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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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울프)는 말한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교육 받은 계급의 일원이라고. 우리가 겪은 실패는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라고. 우리는 이런 현실을 마음 깊숙이 담아 두는 데 실패해 왔다고. -25쪽

이런 사진들이 자아낸 연민과 메스꺼움으로 마음이 심란해진 나머지, 그 밖에 어떤 잔악 행위들과 어떤 주검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33쪽

뉴스가 소위 전세계라는 어법으로 말하는 세게는 지리적으로나 관심 여부로나 아주 국한된 장소일 뿐이며, 뭔가 알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매우 짧고 굵게만 방송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에서도 고작 몇개만이 추려내질 뿐이니 그처럼 선택된 전쟁들 속에서 모아놓은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다. 게다가 카메라에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질 것이다. -41쪽

오늘날 사진은 상상력보다 우월한 권위를 지니게 됐다. -47쪽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출됐던 그토록 많은 사진들이 순수하지 못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90쪽

이 사진이 찍힌 지 수십 년이 흘렀어도 관찰자들, 즉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 사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푼다거나, 이 사진이 보여준 추악함을 없앤다거나, 자신들도 공동의 방관자라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한 채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 사진에 찍힌 것 같은) 표정을 보게 될 것이었다. -95쪽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식민지화된 아프리카는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일반 대중들의 의식 속에 주로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희생자들의 모습이 달린 잊지 못할 사진으로 존재한다. -109쪽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110쪽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 (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12쪽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자신들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광경을 사진에 찍어 전시하는 것도 이와 똑같은 일이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 (백인들처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113쪽

부당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품게 될 감정이 연민이라면 연민은 도덕적 판단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비록 비극적인 불행을 그린 드라마에서는 원래부터 공포와 연민이 쌍둥이일지는 모르나, 흔히 공포가 연민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는 한 공포는 연민을 희석(산란)시키는 듯하다. -115쪽

사진은 그 무엇이 됐든지 간에 피사체를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116쪽

살가도의 사진들은 특히 그가 생생하게 묘사해놓은 비참함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상업적인 맥락 때문에도 심술궂은 대접을 받았다. 그렇지만 정작 문제는 그의 사진이 어떻게 어디에서 전시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 자체에 있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진들의 초점,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하는 그 초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120쪽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122쪽

피사체가 전혀 포즈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찍었다는 이미지가 평범해 보이지 않을 경우, 보여져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행위는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을 눈앞에 바짝 들이대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을 괴롭혀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라고 강요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122쪽

도덕적으로 깨어 있는 사진작가들과 사진의 이데올로그들은 전쟁 사진을 통해서 (동정심, 연민, 분개 등의) 감정을 착취한다는 쟁점들, 그리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자극해댄다는 쟁점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23쪽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125쪽

유명한 사진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에 깊이 각인되지 못했거나 남아 있는 이미지가 별로 없는 잔악 행위들은 훨씬 더 푸대접을 받는다. -130쪽

미국인들은 저곳, 그리고 미국이 개입되지 않은 곳에서 행해진 악을 사진으로 찍기를 더 좋아한다. (중략) 미국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보려는 국가적 합의는 비참한 광경을 담은 사진들이 맞닥뜨린 새로운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사람들은 그 어느 곳에서 벌어졌든지간에 그릇된 일들에 온 정신을 뺏길 것이다. 단 미국 자체를 유일한 해결사이자 구원자로 보는 한에서만 말이다. -134쪽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135쪽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 -135쪽

이 사진들이 전시됨으로써 우리도 이들과 똑같은 구경꾼이 되어버린 셈이다. -140쪽

아 끔찍한 일이군. 그리고는 채널을 돌렸습니다. -151쪽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정작 문제는 이렇다. 이제 막 샘솟은 이런 감정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그런데 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금방 지루해하고 냉소적이 되며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153쪽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154쪽

현실이 일종의 스펙터클이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은 깜짝 놀랄 만큼 지역성을 띠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이 세계의 부유한 곳, 그것도 뉴스가 오락으로 뒤바뀌어 버린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극소수 교육 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하고 있는 셈이다. -162쪽

현대성의 시민들,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 전쟁터에 직접 가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 참상을 세세하게 말하는 데 정통한 사람들은 진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웃도록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좀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온갖 일을 다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의자에 앉은 채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164쪽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166쪽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167쪽

아마도 사람들은 사색보다는 기억 자체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듯하다. -168쪽

오늘날 전쟁 소식이 전 세계로 퍼진다고 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뺏을 만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하는 현대의 삶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인 이미지들을 외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하다. -169쪽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조차도 예술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입니다. 문화가 발달하고 각 문화가 상호 작용함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 가는 것을 향해 인간이 보여준 반응의 역사가 곧 문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207쪽

작가는 이 세계에 눈길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사악함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살펴보며 연상해보려고 노력하는 존재. 그렇지만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냉소적이 되거나 천박해지거나 타락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207쪽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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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1-16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려서 일단! 수정예정. 굿나잇.

블리 2009-01-1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읽고픈 책 리스트에 넣어뒀다가
잊고 있었다;;; 기억나게 해준 포스팅에 감사!

첫 밑줄, 상상력의 부재로부터 이어지는 타인에 대한 이해부족
정말로 공감... 요즘의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더랬지.

웽스북스 2009-01-18 01:40   좋아요 0 | URL
언니, 읽어봐요. 강추에요 강추.

Alicia 2009-01-2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님 요즘 손택 읽으세요?
존 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씌어진 책 같던데.
저기저기.. 뭐더라.. 음..빌렘 플루서의 책도 같이 읽으시면 도움될 것 같아요. ^^
참견쟁이.ㅎㅎ

웽스북스 2009-01-21 02:19   좋아요 0 | URL
아. 요즘 손택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고. 그냥 한권 읽었어요.
얘기해준 책, 기록해놓을게요. ㅎㅎ 요즘 책을 잘 안사서 ㅋ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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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 참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는 환상 속의 가상 인물을 만들어내 서로에 대한 몽타주를 작성하고 있어요. 질문을 하지만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게 그 질문들의 매력이죠. 그래요, 우린 서로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걸 피하면서 상대방의 호기심을 자꾸 자극하고 계속 부채질해대고 있어요. 우린 행간을 읽으려 애쓰고 낱말과 낱말, 철자와 철자 사이에 숨을 뜻을 읽으려 애쓰죠. 상대방을 정확하게 평가하려고 안간힘을 써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본질적인 면만은 드러내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조심 또 조심해요. -32쪽

우리는 그 만남 뒤에도 자신의 외모를 둘러싼 비밀을 누설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가 상대의 어떤 점을 보고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하느냐가 흥미로운 것이지,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가 흥미로운 것은 아닙니다. -59쪽

이런 상황에 딱 맞는 사람이 바로 저일 거에요. 당신의 실제 삶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124쪽

뭐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해드리고 싶지만 '즐거운 성탄절과 복된 새해'처럼 들릴 거 같아 그만 둘래요. -125쪽

물론 저에게도 당신은 여느 누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안에 있으면서 저와 늘 동행하는 제 2의 목소리같은 존재입니다. 당신은 저의 독백을 대화로 바꿔놓았습니다. -132쪽

이번에도 제 안에 제 2의 목소리가 있어 그 목소리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던지고, 제가 미처 못 찾은 답을 주고, 자꾸 제 외로움을 뚫고 들어와 그것을 깨뜨려놓았습니다. -133쪽

미안해요. 나 조금 취했어요. 이제 이걸 보내고 난 자러 갈 거에요. 굿나잇 키스. 당신이 결혼한 사람이라 속상해요. 우린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을텐데. 에미. 에미. 에미. 난 에미라는 글자를 쓰는 게 좋아요. 왼쪽 가운뎃손가락 한 번, 오른쪽 집게손가락 두 번, 그리고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으로 두 번. 에미, 나는 이 글자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쓸 수 있어요. 에미라고 쓰는 건 에미에게 입 맞추는 거에요. 우리 이제 그만 자요. 에미. -154쪽

당신의 메일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고마워요. -181쪽

레오. 못하겠어요. 당신에게 이 세계를 전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결코 이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어요. 이 세게는 너무 빈틈없이 꽉 짜여 있어요. 일종의 요새와도 같아요. 정복당할 리 없고 침입자 하나 허용하지 않는. 굳게 닫혀 있는 요새 말이에요. 우린 '바깥'에 머무는 수밖에 없어요. 이게 우리에게 허용되는 유일한 길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당신을 잃게 돼요. -182쪽

사랑하지 않는 두 사람은 상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데서 열정을 얻는 법이에요. 저로서는 이것 이상으로 지혜로운 조언은 해드릴 수가 없네요.-185쪽

그 남자도 일부러 여자를 만나려고 애쓰지 않고, 모든 게 저절로 되도록 운명에 맡기며, 저절로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요. -191쪽

3분 뒤
Aw:
잘자요

2분뒤
Re:
굿나잇

1분뒤
Aw:
굿나잇

50초 뒤
Re:
굿나잇

40초 뒤
Aw:
굿나잇

20초 뒤
Re:
굿나잇

2분 뒤
Aw:
새벽 세시에요. 북풍이 부나요? 굿나잇.

15분 뒤
세시 십칠분이네요. 서풍이에요. 쌀쌀하고요. 굿나잇.

다음날 아침
제목 : 좋은 아침
굿모닝, 레오

3분 뒤
Aw:
굿모닝, 에미-264쪽

당신에게 이메일이 와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어제 그랬고, 일곱달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꼭 그래요. -268쪽

에미, 저를 불감증이라 여겨도 할 수 없어요. 크건, 작건, 풍만하건, 말랐던, 펑퍼짐하건, 납작하건, 둥글건 모났던 간에 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가슴에 관심 없어요. 저는 여자를 이루는 다른 모든 것은 뚝 떼어놓은 채 오로지 가슴 크기에만 관심을 갖는 재주는 없습니다. -273쪽

3분 뒤
Re:
지나간 시절을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지나간 시절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시절이고, 새로운 시절은 지나간 시절과 같을 수 없어요. 지나간 시절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쇠잔해요.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해서는 안 되죠.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늙고 불행한 사람이에요. 그거 알아요? 저는 빨리 집에, 레오에게 오고 싶었어요.

50초 뒤
Aw:
내가 이따금 당신의 집이 되는 거 좋아요!
-292쪽

2분 뒤
Re:
잘 자요. 저는 당신을 무척 사랑해요. 우리의 만남이 두려워요. 만나고 나서 당신을 잃게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에미.

3분 뒤
Aw:
'잃는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아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잃는 거에요. 잘자요. 내 사랑. -363쪽

3분 뒤
Aw:
아니요, 에미. 얘기하지 말아요. 대신 내가 제안을 하나 할게요. 진지하게 하는 거니까 웃으면 안 돼요. 내가 문을 살짝 열어 둘 테니 그냥 들어오세요. 현관에서 왼쪽 첫번째 방으로요. 방은 어두울 거에요. 내가 당신을 보지 않고 포옹할게요. 그리고 눈을 감은 채로 키스할게요. 한 번, 단 한 번의 키스!

50초 뒤
Re:
그러고 나서 저는 도로 나와요?

3분 뒤
Aw:
아니요! 키스하고 난 다음에 블라인드를 올리고 우리가 누구에게 키스를 했는지 보는 거에요. 그리고 나는 당신 손에 와인 잔을 쥐여줄 거고 우린 건배를 하겠죠. 그런 다음 계속 서로를 보는 거에요. -367쪽

양심의 가책요? 아니요. 레오, 베른하르트에게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았어요. 다만 내 자신이 두려울 뿐이었죠.
저는 제 방으로 올라가 당신에게 이메일을 쓰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내 사랑 레오. 오늘 당신에게 갈 수 없어요.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이 말만 써놓고 몇 분 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결국 지워버렸어요. 전 당신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건 곧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일테니까요.
레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어요. 제 감정이 모니터를 벗어난 거에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베른하르트는 그걸 알아차렸어요. 추워요. 북풍이 불어오고 있어요. 이제 우리 어떡하죠?

10초 뒤
Aw:
주의. 변경된 이메일 주소입니다. 보내신 주소에서 수신자가 메일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전달된 새 이메일들은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시스템 관리자에게 문의하십시오. -3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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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0-26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 밑줄이 스포일러네 ㅋㅋ

다락방 2008-10-26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한권을 다 옮겨온 것 같아요, 웬디양님.
그러게 이거 스포일러네 ㅎㅎ

웽스북스 2008-10-26 21:50   좋아요 0 | URL
그죠. ㅎㅎㅎ
아, 근데 정말 너무 잘읽었어요 정말 ^_^

다락방 2008-10-26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막,

에미 이제 어떡하지? 정말 어떡하지?

이랬어요. ㅜ.ㅜ

웽스북스 2008-10-27 12:58   좋아요 0 | URL
그죠 ㅜ_ㅜ

니나 2008-10-2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헑쓰~ 정말 스뽀..ㄷㄷㄷ ㅋㅋㅋ
그치? 한 번 읽으면 그냥 죽~ 끝까지 놓을 수가 없다니깐

웽스북스 2008-10-27 12: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그니까, 이게 손에서 정말 놔지지가 않더라.
출근길에 읽었음 큰일날뻔했어.

무스탕 2008-10-2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스템 관리자 모가지를 흔들어서라도 레오랑 연락이 닿았어야 했는데.. ㅠ.ㅠ

웽스북스 2008-10-27 23:38   좋아요 0 | URL
아쉽긴 해도. 전 결말이 꽤 마음이 들었어요.

다락방 2008-10-28 08:59   좋아요 0 | URL
저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결말이다, 막 이랬어요. ㅋㅋ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구판절판


"그때 나는 악마처럼 강해지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악마는 정말 강한가? 악마는 그토록 힘이 센가? 내 의문과는 무관하게 결코 '주르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느린 속도로, 정희의 빰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그 눈물의 속도처럼 천천히, 하지만 지나고 보면 이내 그 시절들은 지나갔다. 용정의 봄은 허무할 정도로 짧았다.-32쪽

정희가 내게 보냈던 처음이자 마지막 서신. 그 한 장의 편지로 인해서 그때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움직이던 내 삶은 큰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부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42쪽

"삼나무 높은 우듬지까지 올라가본 까마귀,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는 법이죠. 진실을 알게 된 고귀한 자들은 비참하게 죽는 순간에도 이 세계 전부를 얻은 셈이에요. 진실을 막을 수 있는 총검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어떤 마적단을 죽이기 위해서는 임산부의 피를 총구에 발라야만 한다고 하더군요. 죽음이 두려운 자들에게는 거짓 관념의 사실이 필요할테니까. 그 사슬로 유지되던 낡은 세계가 무너지니 그 소리 요란한 셈이죠"-47쪽

어떤 계기로 한 번 세상을 고쳐보게 되면 모든 게 다 바뀌어버리는 거야. -65쪽

뭔가에 사로잡혀 있으나 그게 뭔지 숨기고 있는 듯한 눈빛. 늘 과장되게 웃고 과장되게 말하고 과장되게 행동하는 태도. 다소 펑퍼짐한 앞모습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날카롭게 보이던 옆모습, 그의 첫인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기계라면 그는 정비공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행복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들의 사용설명서를 지니고 있는 듯한 사람. -72쪽

바라는 게 없는 인간은 아편에 중독되지 않아요. -81쪽

사랑도 마찬가지지만, 증오 역시 감정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지. 사랑이든 증오든 오직 행동으로 실현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거야.-89쪽

겨우내 그 작은 유리창으로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서야 나는 그게 겨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울은 내 모습만을 보여줄 뿐 그 어떤 풍경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내 얼굴이 그 유리창에 비치는 까닭은 아직 계절이 내게 채 보여주지 않은 것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회색 산과 물이 마른 개울과 여윈 나무만이 서 있는 거리와 움츠러든 사람들 속에 감춰진 마음이 세상의 모든 투명한 유리를 거울로 만들어버렸다. -103쪽

내 몸에는 어떤 소망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내가 겁낸 건 바로 눈물이었다. 늙은 나무에 피는 꽃처럼 내 마른 몸에서 눈물 같은 게 나올까봐.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나같은 놈도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떠한 사람으로 되며,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모르는 나같은 놈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까 봐. -123쪽

영국더기 언덕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빛의 세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빛의 세계 속에 어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됐다. 인화된 양화는 필연적으로 음화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은 현상한 필름에도 인화된 사진에도 있지 않았다. 진실은 음화와 양화, 두 세계에 동시에 걸쳐 있다. (중략)
인화지에 나타난 내 손 역시 빛도 어둠도 아니었지만, 동시에 빛이자 어둠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나는 지난가을의 고통을 완전히 치유받았다. 지금 여기 내게 없는 것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이리라.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가 존재한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빛도, 어둠도 아니면서 동시에 빛과 어둠인 세계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암등의 흐릿한 불빛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정희를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제야 슬픔 없이 두려움 없이 정희가 그리워졌다. -126쪽

"아까 네가 나뭇가지를 흔들었니?"
"꼭 누가 흔들어야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랍데. 나뭇가지 저 혼자서 흔들리는 밤도 더러 있답데"-132쪽

나는 오직 진리를 위해 분노할 뿐이요. 인간은 진리 속에 있을 때 끝없이 변화할 뿐이오. 인간이 변화하는 한 세계는 바뀌게 되오. 죽는다는 건 더 이상 변화하지 못하는 고정의 존재가 된다는 것. -235쪽

만약 그날 토벌대가 유정촌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당신이 말한대로 경성으로 돌아갔다면 당신은 이런 세계 따위는 보지도 않고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오. 하지만 진실을 알겠노라고 선택한 다음에는 돌아갈 방법이 없소.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은 결정론적인 세계를 살아가는데도, 그들은 쉬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오. 그게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일이오. 그 책은 버렸으되 내가 톨스토이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오. -236쪽

주인만이, 자기 삶의 주인만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꿈꾸지 않는다. -247쪽

그 시절, 사랑은 다만 사랑이었을 뿐이며 희망은 희망 아닌 것들과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제 모두 지나갔다. 사랑에는 의심과 증오가 스며들었으며, 희망은 가장 어두운 숲속까지 들어가서야 겨우 찾을 수 있게 됐다.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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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링 2008-10-25 0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왜인진 모르겠지만 책 중간에 나오는 "우리들은 천국에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계속 기억에 남더라고요.

웽스북스 2008-10-26 02:53   좋아요 0 | URL
김연수는 참 문장을 잘써요, 그죠 ^_^
 
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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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넌 최고의 디자이너야"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 디자인을 그만둔 이유는 열등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메이비의 방송을 듣고 난 다음부터, 나는 디자인을 한다는 게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라디오 방송이 도대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내 안의 무엇인가가 조금 바뀐 것만은 분명했다. -38쪽

사진은 사람뿐 아니라 시간을 붙들기도 한다. 아니, 시간을 붙들 수는 없다. 시간을 붙들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가고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멈춘다. 사진은 그렇게 시간과의 달리기에서 계속 뒤쳐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70쪽

오차 측량원은 말 그대로 오차를 측량한 뿐이었다. 오차를 되돌릴수도 없고 수정할 수도 없다. 물론 오차측량원이라는 단어를 너무 깊이 생각한 내 잘못이다. -87쪽

뭔가 단단히 어긋나 있었지만 나는 그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명색이 오차 측량원인 주제에 말이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일까? 원인이 없는 결과도 있지 않을까? -87쪽

에스키모들에게는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필요없어. 훌륭한 고래가 없듯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선인장이 없듯 훌륭한 인간도 없어. 모든 존재의 목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하게 존재할 필요는 없어. 에스키모의 나무지도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지도에는 '훌륭한'이라는 수식어가 없구나. 이 지도 속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며 있지 않구나. 그냥 지도이구나. -99쪽

나는 상자에서 나침반을 꺼낸 다음 팽이를 치듯 몇 바퀴 돌려보았다. 자침은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대체 자침을 붙드는 이 힘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일까? 나는 계속 나침반을 돌려댔다. 자침이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까지는 멈추지 않겠다는 듯이. -101쪽

-제가 오늘을 공격일로 선택한 이유를 아십니까?
-글쎄요
-비가 내리는 금요일입니다. 그리고 휴가 기간이죠. -137쪽

-그걸 다듬고 다듬다 보면 언젠가는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거야. 그게 완벽한 연필이지. 물론 어떤 연필들은 끝내 완벽한 연필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마감하는 거지.
- 여기가 너무 어두워서 연필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에요?
- 바보 같으니라고, 보이고 보이지 않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모든 연필들은 만들어질 때부터 운명이 결정돼있어. 나무결에 이미 연필의 운명이 숨어 있단 말야. 물론 그 결을 제대로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야.
-인간의 삶하고 비슷하네요
-멍청한 놈. 무슨 얘기만 하면 꼭 인간에 비유하는 녀석들이 있다니까. 그냥 연필이면 됐지. 그걸 꼭 인간하고 연결해야돼?-213쪽

-응, 그래 돌아가야지.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지?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어느 곳이든 다 지루하고 재미없기 때문이다. -263쪽

찬기가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더 지난 후에 집에 돌아가 빈 집을 보고는 '가버렸군' 하고 중얼거리고 싶었다. -285쪽

내 꿈은 단 한번이라도 아무 미련없이 6을 선택하는 거야. 4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완벽하게 6을 생각하는 거야. 그럼 그게 10이 되지 않을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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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2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09-02 22:49   좋아요 0 | URL
ㅋㅋㅋ 쓴거 보니 왜이리 웃기누 ㅎㅎㅎ

다락방 2008-09-03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오늘부터는 다른 책을 읽으려고 했었는데 웬디양님의 이 페이퍼를 보고 [펭귄뉴스]를 집어들기로 했어요. 불끈!

웽스북스 2008-09-03 23:51   좋아요 0 | URL
헤헷 펭귄뉴스는 앞부분이 재밌어요

지현 2008-09-03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오늘 같이 일하는 디자이너에게 펭귄뉴스를 빌렸드아.
참 요즘 소설가들은 똑똑하고 영리하게 글을 써서 즐겁드아.

웽스북스 2008-09-03 23:51   좋아요 0 | URL
악기들의 도서관은 다 보셨나보군요 오옷!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구판절판


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빠져들었고 아파해야 한다면 기꺼이 아파했으며 이 생에서 다 배우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중략)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7쪽

소중한 것은 스쳐가는 것들이 아니다. 당장 보이지 않아도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들이다. 언젠가는 그것들과 다시 만날 수 밖에 없다. -28쪽

유배 16년동안 겨우 몇 권의 책만 낸 정약전. 그가 뭍이 아니라 아우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그 그리움을 잊으려고 물고기를 하염없이 바라봤따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고서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인가. 그 큰 사랑이 내리 내리 아래로만 흘러간다. 그런 줄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집을 떠나고 어린 새들은 날개를 퍼덕여 날아가는 것이다. -29쪽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60쪽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그건 우리가 살면서 또 사랑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세를 닮은 재벌 3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남산 꼭대기에 세워준다고 해도 나는 그 일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문학을 한다. 그 정도면 인간은 충분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글을 쓸 수 있다. -67쪽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67쪽

봄꽃은 제 몸을 밝혀 내게 저처럼 환한 빛을 던져주는데, 나는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다. 미국의 흑인 작가 랄프 엘리슨이 쓴 투명인간에 보면 주위의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여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내가 바로 그 꼴이었다. -78-79쪽

그 어떤 힘이 제비꽃의 가느다란 줄기를 꼿꼿하게 세우는 것일까? 어떤 힘이 있어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날 밤 내 머릿속에는 뒷산에 두고 온 모종삽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비스듬하게 땅에 꽂혀 있을 그 모종삽. 그 모종삽처럼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하게 꽂아두고 온 것들, 원래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들, 그런 것들. -80쪽

우리가 잊고자 애쓰는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91쪽

그대는 오래전부터 내게 비밀이었다. 내가 밤을 사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밤에는 나도 비밀이 되니까. 우리는 모두 멀리서 흔들리는 불빛이 되니까. 그리하여 밤의 몸과 밤의 살갗과 밤의 온기를 나는 사랑한다. 밤에 그대는 어둠 속으로, 비밀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밤에 그대는 내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밤이 될 것이다. 밤 안에서 우리는 사랑할 것이다. -93-94쪽

업무상 만나는 인간이란 참 서로에게 쓸쓸한 존재다. -113쪽

나는 잊혀지는 것도 그렇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잊혀진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118쪽

그 공허감이란 결국 새로 맞닥뜨려야 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피해 들어가는 자폐의 세계였던 것이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듯이, 새가 알을 깨듯이 우리는 자페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세계 속으로 입문한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124쪽

내 마음 속에 간직해둔 거문고도 이따금 줄 끊어지는 소리를 울린다. 그 소리가 울릴 때면 나는 또 얼마나 놀라는지! 나는 참 많이도 흘러 내려왔구나. 항상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구나. 스무살, 그 무렵에 나는 '이제 그만 바라보자 / 저렇게 멀리서 반짝이는 섬들을' 이라는 내용의 시를 썼지만 이제는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빛이, 마치 새로 산 스웨터처럼 얼마나 따뜻한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것 같아 가만가만 고개만 끄덕인다. 이따금 마음에서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가만 -125쪽

그해 겨울, 나는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했다.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빨리 정릉 그 산꼭대기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중략)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131쪽

내가 기억하는 청춘이란 그런 장면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이고, 창문 너머로는 북악 스카이웨이의 불빛들이 보이고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일들을 생각하며 하지만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합창한다. -138쪽

그렇게 3년 정도 그와 함께 지냈다. 그의 집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함께 여러 곳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광경을 봤고 수없이 많은 소리를 들었다. 대개는 처음 보고 듣는 것들이 많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듣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우리 삶에 존재한다는 뜻은 이 세상을 더 밝고 멀리 보라는 까닭이다. -194쪽

세월은 흐르고 흘러 서리 내린 연잎은 그 푸르렀던 빛을 따라 주름져갈 테다. 연잎이 주름지고 또 시든다고 하더라도 한 때 그 푸르렀던 말들이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도 그처럼 푸르렀던 말이 있었다. 에컨대 "글을 잘 읽었다"라든가.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꼭 보고 싶다" 같은 말들. 그런 말들이 있어 삶은 계속되는 듯하다. -196쪽

1993년 여의도의 로봇들을 바라보니 의구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 로봇들은 삼류 스탠드바를 연상시키는 조명 아래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서서는 앞에 사람이 있건 없건 팔을 내밀면서 "안녕하세요?" 라고 말을 걸고만 있었다. 그것들에게 과연 요리나 청소를 시킬 수 있을 것인지 따져보느라 머리속이 적잖이 복잡했다. (笑)-203쪽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면 간절히 손꼽아 수학여행을 기다릴 수 있다면. "어텐션 플리이즈, 바우"의 세계를 소망할 수 있다면. 깜짝 놀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212쪽

지금 생각하면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지는 어떤 것,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감미로워지는 어떤 것, 대일밴드의 얇은 천에 피가 배어드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으면서도 스케이트를 지칠 수 밖에 없는 어떤 마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217쪽

춘천마라톤에 갔다가 차를 몰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지금 강변도로를 달려가고 있구나. 20여년 전 서울 아저씨가 말씀했던 그 강변도로구나. 뭐 이런 놈의 삶이 다 있을까? 어린 시절에 나는 빨리 커서 서울 아저씨가 말한 강변 도로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이제 강변도로를 달리게 되니까 그 때 술 취한 아저씨와 어머니 사이에 앉아 달려가던 시골길이 그리워지다니. -241쪽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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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밑줄긋기로 다시 보니깐 다시 읽고싶어지네요.
김연수의 청승은 감성으로 승화되는데 왜 나의 감성은 청승으로 치달을까요.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1-09 22:06   좋아요 0 | URL
나의 청승은 청승에서 그쳐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