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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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방영된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는 미니시리즈와 농촌드라마를 결합한 색다른 드라마였다. 동명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제목 그대로 포도밭을 배경으로 한 전원 로맨스다. 촌스러운 시골 총각 장택기(오만석 분)와 깍쟁이 도시 아가씨 이지현(윤은혜 분)이 농사를 지으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택기는 무뚝뚝하면서 까칠한 성격의 청년이다. 지현에게 항상 시비조다. 지현은 포도밭을 차지하겠다는 큰 꿈을 안고 택기와 함께 시골 생활을 하게 됐지만, 쉽지 않다. 지현은 인터넷 한 번 이용하는 것마저 택기의 눈치를 받을 만큼 사생활의 제약을 받는다. 게다가 편하게 샤워할 곳도 없을 만큼 생활시설이 열악하다. 그렇지만 택기는 고단한 농촌생활을 '힘들지만 가치 있는 삶'으로 생각한다.

 

《텍스트의 포도밭》에 가면 그 사나이가 있다. 그는 12세기부터 포도 덩굴 같은 텍스트를 가꾸면서 홀로 지키고 있다. 수도사 후고는 텍스트를 보고 느끼면서 얻은 진리의 양분을 축적하여 <디다스칼리콘>이라는 자신만의 포도밭을 농작했다. <디다스칼리콘>에는 후고가 포도밭을 정성스럽게 대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과정이 바로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이다. 후고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 즉 '렉티오 디바나(Lectio Divina)'는 오늘날의 읽기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후고는 신과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 몸과 마음, 영혼을 다해 성서를 읽었다. 후고를 비롯한 중세의 수도사들은 한 구절이나 한 줄을 여러 시간이나 여러 날에 걸쳐 읽었다. 종이 위에 덩굴로 자란 텍스트 밭을 거닐면서 알알이 열린 포도알을 조심스럽게 따낸다. 그 속에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양분이 숨어 있다. 그것은 수도사들이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incipit, 인시피트) 첫째로 손꼽히는 지혜다. 수도사들은 이 양분을 얻기 위해서 숙고의 시간을 가진다.

 

먼저 자세와 호흡, 마음을 가다듬은 뒤 텍스트를 천천히 소리 내서 읽는다. 이후 다시 한 번 묵독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으면 필사했다. 수도사의 공부 방식(studium, 스투디움)은 기본적으로 읽기와 필사를 반복한다. 종이에 기록한 것들을 천천히 반복 암송한다. 그리고 그 구절들을 기억하거나 쪽지에 기록해 일상생활에서도 되새긴다. 후고는 읽기 행위에 절대로 빠져선 안 될 전제 조건으로 '기억력'을 강조한다. 기억력 훈련이 잘되면 텍스트에서 발견한 지혜의 보물들을 보관한 상자를 이용할 수 있다.

 

 

아이야. 지혜는 보물이며 네 마음은 보물을 담아두는 곳이다. 지혜를 배우면 귀중한 보물을 모으는 것이다. 지혜의 보물은 여럿이며, 네 마음에도 감출 곳이 여럿 있다. 여기에는 금, 저기에는 은. 너는 이 자리들을 구분하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것 저런 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할 수 있다.

 

(이반 일리히가 후고의 책에서 인용한 문장, 《텍스트의 포도밭》 56쪽)

 

 

사실 암기로 책을 읽는 시대는 한물갔다. 후고가 살았던 시대에서 '기억'이란 교양인의 삶을 한시도 떠나선 안 되며 부단히 단련시켜야 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몽테뉴는 암기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단순 암기의 독서법을 비판했다. 기억은 이성적 사유를 방해한다. 그저 암기한 것을 그대로 종이 위에 뱉어낸 토사물들은 지혜로 손쉽게 포장된다. 그것은 '쓰레기 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기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후고의 독서법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후고의 기억력 훈련은 단시간 내에 지식을 획득하는 데 쓰이는 오늘날의 기억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도사들의 기억력 훈련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수도사들은 텍스트의 지혜를 자신의 삶에 흡수하여 소화하기 위해서 독서를 했다. 그들의 독서는 일상적이다. 물이나 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해지듯이, 독서는 지속적인 읽기가 중요하다. 기억력 훈련은 독서의 일상적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예(artes, 아르테스)였다.

 

독서법은 다양하다. 다만 무조건 단 하나의 독서법이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책 읽는 과정은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결국, 다양한 독서법이 지혜에 목마른 우리 앞에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텍스트의 포도밭을 오랫동안 지킨 ‘중세인’ 후고와 그를 만난 ‘근대인’ 이반 일리히는 마음과 영혼을 살찌우는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터넷 도시에 거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알려준다. 인터넷 도시에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축재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남이 올려놓은 인터넷 정보를 통해 지식을 얻는다. 인터넷의 지식에 의존한 우리는 지식의 이해가 깊어진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읽는 행위를 잊어버린 현대인은 책 속의 문장과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 소화하지 못한다. 인터넷은 우리의 지식습득 능력을 확대하지만, 사유와 성을 방해한다. 지식을 쉽게 습득한다고 해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후고의 책 속에는 인터넷 시대의 공부법에 대한 성찰적 기반이 되어주는 답이 묵직하게 담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우둔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여 애써 지식을 쫓고, 쉬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간다. 이들은 노력의 결과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의지력의 결과로 얻을 자격이 있다.

 

(이반 일리히가 <디다스칼리콘> 서문에서 인용한 문장, 《텍스트의 포도밭》 117쪽)

 

 

속독이 요구되는 시대에도 음식물을 꼭꼭 씹어 먹듯이 글을 음미하며 읽는 것이 필요하다. 후고는 매일 텍스트의 포도밭 한가운데서 우직하게 공부했다. 비록 텍스트를 거치는 동안 수차례 실패를 겪게 되더라도 그렇게 힘들게 터득한 지혜는 정말 소중하다. 공부와 독서에는 왕도(王度)가 없다. 공부와 독서는 자랑거리를 위한 유희가 아니다. 책 속의 영양분을 골고루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공부는 '힘들지만 가치 있는 삶'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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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0-0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밭 그 사나이가 원작이 있었구나. 근데 외국작품일 거라곤 정말 생각 못했네. 정말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씹어 먹듯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할 책은 많고 읽는 시간은 한정되 있고 그래서라도 속독을 배워보고 싶은데, 막상 낭비되는 시간이 더 많거든. 그거 모아다 읽어도 충분할 것 같긴해.

stella.K 2016-10-02 18:20   좋아요 0 | URL
헉, 근데 확인해 본 결과 드라마와 책은 같은 게 아니었군.
나의 완벽한 오독인건가...?ㅠㅋㅋ

cyrus 2016-10-02 18:24   좋아요 0 | URL
원작소설이 한국 작가가 썼어요. 작가 이름은 `김랑`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6-10-02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감하는 내용입니다.
비슷한 류의 책은
욕심을 자제하고
바이블이 되는
한권의 책을 여러번 깊이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블라디미르 나브코프가
˝책은 읽을 수 없다.
다만 여러번 읽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재독의 중요성을 말했고,

히라노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서도
슬로우 리딩의 가르침이 눈에 띄었답니다.

싸이러스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시죠?^^/








cyrus 2016-10-02 18:29   좋아요 1 | URL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이미 읽었던 책의 내용을 몰라서 다시 읽거나 아니면 비슷한 주제의 책을 읽어요.

예를 들면 상대성이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괜찮은데, 이게 잊어버려서 상대성이론에 대한 책을 또 읽어요. 상대성이론을 쉽게 소개한 책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어요.

내일도 쉴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북프리쿠키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아무 2016-10-0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 덩굴 같은 텍스트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사실 알고 싶은 게 많다보니 많이 읽고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소화하고 있는지도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죠.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니까요.. 여러모로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네요ㅠ 남은 휴일도 편안히 보내시길..^^

cyrus 2016-10-03 09:44   좋아요 0 | URL
텍스트를 포도밭에 비유한 사람이 이반 일리히입니다.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독의 효과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다독에 집중하는 바람에 재독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

아무님도 연휴 잘 보내세요. ^^

yureka01 2016-10-02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식의 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것만큼 지혜의 안목도 비례해서 늘어야 하는데 오히려 반비례되면 아주 곤란하거든요..포도 넝쿨같은 텍스트로 근사한 삶의 와인이 숙성되어 익어갔으면^^..

cyrus 2016-10-03 09:45   좋아요 0 | URL
삶의 와인, 탐나는 표현입니다. ^^

우마우마 2016-10-03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도사의 독서법은 무척 따라해보고 싶네요! 아무래도 경전 공부에 특화된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요 ㅎㅎ 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웹에 흩어진 텍스트를 그렇게 많이 봐도 역시 책으로 묶인 것을 읽는 경험이 즐거운 것 같아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6-10-03 09:49   좋아요 0 | URL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듯이 필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공부 방법이라기 보다는 정신 치유 목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인터넷의 정보 대부분은 출처가 불명확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꺼립니다. 아무래도 책에서 찾아보는 것이 더 믿을만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쉽습니다. ^^

파트라슈 2016-10-0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그사 정말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데요. 윤은혜도 예쁘게 잘 나왔던 드라마인데 요즘 윤은혜 중국서 사고치고 다니는 것 같음.ㅎㅎ 오만석도 연기 좋았지요.

cyrus 2016-10-03 21:21   좋아요 0 | URL
이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했을 때 말이 많았었죠. 시작하기 전부터 미스캐스팅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어요. 두 사람의 행보가 너무 달라졌어요. 윤은혜의 전성기 마지막은 커프1호인 것 같습니다. 국내에 복귀해도 궁, 커프 시절의 인기를 얻기 힘들 겁니다.

transient-guest 2016-10-04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꺼리가 많아진 시대와 그렇지 못했던 시대의 차이 (및 무수히 많은, 다른 삶의 방식과 자세까지)에서 오는 다른 독서방법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경건하게 책을 대하고 천천히 읽고 암송하는 건 좋은 방법인데, 우리가 사는 시대의 다수에겐 조금 요원한 듯 합니다. 좀더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시기가 오면 잘 정리된 서재에서 이런 독서도 해보고 싶네요.ㅎ

cyrus 2016-10-04 18: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이 팔리지 않는 세상에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기대하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ㅎㅎㅎ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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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1]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데 익숙하다. 어디서 무엇을 잘한다는 입소문이 나면 시간을 내서라도 한번 찾아가 먹어보고 자신도 맛집 소문을 퍼뜨리는 대열에 기꺼이 합류한다. 우리는 가벼운 쾌적함에서 극단적인 관능에 이르기까지 감각적 쾌감을 기꺼이 즐긴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에게 쾌감의 실체는 경험으로 육체에 기록되고 기억된다. 특히 먹고 마시는 행위는 가장 원초적인 쾌락이다.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이 탐식의 쾌락과 겹쳐 있다. 우리는 좋은 식사를 하고 나면 특별한 행복감을 누린다. 표정이 밝아지고 혈색이 좋아지며, 눈은 빛나고 부드러운 열기가 온몸에 퍼진다.

 

하지만 중세 유럽의 가톨릭 세계관에서 탐식은 죄악으로 취급받았다.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지금도 '먹방' 신드롬의 영향력은 여전하나 고열량 음식을 피하고, 건강 식단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고열량 음식은 단지 높은 칼로리 때문이 아니라, 미각을 통해 뇌를 자극하는데 그 위험성이 있다. 고열량 음식이 뇌의 쾌감중추를 자극하고 지속적인 자극이 발생하면 음식중독으로 이어진다. 본인 의지로 체중 조절이 어려워져서 비만이 되고 건강까지 악화시킨다. 그러니까 종교의 힘이 약화된 오늘날에도 탐식은 현대인의 대죄인 셈이다.

 

먹는 것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 미식가의 조상님 브리야 사바랭이다. 다만 사바랭보다 먼저 먹는 행위의 탐닉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프랑수아 라블레다. 라블레가 살았던 15세기의 유럽은 르네상스로 무르익은 시기였다. 그렇지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요하는 가톨릭의 힘은 여전했다. 라블레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로 활동하면서도 인간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시대로 변화하는 흐름을 몸으로 느꼈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개성을 가진 인물들을 창조했는데, 라블레의 정신을 통해 잉태된 인물들이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두 거인 부자(父子)는 쾌락을 향유하는 생기 넘치는 자들이다. 오히려 삶의 기쁨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위선적인 삶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두 거인이 태어나는 과정이 범상치 않다. 게다가 먹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가르강튀아의 어머니 가르가멜은 임신한 상태에 36만7천14마리의 소 내장을 먹어치웠다. 진통이 오기 시작하자 가르가멜은 있는 힘껏 배에 힘줬는데 처음에 나온 것은 태아가 아니었다. 그 전에 먹었던 소 내장 때문에 늘어난 직장이 항문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 가르가멜은 무사히 건강한 가르강튀아를 출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가르강튀아가 밖으로 나오는 과정이 기이하다. 가르강튀아는 가르가멜의 왼쪽 귀로 나왔다. 울음소리도 특이하다. "응애, 응애"가 아니라 "마실 것!, 마실 것!"이다. '자이언트 베이비' 가르강튀아에게 젖을 먹이는 데 필요한 암소의 수는 무려 1만7천9백13마리다. 팡타그뤼엘은 유아기 때 4천6백 마리의 암소 젖을 먹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두 거인이 과식하는 장면은 생각보다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후대의 예술가들은 거인들이 과식하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 인상 깊었는지, 재창작 소재로 사용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묘사한 삽화가 구스타브 도레는 절정의 행복감에 젖은 채 음식을 먹는 행위 속에 인간 본연의 욕망을 읽었으리라. 라블레와 도레는 탐식하는 거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음식을 먹어도 실컷 먹을 수 없었다. 매일 먹는 기름진 음식의 향기만 맡는 것이 서민들에게는 평생의 꿈이었다. 서민들은 멀건 죽과 풀뿌리로 연명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가톨릭 금욕주의는 허기진 서민들을 아주 초라하게 만들었다. 성직자들은 서민들이 탐식에 빠지면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순진한 서민들은 "그래, 천국에 가기 위해서 고기 못 먹으면 어때?"라면서 자기 위안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신의 교리를 설파하는 성직자들의 모순에 실망한다. 성직자들의 식탁에 술과 고기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수도원 생활을 했던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의 입을 빌려 탐식 욕망을 숨기면서 몰래 즐기는 성직자들의 이중성을 조롱한다. 성직자들은 신을 믿는 신자들의 욕망을 '돈줄'로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면죄부를 팔았다.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가져간 돈은 성직자들의 배를 채웠고, 사악한 냄새를 풍기는 똥으로 나왔다. 

 

 

 

 

"수도사의 겉옷과 소매 없는 외투가 세상의 치욕과 욕설, 저주를 불러온다는 것보다 자명한 사실은 없소. 그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세상 사람들의 똥, 다시 말해서 죄악을 먹기 때문이라오." (제6장 46~47쪽)

 

 

쾌락주의자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면서 눈부신 생산성을 올리는 사람들이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독자들에게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쾌락주의자가 되라고 말한다. 먹고 마시고 웃고 수다스러워질 것.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식탐은 ‘먹방’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먹방’은 폭식을 부추기는 ‘푸드 포르노’의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거인의 ‘먹방’은 저급하지 않다. 위선적인 성직자들의 폭식이야말로 탐욕을 절제할 줄 모르는 비대한 욕망에 지배당한 것이다. 거인들이 먹는 행위는 생존, 특히 행복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를 유형화하는 표현 방식이다. 가톨릭이 지배하는 각박한 현실에 지친 15세기의 프랑스인들은 맛난 음식을 먹는 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건강한 쾌락은 일상의 활기를 불어넣는 기폭제가 된다.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을 지나치게 억압할수록 정신이 건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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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0-01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한 번 읽는다는 걸 지금은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런데 내용이 그런거였군.

김명민 베바에서 정말 탱탱했군. 여기서도 좋긴했지만
이순신과 하얀거탑이 최고지 않나 싶다.ㅋ

cyrus 2016-10-01 20:19   좋아요 0 | URL
진짜 특별한 내용 없어요. 황당한 에피소드가 많이 나와요. 그리고 인물들이 똥, 불알 같은 용어를 편하게(?) 말합니다.

베바가 했을 때 저는 군 복무하고 있어서 드라마를 못봤어요. 군대 아니었으면 본방사수했을 거예요. ^^

비연 2016-10-01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르강튀아...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베바는 제가 본방사수한 몇안되는 드라마 중 하나에요. 김명민은 정말... 베리굿 이었죠. 요즘엔 이런 드라마 찍고 있는지.

cyrus 2016-10-02 16:45   좋아요 0 | URL
라블레의 소설이 다시 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책에 나오는 내용 절반이 상스러워도 시대를 앞서간 표현법과 서술 방식은 지금 봐도 놀랍습니다.

역시 베바를 많이 본 분들이 많군요. 제가 보고 싶은 드라마는 하필이면 군 복무 시기에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

yureka01 2016-10-02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요.탐식도 문제고 거식도 문제죠..
하여간 음식에서만큼 정적성을 염두하지 않으면
몸이 맛탱이 가거든요.

몸이 맛이가면, 무얼 먹어도 맛이 오지는 않으니까요..

뭐든 잘 왔다가 적당하게 가야 되는 썰물과 밀물의 맛.ㅎㅎㅎ^^

cyrus 2016-10-02 16:47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비유입니다. 절제하는 삶도 아주 중요하죠. 통풍 진단을 받고 난 이후로 절제의 중요함을 몸소 깨달았습니다. ^^;;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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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나쁜 인터넷은 정신의 독약이며, 정신의 파멸을 가져온다. [주1]

 

먼지바람이 휩쓰는 길 한가운데에 두 총잡이가 최후의 결투를 준비한다. 구경꾼들은 결투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본다. 침묵 속의 기 싸움이 구경꾼들을 압도한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이 지지하는 총잡이가 이 결투를 어서 빨리 끝내주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총잡이는 자신이 아끼는 리볼버 권총을 쓰다듬는다. 상대가 따라 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비장한 사격 솜씨를 내보일 준비 한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클리셰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결투와 싸움이 벌어진다. 권총을 대신한 무기가 댓글이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려고 저격하는 상황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서부영화에서 악당이 빠질 수 없듯이 인터넷에서도 게시판 전체 분위기를 흐리게 만드는 누리꾼 집단이 존재한다. 그들은 차마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욕을 하거나 상대방을 비방하는 악성 댓글, 이른바 ‘사이버 폭력’을 일으킨다. 평화로운 게시판은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로 변한다. 팝콘을 먹으면서 댓글 싸움을 구경하는 누리꾼들이 늘어난다. 댓글 싸움에 서부영화의 총싸움에서 허용되지 않는 특별한 무기가 동원된다. 그것은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는 특별한 ‘방패’다. 댓글로 공격한 누리꾼은 이 방패로 삼아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보호한다. 그것이 바로 ‘익명’이다.

 

익명성은 분명 매력적이다. 특히 과거 감시와 통제의 그늘 속에 속박받던 세대들에게 그 가치는 충격적일 정도의 경이로운 일이다. 이데올로기로서 이미 그 효용가치를 상실한 공유와 평등은 인터넷으로 다시금 부활했다. 자연히 구성의 개체에 불과했던 개개인의 힘은 막강해졌다. 그러나 매혹적인 만큼 위험도 있다. 권위의 문턱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익명의 힘은 누리꾼들의 자유를 침해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고립시킨다. 급기야 통제 불가능한 괴물로 변한다. 대중매체를 휘어잡으려는 세력이 인터넷 괴물들을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대중을 선동한다. 《댓글 부대》는 익명에 숨어들어 괴물로 둔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Scene #2

 

“내 친구들이여, 세상에 친구란 없다네.” [주2]

 

《댓글 부대》가 갖는 섬뜩함은 ‘접속하는 순간, 당신도 교묘한 선동 전략에 당할 수 있다’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다중 인격 사회’와 같다. 일상에서는 평범한 사람, 컴퓨터 화면 안에서는 상대방의 삶을 갉아먹는 괴물. 댓글 부대 ‘팀-알렙’의 ‘찻탓캇, 삼궁, 01某10’은 그러한 사회악을 일삼는 부류들이다. 이 세 사람은 가면을 쓰면서 여론 전체를 뒤흔들고, 사람들의 심리를 조종한다. 여론 조작의 동기가 밝혀지기 전까지 우리는 그들이 꾸민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 일이 자꾸만 누적될수록 댓글 부대는 이중인격자 집단이 되어간다. 소설 초반부에 칫탓캇이 신문기자 임상진에게 댓글 부대의 실체를 알리는 장면과 이 소설의 결말을 겹쳐 보시라. 은밀한 속임수와 폭력성이 익명성과 만나 극대화될 경우 얼마나 끔찍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지금 인터넷 웹(internet web) 어디선가 칫탓캇과 같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먹잇감을 노리기 위해 누리꾼들이 모인 곳에 인터넷 거미줄(wed)을 잔뜩 치고 있다. 거미줄에 걸린 누리꾼은 수많은 정보가 오가는 인터넷에서 허구와 진실을 가려내지 못한다. 댓글 부대는 허구와 진실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미끼를 만들어낸다.

 

 

 

 

 

 

이중적 인격을 지닌 사람은 사회적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다. 그들이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지킬 박사에서 하이드로 금방 변하는 과정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01某10처럼 대인관계 능력이 부족한 소극적인 새가슴도 인터넷 공간에서 사악한 속임수에 동참하는 게 이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의 01某10은 칫탓캇과 삼궁에 비해 인간적으로 약점이 많은 편이다. 그렇다고 그가 만만하게 봐야 할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칫탓캇과 삼궁보다 더 위험한 인물일 수도 있다. 01某10은 상대방이 자신의 약점을 간파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약점을 감추려고 유흥업소 여자들과 어울리는 자신의 행동을 동료들에게 과장하면서 말한다. 01某10은 일상에서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어설프게 행동하는 반면, 인터넷에서는 댓글 부대 조직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일부러 만들어서 드러내는 일에 참여한다. 01某10의 이중적 심리는 가상과 현실을 착각하여 생긴 심각한 병이다. 그는 맥플리커 증후군 환자다. 맥플리커 증후군에 시달리면 대인관계를 맺기를 원해도,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인관계가 맺기 힘든 현실에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는 인터넷이다. 그곳에서 있으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살펴보지 않아도 된다. 특히 익명성은 불안정한 01某10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치부를 숨길 수 있고, 타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댓글 부대 활동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01某10은 정말 ‘인터넷을 위해 태어난 인간’이 맞다. [주3] 열등감이 많은 그가 인터넷을 접할수록 마치 자신이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01某10은 나르시시즘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약점을 노리고, 비방하는 댓글 부대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01某10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시라. 현실의 어수룩한 양이 ‘쇼타임’을 즐기려는 순간, 인터넷의 포악한 늑대로 급변하는 모습을.

 

 

 

Scene #3

 

인간 :

자기 마음속에 그리는 제 모습에 도취되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동물 [주4]

 

《댓글 부대》를 읽은 독자들 누구나 댓글 부대의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한 번쯤 생각한다. 그만큼 이 소설의 미덕은 소재 자체가 품고 있는 선정성을 깊이 파고들었다는 점에 있다. 인터넷 여론선동이라는 소재로 인간의 이중적 정서에 다가서려 했다는 점에서 《댓글 부대》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댓글 부대》는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음모를 그린 흥미진진한 소설이 아니다. 그리고 《댓글 부대》는 실패한 작품이 절대로 아니다.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척척 진행되는 전개가 작가의 과장된 비약으로 보지 않는다. 《댓글 부대》는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인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속이는 자아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 사회에 적지 않은 생각 거리를 던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 대부분 인간은 본성을 숨긴 채 거짓된 얼굴로 살아간다. 양심도 죄의식도 없이 타인이 고통당하는 과정을 놀이처럼 생각하는 댓글 부대원들의 모습은 파괴적인 본성을 가진 인간의 초상이다. 이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댓글 부대원의 모습에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사실 댓글 부대의 ‘쇼타임’보다 더 무서운 게임이 펼쳐진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남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들여다보고, 들불처럼 번지는 인터넷 마녀사냥에 동조하여 희열을 느끼는 우리가 과연 익명이라는 무기와 폭력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한 번쯤 돌아보게 한다. 관음적인 엔터테인먼트가 일상인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다. [주5]

 

아직도 《댓글 부대》가 일상의 현실을 침투한 작가의 상상력만 기억 남는 음모론적 작품으로만 보이는가. 책을 덮은 후에 댓글 부대의 실체 여부를 상상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소설의 이야기가 현실에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따라서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 그리고 구경꾼이 될 수 있다. 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두 모이면 ‘진짜 쇼타임’이다.

 

 

 

 

[주1] 쇼펜하우어의 말 “악서는 정신의 독약이며, 정신의 파멸을 가져온다.”를 패러디했음.

[주2] 코코 샤넬의 말

[주3] 《댓글 부대》 70쪽

[주4] 앰브로즈 비어스 《악마의 사전》(이른아침. 164쪽)

[주5]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민주화” (《댓글 부대》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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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1 0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01 15:17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인데, 정부의 얼굴이 달라져도 여론조작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stella.K 2016-10-01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장강명의 판정승의 해는 아닐까 한다.
몇년 전엔 김애란의 해였는 것을 기억하는데 말야.
해마다 한 해를 빛낸 작가 정도는 기억해 줘야할 것 같아서...ㅋ

얼마 전 정지돈이 후장사실주의라더니,
이제 장강명은 월급사실주의란다.
예전의 작가들은 정자세로 쓰기만 했는데
요즘 작가들은 말장난도 곧 잘 잘하나 봐.ㅋ

cyrus 2016-10-01 15:20   좋아요 0 | URL
《댓글부대》는 알라딘 올해의 도서에 선정될 겁니다. 은근히 책도 꾸준히 나와요. 최근에 에세이집 나오고, 10월에 출간 예정 작품이 있던데요. ^^

서니데이 2016-10-0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6-10-01 15:2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보름 전에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다. 우리나라도 이제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렇게 천재지변으로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두고 겁탁(劫濁)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이 세계가 흐려지고 있다. 겁탁의 시대 속에 우리는 이성의 변별력이 둔화하고 급기야 불편한 진실들을 망각하면서 사는 것에 익숙해 있다. 어느 인터넷 방송 BJ는 생방송 중에 경주 지진 소식을 듣고도 채연의 흔들려라는 노래를 틀어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다음 태도가 더 문제였다. BJ는 지진 피해를 몇만 명 다친 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BJ는 그 날 지진의 공포로 불안에 떨고 있던 경주 시민들의 심정을 몰랐다. BJ의 무지한 발언에 일부 시청자들이 지적하자, BJ열혈 팬시청자들은 BJ를 옹호했다. BJ와 열혈 팬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의 이기주의는 자연재난 상황이 볼거리또는 이야깃거리로 만들어버린다. BJ와 열혈 팬들은 편하게 집에 있으면서 남의 고통을 감상하는 관람자다.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여진을 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조차 무서운 실제의 현실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인터넷, SNS 그리고 속보 뉴스는 자연재난의 공포를 알리는 데 한몫을 했다. 하지만 자연재난 참사를 재연하는 소셜미디어와 대중매체의 장면들에 익숙해지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공포‘그들이 경험한 공포로 느껴진다. 수잔 손탁은 실제의 참담한 현실과,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간극을 지적했다.

 

 

 

 

 

 

 

 

 

 

 

 

 

 

 

 

 

 

 

서경식은 현지 실상에 무감각해지는 인간의 심리를 동심원 패러독스로 설명했다. 우리나라보다 지진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책을 잘 마련한 일본 정부는 원전의 재앙을 뒤로 잊은 채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한다. 서경식이 생각하는 원전의 재앙은 다중의 뜻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원전정책 자체가 잘못되었고, 원전사고 이후 참사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본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는 안전 불감증을 불러온다. 일본 정부는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시민들을 안심시키려고 원전의 안전성만 부각한다. 재앙의 단편적인 실태를 전해 들은 시민들은 동심원 안에서 일어난 원전사고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원전 재앙이 발생한 지역, 즉 동심원 밖의 외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원전 재앙을 목격한 사람들보다 공포와 불안감을 덜 느낀다.

 

 

 

 

 

 

 

 

 

 

 

 

 

 

 

 

 

 

 

 

그렇지만 재앙의 근원 지역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도 끔찍한 현실을 외면한다. 현실 회피성 인물의 모순된 심리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아모스 오즈의 소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에 나오는 스테파다. 그녀의 남편인 유대인 수학자 엘리샤 포메란스는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을 피해 탈출하지만, 스테파는 귀를 뚫는 포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낸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스테파의 태도는 소설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도 망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프레모 레비는 편리한 진실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이 고향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발목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겁탁의 시대가 이어질수록 우리의 마음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것들의 힘을 잃는다. 일본이 대지진 이후로 마음의 동요에 시달리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조만간 일본과 비슷한 행보를 걷게 될지도 모른다. 행복할 줄만 알았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며 앞으로 다가올 비관적인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사람도 많이 나올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이 사회의 구조는 비극들을 일상의 무대 뒤로 내쫓아내고, 기억하는 것조차 금기시한다. 우리는 이미 세월호 사고 이후에 연민의 연대를 좌파 논리로 몰아세우는 폭력을 목격했다. 몇 개월 뒤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 같다. “지진이 일어난 지가 언젠데, 경주 사람들은 정부에게 피해 보상을 원하는 것일까?”, “우리 지역도 먹고 살기 힘든데, 정부가 경주만 편애하는 것 아닌가?”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떤 식으로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고통스러운 진실을 받아들이는 힘이 필요하다. 강상중이 말하는 받아들이는 힘이란 어두운 과거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잊고, 주어진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다. 용기를 내어 가혹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서경식의 생각과 유사하다.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딛고 희망으로 전환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고통과 두려움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야만 긍정적 변모가 가능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만큼, 아니면 그 이상의 고통에 연대하는 한에서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겁탁의 시대 속에서 사는 우리가 내면으로 치러내야 할 또 다른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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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28 1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고 방금도 재난문자 받았습니다.

세월호든 원전이든 지진이든 홍수는 당장에 내가 그 속에서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거든요.....

cyrus 2016-09-28 17:16   좋아요 2 | URL
지금 제가 일터에 있어서 문자 보고서야 여진 사실을 알았습니다. 재난 문자 오는 게 귀찮다고 불평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으멱 좋겠어요. 그 사람들은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yureka01 2016-09-2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지진이 심해지면 일상의 삶이 송두리째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닥칠수도 있거든요..이젠 지진 노이로제 걸리겠습니다..너무 무섭습니다. 사실 마땅한 대비책이 없다는게 더 공포스럽거든요.

cyrus 2016-09-28 17:25   좋아요 1 | URL
지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마치 사회 전체 분위기를 흐리도록 조장한다는 식으로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정부는 국민의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안전하다고 거듭 주장하는데, 이제 그런 말들은 소용 없습니다.

나와같다면 2016-09-28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대하라.. 그리고 연대하라..

cyrus 2016-09-29 14:20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공감`이라는 말보다 `연대`라는 말이 좋게 느껴집니다. 이기주의 행태가 많아져서 그런지 우리 사회에 연대 의식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표맥(漂麥) 2016-09-28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고통... 저 책 은근 기억에 남더군요... 내공부족으로 리뷰 쓰다가 만 책...^^

cyrus 2016-09-29 14:21   좋아요 0 | URL
<타인의 고통>의 분량이 얇아도 문체와 전체적인 내용 분위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책을 읽은 후로 손탁의 책을 읽은 적이 없어요.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09-28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겁탁... 덕분에 알게되어 찾아 봤습니다. ^^

오탁(五濁)의 하나. 본디 맑은 성(性)에 흐린 마음 일어남이 탁(濁)이고, 겁(劫)은 시절(時節)이니, 시절에 모진 일이 많아 성을 흐리게 하여 죄업(罪業)을 일으킴임. 곧 기근(飢饉)과 질역(疾疫)과 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

cyrus 2016-09-29 14:22   좋아요 0 | URL
`겁탁`이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단어라서 그런지 한글 워드에서는 오자로 떠요. 그래서 한글 워드 맞춤법 검사기는 `겁탁`을 `겁탈`로 수정하라고 하더군요. ^^;;

달걀부인 2016-09-29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에 연대하는 한에서만, 희망을 말할수 있다. 이 문장으로 저는 오늘 수요일 하루 마감합니다. 무겁고 무력한 요즘이지만, 그래도 마음을 나눌 수 있으니 나쁘진 않네요. 고마워요.

cyrus 2016-09-29 14:28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연대의 중요성을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냥 책상에 앉아서 생각만 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백남기 님의 분향소를 지키는 분들이야말로 진짜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고, 머리와 몸으로 실천하시는 분들입니다. 무력한 시간들이 지나가길 바랍니다.

:Dora 2018-06-22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지 않아야할 것들을 떠올리며 ㅈㅇㅇ 꾸욱~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작자 미상, 최낙원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1001-10]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 국내 번역본 표기는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생애’)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감옥에 갇힌다. 그는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 도둑질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죗값을 치러야 했다. 가석방된 첫날 밤 장발장은 어느 신부의 집에 묵는다. 밤중에 그 집에서 은그릇을 훔쳐 달아난다. 형사 자베르에게 잡혀 교회에 끌려왔을 때 신부는 “내가 은촛대까지 주었는데 왜 은그릇만 가지고 갔느냐?”고 반문했다. 장발장은 신부의 말에 감동해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빵 하나를 훔친 죄로 결국 19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장발장의 세상에 대한 분노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굶주림은 사람의 인격을 비참하게 망가뜨린다. 훔친 행위는 부도덕이지만, 굶주림 때문에 도둑질한 것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자구책으로 볼 수 있다. 벽초 홍명희가 처음으로 《레 미제라블》을 소개하면서 제목을 ‘너, 참 불쌍타’로 지었다. 장발장은 빵을 훔친 절도범이지만, 프랑스 혁명 직후의 혼란기에 사회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는 비참한 인물이다.

 

 

 

 

 

사실 장발장이 나오기 아주 오래 전에 굶주림을 못 이겨 부도덕한 행동을 일삼은 또 한 사람이 있다. 1554년 스페인에 발간된 작자 미상의 피카레스크 소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Lazarillo de Tormes)》의 주인공 라사로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는 라사로의 실명. 라사로는 애칭) 피카레스크 소설은 16~17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기법으로 불량배나 건달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대 사회상을 예리하게 비판한다. 라사로는 하층 계급 집안에 태어난 소년이다. 어린 나이에 벌써 손버릇이 나빠 도둑질을 하기 시작한다. 라자로의 부모는 빈곤한 형편 탓에 아들을 먹여 살리기 힘들었고, 소년은 장님의 보호 하에 생활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님은 사기꾼이었다. 사람을 속이면서 돈을 구걸하고, 모은 돈으로 마련한 기름진 음식과 감미로운 포도주를 자기 혼자만 즐긴다. 지독한 구두쇠라서 라사로에게 자신이 먹는 음식의 반도 되지 않은 양을 준다. 그래서 장님이 먹고 마시는 것들을 맛보려고 속임수를 꾸민다.

 

 

 

 

 

 

두 눈이 보이지 않은 장님의 약점을 이용, 포도주가 담긴 항아리에 빨대를 대고 마신다. 하지만 장님은 라사로의 수법을 알아챘는지 손으로 항아리를 감싸 안아 자신의 품속으로 밀착시킨 채 포도주를 마신다. 라사로는 항아리 밑바닥에 빨대가 관통할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을 뚫어놓는다. 그는 구멍에 새어 나오는 포도주를 마시지만, 속임수는 금방 탄로 나고 만다. 단단히 화가 난 장님은 라사로의 얼굴 정면에 항아리를 힘껏 던질 정도로 가혹하게 혼을 낸다.

 

 

 

 

 

라사로는 더 이상 인성이 최악인 장님과 함께 살 수 없어서 혼자서 살아가기로 한다. 그는 자신을 괴롭힌 장님에게 통쾌한 복수를 날리는 심정으로 골탕 먹이고 달아난다. 그 이후로 라사로는 신부, 수도사, 면죄부를 판매하는 포교사, 화가 등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그가 처한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라사로가 장님을 버리고 떠난 후에 만난 신부는 장님보다 사악한 인물이었다. 기독교의 일곱 가지 죄악 중 하나가 탐식이다. 그런데 이 신부란 놈은 본인 입으로 탐식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매일 점심과 저녁에 고기만 먹는다. 심지어 장님처럼 라사로에게 고기 한 점도 주지 않는다. 라사로가 네 번째로 만난 수도사는 수도원 일에 관심 없고, 그저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한다. 면죄부 포교사는 면죄부 판매의 악습을 버리지 못한 구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면죄부 판매 행위를 ‘신의 뜻’으로 포장했고, 면죄부를 사들인 사람들은 포교사의 속임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라사로는 비열하고, 부도덕한 수단을 동원하면서 살아가는 나쁜 놈들을 관찰하면서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이 작품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은 종교적 윤리를 지키지 않는 위선적인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가 금서 도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는 오로지 선한 방법으로 현실을 극복하는 영웅의 눈부신 활약을 그리지 않는다. 라사로는 보잘것없는 주인공이다. 게다가 장발장처럼 생존을 위해 비도덕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현실을 마주보고 인식하는 계기와 과정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장발장은 신부의 자비심으로 선악에 눈을 뜨면서 점차 순화되지만, 라사로는 자신보다 더 나쁜 놈들을 만나면서 이기주의가 만연한 현실의 냉정한 이면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 그러면서 궁핍한 상황을 타개하는 자신만의 생존력을 터득한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를 읽은 독자들은 주인공이 장님을 속이고, 골탕 먹이는 행동을 비난하지 못한다. 라사로는 굶주림의 고통이 근본적인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독자들은 안다. 배고픔은 우리의 몸이 생존을 위해 보내는 신호라는 것을. 라사로보다 ‘더 나쁜 놈’인 장님이 주인공의 복수에 당하는 장면은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특히 ‘가장 나쁜 놈’인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은 추락한 종교의 권위를 희화화한다. 라사로는 종교의 힘에 벗어나 현세를 중시하는 민중들의 정신이 반영된 ‘나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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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09-26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반데니소비치,수용소의 하루에도 아침과 점심 각10분, 저녁5분,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다~란 글이 있어요
굶주림은 인간을 가장 초라하게 만드는
천형의 하나임을 공감합니다.

cyrus 2016-09-27 12:25   좋아요 0 | URL
`배고픔`을 주제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 솔제니친의 노잼 소설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yureka01 2016-09-26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더더 나쁜 놈들이 가식적인 놈들이죠..앞에서는 좋은 말 늘어 놓다가 뒤로는 온통 굳은 일저지르는 이중성이거든요..

cyrus 2016-09-27 12:26   좋아요 1 | URL
서울 한폭판에 있는 국회 닭장 속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나쁘죠.

아무 2016-09-26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명희 선생이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ㅎㅎ
왜 최고의 명장면인지는 그림만 봐도 알 것 같습니다..^^

cyrus 2016-09-27 12:29   좋아요 0 | URL
십 년 전에 스펀지에서 레 미제라블 번역명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한 방송을 봤어요. ^^

transient-guest 2016-09-27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사로..`가 한국어 번역본이 있네요. 전 98-99년엔가 3학기 분량의 유럽지성사를 들으면서 읽었어요. 마지막에 장님거지한테 한 방 먹이는 장면의 묘사가 압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ㅎ

cyrus 2016-09-27 12:30   좋아요 1 | URL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알고 계시는군요. 이런 순간이 제일 기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