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절판


은교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39쪽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 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46쪽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수 없어요
왜요
콩밭,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콩반 매는 아낙이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74쪽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엉서 귀한 것들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후략) -104쪽

은교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
슬럼.
슬럼.
하며 앉아 있다가 내가 말했다.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나야말로.-112쪽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아서,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억울해지는 거에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언젠가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113쪽

은교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까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런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144쪽

이번엔 따끈하고, 개운했나요?
네. 맛있었어요. 따끈하고 맑고 개운했어요. 고마워요, 데려와 줘서,-157쪽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
한다

모두 건강하고
건강하길

(작가의 말)-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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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 2010-08-0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작가의 말까지 아름다웠던 책이었지요.

웽스북스 2010-08-08 23:52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랬어요. 김지님. 겨울에 올라오시면, 따뜻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 먹으러 가요.

깐따삐야 2010-08-09 12:0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좋았는데. 근데 두분 데이트 하실 예정? 껴줘용.

웽스북스 2010-08-09 12:40   좋아요 0 | URL
제가 청주로 한번 놀러갈까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