》는 ‘화성’을 소재로 한 28편의 단편소설을 연작 형태로 꾸민 작품이다. 1950년에 처음 출간된 이후로 두 편의 작품이 추가되면서 여러 권의 판본이 나왔다. 그래서 국내 번역본(샘터, 2010)에는 2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다행히 나머지 두 편도 번역되었고,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 문신을 새긴 사나이와 열여덟 편의 이야기》(황금가지, 2010)《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편》(현대문학, 2015)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 …In This Sign / November 2002 : The Fire Balloons (1951)

불덩어리 성상

 

 

 

 

 

 

 

 

 

 

 

 

 

 

 

 

 

 

* The Wilderness / May 2003 : The Wilderness (1952. 11)

황야

 

 

 

 

『불덩어리 성상』 1974년 영국에 출판된 《화성 연대기》(원제는 ‘The Silver Locusts’)에 처음 수록되었다. 그 후 1979년 보급판, 출간 40주년 기념판에도 수록되었다. 『황야』는 1974년 영국 판본, 1979년 보급판, 1997년 판본 순으로 수록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1997년 판본은 ‘31년 후’의 미래를 묘사한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 1950년 제1판본의 연대는 1999년부터 2026년까지 설정되었고, 1997년 판본의 연대는 2030년부터 2057년까지 정해져 있다. 연대는 달라도 제1판본 내용과 똑같다.

 

 

 

 

 

 

《화성 연대기》 (국내 번역본) 수록작 원제와 발표연도

 

 

 

* The Watchers / November 2005: The Watchers (1945. 5)

200511월 지켜보는 사람들

 

 

* The Million-Year Picnic / October 2026: The Million-Year Picnic (1946)

202610월 백만 년짜리 소풍

 

 

* ...And the Moon be Still as Bright / June 2001: And the Moon be Still as Bright (1948. 6)

20016월 달은 지금도 환히 빛나건만

 

 

* The Earth Men / August 1999: The Earth Men (1948. 8)

19998월 지구인

 

 

* The Long Years / April 2026: The Long Years (1948. 9)

20264월 긴 세월

 

 

 

 

 

 

 

 

 

 

 

 

 

 

 

 

 

* 최세진 외 공역 SF 명예의 전당 2 : 화성의 오디세이(오멜라스, 2010) 

 

 

* Mars Is Heaven! / April 2000: The Third Expedition (1948)

화성은 천국! ('오멜라스' 번역본 제목) / 200043차 탐험대

 

 

 

* The Off Season / November 2005: The Off Season (1948. 12)

200511월 비수기

 

 

* The Spring Night / August 2005: The Summer Night (1949)

1999년 8월 여름밤

  

 

* The Silent Towns / December 2005: The Silent Towns (1949. 3)

200512월 적막에 휩싸인 도시들

 

 

* Impossible / September 2005: The Martian (1949. 11)

20059월 화성인

 

 

* I’ll Not Ask for Wine / February 1999: Ylla (1950. 1)

19992월 일라

 

 

* Carnival of Madness / April 2005: Usher II (1950. 4)

20054월 어셔2

 

 

 

 

 

 

 

 

 

 

 

 

 

 

 

 

 

* 김상온 역 최후의 날 그후 : SF거장 14인이 그린 핵전쟁 그 이후의 세상

(에코의서재, 2007)

 

  

* August 2026: There Will Come Soft Rains (1950. 5)

부드러운 비가 올 거야('에코의서재' 번역본 제목) / 20268월 부드러운 비가 내리고

 

 

* December 2001: The Green Morning (1950)

200112월 녹색 아침

 

 

* August 2002: Night Meeting (1950)

20028월 한밤의 조우

 

 

* June 2003: Way in the Middle of the Air (1950)

20036월 하늘 한가운데 난 길로

 

 

* January 1999: Rocket Summer (1950)

19991월 로켓 여름

 

 

* February 2003: Interim (1950)

20032월 그 사이에

 

 

* February 2002: The Locusts (1950)

20022월 메뚜기 떼

 

 

* November 2005: The Luggage Store (1950)

200511월 가방 가게

 

 

* April 2003: The Musicians (1950)

20034월 연주자

 

 

* August 2005: The Old Ones (1950)

20058월 노인들

 

 

* August 2001: The Settlers (1950)

20018월 이주자

 

 

* October 2002: The Shore (1950)

200210월 바닷가

 

 

* March 2000: The Taxpayer (1950)

20003월 납세자

 

 

* 2004-05: The Naming of Names (1950)

2004~2005년 이름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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