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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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 제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 조항은 일반적 평등조항으로 성 평등권을 명시한 것은 아니다. 성 평등은 한 사람의 남성과 한 사람의 여성 사이의 평등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불평등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 법에 보호받는다’는 발상의 이면에는 남녀는 같지 않으므로 결국 동등하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여성의 평등권은 법적인 면에서 보장되고 있지만, 여전히 형식상으로 인정될 뿐 불평등이 잔존해 있는 게 사실이다.

 

‘법’이라는 다소 어려운 주제를 웃음으로 버무려 낸 《미스 함무라비》는 부담 없고 통쾌한 장점이 한껏 돋보인다. 특히 우리 사회에 여성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지 놀랄 만큼 생생하게 그려냈다. 여성차별 문제라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관심한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힘이 남성보다 부족하기에 폭력을 행사함은 물론 부적절한 성차별적 언행을 한다. 정의 실현의 최후 보루인 법정 안에서도 여성차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미스 함무라비》는 습관이 돼버린, 그래서 더 무서운 성차별의 형태를 자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초임 판사 박차오름이 보고 겪은 일상적인 성차별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때로는 뜨끔한 느낌을 받게 한다.

 

‘여자는 여자답게 조신해야 한다’, ‘성범죄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한세상 부장의 논리는 성폭력이 권력 관계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성적으로 가하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이런 관계는 피해자들의 저항을 어렵게 하고, 가해자의 법적 처벌을 면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권력에 의해 이들 사건은 곧잘 왜곡되거나 은폐됐다. 아르바이트 여대생을 성희롱한 홍보부 차장의 아내는 가부장제 문화에 매몰된 여성이다.[1] 그녀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남성 중심적 질서에 타협하여 살았기 때문에 남편(가해자)의 잘못보다는 피해 여대생의 품행을 의심한다. 그녀의 입장은 사회생활을 통해 더욱 강화돼 남성중심문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서로 알고 있는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아내 폭력’에도 여성책임론은 영락없는 단골 메뉴다. ‘아내 폭력’은 성차별적 가부장제에 의해 남편이 아내에게 가하는 신체적 · 정신적 폭행이다. 남편의 구타에 시달린 아내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자기방어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아내가 휘두른 칼에 찔린 남편과 담당 변호사는 가부장적 권위를 앞세워 아내를 ‘서방 죽인 년’으로 몰아세운다.[2] 아내가 겪는 폭력의 심각성과 공포를 잘 모르는 법조인은 구타 피해가 입증돼도 가해자에게 미약한 수준의 처벌을 내린다. 폭력의 고통을 당해본 다음이 아니고서는 남편을 죽인 아내의 죄과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박 판사는 어린 시절 ‘아내 폭력’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녀는 아빠에게 구타당한 엄마가 본연의 목소리를 잃고 정신적 외상을 입는 모습을 기억한다. 엄마는 남편의 명예와 딸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닫아걸고 억압을 표현할 용기를 잃었다. 박 판사는 이런 침묵 뒤에 가려진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성차별과 성폭력은 한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며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다. 더욱이 인권을 보호해야 할 법원이 유독 이 문제에 대해 여성에게 불리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법원이 아직도 가부장적 문화를 방증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한 부장처럼 남성중심주의 시대에 보호를 받고 자란 남성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동안 억압받고 눌려왔던 여성들이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자신들에 대한 복수나 억압으로 생각한다. 부당한 사회에 향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보복이 아니다. 어떤 사회 변화를 겪어도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면서 사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여성의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아야 한다.[3] 성차별과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혜안을 모아 여성의 인권을 유린한 자를 엄단하는 법조인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

 

 

 

 

 

[1] 《미스 함무라비》, 105쪽

[2] 같은 책, 339~341쪽

[3] 같은 책, 125쪽(“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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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23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을 만해서 때린다는 논리로 아이, 여성, 성별에 상관없이 폭력을 가하던데, 그 논리는 악행의 합리화일 뿐이죠.

cyrus 2017-01-23 14:59   좋아요 1 | URL
그런 논리는 맞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을 약자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르게 부당한 편견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가해자가 ‘맞을 만해서 때린다’라고 주장하면 강자의 논리가 되어 자신의 폭행을 정당화합니다. 정말 위험한 발상입니다.

해피북 2017-01-23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애너벨 크렙의 말이 떠오릅니다. ‘왜 여성 위인은 나오지 않는가‘ 외쳤던 그녀의 책(아내가뭄)이 말이죠 ㅎ 법조계에 여성이 많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아무리 여성들이 남성의 마음을 안다고 해도 다 알 수 없는거처럼 남성으로 이뤄진 법 테두리 안에서는 여성들의 불합리함을 속시원이 풀어내줄 사람이 없는것도 문제가 아닐까해요. 공감이 있어야 이해가 될텐데 말이죠. ㅎㅎ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7-01-24 11:53   좋아요 0 | URL
제가 마침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과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을 읽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남성은 이성, 여성은 감정이라는 편견이 법조인들에게도 남아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런 편견 때문에 여성 법조인은 사건을 이성보다는 감정에 기대어 해결할거라고 착각합니다. ^^;;

무식쟁이 2017-01-23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상에서 습관화 되어 있는 성차별 언행들을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걸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고 넘기는 건 곧 묵인하는거고, 묵인은 동조의 의미이므로.

cyrus 2017-01-24 11:5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제 자신에게 늘 주의를 줍니다. 여성에 향한 잘못된 언행이 나오면 그 자리에 반성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가볍게 넘기는 것도 여성 차별을 강화하는 묵인과 동조의 의미입니다.

레삭매냐 2017-01-2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대회 참가하려고 도서관 대출을 기대해
보았지만, 선 대출자가 있어서 결국 빌려 보지
못했네요.

물론 사서 읽는 수고도 하지 않았구요. 대신
이렇게 간접으로나마 읽고 갑니다 :>

cyrus 2017-01-25 10:44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이 책을 도서관에 빌리려고 했다가 이미 대출된 상태라서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청이 운영하는 작은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봤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
 
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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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녁 여덟시 ‘뉴스룸’을 시청하고는 또 하루를 접는다. 그런데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이건만 한결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만든다.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무감하다. 사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당연시하는 세태를 발견하게 된다. 번듯한 대학을 나와도 밥벌이를 찾을 수 없는 사회, 속고 속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불신, 상생(相生)할 수 없는 경쟁, 극에 달한 지도층의 부패……. 문제는 이 세상의 틀에 들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1956년인가. 그해에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책이 나왔다.아웃사이더는 세계와 자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또한 그것을 반세계적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이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다. 콜린 윌슨이 떠나고 없는 이 세상에 아웃사이더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태주. 그는 사회와 화해하지 못하고 불온하다.

 

남과 같지 않다는 게 꼭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남과 같지 않으려 노력해서 얻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그게 도리어 더 가치 있는 삶일 수도 있었다. (《스파링》 18쪽)

 

도선우의 소설 《스파링》에서 일찍이 세상에 환멸을 배운 주인공 장태주는 현실의 흐름,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신의 변화를 부정하거나 못 본 체해야만 한다. 이것은 분명 퇴행이고 나쁜 선택이다. 시련이 많았던 소년기를 지나 오염된 어른들의 세상으로 가기 위한 사내의 통과의례라고 하기엔 너무나 극단적이다. 하지만 세계에 냉소와 환멸을 표하는 성숙한 아웃사이더는 성장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력적인 존재이다. 소설이 좋은 반응을 얻은 이유는 ‘참을 수 없는 저항’을 분출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인물 설정이 성장소설에서 봤을 법한 클리셰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지적할 만한 문제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소설 안과 밖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민의 최면, 즉 자기 연민에 빠진 주인공을 연민하게 하는 최면이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독자가 장태주를 연민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건 달리 말해, 인사이더(insider)에 속한 독자들이 정말 반역의 삶을 선택한 장태수를 옹호할 위치에 있는가에 대해 되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장태주는 세상과 잘 타협하지 못하는 비주류 삐딱이 그 자체다. 웬만한 인간은 모두 펀치를 날리며 읊조리듯 씹어대는 그의 독백에는 체제에 순응하기 위해 모순된 이중성에 눈감은 인사이더에 대한 혐오감이 담겨 있다.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그 단어는 가면으로 이용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일종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즈음에 이미 깨달았고, 살아오는 내내 그 가면을 어떤 인간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줄곧 봐왔다. 그것은 실로 역겨운 인간들의 전유물이었다. (63쪽)

 

인사이더는 어느 정도는 사회와 개인적 가치관의 불일치 그리고 되풀이되는 사회 악습의 심각성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것의 원인이나 문제점에 대한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여기서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명확하게 대비된다. 아웃사이더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또는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많이 보려고 한다. 장태수는 인사이더들이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 하는 지배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롱했다. 《스파링》을 읽은 독자들이 불쾌한 세상에 통쾌한 주먹을 날리는 장태주에 열광하고, 그를 응원하는 반응에 그친다면 ‘무임승차’하기를 서슴지 않는 방관자에 남을 뿐이다.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어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지려 하기보다는 뒷짐 진 채 뻔뻔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 장태주는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이를 복싱 용어로 적용한다면, 목숨 거는 것에 두려워 피하기만 하는 아웃복서(Out boxer)다. 담임은 장태주에게 복싱의 의미를 가르치면서 정면승부를 펼치는 인파이터(infighter)가 되라고 강조한다. 인파이터는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정면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더 좋은 사회를 꿈꾸는 아웃사이더와 비슷하다.

 

두 번째 질문은, 주인공에 향한 연민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결말에 대한 의문이다. 혹시 이 허접한 서평을 보고 있을 작가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1]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장태주의 질문을 들은 나 역시 소설 속 기자들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봤다.[2] 《스파링》은 시종 건조한 장태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하면서도 그를 통해 독자의 감정적 혼란이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독하게 밀어붙인다. 그런데 자신을 괴물로 설정하는 세상에 향한 장태주의 질문은 ‘날 좀 제대로 봐 줘’ 식의 유아적인 칭얼거림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장태주에게 사랑의 필요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등장하는 설정은 뜬금없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다. 작가가 ‘사랑의 구원’이라는 결론에 기대는 것은 아웃사이더의 저항을 비웃으면서 가장 앞장서서 난타하고 있는 인사이더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곧 누군가를 희생제의 제물로 삼으면서 본심은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려는 자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우회로가 된다. 이 모호한 위치의 ‘사랑’은 최면제가 되어 독자의 반성을 마비시킨다.

 

장태주는 마음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채 미래조차 불투명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장태주의 무력함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무력함이 자기 연민으로 이어진다면, 그 어디서도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장태주의 결말은 투정만 부리다가 성장을 멈추어버린 소년이나 다름없다. 이런 점에서 《스파링》은 성장소설이라 할 수 없다. 장태주만의 사랑이 있고, 그가 행복할 수 있는 세계는 찾기는 쉽지 않다. 없는 세계(Utopia)이기에 또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 수많은 장태주가 있다. 살아가야 할 방향의 선택을 확인할 여유도 주지 않는 세상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 세대는 슬퍼하고만 있다. 과연 이들은 장태주처럼 거대한 세상에 멱살을 부여잡고, 거부하는 몸짓을 할 수 있을까. 아웃사이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1] 드라마 ‘시크릿 가든’ 대사

 

[2]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기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 묻듯, 서로 얼굴을 돌아보면 눈치를 살폈다. (《스파링》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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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1-24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알던 분이 쓴 책이라 서점에서 읽기에
도전했지요. 딱 101쪽 읽고 나서 고만 읽었어요.

나머지는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려구요.
아직 도서관에 안 들어온 모양이네요.

책 읽으면서 리뷰 제목도 정해 놓았었는데 다
잊어 버렸네요. 인간은 참 망각의 동물인가 봅니다.

cyrus 2017-01-25 10:48   좋아요 1 | URL
작가분이 네이버에 서평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한 번 그 분의 블로그를 봤는데 역시 일반 독자서평과 다른 아우라를 느꼈습니다. 알라딘에서만 활동하니까 네이버에 서평을 쓰는 좋은 독자들의 존재를 보지 못했었습니다. 작년에 예스24 블로그를 만들면서도 느꼈지만, 제가 그동안 알라딘 램프 안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책을 좋아하고, 좋은 서평을 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정치는 코스프레 게임이다. 각 후보는 선거철이 되면 자신에게 유리한 상징과 이미지를 연출한다. 시장의 상인들을 만날 때는 정장 대신에 점퍼를 걸치고 고급 승용차를 놔두고 일부러 지하철을 타기도 한다. 후보들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옷차림을 꼼꼼하게 신경 써서 방송토론에 참석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다.

 

당선을 목표로 출마한 후보들이 민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미디어 정치에서 살아남으려면 ‘상징’과 ‘이미지’를 이용하는 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징과 이미지가 과장되거나 심지어 조작되면서 정작 중요한 정치 능력, 도덕적 자질 등이 무시되고 왜곡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어느 정파나 후보를 막론하여 판박이에다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서민정책’은 볼썽사납다.

 

 

 

 

그들이 선거철만 되면 찾는 ‘서민’은 누구인가. 서민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온유하고, 그리고 소박하다.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서민’은 유권자다. 즉 정치인들이 언급하는 ‘서민’은 유권자를 뭉뚱그려 정치적으로 표현한 단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서민정책이란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 생활을 더 편안하게 하겠다는 전략적인 구호일 뿐이다.

 

대선 시기가 점점 다가오면서 정치인들이 서민과 가까워지겠다는 일념에서 예전엔 볼 수 없던 언동을 연출하는 것을 보면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특히 반기문 씨는...

 

 

 

 

 

 

 

 

 

 

 

 

정치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서민 코스프레’ 하느라 소리 없는 민심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어설프게 연기할수록 부끄러움과 분노는 우리 국민의 몫이다. 생각이 있는 국민은 얄팍한 쇼를 믿지 않는다. 반면 특정 정치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드러내는 국민은 위험하다. 이들은 상대 후보에 대한 해묵은 감정만을 갖고 편을 갈라 논쟁을 벌이며, 상대의 주장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만 내세운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지역감정은 물론이며, 해답 없는 감정다툼을 유발한다. 여론을 의식한 ‘서민 코스프레’와 빈말은 사기일 뿐이다. 이미지와 사기에 던진 표는 동원되고 이용된 표와 다를 것이 없다. 나라의 품격에 떨어짐에 자존심 상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서민이다. 진짜 서민은 나라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상식과 원칙이 있는 민주주의도 살리고 싶어 한다. 이것이 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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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0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20 20:14   좋아요 1 | URL
턱받이, 국기에 대한 목례, 지폐... 이런 걸로 웃음을 주는 분은 처음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1-20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민 하면 역시 마태우스 님이시죠..

cyrus 2017-01-20 20:1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서민적인 분입니다.

책한엄마 2017-01-20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보고 싶어요.
북플에 언제 오시는건지..

cyrus 2017-01-20 20:15   좋아요 0 | URL
기생충 연구하느라 칼럼 쓰시느라 많이 바쁘신 것 같습니다.

2017-01-20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20 20:17   좋아요 0 | URL
정치꾼 맞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유능한 살림꾼이라고 입털어요. 실제로 제 밥그릇 챙기는 사기꾼이죠.

단발머리 2017-01-2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 페이퍼 너무 재미있고 유익하네요.
ㅎㅎㅎ서민 교수님이 보고 싶어지는...

cyrus 2017-01-24 11:56   좋아요 0 | URL
저도 서민 교수님이 보고 싶습니다. ^^

transient-guest 2017-01-24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도 그렇지만 반씨는 정치를 하기엔 확실히 너무 늙었고 감도 모자란다는 생각이 드는 일련의 ‘민심‘행각들이죠.ㅎㅎ 요즘 세상에 저런 setup이 먹히지 않죠. 조금 남아있던 가능성은 지난 10년간 줄기찬 이명박근혜의 행각으로 다 날아갔구요. 뭐가 뭔지 모르고 욕심이 나서 나온 것 같아요. 볼살에 덕지덕지 붙은 욕심이 추하게 느껴집니다.

cyrus 2017-01-24 11:58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은 <반기문과의 대화>를 다시 읽었어요. 몇 년 사이에 사람이 확 달라졌어요. 그 책에서는 반 전 총장은 총장직에 물러나면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어요. 권력이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한 번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위력을 새삼 깨닫습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1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외 옮김 / 동녘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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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탐구한다. 그러나 급격한 세태의 변화 속에서 인문학은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학문적 힘을 잃어가고 있다. 프랑스는 모든 학문을 철학으로 대접한다. ·고교에서 철학 과목을 가르치고 대학입학을 위해선 종합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를 치러야 한다. 여기서 출제되는 철학 문제는 그 격조와 높은 수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으며 그해 국민적 관심사가 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이런 흐름과 여전히 동떨어져 있다. 아직도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주류다. 자율적, 비판적 사고 훈련이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 의견과 주장은 넘쳐나지만 음미할 만한 깊은 글은 보기 힘들다.

 

성역과 금기 없는 비판과 치열한 논쟁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요소들이다. 비판의식은 정확한 논점과 논리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대화 가능성마저 잃어버린 채 극단으로만 치닫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무기의 선명도만 높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크고 높은 목소리들만이 득세하게 된 데에는 지식인의 침묵이 주범이라고 하지만, 그 침묵을 만들어낸 풍토 또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현실은 자꾸 대답을, 아니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사회발전에 기여할 방안을 모색한다. 그들이 사회의 각종 문제에 대처하고,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집단화해서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들은 지식권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전문적 지식이 집권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 경우가 많았고, 집권자들을 등에 업고 형성된 일부 지식인 집단이 부당한 물리적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각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가진 지식인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들이 사회의 여타 권력과 결탁하지 않고 긴장 관계를 이루며 공존할 때 사회는 이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 논의를 거쳐 발전한다.

 

자기 뜻에 따라 타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직간접적 힘을 권력이라고 할 때 지식이 직접 권력 주의라는 옷을 입게 된다. 권력 주의는 통치를 공고하기 위한 기술이다. 권력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권력을 휘둘러 남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미셸 푸코는 1978년에 진행된 강연(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통치받지 않기 위한 기술’, 비판적 태도의 의미를 재정립하여 그 필요성을 강조한다. 푸코가 정의한 비판적 태도는 물리적 권력에 저항함으로써 대중들의 힘을 통해 반사적인 대항권력을 형성하는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코의 권력 개념은 국가 권력이나 특정한 무엇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푸코는 현대인이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온통 결박되어 있어서 스스로 자신을 규율하기에 이른다고 봤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는 일상적인 권력은 통치 체제에 순응하게 한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 미세한 권력의 영향력에 길들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스스로 교정해야 한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를 떠올리면 된다. 이 글귀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아서 자만에 빠지는 것을 피하도록 해주는 계몽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푸코는 이 글귀의 의미가 과대평가되는 바람에 정작 자기 배려(돌봄)’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자기 배려는 자신을 사유하는 존재로서 간주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자산과 관계된 타인,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분석하는 것이다. 플라톤이나 명상록의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고대 그리스 · 로마 철학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고, 성찰해 자신을 수양하는 실천적 자세를 추구했다.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려면 엄격한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 자기 수양은 비판의 기능, 투쟁의 기능이 있다. 내가 배운 지식이 잘못되었으면 인정하고, 폐기해야 한다. 또 우리를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평생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투쟁의 힘을 길러야 한다.

 

푸코의 비판적 태도자기 수양개념은 진실 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각하는 힘이다. 푸코는 자기 수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소개했다. 자기 수양을 위한 글쓰기는 자신을 혹독하게 다스릴 수 있는 성찰의 글쓰기다. 자기 수양이 결여된 글은 변명으로 변질한다. 민주주의는 부단한 자기비판과 수정을 거칠 때 살아남는다. 도덕도 필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정직성진실 된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다. 정직성과 진실 된 삶은 자기 인생을 떳떳하게 사는 데 관련이 있다.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문제점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만이 비판할 자격이 있다.

 

 

 

 

* 도대체 무슨 말일까??

 

눈이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눈 속에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 안에서 하지만 타자의 눈의 형태하에서 그런데 거기서 타자의 눈동자 내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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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1-18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민들이 국가 권력을 바꿔 본 나라....네 철학의 힘이죠...
철학을 자신을 돌아보게 하죠...

박사모에서 철학이 발견되기 힘든 이유기도 하죠..

cyrus 2017-01-19 13:1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박사모는 생각 자체가 없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아무 2017-01-18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리정치>에서 푸코의 자기 수양을 언급한 부분이 있는 거 같아 찾아보니 여기서는 ˝자아 기술˝이라고 번역한 것 같아요. 출처가 같은 책인지는 모르겠지만..(미주가 영어가 아니라 전 해석할 수 없습니다ㅠ) 성역과 금기 없는 비판이라는 대목이 심상치 않게 보입니다..

cyrus 2017-01-19 13:13   좋아요 1 | URL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푸코 강연집이 꽤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올해에도 미공개 선집 두 권이 나올 예정입니다. <심리정치>를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

시이소오 2017-01-18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시다니
사이러스님은 정말 꾸준히 읽고 쓰십니다. ^^

이 리뷰를 읽으니 선물해주신 책 빨리 읽고 싶어요 ^^

cyrus 2017-01-19 13:15   좋아요 0 | URL
1월 초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분량이 얇아서 만만히 봤는데, 생각보다 읽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천천히 읽고, 관심 있는 내용을 반복해서 읽으니까 대충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

[그장소] 2017-01-18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표 ㅡ 눈부처 ㅡ라고 흔히 표현하는 상태
타인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가 비치는 조건 ㅡ 마주보기 ㅡ그걸 말하는거 아닌가요?
일테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 ...랄까? ㅎㅎ

cyrus 2017-01-19 13:1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이해했어요. 사실 제가 이해가 되지 않은 문장이라고 말한 것이 ˝자기 자신 안에서 하지만 타자의 눈에 형태 하에서 그런데 거기서 타자의 눈동자 내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였어요. 문장 안에 ‘하지만‘과 ‘그런데‘가 같이 있어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

[그장소] 2017-01-19 15:56   좋아요 0 | URL
하지만 ㅡ이 접속사 하지만이 아닌 , 하는 ㅡ행위의 동사 , 로 연결된게 아닐까 ..그렇게 읽으면 ? ㅎㅎㅎ

박람강기 2017-01-1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시권력을 극복하려는 푸코의 마지막 자구책이었죠..현대에서도 곱씹어볼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cyrus 2017-01-19 13:19   좋아요 0 | URL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생각하면 이 책이 나오길 정말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치받지 않기 위한 기술’이라는 개념이 언급된 내용이 좋았습니다.

2017-01-18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9 13:25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에 접한 소식에 실망했습니다.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가 반복된다면 기업인의 도의적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가 없습니다.

우민(愚民)ngs01 2017-01-19 13:38   좋아요 0 | URL
사법부의 독립이 중요하지만 개혁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판증하는 기각판결이었습니다. 제3자인 외국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동안 지적했던 기득권 엘리트들의 부패 카르텔을 없애지 않는한
대한민국의 부패는
반복될 것입니다.
지금 인터넷에서 조판사에 대한 인신공격과 박사모의 지지선언을 보니
같은 사실 상황으로 극단적인 이분적 논리에 빠져 버린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진실을 조작 호도하는 세력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대상입니다.

oren 2017-01-18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스로 인용해 주신 대목의 핵심은, 제 판단으로는, 결국 ① ‘자기 자신 안에서‘ ② 하지만 ‘타자의 눈동자 내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저는 미셀 푸코의 주장이 아담 스미스가 말했던 ‘가슴 속의 동거인‘과도 얼핏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 *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253쪽)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cyrus 2017-01-19 13:28   좋아요 2 | URL
oren님이 푸코의 책을 읽어보시면 정말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자기 수양 개념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정신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명상록>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qualia 2017-01-19 1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박스 안의 인용문은 비문인 듯합니다. 너무 원문에 얽매여 번역을 서툴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략 그 뜻이 무엇인지 감은 옵니다만, 철학적 저작은 문구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가 정밀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해서 약간 어긋나게 독해하고 번역하면 원뜻에서 빗나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집니다. 저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문을 아래에 옮겨놓겠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t cette connaissance, cette connaissance ontologique de soi en tant qu‘âme, elle se fait, au moins dans certains textes et en particulier dans l‘Alcibiade, sous la forme de la contemplation, de la contemplation de l‘âme par elle-même, avec la fameuse métaphore de l‘œil : comment est-ce que l‘œil peut se voir lui-même ? La réponse est apparemment très simple et, en fait, elle est très compliquée, car l‘œil, pour se voir lui-même, Platon ne dit pas : il suffit qu‘il se regarde dans un miroir; il faut qu‘il regarde dans un autre œil, c‘est-à-dire dans lui-même, mais pourtant dans lui-même sous la forme de l‘œil de l‘autre, et là, dans la pupille de l‘œil de l‘autre, il va se voir lui-même, car la pupille sert de miroir. Et de la même façon l‘âme, se contemplant elle-même dans une autre âme ou dans l‘élément divin de l‘autre âme qui est comme sa pupille, se verra elle-même et se reconnaîtra comme élément divin 24.

cyrus 2017-01-19 13:30   좋아요 1 | URL
제가 밑줄 친 문장이 어설프게 느껴졌습니다. 원문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북프리쿠키 2017-01-20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공간에 의견과 주장은 넘쳐나지만 음미할 만한 ‘깊은 글’은 보기 힘들다˝

무척 공감가는 부분입니다.
그저 센스있는 말장난이 대접을 받는 공간이죠.

싸이러스님이 읽는 책은 아직 제가 읽어보기엔 엄두가 안나네요..ㅠ
언젠가는 저도 내공이 쌓이면 따라가겠습니다 ㅎㅎ

cyrus 2017-01-20 11:59   좋아요 1 | URL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처럼 각 잡고 너무 진지한 글은 재미없게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ㅎㅎㅎ
 

 

 

출처: 사단법인 올재 (http://www.olje.or.kr/)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1, 2> 이동현 역

케인스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 역

하이에크 <, 입법 그리고 자유1, 2> 양승두 외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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