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건 하나뿐이다. 내 말들은 그의 말처럼 매끄럽지 않을 것이다. 견고하지 않을 것이다. 일사불란하지 않을 것이다. 함부로 요약하지 마라.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 나는 더듬을지도 모른다.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내 말들로 그의 말에 부딪칠거다. 부서질 거다. 부술 거다. 조각조각 부수고 부서질 거다. -41쪽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다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52쪽
삶이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에 철저히 회유되고 협박당한 사람의 얼굴로 어머니는 작은 방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의 살비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녀에게 삶이 폭력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떤 희망에 그토록 교묘하게 회유당했을까. -55쪽
나는 그 새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서 있었던 것 같다. 그 순간에 찾아들 벼락같은 적막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나자 새가 사라지기 전에 꿈에서 깼다는 것이 서늘하게 다행스러웠다. -56쪽
삼촌이 그랬듯이 인주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고요한 푸른빛을. 푸른 시간을. 밤의 비밀과 낮의 명료함이 맞바뀌는 지진 같은 떨림을. 피와 뼈까지 파랗게 배어드는 서늘함을. 잠든 사람들의 체온이 가장 내려가는 순간. 지표면이 가장 차가워지는 이 순간. -57쪽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득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 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64쪽
그의 손이 서슴없이 내 손바닥에서 열쇠들을 채간다. 잠깐 스친 손가락들이 따뜻하다. 차가움보다 더 소름끼치는 온기다. -124쪽
그러니까 인파에 떠밀려 지하철을 탈 때, 복잡한 환승 구간을 어깨로 헤치며 나아갈 때, 매표구 앞에서 길고 무질서한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릴 때 난 성스러움을 느껴. 인간을 믿을 수 없어질 때, 흉폭한 모서리가 가슴을 찢고 튀어나올 때 성스러움을 느껴. 차가운 장판 바닥에,. 씻지도 않고 코트도 안 벗고 웅크리고 누워서 내 안의 마모된 부분을 들여다볼 때, 영원히 망가졌거나 부서져버린 그것들을 들여다볼 때 성스러움을 느껴. 예배당도 고적한 기도처도 아니고...너덜너덜한 이 삶 가운데서. -151쪽
치욕은 너덜너덜하다.
그 너덜너덜한 것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부릅뜬 눈이 감기지 않는다. -152쪽
강석원의 문체는 딱딱함과 열의, 반짝임과 둔감함, 진지함과 얄팍함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무엇인가가 불쾌했고, 무엇인가가 가짜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진짜였다. -212쪽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219쪽
모든 죽은 사람의 관 뚜껑을 닫고, 거칠게 못질을 하고, 영원히 버리십시오. 그 얼굴을, 눈동자들을, 끈덕진 자책과 결의 따위를. -314쪽
이제 나는 늙었지만, 어떤 위엄도 깨달음도 마침내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만나온 사람들과 주어진 시간을 서서히 파괴해왔고 자신 역시 무사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교훈도 치유도 돌이킴도 없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흔들리며 끔찍하게 어두운 길을 가겠습니다. 어떤 사람과도. 어떤 전생의 기억과도 마주치지 않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영혼과 천사들을 위해. 내가 그르친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을 위해. 아멘. -314쪽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마지막 결단을. -340쪽
어느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길...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그게 무서워서, 꿈 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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