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울프)는 말한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교육 받은 계급의 일원이라고. 우리가 겪은 실패는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라고. 우리는 이런 현실을 마음 깊숙이 담아 두는 데 실패해 왔다고. -25쪽
이런 사진들이 자아낸 연민과 메스꺼움으로 마음이 심란해진 나머지, 그 밖에 어떤 잔악 행위들과 어떤 주검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33쪽
뉴스가 소위 전세계라는 어법으로 말하는 세게는 지리적으로나 관심 여부로나 아주 국한된 장소일 뿐이며, 뭔가 알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매우 짧고 굵게만 방송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에서도 고작 몇개만이 추려내질 뿐이니 그처럼 선택된 전쟁들 속에서 모아놓은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다. 게다가 카메라에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질 것이다. -41쪽
오늘날 사진은 상상력보다 우월한 권위를 지니게 됐다. -47쪽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출됐던 그토록 많은 사진들이 순수하지 못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90쪽
이 사진이 찍힌 지 수십 년이 흘렀어도 관찰자들, 즉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 사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푼다거나, 이 사진이 보여준 추악함을 없앤다거나, 자신들도 공동의 방관자라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한 채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 사진에 찍힌 것 같은) 표정을 보게 될 것이었다. -95쪽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식민지화된 아프리카는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일반 대중들의 의식 속에 주로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희생자들의 모습이 달린 잊지 못할 사진으로 존재한다. -109쪽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110쪽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 (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12쪽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자신들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광경을 사진에 찍어 전시하는 것도 이와 똑같은 일이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 (백인들처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113쪽
부당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품게 될 감정이 연민이라면 연민은 도덕적 판단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비록 비극적인 불행을 그린 드라마에서는 원래부터 공포와 연민이 쌍둥이일지는 모르나, 흔히 공포가 연민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는 한 공포는 연민을 희석(산란)시키는 듯하다. -115쪽
사진은 그 무엇이 됐든지 간에 피사체를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116쪽
살가도의 사진들은 특히 그가 생생하게 묘사해놓은 비참함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상업적인 맥락 때문에도 심술궂은 대접을 받았다. 그렇지만 정작 문제는 그의 사진이 어떻게 어디에서 전시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 자체에 있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진들의 초점,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하는 그 초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120쪽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122쪽
피사체가 전혀 포즈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찍었다는 이미지가 평범해 보이지 않을 경우, 보여져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행위는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을 눈앞에 바짝 들이대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을 괴롭혀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라고 강요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122쪽
도덕적으로 깨어 있는 사진작가들과 사진의 이데올로그들은 전쟁 사진을 통해서 (동정심, 연민, 분개 등의) 감정을 착취한다는 쟁점들, 그리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자극해댄다는 쟁점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23쪽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125쪽
유명한 사진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에 깊이 각인되지 못했거나 남아 있는 이미지가 별로 없는 잔악 행위들은 훨씬 더 푸대접을 받는다. -130쪽
미국인들은 저곳, 그리고 미국이 개입되지 않은 곳에서 행해진 악을 사진으로 찍기를 더 좋아한다. (중략) 미국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보려는 국가적 합의는 비참한 광경을 담은 사진들이 맞닥뜨린 새로운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사람들은 그 어느 곳에서 벌어졌든지간에 그릇된 일들에 온 정신을 뺏길 것이다. 단 미국 자체를 유일한 해결사이자 구원자로 보는 한에서만 말이다. -134쪽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135쪽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 -135쪽
이 사진들이 전시됨으로써 우리도 이들과 똑같은 구경꾼이 되어버린 셈이다. -140쪽
아 끔찍한 일이군. 그리고는 채널을 돌렸습니다. -151쪽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정작 문제는 이렇다. 이제 막 샘솟은 이런 감정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그런데 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금방 지루해하고 냉소적이 되며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153쪽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154쪽
현실이 일종의 스펙터클이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은 깜짝 놀랄 만큼 지역성을 띠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이 세계의 부유한 곳, 그것도 뉴스가 오락으로 뒤바뀌어 버린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극소수 교육 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하고 있는 셈이다. -162쪽
현대성의 시민들,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 전쟁터에 직접 가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 참상을 세세하게 말하는 데 정통한 사람들은 진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웃도록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좀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온갖 일을 다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의자에 앉은 채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164쪽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166쪽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167쪽
아마도 사람들은 사색보다는 기억 자체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듯하다. -168쪽
오늘날 전쟁 소식이 전 세계로 퍼진다고 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뺏을 만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하는 현대의 삶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인 이미지들을 외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하다. -169쪽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조차도 예술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입니다. 문화가 발달하고 각 문화가 상호 작용함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 가는 것을 향해 인간이 보여준 반응의 역사가 곧 문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207쪽
작가는 이 세계에 눈길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사악함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살펴보며 연상해보려고 노력하는 존재. 그렇지만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냉소적이 되거나 천박해지거나 타락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207쪽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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