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알라디너 분들께서 추천하신 작품을 미루다가 이제야 읽으면서 게으른 과거의 나를 탓하고 흠뻑 빠져 읽었으면서도 제대로된 감상문은 커녕 몇 줄 남기기도 어려워서 버벅거리는 현재의 나를 탓하는 중이다. 


다른 분들의 리뷰 처럼 멋지고 심오하게는 못쓰지만 그저 나의 솔직한 감상은 적어둬야지. 안 그러면 미래의 나는 기억을 잃을테니까;;;; 


순진하달까, 맹한 펠리시아는 뻔한 시골처녀 답게 뻔한 동네 놈팽이 (그런데 대도시 공장에 다니면서 추석 때나 고향에 오는)와 사랑의 결실을 품었다. 기다리다 불안해져서 그 대도시(라지만 수도도 아님) 공장만 아는 주제에 민쯩도 없이 집안의 돈뭉치를 들고 밤차/배를 탄다. 그리고 낯선 곳을 헤매다 뻔한 오십대 뚱남 포식자의 눈에 띈다. 그는 그러니까, 십여 년 전 어머니 사후에 (그전에도 싱글이었지만) 홀로 큰 집에 살면서 여러 번 여자들과 우정을 나눌 뻔, 나누기 시작하다 떠나보낸 슬픈 과거가 있다. 이 사람의 즐거움은 소소하게 고가구나 문진 따위를 모으고 LP판으로 노래를 듣고 또 섬세하고 호방한 (?) 장보기와 식사하기다. 그의 직업도 공장 구내 식당 감독. 그는 다른이의 인정을, 눈에 띄어 '다른이와 함께 하는' 인상을 주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외로버. 소설은 1990년 초반의 아일랜드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데 어쩐지 1980년대 분위기도 보이고, 미국의 범죄 스릴러 느낌도 난다. 그러니까 뻔한, 어떤 공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있다.


집나온 시골 처녀, 애인을 찾을 것인가. 

낯선 도시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도움은 덫이 아닐까. 

저 낯선 이는 친구일까, 적일까. 

이 낯선 이의 과거는 어떠한가. 

상황은 어디까지 나빠지고 그 바닥은 어디일까.


50대 뚱남의 묘사는 매우 전형적인 연쇄살인마인데, 강박적 규칙 준수와 넓은 정원과 이어지는 숲, 과거의 여자들, 군인을 동경했으나 입대를 거절당하고, 비틀린 모자 관계와 부재하는 아버지 상 등이 그 타입의 뻔한 인물상을 또렷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 펠리시아가 짠. 


그런데. 


뻔한 시골 처녀가 뻔한 50대 뚱남을 만났는데도 게다가 뻔한 광신(기독) 전도사 아줌마 까지 나왔는데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결말을 그리고 있는데, 그 하나 하나가 뻔하지 않은 소설이 되었으니 기가 막힐 수 밖에. 모든 면에서 정반대에 위치한 두 인물이 외로움이라는 교차점에서 만났다가 다시 멀어진다. 인물 하나 하나가 짜증나게 생생한데 은근 살짝 빗겨나가며 독자 반발짝 앞에 서서 (애쓰지 않으며) 능수능란한 작가의 호흡으로 흥분 혹은 긴장한 독자를 바라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도 뭔 말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벌써 점심 밥 때라 일어나야 하고요. 

그러니까, 잘 썼어요. 정말. 


그래서 영화도 찾아봤는데.


아 이건 <힐디치씨의 여정> 이고요, 영화 초반, 그의 집을 보여주는 건 좋았는데 자꾸 '양들의 침묵'이랑 '싸이코' 영화가 생각나게 히디치 씨의 모자 관계를 과하게 설정하기도 했고 힐디치 씨가 접했던 '과거의 여성들' 묘사도 도드라져서 펠리시아가 가려졌더라구요. 그래서 펠리시아의 여정, 그 끝은 어디냐, ... 영화에선 사탕을 많이 발라놨어요.



아 이제 정말 밥하려 가야해요

일요일엔 오뚜기 카레냐 짜파게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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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22 12:0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잘 쓰셨습니다. 정말~ 근데 저는 어느 선까진 힐디치가 정말 좋은 사람일 거라고 호의로 펠리시아를 도와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니까요! 하.. 저는 진짜 좋은 사람만 만났나봅니다.(현실은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스릴러 영화를 너무 안 봤거나..ㅋㅋ)

유부만두 2021-08-22 18:01   좋아요 1 | URL
붕붕툐툐님께선 그러셨군요. 전 처음 몇 문장은 좋았지만 (음식사랑 좋은사람?) 곧바로 아, 이 ㅅㄲ 위험하다 싶었어요. 하지만 시침 뚝 뗀 소설가는 느긋하게 계속 이야기를 풀어가고 전 책을 덮을 수가 없더라고요.

레삭매냐 2021-08-22 12: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주말에는 짜파게티로 대동단결 !!!

유부만두 2021-08-22 18:0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아이들은 짜파게티, 어른들은 비빔밥이었습니다.
어쩐지 더 늙은 기분도 들어요. (그런데 애둘이 세 봉을 먹어서 어쩔 수 없어요)

scott 2021-08-22 12:0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이작품 영화 부터 봤습니다. 대가 트레버의 스토리 전개에 감탄! 유부 만두님 점심은 짜파로!

유부만두 2021-08-22 18:03   좋아요 2 | URL
아이들 점심만 짜파게티였어요. 집에 있는 게 딱 고만큼이었거든요.

영화는 소설과 꽤 다르던데요. 펠리시아가 금발도 아니고 쇼핑백도 없... 아니, 그것보다 주인공이 힐디치 아저씨 였고요, 그 엄마 묘사도 너무 달라서 아예 다른 이야기를 읽는/보는 기분이 들었어요.

페넬로페 2021-08-22 12:1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다 모여서 이 책을 가지고 토론을 한번 해보고 싶더라고요.
유부만두님, 일욜은 그냥 아점 한끼로 해결하는게 어떠신지요^^

유부만두 2021-08-22 18:04   좋아요 2 | URL
아,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펠리시아 토론방!

주말엔 두끼만 먹었으면 좋겠는데, 우리집 애들이 힐디치 못지 않게 먹기를 챙깁니다. ㅜ ㅜ 간식도 먹는답니다?

blanca 2021-08-22 12: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죠. 저도 다 읽고 온몸에 전율이... 이래서 대가라고 하나봐요. 윌리엄 트레버는 그저 리스펙트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저는 특히 이름 없이 죽어간 소외되는 여자들에게까지 시선이 닿는 점도 너무 감동적이더라고요. 독자를 억지로 설득하거나 자기 세계관으로 끌어들이려는 의지를 안 보이면서 포섭하는 능력이 있는 작가인듯...유부만두님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트레버 장편 더 많이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유부만두 2021-08-22 18:05   좋아요 1 | URL
그죠 그죠.
어쩜 이야기를, 특히 회상 꿈 이야기를 능숙하게 버무리면서 인물과 배경을 내놓는 데 감탄할 수 밖에요. 정말 멋진 작가에요.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으려고 합니다. ^^

잠자냥 2021-08-22 13: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호방한 장보기에서 빵 터졌어요. ㅋㅋㅋㅋ 아이고 힐디치 씨 정말 먹는 거 하나엔 호방하게 진심인 남자.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8-22 18:06   좋아요 1 | URL
실은 저도 그러잖아요. 먹기와 장보기에 진심을 다하고요. 그런데 왜 힐디치는 나쁜 사람인건가. ㅜ ㅜ

잠자냥 2021-08-22 13: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호방남이 펠리시아 돈 훔칠 때 진짜!!!!! 호방하게 한 대 갈겨주고 싶었습니다. ㅜㅜ

유부만두 2021-08-22 18:08   좋아요 2 | URL
전 소리내어 욕을 냅다 질렀습니다.


그리고 이 ㅅㄲ가 펠리시아 병원 데리고 가는 거요.
다른 소설에서 성폭행 하는 것 보다 더 끔찍하게 ‘착취‘하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완전히 펠리시아의 신념, 습관, 정체성 등을 다 갈아버리는 거 잖아요. 으....

다락방 2021-08-22 14: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주는 기쁨을 한껏 만끽할 수 있었어요. 크-

유부만두 2021-08-22 18:08   좋아요 2 | URL
그쵸. 문장 문단 읽으면서 입과 뇌에 호사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바로 이 맛이야, 라고 생각했어요.

그레이스 2021-08-22 16: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영화 봐야겠군요~
반드시...

유부만두 2021-08-22 18:09   좋아요 2 | URL
영화는 강력추천은 아니고요, 책과는 다른 이야기 해석을 보여주는 듯해요. ^^

그레이스 2021-08-22 18:10   좋아요 2 | URL
정보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1-08-23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도 읽어 보고 싶고...유부만두님의 다이나믹한 리뷰 읽을때마다 재미져서 자꾸 클릭 클릭!!!!
밥 시간때 쫓겨 사는 인생도 느껴져 허탈한 긴장감!!!! 늘 흥미진진 합니다.
저는 맨날 오뚜기 백세카레 해먹다가 요즘 카레의 여왕 만들어 먹었는데...와...먹을만 하더라구요.종류별로 다 먹어 보고 있는데 이거 이거 이러면서 내가 카레의 여왕이 되는 거???싶더군요.
내일 점심땐 저도 애들 개학 기념으로 짜파게티 해줘야 겠네요.메뉴팁도 얻어 갑니다.알찬 서재~^^

유부만두 2021-08-24 20:07   좋아요 0 | URL
정리 안 된 감상 쪼가리에 인사 건네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이들이 집에서 밥을 먹으니 라면, 카레 등 인스턴트 음식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네요. 저희집은 (일본식) 숙성카레와 (인도식)티아시아 카레를 좋아합니다. 볶음밥이나 국수 등 한그릇 음식이 제일 편하고 좋아요.
개학은 했지만 방학의 연장인 기분이에요. 이젠 힘들다는 말도 하기 힘... ㅜ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