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이지, 넌 최고의 디자이너야"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 디자인을 그만둔 이유는 열등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메이비의 방송을 듣고 난 다음부터, 나는 디자인을 한다는 게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라디오 방송이 도대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내 안의 무엇인가가 조금 바뀐 것만은 분명했다. -38쪽
사진은 사람뿐 아니라 시간을 붙들기도 한다. 아니, 시간을 붙들 수는 없다. 시간을 붙들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가고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멈춘다. 사진은 그렇게 시간과의 달리기에서 계속 뒤쳐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70쪽
오차 측량원은 말 그대로 오차를 측량한 뿐이었다. 오차를 되돌릴수도 없고 수정할 수도 없다. 물론 오차측량원이라는 단어를 너무 깊이 생각한 내 잘못이다. -87쪽
뭔가 단단히 어긋나 있었지만 나는 그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명색이 오차 측량원인 주제에 말이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일까? 원인이 없는 결과도 있지 않을까? -87쪽
에스키모들에게는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필요없어. 훌륭한 고래가 없듯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선인장이 없듯 훌륭한 인간도 없어. 모든 존재의 목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하게 존재할 필요는 없어. 에스키모의 나무지도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지도에는 '훌륭한'이라는 수식어가 없구나. 이 지도 속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며 있지 않구나. 그냥 지도이구나. -99쪽
나는 상자에서 나침반을 꺼낸 다음 팽이를 치듯 몇 바퀴 돌려보았다. 자침은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대체 자침을 붙드는 이 힘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일까? 나는 계속 나침반을 돌려댔다. 자침이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까지는 멈추지 않겠다는 듯이. -101쪽
-제가 오늘을 공격일로 선택한 이유를 아십니까? -글쎄요 -비가 내리는 금요일입니다. 그리고 휴가 기간이죠. -137쪽
-그걸 다듬고 다듬다 보면 언젠가는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거야. 그게 완벽한 연필이지. 물론 어떤 연필들은 끝내 완벽한 연필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마감하는 거지. - 여기가 너무 어두워서 연필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에요? - 바보 같으니라고, 보이고 보이지 않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모든 연필들은 만들어질 때부터 운명이 결정돼있어. 나무결에 이미 연필의 운명이 숨어 있단 말야. 물론 그 결을 제대로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야. -인간의 삶하고 비슷하네요 -멍청한 놈. 무슨 얘기만 하면 꼭 인간에 비유하는 녀석들이 있다니까. 그냥 연필이면 됐지. 그걸 꼭 인간하고 연결해야돼?-213쪽
-응, 그래 돌아가야지.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지?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어느 곳이든 다 지루하고 재미없기 때문이다. -263쪽
찬기가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더 지난 후에 집에 돌아가 빈 집을 보고는 '가버렸군' 하고 중얼거리고 싶었다. -285쪽
내 꿈은 단 한번이라도 아무 미련없이 6을 선택하는 거야. 4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완벽하게 6을 생각하는 거야. 그럼 그게 10이 되지 않을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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