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절망을 치료하는 사람들 - 국경없는 의사회 이야기
댄 보르토로티 지음, 고은영 그림 / 한스컨텐츠(Hantz) / 2007년 10월
구판절판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을 한 명 치료한다면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말라리아가 평상 수준보다 심각한 난민 캠프나 재난 상황에서 치료를 하면서 '어차피 이 일을 내년에는 못할 테니 올해도 하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죠. 누군가에게 '미안해, 너를 구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만, 내년에는 아마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싫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죠. 우리는 내년에도 치료가 가능하게끔 노력하겠지만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보장하는 게 MSF의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 나라의 몫이죠. 종종 우리는 과거 개발 현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향후 10년 도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0년이 흐르면 백신이 개발될지도 모르죠. 단지 올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190쪽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 보건이며 동시에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안전한 식수를 마셔라, 손을 씻어라, 기타 등등 말이죠. 그러나 티베트 사람들은 단지 신선한 물을 원하지 건강은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업이 끝나면 개통식을 하는데 사람들이 꼭 와서는 끝없이 제게 맥주를 권하며 고마워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얻은 것이 무엇인지 말하죠. 여자들은 물을 길러 언덕까지 3-4킬로미터를 걸어가곤 했는데 그들은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한 무리의 10대들이 와서 팔꿈치로 찌르고 눈을 찡긋거리고 발을 끌며 춤을 춥니다. 그들은 골짜기의 모든 여자들이 이제는 마을에서 살기를 원하게 되어 결혼할 가능성이 열배나 뛰었다는 겁니다."-225쪽

미국인들은 우리가 자신의 동맹군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원하지 않아요. 우리가 미군의 동맹이 된다면 그것은 인도주의의 죽음을 의미하니까요. 그들은 이슬람군대가 우리를 괴물로 보고, 적으로 보기를 원하며,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 공격을 하는 자들이 이전의 탈레반이든 아니든 그들에게 가서 '우리는 미국인들의 동맹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재건할 생각도 없어요. 우리는 당신들과 미국이 생각도 안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고통을 덜어주려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빈 라덴이 여기를 차지하든지 조지 부시가 차지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하죠. -236쪽

MSF에서 처음 훈련을 받을 때 '새 냉장고 증후군'에 대한 농담을 들었습니다. 미션을 떠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며 미션에서 본 일, 부패, 사망자, 즐거웠던 일들에 대해 얘기하려 하면 엄마가 쳐다보며 말하는 거죠. '흠 멋지다. 내가 새 냉장고를 샀다고 얘기했니?" (중략)
멀리 있을 때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죠. 어떤 이들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어떤 이들은 이해하지 못해요. 그들에게 들려주기는 무리라는 느낌이 들죠.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봐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중략)
일부 귀국한 자원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고국의 관심을 일깨우려는 의지에 불탄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이 얼마나 행운아며 그들의 문제가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화장실 물을 내리며, 그들은 머나먼 땅의 난민들은 하루 종일 쓸 물이 그만큼도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 자칫 잘못하면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방종하며 경박하다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248쪽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들이 제공하는 원조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위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으며 반대로 다른 어느 NGO보다 재빨리 현장에 의료 구호 및 사람들을 파견한다. MSF는 자기 손을 비틀지언정 얽어매지는 않는다. -292쪽

인도주의는 단순히 관대함이나 자선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들 가운데서 정상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295쪽

침묵은 오랫동안 중립성과 혼동되었으며 인도주의 활동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시작부터 MSF는 이 가정에 대한 반발로 설립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이 언제나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침묵은 반드시 생명을 죽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96쪽

언어란 결정적인 것입니다. 언어는 문제를 구조화시키며 반응, 권리에 따라서 책임감을 정의합니다. 언어는 의료적 혹은 인도주의적 대응이 부적절했는지 말하며 정치적 대응이 부적절했는지도 말합니다. 아무도 강간을 복잡한 부인과적 응급 문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강간은 강간이며 인종 학살은 인종 학살입니다. MSF의 인도주의 활동은 고통의 경감과 자율성의 회복과 부당함의 진실을 목격하는 것, 그리고 정치적 책임감을 묻는 것입니다. -297쪽

인도주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사들은 인조 학살을 막지는 못합니다. 어떤 인도주의자도 전쟁을 저지를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인도주의자도 인종 청소를 막지는 못합니다. 또한 어떤 인도주의자도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도주의의 과제가 아닌 정치권의 과제입니다. 저는 다음 사항을 명확히 하겠습니다. 인도주의 활동은 어느 활동보다도 비정치적이며 그러나 그 활동의 도덕성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가장 심오한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범죄 행위를 하고도 무사한 것에 대한 투쟁이 이런 함의들 중의 하나입니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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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구의절망을치료하는사람들]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7-11-14 09:44 
    최근 S사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바라보면 참 화가 치밀어오른다. 명백한 불의 앞에 제 목소리를 내야 할 많은 공직자들은 이미 S사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은 상태이기에 침묵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런 것들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내부고발을 감행한 한 변호사의 고군분투를 떳떳하게 응원하고 지지해줄 만한 이가 많지 않다. 그 용기가 쓸쓸한 울림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안타까움이 든다. 권력을 가진 자들 중, S사로부터 자유로운
 
 
 
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품절


만약에 남북의 언어가 정말 '이질화' 됐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과정이 가속도를 얻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전체주의 질서를 채택하지 않는 한, 그 이질화의 흐름을 바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굳이 그 흐름을 바꿀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죽은 언어가 아니라면 언어는 변화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언어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언어적/언어외적 조건과 상황이다. 우리가 지금의 한국어를 19세기 한국어와 일치시킬 수도 없고 굳이 일치시킬 필요도 없다. -36쪽

내가 감염된 인간이듯, 내 한국어는 감염된 언어다. 우리는 모두 감염자다. 그리고 모든 언어는 감염된 언어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민족어에 대해서, 그리고 민족어 문학에 대해서 관찰자의 거리를 가지고 차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73쪽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국경의 높이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고 그 낮아진 국경을 넘어 유럽-미국산 언어들은 점점 더 자주 한국어와 접촉하고 한국어에 간섭할 것이다. (중략)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물론 피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꼭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다. 언뜻 멋져 보이는 한자어를 포함한 외래어의 남용에는 분명히 다소간의 허영심(을 향한 호소전략)이 작용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 허영심을 비웃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공동체 차원에서 억지로 막을 수는 없다. -92쪽

소통은 언어가 존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소통할 수 없을 때 언어는 쇠약해지고 끝내 사멸한다. 언중은 당연히 자신의 언어 생활에서 일반적으로 소통을 확대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외래어를 비롯한 이물질이 한국어에 스며드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소통 가능성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듯 하다. 소통 가능성이 없거나 극히 약한 외래 요소들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외래어를 비판하는 것은 상상된 순수성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뒤에 흘끗 살피겠지만 이들은 순수성에 대한 집착으로 소통 가능성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그들은 불순해진 지금의 한국어를 한탄하고 순수했던 과거의 어떤 한국어를 상상한다. (중략) 그러나 그 순수한 한국어 가운데도 깊이 살펴보면 그 어원이 중국어나 몽고에서 온 것이 상당수 있다. (중략)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문명어들은 외래 요소와의 혼합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혼혈은 그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98쪽

한 힘있는 일간신문이 주묵도가 높은 난의 제목으로 사용해 매일 독자에게 읽히는 수고를 하고도 낱말 하나의 생명력을 되살려내지 못한다면, 한국어 어휘의 '순도'를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겠다는 순수주의자들의 꿈이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더구나 이런 시도는 윤리적으로도 바탕이 튼튼하지 못하니, 자신의 우세한 지위를 이용해 자신과 극소수 동지들만이 아는 말을 사용하면서 내 말을 알아듣고 싶으면 이 말을 배워라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들이 사전에서 찾아낸 순수한 한국어는 그 효과에서 그들이 책상 위에서 새로 만들어낸 말과 다름없다. 누가 그들에게 자신들의 '개인 언어'를 사회에 강요할 권리를 주었는가. 그런 개인언어가 이내 민중언어로 통용될 수 있는 사회는 멋진, 무서운 신세계일 수밖에 없다. -100쪽

나는 이 잡종 언어의 흐드러진 개화가 걱정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발랄한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어떤 해방감을 드러낼 뿐이다.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진짜 세상, 곧 오프라인 세상에서 빠져나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해방감 말이다. (중략) 물론 채팅 언어의 일부는 언젠가 표준 한국어로 편입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어 화자의 다수가 그것을 표준 한국어로 받아들일 때다. 그리고 그것이 표준 한국어에 편입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어떤 말이 바른 말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언중이기 때문이다. -102쪽

섞임과 스밈은 문화적 생물학적 진화의 피할 수 없는 요건이다. 순수한 한국어라는 것 역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다.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순수한 한국어'만으로 이뤄진 언어 체게는 흉측하기 짝이 없는 전체주의의 언어일 것이다. 아름다운 순수어를 고집하는 마음은 아름답지 않ㄴ다. 아름다움은 섞임과 스밈 속에, 불순함 속에 있다. -104쪽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110쪽

민족주의라는 것은 비록 이념의 모습을 갖추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감정 상태이기 때문이다. -120쪽

민족주의의 융성이 한 민족의 독립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독립을 얻은 민족의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한다. 민족주의는 그것이 강대국의 민족주의든 약소국의 민족주의든 얼마나 자주 대외적 패권주의와 대내적 집단주의를 가져왔는가? -123쪽

우리는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일본 사람들의 노력으로 한자어화된 서양의 문화를 손쉽게 빌어쓰는 길을 걸었다. 확실한 것은 메이지 이래 일본 열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신조어들은 한자라는 매개를 통해 즉각 한국어에 흡수됨으로써 한국어의 어휘를 배가시키고 한국인들의 세계 인식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해내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말의 풍부화와 그것을 통한 우리 의식의 획기적 전환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었다는 사실마저 변하는 것은 아니다.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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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04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쓰다 힘들어서 일단 스톱

다락방 2007-11-04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거 한번 읽어볼까요? 저는 소설아니면 취미가 없는데, 아프락사스님도 웬디양님도 급칭찬모드시라면..흐음..

웽스북스 2007-11-04 22:02   좋아요 0 | URL
읽어보세요 다락방님! 저도 소설이 제일 좋아요 ㅎㅎ
고종석 아자씨는 소설도 잘쓴다는! ㅋㅋ

마늘빵 2007-11-05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고종석씨 소설 <제망매>도 있답니다. :)

웽스북스 2007-11-05 12:22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 제망매 읽으셨어요?

마늘빵 2007-11-06 08:33   좋아요 0 | URL
네!

양승훈 2008-02-1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씨 글이 아름답죠~~ 유려하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해요~~ 보통 비평적 글쓰기에선 항상 '건조함' 때문에 졸음 유발이 일색인데,, 이 책 저도 읽으면서 참 윤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언젠가 이 블로그 놀러왔었는데~ 잘 지내시나요? ^^
 
애덤 스미스 구하기 - 개정판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절판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 아닌가요?"
"맞아, 하지만 그 이기심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지."-90쪽

일단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게 되면 나는 감정과 행동을 의식하게 되지. 감정이나 행동이 실제로 적절한지 보기 위해서 그것을 주시하게 된다는 말이네. 그리고 타인이 나를 보는 것처럼 내 자신을 보려고 노력한다네. 나는 이 연극에서 배우일 뿐 아니라 '공정한 관객'이 되는 거야 (중략) 절대적으로 중요한 건 우리는 타인이 던지는 외부적인 찬사를 얻으려고 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오는 내부적인 존경과 찬사도 얻으려고 한다는 거야. -237쪽

스미스의 목소리는 살아가는 방식을 내가 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양심이 보내는 신호음에 귀 기울이는 것, 내면의 눈을 통해 진실한 감정을 보는 것, 소유보다는 존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 이 모든 것이 선택이다. -269쪽

다음 세대가 이 회사와 일반적인 지구적 자본주의를 경제적 해결책이 아니라 경제적 문제의 일부로 인식하고 나면 고치려 들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너무 늦기 전에 문명 사회 내에서 지구적 자본주의를 성숙시킬 수 있는 기본 원리에 집중하자는 겁니다. (중략) 다음 세대에 우리가 제시하는 해답은 그들의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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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1-02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 하고픈 구절이 엄청 많은 책이더군요.

웽스북스 2007-11-04 18:44   좋아요 0 | URL
마감이 내일이라 부랴부랴 썼어요 ^^ 혜경님은 쓰셨나요?
 
간디의 물레 -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김종철 지음 / 녹색평론사 / 1999년 7월
구판절판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이 생태학적 재난은 결국 인간이 진보와 발전의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이른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15쪽

그러한 예언은 무엇보다 종교적 열정에 근거를 둔 것임에 반해서 오늘의 묵시록적 전망은 다분히 과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15쪽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 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 밖에 없으며 자신의 현재 능력이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 해야 옳다. -16쪽

사람이 부도덕하고 무책임하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이 행복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만이 남의 자유에 관심을 갖고 남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법이 아닌가. 이치를 따져 생각해보면 세상만물이 자기자신과 근원적으로 한 몸뚱이로 연결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공동체에 폭력을 가하고 상처를 입히면서도 스스로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인간이 내면적인 자유와 성숙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31쪽

위대한 영화예술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책 <봉인된 시간>에서 시종일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기 희생의 가치에 관해서이다. 그는 바로 이 희생의 가치가 망각된 것이 현대사회의 가장 큰 비극인 정신적 불모성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33쪽

일찌기 해월 선생은 천지만물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지 않은 것이 없고 따라서 생물이 살기 위해 다른 생물을 먹는 행위는 한울이 한울을 가지고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담겨있는 것은 약육강식의 잔인한 폭력성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모든 생명이 다른 생명에 대하여 공양의 관계, 즉 희생과 헌신,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 이 우주의 근본 짜임새라는 생각인 것이다. -37쪽

저 산을 밀어올리고 있는 힘, 그것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라는 직관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로 생태학적 감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감수성의 교육에 새로운 생존전략의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는 그런 감수성의 교육에 적합한 생활방식을 어떻게 강구하느냐이다. -38쪽

의사들이란 자기가 갖고 있는 의료적인 지식을 가지고 환자를 개별적으로 상대하면서 본질적으로 환경적 요인, 산업체제의 반생명성에 기인하는 질병을 개인의 책임을 돌린다는 것이죠.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구조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비인간적인 체제를 환자에 재적응시키는 사회적 역할을 받아들이는 한 의사는 체제를 수호하는 '사제'라는 얘기지요. -53쪽

개발과 환경의 조화라는 얼핏 듣기에 나무랄 데 없는 이러한 전략에는 날로 급박해지고 있는 생태계 보전의 필요성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이른바 산업적 생활방식에 어떤 본질적인 변경을 가할 의도는 없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58쪽

돌이켜 보면 개발 이데올로기가 부추기는 생산과 소비의 확대라는 것은 토지와 자원에 대한 착취를 무한히 계속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점에서 이것은 물질적 생활수준의 무한한 향상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에 기초하여왔던 19세기적 세계관의 교만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개발-저개발이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공식에 의거하여왔던 토착 전통사회들의 상호비교가 불가능한 독자성과 다양성을 처음부터 무시하고 단 한가지 형태의 '진보적'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는 태도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폭력을 수반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중략)
빈곤으로부터 대중을 해방한다는 최대의 명분마저 실제로 역사적 경과속에서 허구적인 것으로 판명되는 날이 오고야 만다. 국민총소득이라는 극히 기만적인 통계가 상당기간동안 사람들을 세뇌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러나 부의 총량이 엄청나게 증대되면 될수록 대중이 느끼는 박탈감이 깊어지는 사태가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도대체 전 세계적으로 개발에 의하여 민중의 운명이 실질적으로 개선된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 -73쪽

산업주의 문명은 간단히 말하여 천지만물에 대한 인간의 배타적인 자기주장을 기초로 하는 매우 교만한 정신적 태도의 소산이다. 산업문명속에서 자연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재화를 만들어내고, 편의와 안락을 제공하는 자원으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자연이 그 풍요로운 다양성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그 자체로 생명을 구가해야 할 내재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공리주의적, 인간중심적 시각으로만 사물을 보는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이웃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필연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81쪽

어디서나 사람들은 자기의 생태적 조건과 체질에 적합한 문화를 발전시켜왔어요. 고원지대에 사는 농민들은 그 나름으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왔고, 열대지방은 열대지방대로, 자기들 나름의 자기들에게 맞는 노동의 양식과 축제의식을 발전시켜왔을 거란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불합리한 사고, 덮어놓고 자기가 최고이며,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푹 빠져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순진한 꼬마들로부터 정치한다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쇼비니즘에 크게 오염되어 있어요. -118쪽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을 가면서 자꾸 이걸 살 길이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그걸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장에 현실적으로 패할 수밖에 없더라도 저항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죠. 적어도 불복종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복종의 핵심은 결국 아까도 말했듯이 생명의 해방구를 늘려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26쪽

늘 하는 얘깁니다만, 한국의 언론은 너무나 국제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맨날 한국과 미국과의 단순비교에 열심이지, 우리를 상대화시킬 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까 맨날 힘을 길러야 한다거나 쇼비니즘적인 열정만 자극하면서 강자의 논리로만 치닫는 거에요. 우리가 일본사람으로부터, 또 서양사람으로부터 힘의 지배를 받아왔으니까, 우리도 꼭같은 방식으로 강자의 반열에 서야겠다는 생각은 정말 늘푼수없는 생각이에요. 존경받을 수 없는 생각이에요. 개인적으로 누구하고 싸울 때도 마찬가지죠. 이번엔 내가 졌으니까 절치부심 근육을 길러서 상대를 꼭 꺾어버리겠다는 식으로 가본들 귀결이 뭐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인격적으로 감화를 시키는 겁니다. -150쪽

가장 귀담아들을 만한 것은 가령 이것을 통해서 그들이 사람 누구에게나 어떤 잠재된 기술과 솜씨와 지혜가 있다는 것을 빈번히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금경제 밑에서 늘 소외되어 온 가난한 사람들이나 실업자들이 레츠를 통하여 스스로 쓸모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인간다운 위엄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공동체의 상호의존적 사회관계가 강화되고 지금까지 산업경제의 지배밑에서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부터 오는 힘에 속절없이 굴복하여 붕괴일로에 있던 풀뿌리 공동체가 활기 있게 되살아난다는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168쪽

산업화의 진척은 자동차관련 산업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에 관련된 일자이와 경제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동차관련 산업이라고 하면, 제철, 석유, 유리를 포함하여 자동차의 생산과 판매에 직접 연관된 업종뿐만 아니라 주유소, 경찰, 병원, 보험회사, 은행, 법원을 비롯하여 실제로 방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용과 돈이 걸려 있는 문제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갖기 어렵다. 그렇기는 커녕 자신의 일거리와 생계에 어쩌면 보람있는 삶이 걸려있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묻는 행위에 적개심을 느끼기 쉬운 것이다. 오늘날 환경파괴에 대한 대처방식은 기껏 환경투자나 기술개발과 같은 순전히 기술주의적 논의로만 집중될 뿐 근본적으로 자꾸만 겉돌고 있다. 그렇게 되는 핵심적인 이유의 하나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자기자신의 문제, 즉 자기자신의 생활방식과 가치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문제로서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192쪽

텔레비전과 컴퓨터 앞에 매달려 아동기의 대부분을 '가상현실'의 체험으로 보낸 아이들이 과연 다른 사람, 다른 생명의 슬픔과 기쁨을 이해하고, 보살피고, 돌보는 능력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가상현실'의 경험은 거기서 사람이 싫증나거나 고통을 느낄 때는 언제라도 플러그를 뽑아버리면 순식간에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뿌리없는' 경험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시련이나 고통이나 기다림을 통한 도덕적 연마와 정신적 성숙을 기대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과 교사들이 일상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현상 - 무책임하고, 참을성없고, 너무나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우리가 실제로 가장 두려워해야 할 문제인지 모른다. -199쪽

권력욕망과 경쟁의 논리에 뿌리를 두고 속도와 힘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그러한 '현대적' 교통수단에 언제까지나 몸을 맡긴 채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희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말의 참다운 의미에서 평화와 사회정의와 생태적 건강이란 우리의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명에 대한 존경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이러한 존경심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극히 검소하게, 가난하게 꾸려가려는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다니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생명의 공동체에 종속시킴으로써 진정한 내면의 행복과 자유에 근접하고자 하는 시도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24쪽

마음만으로 되겠느냐고 하겠지만 마음없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246쪽

문명생활의 향유가 설령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생존의 근본토대, 즉 자연적 기초를 망가뜨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그러한 문명이란 무엇인가-하고 그는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문에는 흔히 서구적 진보사관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드러내는 시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자기기만적인 것인가에 대한 예리한 비판도 들어있음이 틀림없다. -248쪽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핵심적인 과제는 부분적인 성과나 후퇴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실로 다급한 문제는 인간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마땅한가를 깊이 성찰하는 일인 것이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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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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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배움이 짧았고 자신의 교육적 선택에 늘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다만 그 때 엄마는 어떤 '보통'의 기준들을 따라가고 있었으리라. 놀이 공원에 가고, 엑스포에 가는 것처럼, 어느 시기에는 어떠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는 풍문들을 말이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 엑스포에 가고 박물관에 간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엑스포에 보내 주고 놀이 공원에 함께 가준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누구나 겪는, 평범한 유년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무지한 눈으로 시대의 풍문들에 고개 끄덕였을, 김밥을 싸고 관광버스에 올랐을 엄마의 피로한 얼굴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도도한 생활) -13쪽

체르니란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란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도도한 생활) -15쪽

내가 집을 떠나던 날 아빠는 오토바이 '쇼바'를 잔뜩 올린 채 도로 위를 달리며 울고 있었다. 아빠는 오토바이 속도가 최절정에 다다랐을 때 앞바퀴를 들며 "얘들아 너흰 절대 보증 서지 마!"라고 오열했고, 비닐하우스 옆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속도 위반 딱지를 뗐다고 했다. (도도한 생활)-22쪽

언니는 그 중 하나를 수줍게 가리켰다. 전투 로봇의 갑옷처럼 번쩍하니 투박하게 생긴 거였다. 친구가 놀란 표정으로 "여자 애가 왜 그런 걸 고르냐?"고 묻자 언니는 얼굴을 붉히며 "저게 가장 21세기적인 느낌 가아서...."라고 답했다. 언니는 가장 21세기적인 컴퓨터와 함께 반지하방에서 살게 되었다. 21세기가 얼마나 '슬림'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도도한 생활)-29쪽

어느 날 언니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볼펜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야, 미래가 어떻게 '완료'되냐?" (도도한 생활)-31쪽

패션은 관습적인 인사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중요한 화제였다. 그녀는 점점 궁색한 자신의 옷장과 여선생들의 관심에 부담을 느꼈다. 칭찬을 들은 후엔 이상한 부채감도 생겼다. 어느 때는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모두가 재빨리 자신을 훑어보며 점수를 매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근심이 보잘것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변화에 환호하는 건 우리에게 어떤 '화제'가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침이 고인다)-52쪽

어쩌면 유통기한이 정해진 안전한 우정이 그녀를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도 몰랐다. 하루란 누구라도 누구를 좋아할 수 있는,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근사해질 수도 친절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침이 고인다)-57쪽

그녀는 후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집주인이라고 유세를 떠는 것 같고, 그런 검열과 의식적인 배려를 해야 하는 자신이 지겨워진다. 그녀는 지각한 탓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나쁜 배역을 억지로 맡아버린 학생처럼 연극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침이 고인다)-76쪽

월세 부담이 컸지만 한번 쯤 무리라는 걸 모른 척하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영화관이나 놀이공원에서 잠깐 동안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환상이라 하더라도 이제 분수껏 사는 일은 지겨워져버렸다고 떼를 쓰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성탄 특선)-103쪽

의정부 북부행이라는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 어쩐지 나는 우리 모두가 아주 멀고 추운 나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119쪽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칼자국)-169쪽

어머니의 몸뚱이에선 계절의 끝자락, 가판에서 조용히 썩어가는 과일의 달콤하고 졸린 냄새가 났다. (칼자국)-178쪽

나는 엉거주춤 언니에게 5만원을 찔러준다. 언니는 기겁하며 손사래를 치고, 나는 받으라고 우기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늘 같은 식이다. 그것은 서로 덜 면구스러워질 수 있는 최소한의 연기, 온전히 속아주기만을 위해 고안된 격식과 같다. (기도)-204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기다려봐" 하고 말한 뒤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이제 막 하늘에서 도착한 메시지를 전하듯 선하게 중얼거렸다.
"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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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층 숨을 고르는 듯한 느낌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7-10-07 20:52 
    얄팍하게도 나는, 몇 살이세요? 라는 질문에 매우 자주 '80년생이요'라고 답한다. 스물 여덟,이라고 답하는 일보다 더 잦은 일이다. 이유는 이 리뷰를 읽는 분이 80이라는 숫자와 스물 여덟 이라는 두 단어를 보며 느꼈을 차이 그대로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일 수록, 고맙게도 80년대 생을 하나로 묶어 생각해 주시는 경향이 짙다. 김애란의 새 책을 접한 문단의 반응은 극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