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구판절판


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빠져들었고 아파해야 한다면 기꺼이 아파했으며 이 생에서 다 배우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중략)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7쪽

소중한 것은 스쳐가는 것들이 아니다. 당장 보이지 않아도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들이다. 언젠가는 그것들과 다시 만날 수 밖에 없다. -28쪽

유배 16년동안 겨우 몇 권의 책만 낸 정약전. 그가 뭍이 아니라 아우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그 그리움을 잊으려고 물고기를 하염없이 바라봤따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고서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인가. 그 큰 사랑이 내리 내리 아래로만 흘러간다. 그런 줄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집을 떠나고 어린 새들은 날개를 퍼덕여 날아가는 것이다. -29쪽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60쪽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그건 우리가 살면서 또 사랑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세를 닮은 재벌 3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남산 꼭대기에 세워준다고 해도 나는 그 일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문학을 한다. 그 정도면 인간은 충분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글을 쓸 수 있다. -67쪽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67쪽

봄꽃은 제 몸을 밝혀 내게 저처럼 환한 빛을 던져주는데, 나는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다. 미국의 흑인 작가 랄프 엘리슨이 쓴 투명인간에 보면 주위의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여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내가 바로 그 꼴이었다. -78-79쪽

그 어떤 힘이 제비꽃의 가느다란 줄기를 꼿꼿하게 세우는 것일까? 어떤 힘이 있어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날 밤 내 머릿속에는 뒷산에 두고 온 모종삽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비스듬하게 땅에 꽂혀 있을 그 모종삽. 그 모종삽처럼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하게 꽂아두고 온 것들, 원래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들, 그런 것들. -80쪽

우리가 잊고자 애쓰는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91쪽

그대는 오래전부터 내게 비밀이었다. 내가 밤을 사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밤에는 나도 비밀이 되니까. 우리는 모두 멀리서 흔들리는 불빛이 되니까. 그리하여 밤의 몸과 밤의 살갗과 밤의 온기를 나는 사랑한다. 밤에 그대는 어둠 속으로, 비밀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밤에 그대는 내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밤이 될 것이다. 밤 안에서 우리는 사랑할 것이다. -93-94쪽

업무상 만나는 인간이란 참 서로에게 쓸쓸한 존재다. -113쪽

나는 잊혀지는 것도 그렇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잊혀진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118쪽

그 공허감이란 결국 새로 맞닥뜨려야 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피해 들어가는 자폐의 세계였던 것이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듯이, 새가 알을 깨듯이 우리는 자페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세계 속으로 입문한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124쪽

내 마음 속에 간직해둔 거문고도 이따금 줄 끊어지는 소리를 울린다. 그 소리가 울릴 때면 나는 또 얼마나 놀라는지! 나는 참 많이도 흘러 내려왔구나. 항상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구나. 스무살, 그 무렵에 나는 '이제 그만 바라보자 / 저렇게 멀리서 반짝이는 섬들을' 이라는 내용의 시를 썼지만 이제는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빛이, 마치 새로 산 스웨터처럼 얼마나 따뜻한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것 같아 가만가만 고개만 끄덕인다. 이따금 마음에서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가만 -125쪽

그해 겨울, 나는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했다.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빨리 정릉 그 산꼭대기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중략)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131쪽

내가 기억하는 청춘이란 그런 장면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이고, 창문 너머로는 북악 스카이웨이의 불빛들이 보이고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일들을 생각하며 하지만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합창한다. -138쪽

그렇게 3년 정도 그와 함께 지냈다. 그의 집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함께 여러 곳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광경을 봤고 수없이 많은 소리를 들었다. 대개는 처음 보고 듣는 것들이 많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듣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우리 삶에 존재한다는 뜻은 이 세상을 더 밝고 멀리 보라는 까닭이다. -194쪽

세월은 흐르고 흘러 서리 내린 연잎은 그 푸르렀던 빛을 따라 주름져갈 테다. 연잎이 주름지고 또 시든다고 하더라도 한 때 그 푸르렀던 말들이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도 그처럼 푸르렀던 말이 있었다. 에컨대 "글을 잘 읽었다"라든가.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꼭 보고 싶다" 같은 말들. 그런 말들이 있어 삶은 계속되는 듯하다. -196쪽

1993년 여의도의 로봇들을 바라보니 의구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 로봇들은 삼류 스탠드바를 연상시키는 조명 아래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서서는 앞에 사람이 있건 없건 팔을 내밀면서 "안녕하세요?" 라고 말을 걸고만 있었다. 그것들에게 과연 요리나 청소를 시킬 수 있을 것인지 따져보느라 머리속이 적잖이 복잡했다. (笑)-203쪽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면 간절히 손꼽아 수학여행을 기다릴 수 있다면. "어텐션 플리이즈, 바우"의 세계를 소망할 수 있다면. 깜짝 놀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212쪽

지금 생각하면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지는 어떤 것,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감미로워지는 어떤 것, 대일밴드의 얇은 천에 피가 배어드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으면서도 스케이트를 지칠 수 밖에 없는 어떤 마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217쪽

춘천마라톤에 갔다가 차를 몰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지금 강변도로를 달려가고 있구나. 20여년 전 서울 아저씨가 말씀했던 그 강변도로구나. 뭐 이런 놈의 삶이 다 있을까? 어린 시절에 나는 빨리 커서 서울 아저씨가 말한 강변 도로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이제 강변도로를 달리게 되니까 그 때 술 취한 아저씨와 어머니 사이에 앉아 달려가던 시골길이 그리워지다니. -241쪽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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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밑줄긋기로 다시 보니깐 다시 읽고싶어지네요.
김연수의 청승은 감성으로 승화되는데 왜 나의 감성은 청승으로 치달을까요.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1-09 22:06   좋아요 0 | URL
나의 청승은 청승에서 그쳐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