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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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의 소설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꽤 상층 계급인 특수한 사람들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오늘날, 그런 상황은 일반화, 대중화하여 사회 구석구석까지 뒤덮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소세키적인 세계는 대체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31쪽

자유와 독립과 자아로 가득찬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런 외로움을 맛볼 수밖에 없네 (나쓰메소세키 '마음'에서 재인용) -52쪽

호모 파티엔스는 호모 사피엔스를 비튼 말인데 이 말에는 살아있는 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인간성의 위계에서 볼 때 더 높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55쪽

호모 파티엔스란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살아 있을 의미 같은 건 없다는 절망에 계속해서 내몰리는 수용소의 상황에서도 '인간적으로 고민하고 싶다'는 바람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 온 끝에 다다른 말이기 때문에 아주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56쪽

우리의 깊은 고뇌는 '문'으로 들어가버리고 싶다는 괴로움보다는 소스케나 소세키, 베버처럼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갈 수 없다는 괴로움이 아닐까요. -62쪽

진짜 자기를 찾아라
이것이 때로는 강박관념이 되어 사람을 몰아붙이는 경우가 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치관에 비추어 '이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좀 더 빛나는 진짜 내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뒹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진짜 찾기의 공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진짜 찾기는 신경을 몹시 피곤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는 절대로 손이 닿지 않는 목표를 저편에 세워 놓고 영원히 그것을 향헤 노력하는, 헤겔이 말하는 '불행한 의식'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92쪽

저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 자살에 실패한 사람 등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대의 병리로 취급하지 않고, 자기 실현에 실패한 평범한 사람의 무리로 보지 않고,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이라며 잘라 버리지도 않고, 그들을 닥치는 대로 자기다움의 탐구로 내모는 현실을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93쪽

만약 진짜 자기라는 것에 진정으로 집착한다면, 오히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106쪽

그는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121쪽

하지만 지금은 '사랑의 보금자리'라기보다는 긴박한 연극이 계속되는 작은 '극장' 같은 것이 된 듯합니다. -143쪽

하지만 맞서야 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을 잘못 선택하면 비극을 부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152쪽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서 우리는 때때로 이중의 잘못을 저지릅니다. '자연은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회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54쪽

죽음이 가까이 있었을 때는 목숨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고 생각되었고 그 때문에 죽음을 멀리 쫓아버리는 데 열심이었는데, 죽음을 멀리 쫓아버렸더니 이번에는 삶의 소중함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168쪽

사소하다고 해도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을 소중히 하는 사회가 바람직할 것입니다. -179쪽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생이 물어오는 것에 대해 계속 대답해간 사람만이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도중에 대답하는 것을 그만둔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고 '결단하는' 것이며 또 '책임을 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책임'으로 번역되는 responsibility라는 영어다 '응답'을 의미하는 response로부터 파생한 말이라는 것도 '대답한다'는 것과 '책임을 진다'는 것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의 물음 하나하나에 정확히 '예'라고 대답해가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186쪽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어떤 사회나 세계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할까요. 그것은 '존엄'이라는 것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유일성'이나 '일회성'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를 재검토할 때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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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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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세 걸음 이상 다가오지 않아준 배려 깊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나에게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아준 한결같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혼자서 설레어한다. -9쪽

나는 두리번거리다 프리지어 스무 묶음을 골랐다. 한 아름으로 안길 만큼이었다. 첫눈이 온 날에 봄꽃을 사고 싶었다. 첫눈 오는 날에 프리지어를 살 수 있는 기적은 아무에게나 일어나진 않을 거였다. -18쪽

의심이 많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주눅이 든 채로 유년기를 보냈다. 언제부턴가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묻지 않고 혼자 조용히 상상해보거나 조사를 해보거나 하는 식이 됐다. 혼자서 상상하거나 공부할 때 의심이 많아서 이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 한쪽이 늘 편치 못했다. 궁금증은 마음의 불편을 감내해야 할 만큼 컸고 혼자서 알아내느라 간혹 멋대로 이해하는 일은 내 몫이 되어갔다. -25쪽

낙관은 대체로 빗나갔지만 비관은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낙관은 허술한 것으로, 비관은 치밀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주눅은 어느새 사라졌고 긍지 비슷한 게 생겨버렸다. -26쪽

한 세계와 또 한 세계의 문지방 위에서 기대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가장 농밀하게 흔들리는 시간을 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화학적으로 성숙한다. 성숙에 대해 한 시인이 이렇게 말해놓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꽃'에서-48쪽

살피다
마음을 먹는다는 말은 어쩐지 마음을 간식 정도로 생각하는 말 같다
마음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은 살피는 게 맞다. 마음을 따르고 싶다면 마음을 살피면 된다. 마음을 다스리고 싶다면 보살피면 되듯이. -51쪽

가엾은 여자, 아픈 여자, 두려운 여자, 눈물겨운 여자, 엄마라는 말은, 그 미음 발음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발음이다. 젖 한모금 같은 모음 하나를 입속에 담고 있다가 도라지꽃이 피듯 입술만 벌리면 내뱉을 수 있다. 사람이 세상에서 처음 배우는 말. 가장 쉬운 말. 그러나 물컹한. 거대한. 너무 따뜻해서 도리어 슬프고,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쉽지 않은 말. -62쪽

여자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제 엄마의 슬픔이 된다.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이상한 슬픔을 모든 딸들은 부모에게 선물한다. 금 간 그릇처럼 슬픔 한 줄에 새겨져 있다. 그러고 장차, 한 남자의 슬픔이 된다. 그 이상한 슬픔으로 인해 한 남자의 절망에 가까워져간다. 그런 후, 자라나는 딸의 슬픔이 서서히 되어 간다. -64쪽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거린다
전당포 안의
은그릇처럼.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사월과 침묵' 에서 -108쪽

그들을 위해서 세 명의 시인(심보선, 신해욱 그리고 나)이 조용히 천막을 쳤다. 광목천에 크레용으로 '문학천막'이라고 쓴 간판을 내걸었다. 안에는 촛불 두개, 집에서 싸들고 온 책 몇십 권, 그리고 공책 몇 권과 볼펜 몇 자루. 누군가 군중을 벗어나 조용히 있고 싶다면, 누군가 이 소풍길에서 느낀 소회를 어딘가 풀어놓고 싶다면 여기에 있어보라는 뜻에서였다. 작고 허름한 둥지 속에 쪼그리고 앉아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문학은 그런 거다. 소풍길의 대오에서 불현듯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저 혼자 질문하고 대답하기 위해서 잠시 대오를 이탈하는 일, 혼자만의 방에서 정연해지지 못하는 생각들을 기록해보는 일. -111쪽

우리는 타오르지 않기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무너진 골조물에 벽을 세우는 유일한 방법
이영주 '공중에 사는 사람'에서 -116쪽

당신은 똑바로 걷고 있지만 당신의 그림자는 허우적거려요. 당신의 그림자가 똑바로 걷고 있을 때는 당신만이 허우적거려요. (중략) 우리의 허우적거림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테죠. 허우적거리는 것만으로 우리는,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표현을 하고 있고요.
허우적거림은 나의 자세를 헝클고 공기를 헝클지만 나를 넘어지지 않게 하고 공기를 고여 있지 않게 합니다. 이렇게 허우적허우적하는 표현들을 가장 따뜻하게 받아주는 우리의 마지막 장소는 어쩌면 시의 장소일 거에요. 그러므로 시의 장소에서는 질서를 꿈꾸지 말아야죠. 허우적거려야죠. -120쪽

말의 한계점에서의 서성거림이 시에 많이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단순히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로고스라고 생각한다. 로고스가 되지 못한 말들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우리의 대화. 이걸 나는 인간의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사람에게 말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천만에. 사람에게 말은 업보였다. 말은 빚어지는 동시에 깨졌다. 그게 사람의 운명이고 사람인 한 그 멍에를 짊어지고 고해의 언덕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야 한다. 사람에게 말이라는 것은 쓸모 있거나 아니거나 간에, 그 자체로 이미 트라우마다. -127쪽

사람의 말로 사람의 일을 기록해야 하는 시는, 그러므로 불가능성을 향해서 간다. 불가능한 줄 알고도 간다. 개의치 않는다. 그 불가능성이 시의 토양이고 불구의 자리에서 영원히 서성이는 자, 그자가 시인이다.
내가 만약, 시에 아프다는 말을 썼거나 괴롭다는 말을 썼거나, 불편하다는 말을 썼다면, 그것은 아픔을 흔쾌히 허락한다는 뜻이고 괴로움을 흔쾌히 수락한다는 뜼이고, 불편함을 흔쾌히 수락한다는 의지다. 그걸 즐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넘어서겠다는 것도 아니고, 견뎌내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걸 시인하겠다는 태도다. 불가능성에서 불구인 채고 시를 얻겠다는 것이다. -128쪽

이런 건 아니었는데 때문에 잠을 청할 시간에 뒤척이게 된다면 그 사람은 송경동의 편이자 가난의 편이다. 가난의 편에 서서, 가난하지 않은 삶의 가난을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가난하지 않은 삶이 도리어 불편한 사람이다. 안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밥그릇을 빼앗겨 내몰리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람들의 소식이 귓전에 들려오는 이 세상에서, 나만 안녕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괴물은 아직 되지 않은 사람이다. -132쪽

아이들은 으레 수천년 전의 성인과 같이 풍경을 바라보지 않는다. 스스로 풍경 속에 뛰어 들어가서 논다. 스스로 풍경의 일부가 된다. -150쪽

우리에겐 고향이 없지. 고향을 잃어버린 것도, 잊은 것도 아닌, 그냥 없을 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고향이다. 우리는 영원히 말아하지 않는 복사씨 살구씨이므로. -158쪽

사랑 앞에서 사랑을 믿는 행위는 거짓말을 숭배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노련한 거짓말이라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에 관하여 노련하기 때문에 가능한 작당이다. 거짓말이 사랑을 부르는 것은, 사랑이 거짓말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작당이다. 영원히 변치 말자는 거짓말이 약속으로 둔갑하는 그 순간을, 사랑은 사랑한다. 영원하자고 말하는 순간을, 그 발화 자체를 겁내지 않는 만용을, 사랑은 사랑한다. 사랑은 그렇게, 자기 한계에 자기를 가두고 마는 얌전함보다는 자기 한계를 지워나가고 부숴버리는 강령 자체를 사랑한다. -160쪽

정작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말은 어릴 적 엄마에게 들었으니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랑한다는 말이 그 자체로 아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런 말을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픔이 된다.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 그들에겐 애틋한 추억 한 조각이 오히려 힘겨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에 찬 말들 역시 지겹도록 주고받는다. 그 말에도 무감해질때까지.
힐난의 말은 현재진행형일 때 더욱더 고통이고 사랑 가득한 말은 과거완료형일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이다. 들려오는 말은 모두 악담인데 덕담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때 이럴 때 우리는 가장 비참하다. -163쪽

인간이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의 숙주가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잊기보다는 익숙해지기. 고통의 숙주가 되어간다는 것은 통증의 수위만큼을 인내심으로 제방을 쌓아두는 행위이다. 인내심이란 제방은 한꺼번에 무너져버리거나 혹은 서서히 균열이 간다. 결국 인내심은 거짓말의 또 다른 얼굴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164쪽

추억은 요물이었다. 살아가는 지금은 맨눈으로 보게 하질 않았다. 추억은 경험치라는 편견의 도수에 맞춰진 안경이었다. 물흐르듯 자연스러울 나의 선택들을 막는 트라우마로 직조된 장애물이었다. 추억은 번번이 고정관념이라는 굳은살로 새로운 사물들을 새롭지 않게 만지게 했다. 추억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처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꿈과 다르지 않았다. 인과관계는 까맣게 잊힌 채로 제멋대로 기억을 기억하는 몹쓸 것이었다. -169쪽

새벽 네시는 하루가 얼마가 남았는지를 생각할 수 없는 곤란한 시간이지만 하루가 시작되려면 얼마나 남았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설레는 시간이다. 하루 24시간 중에 그나마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미묘한 시간인 것이다. -175쪽

비미를 향한 미적 태도는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용감하게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176쪽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에서 -177쪽

열아홉 살은 희망 따위를 믿는 마지막 나이다. 진정으로 유유할 수 있는 나이가 스무살일 거라는 희망을 주먹 안에 꼭 쥐고 있을 나이가 열아홉이다. 자신이 살아온 찌질한 일상과는 확연히 다른, 더러는 자신감에 차오르고 더러는 겸손해지기조차 할 수 있는, 진정으로 키가 크는, 진정으로 세상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중심까지를 날렵하게 가로지르는 튼튼한 날개가 어깨죽지에서 돋아날 수 있는. 그래서 절망과 설렘 사이에서 쉼 없이 멀미를 하는 나이. -180쪽

conflict에는 갈등과 충돌이라는 상(호)충(돌)의 의미가 바탕에 깔려있었고, struggle이라는 말에는 안간힘을 쓰는 상태라는 의미가 바탕에 깔려있었다. 나는 struggle에다 밑줄을 긋고 페이지 귀퉁이를 접었다. (중략)
부조리한 상황에 대하여 지치지 않고 안간힘을 쓰는, 고귀한 삶에의 의지. 여기엔 포기하지 않는다는 억척스러움이, 꼿꼿하고 굳세지만은 않다는 인간다움이, 낑낑대는 듯한 근근함이 포함돼 있었다. 피냄새는 조금 덜했지만 살냄새가 났고 땀냄새가 났다. -187쪽

빨리 걷는 출근길 인파 속에서 슬리퍼를 찍찍 끌며 걷는 걸음도 투쟁이고, 남들이 땅 보는 법을 공부할 때 하늘의 별자리 보는 법을 공부하는 것도 투쟁이고, 모두가 식도락을 즐길 때 소박한 풀밭 밥상에 만족하는 것도 투쟁이고, 금전출납부를 쓸 시간에 음악을 듣는 것도 투쟁이고 궁리를 할 시간에 몽상을 하는 것도 투쟁이고, 판단을 할 시간에 사색을 하는 것도 투쟁이다.-189쪽

우리는 알고 있다. 봄날에 내렸던 어이없는 폭설도 극렬한 투쟁임을. 아스팔트의 균열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풀도 투쟁하는 중임을. 엉뚱한 행동, 기괴한 상상력, 불편한 공간, 까칠한 성격 등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우울하고 슬프며, 서럽고 괴로워 흐물대는 우리의 실상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이 기괴한 모습을 지닌 텍스트, 이 우울한 모습으로 무장된 사람을 극구 옹호하는 것도 우리에겐 투쟁의 일부다. 여기엔 싸우고 이겨서 쟁취해낼 거란 의지 따위는 없다. 낙오를 각오한다는 의지 또한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다는 천성과 이렇게 해야만 내가 조금은 행복해진다는 진심이 있을 뿐이다. 내팽개쳐진 인간의 천성과 인간의 진심을 사모하기 위해 삶을 낭비해도 괜찮다는, 투쟁이 있을 뿐이다. -190쪽

그러나 그 사람은 정말 그대로였을까. 어쩌면 살 냄새, 땀 냄새, 눈물 냄새를 풍기며, 이전에 있던 자리와는 다른 곳을 향해 환형동물처럼 조금씩 이동을 하지는 않았을까. -191쪽

변두리로 밀려난 생이었지만, 변두리에는 나처럼 밀려난 생들의 주옥같은 진실들이 포진해 있음을 알게 되어 눈물겨웠다. -200쪽

근근함을 이어가는 데에는 나름의 비법이 필요했다. 지금 내가 선택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 아니라 최선의 선택이라고 우겨 말하기, 내가 원하는 삶은 저 멀리 외딴 곳에 있지 않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범주 안에 있다고 자기 세뇌하기 등등, 이런 비법을 거치자, 어느덧 나도 모르게, 나는 저렴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 -202쪽

한의원에 찾아가니 내 체질은 고영양식이 맞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았다. 한의원을 나오면서 나는 뼛속까지 저렴한 인생이구나 생각했고 안도했다. -203쪽

시인으로 산다는 비참은 방식이 좀 다르다. 먹고사는 게 미참해서 더 큰 비참을 외면하는 삶이 아니라 더 큰 비참의 참담함 때문에 먹고사는 비참을 외면하게 되는 삶. -205쪽

조금 위험하게 말하자면 생활의 비참과 영혼의 비참의 연관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그 연관 고리를 끊어냄으로서 생활의 비참에 영혼만큼은 물들지 않기 위해서, 자본 논리를 벗어나 다른 층위에서 삶을 바라보기 위해서, 최소한 노예는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는 시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206쪽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느다.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중에서. -210쪽

따뜻한 문장을 가장 꺼려했다. 따뜻한 문장은 삶을 달관한 듯한 깨달음과 위로로 포장되어 있기가 십상이다. 위선에 가깝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삶과 손쉽게 화해해버렸다는 의미애서 패배자의 모습과 비슷한 뒷맛이 남는다. 삶의 녹록지 않음을 분별력 있게 가늠하지 않은 채로, 손쉽게 화해한 태도가 배어 나와 속임수와도 비슷한 뒷맛이 남는다. 사랑을 겪기보다는 사랑을 포장하려는, 그래서 환심을 쉽게 사려는 얇은 상술도 보인다. 따뜻한 문장으로 위로하기란 너무 쉽다. 생은 아름답고 살만하다는 낙관은 누구나 얻고 싶어하므로. 따뜻한 문장은 인기 품목이 된지 오래됐다. 그러나 이런 위로는 어딘가 삶과 유리돼 있다. 생이 어찌하여 아름답고 그리고 살만한지를 알기 위해 치러야 할 지난한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은폐하려 한다. -214쪽

우리는 겪은 불행들을 더 잘 이해하면서 더 겸손해지고 예민해진다. 그리고 성장하고 늙어간다. 그 과정 자체가 삶이고,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고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고귀한 경험들은 따뜻한 온도의 문장이 아니라 밀도 높은 문장만이 감당할 수가 있다. -215쪽

우리에게 생일이란, 나를 떠나 떠돌던 내가 어색하게 나와 마주하는 하루인지도 모르겠다. -226쪽

곡진한 말은 간절함보다 더 고요하고, 정성보다 더 아련하며, 사려보다 더 신중한 말이다. 말을 아끼려고 아끼는 게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 말. 말들의 타임캡슐.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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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11-29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다가 졸려서 내일. 밑줄긋기 2년만에 컴백.

다락방 2012-11-2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으네요.

웽스북스 2012-12-08 02:45   좋아요 0 | URL
네. 좋아요 :)

치니 2012-11-2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눈물이 났지만, 저 희망버스 글에서 가장 가슴이 울렁울렁 눈물이 차올랐어요. 서로의 두려움을 알아본 사이, 라는 그 벅찬 느낌.

웽스북스 2012-12-08 02:4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는 진짜 이 시대에 시인들이 필요하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정말.

웽스북스 2012-12-08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긋기 완성. 하아. 너무 많다. ㅋ
 
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절판


은교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39쪽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 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46쪽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수 없어요
왜요
콩밭,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콩반 매는 아낙이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74쪽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엉서 귀한 것들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후략) -104쪽

은교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
슬럼.
슬럼.
하며 앉아 있다가 내가 말했다.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나야말로.-112쪽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아서,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억울해지는 거에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언젠가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113쪽

은교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까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런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144쪽

이번엔 따끈하고, 개운했나요?
네. 맛있었어요. 따끈하고 맑고 개운했어요. 고마워요, 데려와 줘서,-157쪽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
한다

모두 건강하고
건강하길

(작가의 말)-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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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 2010-08-0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작가의 말까지 아름다웠던 책이었지요.

웽스북스 2010-08-08 23:52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랬어요. 김지님. 겨울에 올라오시면, 따뜻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 먹으러 가요.

깐따삐야 2010-08-09 12:0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좋았는데. 근데 두분 데이트 하실 예정? 껴줘용.

웽스북스 2010-08-09 12:40   좋아요 0 | URL
제가 청주로 한번 놀러갈까봐요. :)
 
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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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좀처럼 칠판 위에 진실을 그리지 못한다. -44쪽

그렇다고 파티를 망칠 필요는 없지만 진실은 알아야 한다. -52쪽

내가 죽으면 묘비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지기를 바란다.

그가 신의 존재를 믿는 데 필요했던 유일한 증거는
음악이었다-70쪽

음악은 세상 모든 사람이 음악이 없을 때보다 인생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71쪽

모든 권력은 억측가들의 손에 있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승리한 것이다. 병균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도 똑바로 정신 차려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 그래서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그들의 억측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이다. 그들이 증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사람이다. -92쪽

우리는 하고 또 하고 하고 또하고 또 한다.
우리가 해야하고 해야만 하고 해야만 하는 것들을
우리가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질 때까지

- 보코넌-94쪽

책과 관련하여 한마디 더 하자면,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 매체인 신문과 TV는 오늘날 국민 전체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부실하고, 너무나 무책임하고, 너무나 비겁하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매체는 책밖에 없다. -102쪽

비극적 장면은 불발탄으로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필요한 요소들이 갖춰지기만 하면 비극은 반드시 감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농담은 무에서 시작해 쥐덫을 만드는 것과 같다. 터져야 할 때에 터지게 하려면 정말 피터지게 노력해야 한다. -125쪽

지금 지구는 엉망이다. 그러나 과거에도 엉망이었다. 행복했던 시절 따윈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지난 시절만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손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날 쳐다보지 마라. 그냥 이렇게 됐구나" -127쪽

2차 대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댄 삼촌을 내 등을 철썩 치면서 "이젠 어른이 다 됐구나" 라고 말했다. 순간 삼촌을 죽이고 싶었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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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7-24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트 보네거트 소설을 알라딘에서 반값에 3권을 사놓고 모셔만 두고 있었습니다만...영화 <리쿠르트>를 보면서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과 <고양이 요람>을 꼭 봐야만 했더랬습니다. <나라없는 사람>도 계속 눈에 밟혔던 책인데..구입해야 겠습니다~

웽스북스 2010-07-24 23:19   좋아요 0 | URL
제 5도살장도 정말 좋아요. 한권만으로 전 충분히 반했어요-
저도 고양이요람은 여직 모셔두고 있는. ㅋㅋ

이책은 아마 yamoo님 속도면 1시간도 안걸릴듯. ㅎ

무해한모리군 2010-07-2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가 문제를 그리는 방식이 참 좋아요.
진지한 문제를 위트있게 풀어내는 것이요.

웽스북스 2010-07-24 23:20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정말 센스쟁이할아버지.
클린트이스트우드랑 마주앉혀놓고 대화한번 시켜보고싶기도.

무해한모리군 2010-07-26 09:13   좋아요 0 | URL
오호호 그거 기발한데요 ㅎㅎㅎ
의외로 잘 통할듯.

웽스북스 2010-07-27 23:02   좋아요 0 | URL
그죠. 은근히 ㅋㅋ

흰그늘 2010-07-25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밑줄이군요^^ 언제 시간이나서 읽게될지 잘.. 모르겠지만..

웽스북스 2010-07-27 23:02   좋아요 0 | URL
휘리릭 읽으실 수 있을 거에요. 책장이 매우 금방 넘어가요.
 
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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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건 하나뿐이다. 내 말들은 그의 말처럼 매끄럽지 않을 것이다. 견고하지 않을 것이다. 일사불란하지 않을 것이다.
함부로 요약하지 마라.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
나는 더듬을지도 모른다.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내 말들로 그의 말에 부딪칠거다. 부서질 거다. 부술 거다. 조각조각 부수고 부서질 거다. -41쪽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다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52쪽

삶이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에 철저히 회유되고 협박당한 사람의 얼굴로 어머니는 작은 방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의 살비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녀에게 삶이 폭력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떤 희망에 그토록 교묘하게 회유당했을까. -55쪽

나는 그 새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서 있었던 것 같다. 그 순간에 찾아들 벼락같은 적막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나자 새가 사라지기 전에 꿈에서 깼다는 것이 서늘하게 다행스러웠다. -56쪽

삼촌이 그랬듯이 인주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고요한 푸른빛을. 푸른 시간을. 밤의 비밀과 낮의 명료함이 맞바뀌는 지진 같은 떨림을. 피와 뼈까지 파랗게 배어드는 서늘함을. 잠든 사람들의 체온이 가장 내려가는 순간. 지표면이 가장 차가워지는 이 순간. -57쪽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득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 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64쪽

그의 손이 서슴없이 내 손바닥에서 열쇠들을 채간다. 잠깐 스친 손가락들이 따뜻하다. 차가움보다 더 소름끼치는 온기다. -124쪽

그러니까 인파에 떠밀려 지하철을 탈 때, 복잡한 환승 구간을 어깨로 헤치며 나아갈 때, 매표구 앞에서 길고 무질서한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릴 때 난 성스러움을 느껴. 인간을 믿을 수 없어질 때, 흉폭한 모서리가 가슴을 찢고 튀어나올 때 성스러움을 느껴. 차가운 장판 바닥에,. 씻지도 않고 코트도 안 벗고 웅크리고 누워서 내 안의 마모된 부분을 들여다볼 때, 영원히 망가졌거나 부서져버린 그것들을 들여다볼 때 성스러움을 느껴. 예배당도 고적한 기도처도 아니고...너덜너덜한 이 삶 가운데서. -151쪽

치욕은 너덜너덜하다.

그 너덜너덜한 것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부릅뜬 눈이 감기지 않는다. -152쪽

강석원의 문체는 딱딱함과 열의, 반짝임과 둔감함, 진지함과 얄팍함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무엇인가가 불쾌했고, 무엇인가가 가짜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진짜였다. -212쪽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219쪽

모든 죽은 사람의 관 뚜껑을 닫고, 거칠게 못질을 하고, 영원히 버리십시오. 그 얼굴을, 눈동자들을, 끈덕진 자책과 결의 따위를. -314쪽

이제 나는 늙었지만, 어떤 위엄도 깨달음도 마침내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만나온 사람들과 주어진 시간을 서서히 파괴해왔고 자신 역시 무사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교훈도 치유도 돌이킴도 없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흔들리며 끔찍하게 어두운 길을 가겠습니다. 어떤 사람과도. 어떤 전생의 기억과도 마주치지 않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영혼과 천사들을 위해. 내가 그르친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을 위해. 아멘. -314쪽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마지막 결단을. -340쪽

어느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길...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그게 무서워서, 꿈 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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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9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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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9 1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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