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절판


완런메이, 완샤오파오, 어서 내 나무 물어내... 내 나무 물어내...
흥! 웃기고 있네! 아내가 말했어요. 당신 자식이 내 젖퉁이도 만지고, 뽀뽀도 했으니 내 청춘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와우! 아이들이 화끈한 아내의 말에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어요.
런메이! 당황한 제가 고함쳤어요.
웬 호들갑이야? 고모 차에 오른 아내가 고개를 내밀더니 말했습니다. 옷 위로 만진 거야! -223쪽

요즘 고모는 자기 손에 피를 묻혔다고 자주 참회해요. 하지만 그건 역사였어요. 역사는 결과를 중시할 뿐 수단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잖아요. 마치 사람들이 중국의 만리장성, 이집트의 피라미드같은 위대한 건축물을 볼 때 건축 이면에 자리한 수많은 백골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요. -243쪽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쨌거나 자신을 위로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신 루쉰의 소설 축복에 나오는 샹린댁처럼요. 제정신인 사람들은 샹린댁의 허황한 생각을 굳이 들추지 않고 한 가닥 희망을 지캬 주고 싶어 했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샹린댁이 악몽에서 벗어나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길 원했으니까요. 전 고모와 아내의 말을 따르고 있고, 두 사람이 믿는 것들을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것이 옳은 선택이겠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절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도덕군자들 역시 절 비판할지도 모르며 심지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관련 기관에 절 고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이를 위해, 특수 업무에 종사했던 고모와 스쯔를 위해 기꺼이 어리석은 인간이 되기로 했습니다. -433쪽

선생님, 원래 저는 창작이 속죄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극본이 완성된 후 마음속에 자리한 죄의식이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왕런메이와 그녀 배 속의 아이 - 물론 제 아이기도합니다 - 가 죽은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핑계를 들먹이며 저는 쏙 빼고 그 책임을 고모와 계획 생육 실무자들, 위안싸이, 심지어 왕런메이에게 전가하려해씨만 지금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제가 바로 유일한 원흉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습니다. 제 '미래'를 위해 왕런메이와 아이를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천메이가 낳은 아이가 일찍 저세상으로 간 아이의 환생이라고 상상했지만 그건 자기 위안일 뿐입니다. 점토인형에 대한 고모의 마음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모든 아이는 저마다 유일한 존재이며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손에 묻힌 피를 영원히 씻을 수는 없는 걸까요? 죄의식에 얽매인 영혼을 벗어던질 방법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444쪽

죄를 진 사람은 죽을 수도 없고 죽을 권리도 없단다. 죽지 못하고 목숨 부지한 채 온갖 시달림 속에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해. 생선전처럼 이리저리 뒤집히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약재처럼 들볶이면서 속죄하는 삶을 살아야지. -5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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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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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1쪽

채소에 소금을 치면 샐러드가 되듯, 날씨에 노래를 쳐야 비로소 계절이 되는 것 같다. 노래가 없었다면 우리의 계절은 훨씬 흐리멍텅했을 것이다. 봄꽃은 덜 아름다웠을 것이고, 여름은 덜 더웠을 것이며, 가을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겨울은 덜 추웠을 것이다. -3쪽

내가 좋아하는 보컬은 대부분 '무심한 목소리'이다. 이게 참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옳고 그른 것이나 좋고 나쁜 것에 경계를 두지 않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감정을 애써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던져주고 멀리서 바라보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38쪽

봄은 혼자 있기 좋은 계절이고 혼자 걷기 좋은 계절이다. 봄은 순식간에 바스라진다. 시작했나 싶으면 곧 엔딩이다. 누군가와 함께 즐겨야지 마음먹었다가는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럴 때 음악은 친구가 되어준다. 나와 함께 묵묵히 걷는다. 시간을 함께 붙잡아주고 계절을 잘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것도 음악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겠지. -43쪽

음악과 계절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계절은 음악의 스피커카 되어 소리를 더 잘 들리게 하고, 음악은 계절의 공기가 되어 향기를 더 잘 맡을 수 있도록 해준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태풍이 몰아치면 늘 듣던 음악이 다르게 들린다. -53쪽

필사적으로 음악을 들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어쩐지 부끄럽고 웃음이 나지만 그게 또 나였다는 걸 인정하고 싶다. 어떤 친구는 집안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고, 어떤 친구는 필사적으로 여자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으며, 나 같은 녀석은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음악을 들었다. 그건 부끄럽다기보다 애달픈 일이었다. 이제는 조금 여유만만해졌지만, 필사적인 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면 이런 날이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69쪽

그럴 땐 소설 속의 시간이 참으로 신기하다. 내게 현재였던 소설 속 시간이 독자들에게는 오지 않은 미래이고, 독자들이 책을 읽을 때의 현재가 내게는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난 과거이고, 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내 소설 속의 시간은 끝내 오지 않을 미래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이다. -84쪽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쉼표가 없으면 안된다. 쉬지 않으면 쉽게 질리고 만다. 최고의 문장 100개가 모조리 연결되어 있으면 그 어떤 문장도 빛이 나지 않는다. 쉬어가는 문장, 쓸데없는 문장 같은 문장이 조금씩 섞여 있어야 좋은 문장이 더 빛나게 마련이다. -87쪽

스무살 때는 이해를 믿지 않았다. 누가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말, 누군가 나를 이해한다는 말, 내가 누군가를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모두 거짓이라 생각했다. 모든 관계가 가식적으로 보였고, 사람들의 모든 웃음은 비웃음처럼 들렸고, 사람들이 드러내는 슬픔은 과도해보였다. (중략)
마흔이 넘은 지금도 이해를 믿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결론을 여전하다. '이해'라는 단어는 언젠가 완료될 수 있는 명사가 아니라 영원히 진행할 수밖에 없는 동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이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래 계속)-93쪽

여전히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바뀐 건 많다. 십대의 나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십대의 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됐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죽으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는 애쓴다는 뜻이다. -93~94쪽

방 안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그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등을 토닥인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체온을 느끼게 해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지만 바깥에서 이렇게 외친다. "놀자!" 나는 아직까지 방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등을 토닥여줄 자신이 없어서 밖에서 같이 놀자고 소리를 지르는 쪽이다. 언젠가 나도 방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겠지만 아직은 밖에서 불러내는 쪽이 마음 편하다. 울고 있는 게 마음 아프지만 바깥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95쪽

피처링 소설이란 걸 쓰려고 한 적이 있었다. 두번째 소설집을 낸 2008년쯤이었는데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온몸을 배배 꼬던 시절이었다. 설탕을 잔뜩 묻힌 굵직한 꽈배기를 생각하면 그게 딱 나였다. 피처링 소설이란, 힙합곡을 만들 때처럼 내가 소설의 주요 부분을 다 쓰고 동료 작가들에게 부분적인 참여를 부탁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재미날 것 같았다. 웃긴 대사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에게 몇 개의 대화를 부탁한다든지, 잔인한 묘사를 잘하는 작가에게 사람 죽이는 장면을 부탁한다든지, 옷차림을 상세히 묘사하기로 유명한 작가에게 등장인물의 모든 패션을 부탁한다든지...-125쪽

30년 넘게 음악을 들어오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좋아했고 좋아하는 노래는 반드시 셋 중 하나에 속한다는 거다. 듣는 순간 내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듣는 선율이 만들어내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눈을 감게 되는 노래가 있고, 어떤 때는 듣는 순간 먼 곳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노래가 있다. 첫 번째를 근시음악이라 부르며 두번째를 투시음악이라 하고, 세 번째는 원시음악이라고 한다, 고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정했다. 하지만 노래 대신 가수가 또렷하게 보이는 노래는 절대 좋아할 수 없다. -135쪽

외로움이라는 것은 아마도 사라지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일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라면 절대 알 수 없을 감정,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영토를 줄여본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감정, 함께하는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결코 그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 바로 외로움일 것이다. (중략)
외로움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가자. 그게 훨씬 덜 아프다. 외롭지 않다고 자신을 세뇌하다가 어이 없는 한 방에 무너지지 말고 우리가 먼저 찾아가자. -152쪽

흘러나오는 곡들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옛 노래라서 싫다가 추억이 묻은 노래들이어서 좋았고, 따라부를 수 있어서 좋았고, 너무 많이 들은 노래들이라서 지겨웠다. 한창 예민하던 시절에 들었던 노래들,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때 들었던 노래들이다. 지난 시절도 마찬가지겠지. 좋으면서 지겹고, 싫으면서 그립겠지. 우리는 노래를 듣다가 조금 지친 것 같다.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피해 이리저리 돌아 홍대 근처에 왔을 때 9시가 넘어 있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상암동 방면에서 쭉 뻗은 도로를 따라 홍대로 가는데, 갑자기 먼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불꽃놀이의 폭죽이 아름답게 하늘로 번져나갔다. 연이어 두 발이 펑, 펑 터졌고 곧이어 한 발이 터졌다. 아름다웠다. 모두들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날 12만 발의 불꽃 중 우리가 본 것은 세 발뿐이었다. 우리는 하늘을 계속 보았지만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155쪽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니라 음악의 계절이다. 가을엔 (책 따위에) 눈을 뺏겨서는 안 된다. 자연의 모든 색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밤이 오기 전의 노을처럼 곧 겨울이 되어 색을 잃어버릴 것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자기 빛을 발하고 있는데, 하늘은 얼마나 파랗고 나무들은 얼마나 선명한데, 책 같은 거 보지 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이 가을을 보아야 한다.
모든 음악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된다. '실용음악학과'라는 학과 이름을 들을 때마다 참 기묘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럼 뭐야, 실용 음악의 반대는 무용음악인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음악은 귓속으로 들어와 가을의 모든 빛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바라보면 빨래 세제 광고처럼 '흰 색은 더욱 희게, 색깔은 선명하게' 보인다. 보내도 가지 않던 여름이 가고, 보내고 싶지 않은 가을이 왔다. 바람이 완전, 음악이다. -185쪽

겨울 내내 감기에 걸려 있다 해도 나는 겨울이 좋다. 눈이 오고, 공기에 입김이 스며들고, 유리창은 차갑고, 열린 문틈 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들고, 따끈한 커피와 음악이 있는 그런 겨울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190쪽

런던의 시우르 로스 공연장에서 느꼈던 것도 바로 이런 기분이었다. 그때도 소리들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곤 했다. 땅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국경이란 의미 없는 것이고 허공이야말로 우리의 고향이라고, 소리가 나에게 속삭이곤 했다. 나는 날아가다가 자꾸만 땅을 내려다보았다. -200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같은 야행성 괴물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이 괴물들은 밤만 되면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도저히 쓸 수 없는 분량의 글을 순식간에 써내며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음악 속 미세한 소리들을 잡아채며, 사소한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 밤만 되면 스스로가 어쩐지 진화한 인간같이 느껴질 정도다. 물론 오후 1시쯤 잠에서 깨어나 머리를 쥐어박으며 이런 잠벌레 같은 인간이 다 있나 자학하고,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고 말지만 말이다. -203쪽

왜 밤은 깊을까. 어째서 넓지 않고 깊은 것일까. 노래를 듣다 보면 알게 된다. 푸른 바다 속 적막하고 고요하고 먹먹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마음을 보게 된다. 거긴 깊다. 깊어서 좁지만 아늑하다. 몸을 웅크린 채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왜 나였는지 알게 된다. 내가 왜 나였는지 아는 것, 내가 어떤 나인지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밤의 초능력이다. -204쪽

"1989년에 나가 있는 20세 김중혁 통신원 응답하세요"
"네 잘 들립니다. 43세 김중혁씨. 2013년에 저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나요?"
"음, 음, 뭐랄까, 그러니까..."
"별로인가 보네요."
"아니에요, 제법 잘 늙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거긴 어때요? 스무 살 힘들죠?"
"여기도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우리 힘내요"
"그래요"-207쪽

카페 문에다 카드 사용 여부나 와이파이 사용 가능 여부와 함께 가장 자주 트는 음악 리스트를 붙여두면 좋지 않을까. -221쪽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으며 우리가 쌓아가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몇 시간의 기억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간들,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장에서 20분처럼 지나가버린 두 시간, 혼자 산책하던 새벽의 한 시간. 그 시간들, 그리고 책 속, 공연장, 산책길처럼 현실에 있지만 현실에서 살짝 어긋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229쪽

시간을 견뎌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는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견딘다. 시간의 속도를 더디게 만들기 위해 필름 속에다, 컴퓨터 속에다 풍경을 담는다. 우리는 소설을 쓰고 읽으며 시간을 견딘다. 소설 속에 거대한 시간을 담아서 시간의 처음과 끝을 파악하려 애쓰고, 시간을 되돌리고 빨리 흐르게도 하며 시간의 민낯을 보려 애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견딘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모습과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를 화면 속에서 보며 우리의 시간을 잊는다. 그렇게 견딘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견딘다. 아니, 이 말은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뛰어넘는 방법을 배운다. 시간을 가뿐히 뛰어넘어 다른 시간과 공간에 가다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시간을 견딘다. 음악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마법이다.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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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구판절판


그가 원한 것은 헤일셤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가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낸 것처럼 헤일셤을 '추억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삶이 곧 완결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것들을 자세히 묘사하게 해서 그것들이 실제로 자기 머릿속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서는, 약 기운과 통증과 피로감으로 잠 못 이루는 그런 밤 동안 나의 기억과 자기 기억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17쪽

그 느낌은 물 웅덩이로 발을 내딛기 직전의 아주 짧은 순간과 흡사했다. 거기에 웅덩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는 발을 내딛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82쪽

"보다시피 이 곳은 동쪽, 곧 바다 쪽에 이 산맥이 솟아 있기 때문에 이곳을 통해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움직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 곳을 우회해 지나가 버린다. 이런 이유에서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그런대로 아름다운 구석인 셈이다. 동시에 '로스트 코너' 같은 곳인 셈이지."
로스트 코너, 에밀리 선생님은 노퍼크를 그렇게 칭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노퍼크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헤일셤 건물 4층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물건들을 보관해 두는 '로스트 코너'가 있었다. 뭔가 잃어버렸거나 주웠다면 그곳으로 가면 되었다. 그 수업이 끝난 다음 누군가가 에밀리 선생님이 노퍼크를 '로스트 코너'라고 한 것은 그곳이 영국의 '로스트 코너' 다시 말해서 전국의 분실물들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였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웬일인지 인기를 얻어 실제로 그해 내내 통용되었다. -98쪽

우리는 노퍼크에 대한 개념을 꼼꼼히 점검해 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도버 회복 센터의 타일 벽으로 된 병실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루스가 말한 것처럼 당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혹시 귀중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해도, 애써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해도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어른이 되어 자유롭게 전국을 여행할 수 있을 때 노퍼크에 가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위안을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99쪽

그 순간 나는 조금쯤 흥분되는 다른 물건을 발견했을 때처럼 감탄사를 내지르지 않았다. 나는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서 그 플라스틱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그것은 실수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모든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완벽한 구실이 되어 준 테이프가 나타났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중단해야 할 터였다. 내가 놀랍게도 즉각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같은 이유에서 나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척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그 테이프에는 유년기의 뭔가를 어른이 되고 난 후 대할 때 느껴지는 막연한 당혹감 같은 것이 있었다. -241쪽

"어째서 그런 걸 증명하셔야 했던 거죠, 에밀리 선생님? 우리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357쪽

장기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후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그것이 우리의 작은 운동이 시작되기 전의 실상이었단다. 우리가 무엇에 맞서야 했는지 알겠지? -360쪽

그날 춤을 추는 너에게서 내가 본 건 좀 다른 거였어. 나는 빠르게 다가오는 신세계를 보았지. 과거의 질병에 대한 더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그래, 더 많은 치료법을 말이야. 맞아, 거칠고 잔인한 세상이지. 나는 어린 소녀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과거의 세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 보았어. 그걸 가슴에 안고 그 애는 결코 자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 나는 그 장면을 바로 그렇게 본 거란다. 그건 실제 네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372쪽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격하게 휘둘러 대는 두 팔을 꼭 붙잡았다. 그는 나를 떼어 내려 했지만 나는 그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비명이 잦아들고 분심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나는 그 역시 나를 두 팔로 얼싸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바람이 휘몰아쳐 우리 옷을 잡아당기는 그 들판 꼭대기에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말없이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서로 안고 있는 것이 우리가 어둠 속으로 휩쓸려 가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기라도 한 듯.-375쪽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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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짱의 연애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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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는 인생과
엄마가 되지 않는 인생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그리고 그것은
아빠가 되는 인생과
아빠가 되지 않는 인생을 말하는 것과
같은 세계의 이야기일까.-10쪽

"나는 주변에 애들이 없어서 다루는 방법은 잘 몰라"
"나도 그래요. 돌도 안 된 애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요"
"맞아, 맞아!"
"왜~ 친구가 애기를 낳아서 축하해주러 가면 말이야, 친구가 안아봐도 된다고 애를 건네주는데, 사실 그런 거 내키지 않아. 제대로 안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는 게 싫어. 물론 아이는 귀여워하지만"
"뭔지 알 것 같아요"
"근데 사람들이 막 호들갑 떨면서 아이를 좋아한다고 어필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그럴 지도요"
"어쨌든 나중에는 완전히 지쳐버리더라고.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없으면 축하 받을 일이 적은 인생이야"
"축하해, 라고 열심히 말할 뿐"
"고마워, 라고 말할 기회는 적지"
"디저트 나왔습니다"-20쪽

축하받을 일이 적은 인생이라...
결혼도
출산도
아이가 없다는 건
첫 손자 축하파티도 없다는 것이고
거기다가
내 집 장만 집들이도 없겠지...
그렇다는 건....
주연급으로 부조금을 받는 건
자신의 장례식 뿐?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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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싫은 사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구판절판


이것은 무척이나 사소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소한 것도
계속 쌓이다 보면 묵직해집니다. -26쪽

그것은 무척이나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

뭔가 한가지가 싫은 게 아니라
사소하게 싫은 몇개가
마치
장롱뒤의 먼지처럼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고
커다란 먼지 뭉치가 된다.
그렇게
청소기로 빨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미움이 커진다.-32쪽

강요받는 느낌이 들어
'이런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라는 타인의 불쾌감은,
'너는 이런 일로 나를 화나게 하지 않겠지?'
라는 공기같은 협박 -44쪽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이게 일상이 되니 힘드네
불평만 듣고 있는 것이 싫다고.-44쪽

기운이 없을 때도
카레는 먹고 싶어져
카레는 참 대단해 -88쪽

오랜만에 창문을 닦았더니
걸레가 새카매져서 기분이 좋았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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