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악마처럼 강해지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악마는 정말 강한가? 악마는 그토록 힘이 센가? 내 의문과는 무관하게 결코 '주르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느린 속도로, 정희의 빰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그 눈물의 속도처럼 천천히, 하지만 지나고 보면 이내 그 시절들은 지나갔다. 용정의 봄은 허무할 정도로 짧았다.-32쪽
정희가 내게 보냈던 처음이자 마지막 서신. 그 한 장의 편지로 인해서 그때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움직이던 내 삶은 큰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부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42쪽
"삼나무 높은 우듬지까지 올라가본 까마귀,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는 법이죠. 진실을 알게 된 고귀한 자들은 비참하게 죽는 순간에도 이 세계 전부를 얻은 셈이에요. 진실을 막을 수 있는 총검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어떤 마적단을 죽이기 위해서는 임산부의 피를 총구에 발라야만 한다고 하더군요. 죽음이 두려운 자들에게는 거짓 관념의 사실이 필요할테니까. 그 사슬로 유지되던 낡은 세계가 무너지니 그 소리 요란한 셈이죠"-47쪽
어떤 계기로 한 번 세상을 고쳐보게 되면 모든 게 다 바뀌어버리는 거야. -65쪽
뭔가에 사로잡혀 있으나 그게 뭔지 숨기고 있는 듯한 눈빛. 늘 과장되게 웃고 과장되게 말하고 과장되게 행동하는 태도. 다소 펑퍼짐한 앞모습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날카롭게 보이던 옆모습, 그의 첫인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기계라면 그는 정비공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행복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들의 사용설명서를 지니고 있는 듯한 사람. -72쪽
바라는 게 없는 인간은 아편에 중독되지 않아요. -81쪽
사랑도 마찬가지지만, 증오 역시 감정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지. 사랑이든 증오든 오직 행동으로 실현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거야.-89쪽
겨우내 그 작은 유리창으로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서야 나는 그게 겨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울은 내 모습만을 보여줄 뿐 그 어떤 풍경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내 얼굴이 그 유리창에 비치는 까닭은 아직 계절이 내게 채 보여주지 않은 것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회색 산과 물이 마른 개울과 여윈 나무만이 서 있는 거리와 움츠러든 사람들 속에 감춰진 마음이 세상의 모든 투명한 유리를 거울로 만들어버렸다. -103쪽
내 몸에는 어떤 소망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내가 겁낸 건 바로 눈물이었다. 늙은 나무에 피는 꽃처럼 내 마른 몸에서 눈물 같은 게 나올까봐.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나같은 놈도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떠한 사람으로 되며,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모르는 나같은 놈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까 봐. -123쪽
영국더기 언덕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빛의 세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빛의 세계 속에 어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됐다. 인화된 양화는 필연적으로 음화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은 현상한 필름에도 인화된 사진에도 있지 않았다. 진실은 음화와 양화, 두 세계에 동시에 걸쳐 있다. (중략) 인화지에 나타난 내 손 역시 빛도 어둠도 아니었지만, 동시에 빛이자 어둠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나는 지난가을의 고통을 완전히 치유받았다. 지금 여기 내게 없는 것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이리라.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가 존재한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빛도, 어둠도 아니면서 동시에 빛과 어둠인 세계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암등의 흐릿한 불빛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정희를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제야 슬픔 없이 두려움 없이 정희가 그리워졌다. -126쪽
"아까 네가 나뭇가지를 흔들었니?" "꼭 누가 흔들어야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랍데. 나뭇가지 저 혼자서 흔들리는 밤도 더러 있답데"-132쪽
나는 오직 진리를 위해 분노할 뿐이요. 인간은 진리 속에 있을 때 끝없이 변화할 뿐이오. 인간이 변화하는 한 세계는 바뀌게 되오. 죽는다는 건 더 이상 변화하지 못하는 고정의 존재가 된다는 것. -235쪽
만약 그날 토벌대가 유정촌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당신이 말한대로 경성으로 돌아갔다면 당신은 이런 세계 따위는 보지도 않고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오. 하지만 진실을 알겠노라고 선택한 다음에는 돌아갈 방법이 없소.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은 결정론적인 세계를 살아가는데도, 그들은 쉬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오. 그게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일이오. 그 책은 버렸으되 내가 톨스토이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오. -236쪽
주인만이, 자기 삶의 주인만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꿈꾸지 않는다. -247쪽
그 시절, 사랑은 다만 사랑이었을 뿐이며 희망은 희망 아닌 것들과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제 모두 지나갔다. 사랑에는 의심과 증오가 스며들었으며, 희망은 가장 어두운 숲속까지 들어가서야 겨우 찾을 수 있게 됐다.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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