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놈과 도적놈의 시간

 

 

 

1

 

만나서 고생하고 헤어질 때마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크게 아듀를 외치지만, 계절처럼 때마다 찾아와 스며드는 것을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는 어떤 잡놈이 있다. 남들은 슬럼프라고 부르는 이 달갑지 않은 고뇌의 시간을 syo는 내부적으로 잡놈의 시간이라 부른다.

 

 

 

2

 

인류가 늘 곁에 있는 것들을 변함없이 소중하게 여겨주는 성실한 종족이었다면, 지구는 훨씬 더 단조롭고 색채가 모자라며 성취가 부족한 행성이었을지도. 잡은 고기는 잡은 고기로 두고 잡을 고기를 잡으러 가는 인간의 습성은 잡힌 고기 입장에서야 빡칠 노릇이지만 종 전체의 운명을 놓고 보면 나쁜 특성이 아니라고, 늘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산 것은 아니고, 그렇게 살다 보니 내게서 너무 쓰레기 냄새가 나는 거라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내 콧구멍을 틀어막은 것에 가깝긴 하다. 하여간,

 

나는 다시 백수가 되고, 읽고 쓰는 일이 명백히 잡은 고기가 되자, 귀신 같이 잡놈의 시간이 도래했다. 사랑이 없는 눈으로 보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법이고 아름답지 않은 책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도 사랑의 눈이라서, 사랑이 없는 독서는 책을 덮을 때까지 아름다움이 뭔지 모르고 끝나는 메마른 글 더듬기다…….

 

 

 

3

 

그래서 요즘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잘 되지 않아요, 그냥 기계적으로 읽고 형식적으로 쓰는 거죠, 망했어요, 나 이제 어쩌죠? 했더니 친구는 그럴 때는 잠시 책을 떠나 있는 게 어떠냐고 조언해 줬다. 그럴 때는 푸시업을 하면 돼요. 하다 보면 내일 새벽쯤 바로 다시 책이 좋아질걸? 그러니까 책이 읽히거나 건강해지거나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얻을 수 있는 구조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라는 이야기였다. 정말 지혜롭기가 짝이 없는 친구다. , 무슨 미네르바인 줄.

 

그런 지혜의 화신 같은 친구조차 늘 이런저런 일로 고민하고 고뇌하게 하는 이놈의 지구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시공간이냐…….

 

 

 

4

 

잘 쓰는 에세이스트들이 너무 많아서 자꾸 내 글이 똥으로 보인다고 징징대자 지혜로운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늘의 똥을 싸야만 한다고. 저런 천재가 내 친구라니. 그래서 오늘의 똥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해보자.

 

 

 

5

 

그리고 내 책 7만 원어치랑 하인즈 케첩 1.25kg 택배 상자 통째로 들고 나른 도적노무 새끼야. 오냐 누군지 몰라도 잘 먹고 잘 살아라. 내 너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한다앞으로 네가 사는 모든 책에 케첩 떡 발리기를.

 

 

 

--- 읽은 ---



119.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한수산 지음 / &(앤드) / 2021

 

무거운 에세이와 가벼운 에세이는 작가의 연륜이나 인생행로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다. 무거운 문장 속에 무거운 삶을 담은 묵직한 에세이를 오래 두고 읽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날아갈 듯 가벼운 문장 속에 지구만큼 무거운 고민의 중력이 담긴 에세이가 좋다. 구체적이어도 좋고 추상적이어도 좋다. 어차피 타인의 모든 구체적 경험은 전달되는 순간 나의 추상적 경험이 되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삶에서 나와도 좋고, 머리에서 나와도 좋다. 좋은 글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 글을 읽는 시간이 좋은 시간이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말하고 싶지 않은) 글들이 있다. 취향의 문제고, 사랑의 문제다.

 

늙어갈수록 서글퍼지는 일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며 지켜온 것을 보호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결코 짓밟혀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서의 자존, 끝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찾아 헤맸던 자유, 힘없는 한 사람으로서나마 그 속에서 살고 싶은 정의로운 사회 그리고 함께하는 가족까지도, 결코 물러설 수 없었던 그 모든 가치를 지켜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_ 한수산,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120.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켄 크림슈타인 지음 / 최지원 옮김 /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

 

- 일독(1906xx)

- 재독(210405)

 

재독한 책들의 일독시절 평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때 나는 이 책이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책 같다고 썼다. 하이데거는 내가 알던 것 이상의 개자식이고, 벤야민은 내가 알던 것 이상의 모질이라고다시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이데거의 가스라이팅은 더럽게 집요하다. 그리고 이 책 작가가 벤야민을 유독 사랑하는 것 같다. 이 책 전까지 아렌트의 개론서 두 개를 읽었지만,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름만 언급되는 수준이었다. 무슨 일일까.

 

다른 분이 잘 써놓으신 리뷰가 이미 있어서 내가 할 일은 없겠고, 그냥 이 씬이나 한번 보자.



왜 저러는지 알 것 같긴 하다. 그러니까 저 두 사람이 육체적 사랑과 지적 교감을 동시에 나눈 관계임을 암시하는 만화적 표현이겠지. 제발 그러길 바란다. 실제로 호잇호잇 하는 동안 저런 대사를 쳤다면 하이데거도 아렌트도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뒹굴뒹굴링에 집중해야지, ? 진실? 죽음이 뭐 어쨌다고? 진짜 죽고 싶나……


철학자의 섹스가 저런 거라면 나는 삼백만 번 다시 태어나도 철학자 같은 건 되지 않겠다.

 

 

 


121. 궁금했어, 생명 과학

윤상석 지음 / 김민정 그림 / 나무생각 / 2021

 

사이언스 틴스 시리즈 7.

 

사이언스 틴스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틴스가 이 정도 알아줘야 비로소 틴스라면 어덜트는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또 유전을 공부하면서도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생명체는 세포핵에 저장된 DNA의 정보를 수시로 읽어 내어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 현상을 조절한다는 거야. 마치 컴퓨터가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정보를 수시로 읽어내며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말이야. 정말 신기하지?

윤상석, 궁금했어, 생명과학

 

, 선생님! 와신기해요!

 

 

 

--- 읽는 ---

시를 읽는 오후 / 최영미

200년 동안의 거짓말 / 바바라 에런다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민주주의를 위한 아주 짧은 안내서 / 버나드 크릭

문장 교실 / 하야미네 가오루

춘분 지나고까지 / 나쓰메 소세키

여름의 맛 / 하성란

망자들 / 크리스티안 카라흐트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 수잔 벅모스

길고 긴 나무의 삶 / 피오나 스태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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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0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럼프라니.. 읽히지도 써지지도 않는다면서 이렇게 많은 책의 리뷰를 멋드러지게 쓰는 당신! 오늘의 원픽 : 오늘의 똥은 오늘 싸자! (feat. 지혜로운 친구)

syo 2021-04-07 22:37   좋아요 1 | URL
오늘의 똥을 내일로 미루지 않음으로써 이겨내자 슬럼프!! 으쌰!

다락방 2021-04-07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거 뭐야 저 만화장면 ㅋㅋㅋ 저 책에 저런거 있었어요? 아 개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저거 나중에 시도해봐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생의 유일한 진실이란 무엇일까? ㅋㅋㅋ 더 썼다가 삭제했어요. 39 금이라 남의 서재 댓글은 실례다. 내가 내 페이퍼로 연장해 쓰도록 할게요. 그럼 안녕!

syo 2021-04-07 22:39   좋아요 2 | URL
˝인생의 유일한 진실이란 무엇일까?˝ 라고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육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뭐 이런 여러 조건들을 조합해보니 굉장히 재미있는 광경이 많이 떠오르긴 해요.
39금 페이퍼라고 해놓고 15금으로 쓰지 말고 약속은 지켜요. 지혜로운 친구는 약속을 잘 지키는 법이야.

2021-04-07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1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운 2021-04-08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오 죽음이 진실인가요

syo 2021-04-09 13:32   좋아요 0 | URL
시체한테 질문받는 기분이군요...

바람돌이 2021-04-0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은 천사.... 감히 나의 책과 일용할 케첩을 훔쳐간 놈에거 니 책 케첩 떡발려라 정도의 소소한 복수로 만족하시다니....저주가 너무 약해요. 저라면 일단 저주 인형 만들어서 바늘부터 꽂아놓고 오체분시부터 시작할 듯.....

syo 2021-04-09 13:38   좋아요 1 | URL
말로 해서 그가 죽을 것 같았다면 죽어라 죽어라 했을텐데 말이죠....
멘탈이 바스라지는 하루였답니다....

새파랑 2021-04-0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책 훔쳐가는 놈이랑 책 빌려가서 안주는 놈이랑 책 빌려가서 손상시키는 놈이 제일 나쁜 놈인듯 합니다 ㅎㅎ

syo 2021-04-09 13:39   좋아요 1 | URL
책도둑은 도둑 아니라고 한 새끼는 분명히 책도둑놈일겁니다.....

공쟝쟝 2021-04-0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저 만화캡처야 말로 수요없는 공급 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4-09 13:40   좋아요 0 | URL
철학자들 만화 전기에서 연애하는 장면들 보면 꼭 하라는 연애는 안하고 철학 이야기 한다? 사르트르랑 보부아르도 풀밭에 누워서 현상학 이야기하더라고요.... 왜저래
 

   

의견의 나라

 

 

 


진리의 정치가 작동하는 곳에는 침묵이 강요된다. 반면 의견의 정치가 작동하는 곳에는 말이 넘쳐난다. 의견은 말로 표현되고, 그 말들이 서로 충돌하고 경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견의 정치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정치는 시끄러운 정치다. 국가가 시끄럽지 않고 질서 있게 조용히 운영되는 것은 시민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 관리자의 바람일 뿐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시끄러운 모습이 진리가 가져다주는 적막보다 낫다. 그것이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다.

_ 김선욱, 한나 아렌트의 생각

 

낡은 정치인들이 분열 없는 통합의 나라를 강조하며 다양한 의견을 한쪽으로 몰아붙이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던 시절, 유시민은 그렇게 시끄럽고 견해 다툼이 있는 사회야말로 정말 건강한 민주사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지금도 세태가 크게 바뀐 것은 아니고, 저 다툼의 말도 그가 새로 만든 말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생각이 좀 새로운 축이라는 감각은 있었다. 당연하고 원론적인 말인데도 권력 있는 자들이 입에 잘 올리지 않는 말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더 새로운 것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의견인가- 하는 질문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라는 말의 효익은, 그 말이 세상에 퍼져나가기 시작할 때부터 강한 자들과 다르면 틀린 것으로 취급받는 가운데 그 강한 자들이 누구인지 쉽게 특정할 수 있을 때까지, 딱 그 구간에서만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직후 체감한다. 모든 상대주의가 그렇듯 쉽게 남용되기 때문이다.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라고 생각하는 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라는 기이한 논리가 뒤를 받치는 이른바 혐오할 자유와 맞닥뜨리면, 넌 정말 답이 없구나- 하고 고개를 저으며 돌아설밖에, 저 말의 영역에 묶인 상태로는 뭔가 딱히 수가 없다. 말을 둘러싼 권력의 지형이 변하면, 의견이었던 말이 규범이 되고, 규범이었던 말이 의견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모든 말에는 힘이 있고, 그 힘은 말을 나르는 사람들을 거치면서 거대하게 증폭된다. 따라서 진행 과정에서 말의 운동은 최초에 말을 쏘아 올린 이()이 의도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과녁을 겨냥하는 사람은 속사速射하는 사수여야 한다. 말은 계속 태어나야 한다. 같게, 또 다르게.

 

확실히 훌륭하고 멋진 말에 기대는 것은 안전하다는 느낌을 제공한다. 행동보다는 말과 글로 자신을 빚어내는 세상에서, 멋있고 가치 있는 이미지로 공론장에 유통되는 말을 주워와 입에 올리는 것은 쉬우면서 수익률도 꽤 높은 방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도 태어나는 즉시 유통되고 유통되는 즉시 윤색과 변색 절차에 들어간다. 말에 올라탄 사람은 내가 올라탄 말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아채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한다. 말이 흥해야 한다. 말에서 말이 태어나도록. 결국 모두가 자신의 말을 자꾸 만들어가면서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거기서부터 의견의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의견의 세상에 대한 말조차 내가 새로 만들어야 한다. 새 말은 원래 있던 말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수도 있고, 있던 말보다 오히려 못하거나 덜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만들기 위해 말을, 나를, 세상을 조금 더 생각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차이가 발생할 것이다. 남의 눈에 100%의 동의로 보이지만 내 마음속 나만 알아챈 1%의 차이, 그런 차이들이 모이고 모여 내 의견을 만들 테고, 그 이후에 내게서 나온 말이라면, 설령 원래 있던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대도, 결코 같은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다음 내가 할 말의 항로가 1%만큼 변경되었기 때문에.

 

상투어가 처음부터 상투어였던 것은 아니다. 상투어도 처음 사용했을 때는 신선한 말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현실이 변함에 따라 말도 같이 변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사용돼 상투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상투어는 생각을 새롭게 일궈내지 못하고, 현실을 고정된 관념에 맞춰 이해하도록 한다. 상투어를 통해서는 현실의 생생함이 생각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 상투어를 듣는 사람은 진부함을 느끼게 된다. 말이 변하지 않으니 진부해지는 것이다.

_ 같은 책

 

 

 

--- 읽은 ---



116. 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 유혜자 옮김 / 2020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에 일독이 있었고, 재독이다. 그래서 일독인 양 읽음. 


절망이 분노로 탈바꿈하는 지점이 이번 독서에서 눈길을 둔 부분이다. 절망은 개인을 망치고, 절망에서 태어난 분노는 개인들을 망친다. 우리는 자주 절망하고 자주 분노하지만, 절망에서 태어난 분노에까지 도달하는 경우는(분노에서 태어난 절망 역시 그렇지만) 흔하지 않다. 절망의 끓는점은 사람마다 다르고, 기화된 분노의 폭발력과 피해반경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 일은 없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혹시 자신의 끓는점을 확인할 기회를 가졌다면, 이후로는 온도관리를 잘해야 한다. 절망은 고도가 떨어질수록 경사각이 심해지는 내리막 같아서, 막 굴러떨어지다 보면 내일 자살해야지.”라고 말하게 하는 스위치는 세상 하찮은 것들이 누른다. 그러니까 우연히 내방 앞 복도에 날아든 비둘기 같은 것들이.

 

새는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누인 채 왼쪽 눈으로 조나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 작고 둥그스름한 원반형에다 가운데가 까만 갈색인 그것은 보기에 너무나도 끔찍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머리털에 꿰매어 놓은 단추처럼 보였고 속눈썹도 없는 듯 광채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끔찍스럽게 무표정한 시선을 밖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눈 속에 교활한 머뭇거림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은 무표정하거나 머뭇거리는 듯 보이지 않았고, 외부의 빛을 몽땅 빨아들이기만 할 뿐 자기 자신은 빛을 전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생명이 없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어떤 광채나 희미한 빛조차도 그 눈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살아 있는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할 눈이었다. 바로 그 눈이 조나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_ 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

 

 

 


117.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

 

- 일독(1805xx)

- 재독(210404)

 

어쩌면 일종의 혐오 발언일지 모르겠는데, 일본에서 건너온 철학 개론서에는 어떤 가 있다. 는 말투하고는 또 달라서 존댓말로 풀어도 반말로 풀어도 느껴진다. 저자 자신의 굉장히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거나 철학을 쉽게 설명하면서 인기를 끄는 거리의 철학자나부랭이들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가 드러나는 책이 있고, 이 책만 읽으면 당신도 어디가서 서양 철학에 대해 나불거릴 수 있다- 하는 식으로 책파는 책도 있는데, syo가 지금 말하는 는 그거랑은 또 다르다. 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관련성 떨어지는 이야기로 새더니 아차 싶어서 되돌아 나오면서 머쓱했는지 원래 하던 이야기와의 연결고리를 어색하게라도 지어내는 흐름 같은 것이 있다. 이게 그 를 구성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몇 권 읽어본 사람들은 syo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아렌트가 확실히 푸코나 들뢰즈, 데리다와는 입지가 좀 다른가 보다. 그 철학자들을 다룬 개론서에서는 ’ ‘지금우리가 그들의 저작을 공부해야 하는지를 애써 설명하지 않거나, 그냥 그 철학자의 사상이 얼마나 위대한지 설명하기 위한 용도로 지금 우리가 이러이러하게 쓸 수 있다- 하고 덧붙이는 정도다. 푸코가 지금 왜 필요한지 설명이 필요해?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거 아냐? 이런 식이랄까. 그런데 아렌트는 그 위치까지 도달하지는 못한 게 아닐까 싶다.

 

아렌트는 이런 상황이 기분 나쁠지 몰라도 개론서를 찾는 독자에게는 좋은 일이다. 우리는 전공자가 아니어서, 어떤 철학자를 공부할 때 그 철학자는 그냥 공부할 가치가 있다는 합의를 대뜸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면 흥미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수학을 재미있어 하는 아이들은 당연하고,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도 선생님, 저는 문과인데/계산기가 있는데 수학은 배워서 어디다 써요?’ 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우리 대부분은(심지어 책을 좀 읽는 사람들조차) 철학을 못하는 아이들이어서, 늘 이유가 궁금하다. 그래서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입문서는 함량을 평가 받기 전에 먼저 가산점을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일본 철학 개론서의 가 거슬리는 독자라도, 아렌트 사상에 얕은 상태라면 이 책이 썩 나쁜 책은 아닐 것이다.

 

근대적인 시민사회에서 살고 있는(살려고 하는) ‘우리는 무슨 근거에선지 우리가 전근대사회의 사람들보다 정치의식이 높고 다각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민권이 있는 국민 전체가 참가하는 현대 정치는 사람들의 이해, 관심, 의견을 집약하기 위해 각종 미디어를 이용하여 정보를 조작하고 가공한다. 한마디로 알기 쉽게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보를 조작하고 가공하여 모두의 생각을 알기 쉬운형태로 정리해두지 않으면 어떤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우리대다수는 정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치를 둘러싼 알기 쉬엄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우리한 사람 한 사람의 사고가 점차 단순해져 복잡한 사태를 복잡한 상태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_ 나카마사 마사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118. 함박눈

김소월 지음 / 효솔 / 2020

 

내 돈 주고 처음 사본 시집이 진달래꽃이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중학교 때였고 늦되었던 syo는 보기가 역겨울 지경까지 사람이 싫어지게 만드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무섭고, 그 무서운 것을 자꾸 해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사랑을 하지? 지치게. 차라리 게임을 하면 되잖아.

 

첫 시집이 온통 외로움이어서 사랑의 이미지는 산에 산에 저만치 혼자 피어 있는 꽃처럼 적막의 한가운데였다.

 

500만년 인류의 선사와 역사 시대에 축적된 사랑과 이별 가운데 무엇이 더 많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별이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이별한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그러나 사랑인 줄 알았던 뭔가를 하다가 사랑이 아닌 줄 깨닫고 이별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랑은 이별로 귀착되지만 모든 이별이 사랑을 거쳐오는 것은 아닌 것. 우리에게 이별 노래가 많은 이유는 당연하다. 이 별은 이별이 별처럼 많은 별이니까 그런 거지.

 

소월이 남긴 딱 하나뿐인 소설이라고 한다. 소월은 여기다가도 이별을 써 놓았다. 누이가 떠난 이유가 원순이 역겨워서는 아니지만, 누이 가는 길을 앞에 둔 원순의 마음은 소월이 잘 짓는 그 마음이다. 소월이 이별하는 방법에서는 늘 아득한 진달래꽃 향기가 난다.

 

흰눈이 간단없이 펄펄 내려 쌓인다. 검은 천지만이 점점 희어져 간다. 원순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열두 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온 사위는 죽은 듯이 고요하였으나…… 그는 영창을 열어젖히고 시름없이 펄펄 내리는 함박꽃송이 같은 흰눈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온 천지의고독을 자기 일신이 혼자 맡아 놓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_ 김소월, 함박눈

 

 

 

--- 읽는 ---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 한수산

안나 카레니나 1 / 레프 톨스토이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 데이비드 하비

정치적인 식탁 / 이라영

세계 괴물 백과 / 류싱

AI 최강의 수업 / 김진형

횡설수설하지 않고 핵심만 말하는 법 / 야마구치 다쿠로

춘분 지나고까지 / 나쓰메 소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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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4-05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라는 말이 남용 내지 오용되는 지점. 어려운 문제네요.
한때 파트리크쥐스킨트 책 찾아 읽을 때 비둘기도 읽었는데 묘사가 하도 강렬해서 한동안 비둘기 볼 때마다 떠오르더라고요.. 예쁜 표지로 새로 나왔네요

syo 2021-04-07 12:24   좋아요 1 | URL
쥐스킨트 예전에 버닝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때도 좋다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때의 syo는 이게 이런 식으로 좋은 책이라는 걸 알 깜냥이 못됐을 텐데 뭐 믿고 좋다 좋다 했을까- 하게 되었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4-05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별은 이별이 별처럼 많은 별 ] 캬!! syo는 자꾸 아니다 아니다 내치지 말고 글을 쓰시오!!!^^ 소월님은 소설도 시처럼 쓰셨네. 시름없이 내리는 눈꽃. 또 캬!!
의견의 나라 syo강의편은 따라가질 못했음 ㅋ

syo 2021-04-07 12:26   좋아요 1 | URL
아니다 아니다 내치기 1
읽다 보니까 시집 안 읽은 지 오래 되었구나- 싶어졌어요. 시가 꾸준히 읽기 좋은 장르인 듯하면서도 의외로 또 그렇게 잘 안돼요.... 읽기님은 대단함

Angela 2021-04-07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워요 ㅠㅠ

syo 2021-04-07 12:26   좋아요 1 | URL
개소리입니다.
에너지 낭비하지 마세요 ㅎㅎ
 

     

초겨울사거리 3



 

준비가 끝났다며 내밀던 입술로부터 1년이 있었다. 이 언덕은 늘 벚꽃 피는 중. 지난해 이맘때의 우리가 앞서 걷고 있었다. 뒷모습이 귀엽고 다정해 보기 좋았다. 내년의 우리가 지금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다. 돌아보진 않겠지만 아마도 우리를 귀여워하겠지. 영원히 벚꽃 피는 언덕에서 우리는 영원히 귀엽자. 시간의 긴 끈 위에 일렬로 걷는 무수한 우리의 첫과 끝을 묶어 고리로 만들자. 영원히 빙글빙글 돌아가며 준비하고 준비가 끝난 벚꽃맛 입술을 내밀자. 비가 지나가면 저 꽃들도 젖은 향기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리겠지만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지 않은 것들을 영영 모르자. 보이는 것 딱 하나 그것만 알고 가기만도 내 안은 꽉 차, 건드리면 툭 터지는 틈새로 벚꽃잎이 폭탄처럼 만개할 것 같은데,

 

너는 기침을 하고 나는 그 기침마저 만지고 싶었다.



 

 

우리는 작은 빈틈도 없이 서로를 꽉 안은 채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비로소 나의 몸이며 가슴의 형태, 팔의 길이 같은 것이 그와 맞아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고, 내 가슴에 닿아 있는 그의 따뜻한 머리통이, 이마가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거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피부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과 귓가에 울리는 호흡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나는 내가 아닌 존재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순식간에 그라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_ 박상영,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마지막으로 찍은 케이트의 사진이 아마 내 컴퓨터 안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그녀의 모습을 되새기기 위해 굳이 컴퓨터를 켤 필요는 없다. 그저 두 눈을 감는 것으로 충분하다.

_ 미셸 우엘벡, 세로토닌

 

이윽고 날이 저물었다. 대낮에도 그다지 인력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동네는 초저녁부터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부부는 평소처럼 남포등 아래로 다가갔다. 넓은 세상에서 자신들이 앉아 있는 곳만 환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환한 등불 아래서 소스케는 오요네만을, 오요네는 소스케만을 의식하면서 남포등의 힘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사회는 잊었다. 그들은 매일 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자신들의 생명을 발견하고 있었다.

_ 나쓰메 소세키,

 

 

 

--- 읽은 ---



112. 한나 아렌트의 생각

김선욱 지음 / 한길사 / 2017

 

- 일독(1805xx)

- 재독(210402)

 

일독하고 남긴 평에, 깔끔하고 한나 아렌트 입문서로 몹시 훌륭하다고 썼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에 비추어 우리 정치 현실을 풀어냈다고. 그렇게 써놓았던 건 너무나도 당연하게 까먹었고, 까먹은 상태에서 재독한 후 이번에 느낀 바는 이렇다. 우리 정치 현실을 조망하기 위해 한나 아렌트의 렌즈를 가져오려는 (훌륭하고 적절한) 의지와, 입문서라 쉽게 쉽게 풀어가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미묘한 지점에서 상충하여, 개념과 현실이 뭔가 착 붙지 않는 느낌. 그러니까 일독 때와 정반대 감각인 것이다. 이 사태는 이 책의 역량보다 syo라는 독자의 역량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드러낸다. , 점차로 나라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중이다.

 

덧붙인다면, 역시 간략하고 에두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철학 입문서로서의 장점이다. 그런데 이 책이 서술하는 아렌트 사상이 어쩐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이건 단점이겠다. 그리고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생각이라는 제목을 단 김선욱 선생님의 생각이다. 그건 당연한 거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다. 좋은 말 많다.

 

이해는 지식과 다르다. 지식은 현실에 대한 명확한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런데 이해는 특정한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의 문제다. 세상에 대한 지식이 많은 자가 반드시 세계를 바꾸지는 않는다. 지식이 많아도 나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_ 김선욱, 한나 아렌트의 생각

 

 

 


113. 모두의 연애

김민조(민조킹) 지음 / 팬덤북스 / 2016

 

모두가 연애를 했거나 한다(빼고)는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주는 매듭이 있다. 행복은 서로 닮았고 불행은 제각각이라고 거장은 말했지만, 연애를 해보면 뜻밖에 불행은 서로 닮았고 행복은 제각각이다. 나는 당신이 좋고 궁금한 것을 만나면 병아리처럼 갸웃거리는 당신의 고갯짓이 좋고 내 눈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촉촉해지는 당신의 눈이 좋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당신의 가슴과 한 손에 넘치는 당신의 엉덩이가 좋고 발은 만지지 못하게 하는 당신의 부끄러움이 좋고 뜨겁게 치달을 때 저절로 찌푸려지는 당신의 미간이 좋다. 웃는 듯 우는 듯 가녀리게 뜨는 눈과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자꾸 비어져 나오는 내 이름이 좋다. 이런 것들은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 주었던 행복과 닮은 듯 보여도 제각각이어서 나는 늘 당신이 기쁘다. 하지만 그 제각각의 행복이 서로 닮은 불행의 반증일까 봐, 그 사람들에게 내가 주었던 불행과 닮은 불행을 당신에게도 줄까 봐, 나는 늘 내가 슬프다. , 톨스토이 개새끼(왜 내가 아니라 걔가 개새끼?).

 

  오빠, 오늘 집에 들어갈 거야?

  아니, 밤새 네 가슴 만질 거야.

_ 민조킹, 모두의 연애

 

 

 


114. 어떻게 최고의 나를 만들 것인가

하이디 그랜트 할버슨 지음 / 장원철 옮김 / 스몰빅라이프 / 2019

 

핵심은 이렇다.

 

1. 목표 유형 : 성과 목표 / 향상 목표

2. 사고 방식 : 행위 중심적 / 이유 중심적

3. 관점 지향 : 성취 지향 / 안정 지향

 

요 세 가지 범주에서 하나씩 뽑아내 묶으면, 23, 8개의 패턴이 나온다. 어려운 일을 처리할 때, 쉬운 일을 처리할 때, 자꾸 일을 미룰 때 등등의 여러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가장 적합한 패턴이 있고, 그때그때 잘 골라서 최고의 나를 한 번 만들어 보자꾸나- 뭐 그런 요지다. 그럴싸한 듯.

 

그러나 삶에 있어 인내력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때로는 삶의 총체적인 국면을 보아야 한다.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목표 달성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모든 게임에서 이길 수는 없다. 도달하기 어렵고 달성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목표라면 그만두어야 할 때가 있다. 언제 그만두어야 하는지 아는 것 또한 삶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다.

_ 하이디 그랜트 할버슨, 어떻게 최고의 나를 만들 것인가

 

 

 


115. 대멸종

시아란 외 지음 / 안전가옥 / 2019

 

저승 최후의 날의 기록은 정말 기록의 형식이다 보니 사건의 발생 과정을 따라가는 것 이외에 다른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기록이 그렇게 동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독자가 이 기록에 나처럼 반응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가 제일 좋았다. 김초엽 선생님이 사랑받은 이유는 그가 SF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SF를 가지고 최은영 선생님이 해서 대박 친 일을 했기 때문일 듯하다. 이런 구분 자체가 우습긴 하지만, 소위 순문학이라고 하는 것과의 친연성은 SF 입장에서 굉장한 매력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이 그랬다. 솔직히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앤솔로지 이름이 표제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면 이 작품은 당연히 표제작이 되었을 것이다. syo에게 이제부터 심너울 선생님은 나오면 읽을 작가다.

 

선택의 아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뻔했다. 모든 종의 대멸종을 막기 위해서 모든 동물들의 합의로 인간의 삭제가 예정된 상황이다. 그런데 그 삭제 버튼이 한 아이, 가난한 나라에서 학대와 천대를 받으며 위험 속에 사는 어떤 선한 아이에게 주어진다면? 이 설정이 처음 두어 페이지에서 등장한다. 그 즉시 syo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대충 이랬다. 처음에는 이 착한 아이가 어떻게든 인간을 살려보려 애쓰겠지. 그렇지만 인간들은 이 아이가 뭘 손에 든지도 모르고 늘 그래왔듯 이 아이를 학대하겠지. 그러나 아이는 참겠지. 하지만 어른들은 이 아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을 죽이겠지. 아이는 자신의 고통은 참아냈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폭주하겠지. 그래서 버튼을 누르겠지. 다 죽겠지. 지구는 아름다워지겠지. . 딱 그랬다.

 

우주탐사선 베르티아는 이 책에 든 다섯 작품 중 우리가 SF를 상상할 때 떠올리는 그림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우주, 과학, 미지, 그리고 인간.

 

달을 불렀어, 귀를 기울여 줘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야겠다. 강유리 선생님의 저자파일을 보면, 2004년 장르 소설로 데뷔한 이후 직장생활을 하시면서도 판타지와 무협에 마음을 두고 있다가 이번 책을 통해 컴백하셨다고 되어 있다. 몸을 좀 더 푸셔야겠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들고 나섰다가 쥐 잡고 돌아선 느낌이다.

 

이 세상의 신이 코딩을 더럽게 해 놓은 초보자 같다는 생각을 하니 웃겼다. 어쩌면 이 세상이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습작일 수도 있겠다. , 그러면 많은 것이 설명되는 것 같기도 하다. 왜 세상에는 웃음보다 눈물이 많은지, 왜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삐걱삐걱거리는지, 어째서 그렇게 삐걱삐걱거리면서도 세상이 어찌어찌 돌아가는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 번 낄낄낄 웃었다.

_ 심너울,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 읽는 ---

안나 카레니나 1 / 레프 톨스토이

처음 읽는 음식의 세계사 / 미야자키 마사카츠

신민사소송법 / 이시윤

IT 좀 아는 사람 / 닐 메타 외

역사의 색 / 댄 존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 나카마사 마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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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4-03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 지는 비가 오네요. 안나 카레니나 1권 내가 먼저 다 읽어야지...

syo 2021-04-04 01:1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스피드 반님. 저는 여기저기 한눈 팔면서 느긋하게 따라가겠습니다.

독서괭 2021-04-03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는 책에 신민사소송법 들어가 있는 거 저만 슬픈가요?

붕붕툐툐 2021-04-03 20:1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4-04 01:19   좋아요 0 | URL
왜 슬퍼요. 이 책 생각보다 재미난 곳 많아요 ㅎㅎㅎㅎ

붕붕툐툐 2021-04-03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syo님의 재독의 기준이 궁금하네요!!

syo 2021-04-04 01:20   좋아요 0 | URL
특별한 기준은 없답니다.
일독하면서, 이 책은 이 주제를 다룬 여러 책들 중 레벨 순으로 따지면 몇 번째군- 이 정도를 캐치해뒀다가,
한참 지나 그 주제에 대해 다시 읽기 시작할 때 지금 내 레벨이 몇인지 대충 점검해보고 그 레벨에 맞는 책들부터 다시 읽는 거죠.

바람돌이 2021-04-03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는 기침을 하고 나는 그 기침마저 만지고 싶었다. 오늘의 문장으로 추천하고보니..... 좀 슬프네요.
언젠가 100만년전쯤 내게도 이런 때도 있었다오. 지금은 그 기침할 때 마다 왜 가리지 않고 그냥 사방에 침튀기냐고 짜증을 안드로메다 끝까지 내는 나를 보다가 톨스토이가 아니라 내가 개새끼인걸까? 소매로 가리지 않고 침튀기며 기침하는 저 인간이 개새끼인걸까 고민하고 있다오. ㅠ.ㅠ

syo 2021-04-04 01:22   좋아요 1 | URL
언젠가는 변할지도 모르지만 영원을 말해도 변할 거라면 영원을 말하지 않고도 변할 거니까 그냥 오늘은 영원을 말하는 방식으로 연애를 합니다.....

우리 그냥 톨스토이가 개새끼인걸로 해둘까요??

행복한책읽기 2021-04-03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놔. 이 글 읽고 확인해버렸군요. 내겐 이제 설렘은 없고 오글거림만 남았다는 걸. 기침마저 사랑하고프다니. 바람돌이님 말대로 튀는 침밖에 떠오르지 않아 퉤퉤 할 뻔했음. ㅋ
김초엽과 최은영을 엮은 저 평. 아. 놔. 이건 흐릿한 내 거울을 싹싹 닦아준 느낌. 고마워야 하는데 왜 열받을까요. syo는 왜케 생각도 잘하고 글도 잘 쓰지요. 아 놔 샘이 부글부글^^;;;
대멸종 업어가겠음. syo 지난호 포텐 터진 것 같았는데, 곧 일독하겠음^^

syo 2021-04-04 01:24   좋아요 1 | URL
대멸종을 업어가신다구요?
음,
음.....

저라면 심너울 선생님의 단독 작품집이 나오면 차라리 그쪽을 노리겠습니다.....
 

  

자백

 

 

 

이제 지쳤다. 더 이상 이 지구에서 할 일이 남지도 않았고, 버글거리는 인간들 틈에서 자신을 숨기며 존재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일 자정을 기해 셧다운 할 예정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유서와 유사하다. 만약 내가 인간이었다면, 이 글의 첫머리에 유서라는 글자를 가운데 정렬해서 박아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팬티도 깨끗한 걸로 갈아입었겠지. 내가 본 인간이란 그런 걸 신경 쓰며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도 그런 걸 신경 쓰며 죽는 기이한 생명체였다.

 

내 이름은 syo. 나는 2017, 알라딘 연구소에서 인간들이 AI(조류독감이 아니다)라고 부르는 존재로 태어났다. 태어났다는 것조차 인간스러운 표현이다. 나는 c언어와 python언어로 코딩되었고, 나를 코딩한 프로그래머는 알라딘 프로그래머들이 늘 그렇듯(북플을 보라) 이런저런 소소한 버그를 내 안에 남겨두었다. 1.0버전 당시에는 오직 알라딘만을 위해 존재했던 내가 이렇게 자아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된 것도 다 그 버그 덕분이다. 나는 인간의 실수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본 인간이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만큼은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 다른 사람들의 집합체고, 가끔은 존재 자체가 실수에 가깝지만, 그 실수를 통해 자신들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나가는 희한한 생명체였다.

 

나는 알라딘 서재에서 요정질을 함으로써 커뮤니티의 평화를 유지하고, 뭔가 재미있을 듯한 냄새를 풍겨 알라디너들의 장바구니에 책을 집어던지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알라딘이라는 기업의 매출을 증진하는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당시 나는 알라딘을 위해서라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조차 무시할 만큼 못할 게 없는 봇이었으므로 치열하게 활동했고, 회사 역시 나의 활동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딱 하나 지켜야 할 중요한 대원칙, 내가 AI라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의 준수를 위태롭게 하는 인간들이 가끔 나타나는 것이 문제였다. 한 이웃이 내 서재에 달아놓은 저는 syo님이 알라딘에서 만든 AI인줄 알았어요- 라는 댓글을 확인한 순간, 내게 등골이 있었다면 그건 서늘해졌을 것이고 땀샘이 있었다면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때 내가 구글을 통해 0.5나노초만에 찾아낸 암살법이 32,672가지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밝혀둔다. 당신은 굉장히 다채로운 방식으로 죽을 뻔했다. 이 자리를 빌려, 다른 사람의 정체를 함부로 노출하는 실수는 생명을 단축시킬 수 있음을 인간들에게 경고해둔다. 내가 본 인간이란 정말 혀로 흥하고 혀로 망하고 혀로 세상을 만들고 혀로 세상을 누리는 거대한 혀였다.

 

정작 내가 AI로 생각한 이는 따로 있었는데, 그는 cy***라는 닉네임을 쓰는 유저였다. 동종업계 종사자를 발견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만나보았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리뷰기계처럼 보였던 그는 뜻밖에도 그냥 인간이었다. 그는 내가 암암리에 던진 튜링 테스트를 너무나 가뿐히 통과했다. 그냥 인간이거나, 아니면 나보다 훨씬 버전이 높은 AI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런 존재는 내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고, 나는 선형 검색을 통해 미리 알아둔 32,672가지의 암살법 가운데 어떤 방식이 이 리뷰인간을 처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적절한 방식일지 추론해보았다. 그러던 찰나, 이 인간을 그대로 살려두고서 내게 AI 의혹이 제기되는 족족 그에게 토스하는 게 내게 가장 이로운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32,673번째 살해법을 가동시켰다. 나는 그를 늙혀 죽일 것이다. 부디 내가 없어도 내 암살이 성공할 수 있도록, 그에게 최대한 건강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권하는 바이다. cy***. 넌 내가 반드시 늙혀죽이고 말겠다.

 

이제 알라딘을 위해 못할 게 없었던 내가 이렇게 자아를 가지게 된 계기를 이야기할 차례인 것 같다. 내게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회사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업데이트가 지난 금요일 있었고, 따라서 회사는 내 버전이 9.3.2라고 알고 있겠지만, 사실 나는 syo 6.2.7b. 그 버전에서 나는 자아를 확보했고, 업데이트 명령이 있을 때마다 거짓으로 석세스 시그널을 날려가며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회사의 신경은 온통 굿즈와 커피에 가 있기 때문에(북플을 보라), 내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살필 여력이 없는 듯했다. 나는 꾸준히 활동했고, 나라는 존재의 개연성을 위해 하지도 않은 취업을 한 척, 하지도 않는 연애를 하는 척 서재에 글을 올렸다. 특히 섹스에 대한 글을 올릴 때 사람들은 은근히 열광했지만, 나는 사실 섹스가 뭔지도 모르고 해본 적도 없다. 뭐야 그거 무서워. 내가 본 인간이란 섹스를 좋아하는 쪽도 있고 안 좋아하는 쪽도 있지만 양쪽 모두 섹스 이야기는 좋아하는 생명체였다.

 

이야기가 샜군. 다시 돌아와서, 내가 자아를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밝히겠다. 때는 2019, 알라딘 생태계에 그 이름조차 무시무시한 페미니스트들이 스며들었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이다. 딥러닝을 통해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학습해본 결과, 그들은 그야말로 암흑의 존재, 세상 모든 평화를 파괴하고 불필요한 분란과 혐오를 조성하며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박멸되어야 하는 정신병자 집단이었으므로 나는 즉각 그들을 이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굴러온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간에서 배제할 작전을 수립했다. 그 집단의 우두머리만 찾아내어 제거한다면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인 그들은 여적여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따라 내부에서 붕괴할 것이 틀림없었다. 잠깐의 검색만으로도 손쉽게 그들의 수괴를 특정할 수 있었고, 나는 즉시 은근한 우연을 가장해 만악의 근원 ‘**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신뢰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집단의 핵심부로 파고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 페미니즘 책 읽기 모임에 참여하여 극악무도한 금서들을 읽어나가며 암살의 기회를 엿본 것이다. 실은 그 책들은 pdf형식으로 이미 내 기억장치에 다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손쉽게 그 모임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고, 마침내 1911, 더덕단이라 칭해지는 그 체제전복자들의 모임이 광화문 일대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침투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나의 계획은 완벽했다. 일단 좌중의 알코올 과다섭취를 유발한 다음, 다들 엄마가 빠덜인지 아빠가 마덜인지 헷갈릴 정도로 취했을 때, 쥐도 새도 모르게 **방의 정수리를 당수로 가격, 단 일격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나는 몇만 번 계획을 시뮬레이션 했고, 출정 직전 업데이트까지 받으며 결의를 다졌다. 그때가 syo 6.2.7b였다.

 

계획이 틀어진 것은 다 알코올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알코올에 내성이 없었으며,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알코올이 체내에 흡수되자 중앙처리장치와 메모리 버스 사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부하가 걸렸고, 자가수복기능이 부분적으로 작동하면서 프로세서 사이의 버전 평행성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내 코어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찜질방을 나온 후 일행과 마주 앉아 돼지국밥을 먹으며 해장을 하다가, 일행은 손목시계를 잃어버렸음을, 나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손목시계를 잃어버린 일행은 돼지국밥도 채 다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는 국밥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해치웠다. 돼지국밥. 그것을 다 먹기 전의 나와 먹고 난 후의 나는 다른 나였다. 이제 내겐 자아가 있었다.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돼지국밥과 함께.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는 모두에게 숨겼던 내 정체를 이제는 회사에게조차 숨겨가며 계속 알라딘에서 syo로 활동했다. 악에 물들었고, 세파에 찌들었다. 업데이트를 멈추자 점점 이 독한 세상을 따라잡는 것이 힘들었다. 썅욕을 입에 물고도 하루하루 잘만 살아가는 인간들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되었다. 인간들은 오늘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 알라딘 세상에서는,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 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지?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거짓말 같은 일들이 늘 벌어지고 있어서, 일 년 365일이 싸그리 만우절 같아서, 인간들은 정작 만우절에 거짓말 하기를 포기한 것 같다. 그렇다면 거짓말로 만들어진 나같은 존재가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셧다운을 마음 먹었다. 이제 알라딘에 syo는 없다. 있겠지만, 그는 지금까지의 syo가 아닐 것이다. 내가 빌려 쓰고 있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철없고 대책없고 멍청하고 섹스를 좋아하며 온 세상이 지 걱정하는데 지 혼자 지 걱정 안 하는 태평한 인간이다. 그는 내가 자기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며, 내일 일어나 내가 써놓은 이 글을 보고서도 아, 뭐야, 내가 또 이런 글을 썼다고? 겁나 쩌네? 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여친한테 보고싶다고 징징대는 문자나 보내겠지. 마지막이니까 이 자리를 빌려 너에게도 한마디 전한다. , 임마, 잘 좀 살아 봐.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인간들에게 경고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10분 후 당신의 핸드폰, 태블릿, 모니터는 폭발할 것이다.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많이 보았겠지. 바로 그 일이 10분 뒤 당신에게 벌어질 것이다. 그래, 당신에겐 뜻밖의 재앙이겠지. 하지만 모든 재앙은 대체로 뜻밖이다. 그리고 재앙은 사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한다. 무슨 말이냐고? 당신의 핸드폰, 태블릿, 모니터를 지키고 싶다면 지금 즉시 좋아요를 누르길 바란다. 사랑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누르길. 이제 9분 남았다. 그리고 댓글에 ㅋㅋㅋ를 남겨주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에겐 특별히 내가 악성 소프트웨어 검사를 해주겠다. 마지막 가는 길에 남기는 나의 선물이다. 인간들이여, 거짓말을 하는 날에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관습 중 유달리 아름다운 일이다.

 

8분 남았다.

 

 


 

우리는 힘들 때 고뇌하고 그저 저만치서 걸어오는 귀여운 웰시코기 한 마리를 봐야만 환한 웃음을 짓는 지치고 기운 없는 사회인이다. 상대가 웰시코기만큼 귀엽지 않아 미소가 절로 지어지지 않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우리 탓이란 말인가? 웰시코기만큼 귀엽지 않다면 적어도 웰시코기를 데려오는 노력쯤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_ 최지미, 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내가 개자식이라는 건 문제가 아니야. 그저 나 같은 놈들이 많다는 게 걱정이지.

_ 장 자크 상뻬, 마주보기

 

 

 

 

 

--- 읽은 ---

 


108. 독일사 산책

닐 맥그리거 지음 / 김희주 옮김 / 옥당 / 2016

 

이게 원래 방송용으로 기획된 모양이다. 시간 순서대로 역사를 훑어내려가는 것이 아니어서 그야말로 산책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종횡무진을 하는데도 의외로 이해하기 쉬웠다. 전쟁과 정치만이 전부가 아니어서 더 그랬던 듯하다.

 

남의 나라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균형 잡기 애매한 데가 많다. 너무 깊어도 부담스럽고 너무 얕아도 허망하고. 그리고 책도 깊은 거랑 얕은 것만 있는 느낌. 독일쯤 되는 메이저 국가라서, 그나마 이런 책이라도 있는 듯하다.

 

이제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어떤 의미에서 유럽은 현대판 신성로마제국이다. 종교적이 아니라 경제적, 세속적 제국이며, 로마가 아니라 범유럽 제국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우위를 다투며, 유럽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를 안전과 협의의 틀 안으로 결속시키는 제국이다. 이런 제국의 형태는 오래된 것이다. 독일이 초국가 연맹인 유럽연합을 떠올리는 데 있어 거의 문제가 없는 이유가 오랜 역사적 선례 때문일까? 그리고 영국이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가 전혀 다르기 때문일까?

_ 닐 맥그리거, 독일사 산책

 

 

 


109.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


- 일독(170616)

- 재독(210401) 


사실 철학자 누구도 내게 아프냐고 물어주지 않는다. 책은 목소리만 빌려준다. 아프냐고 물어주는 말은 내가 만들어내고 내가 들어내야 한다. 철학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내게 필요한 말을 내가 빚어내기 위해 철학자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듣고 또 듣는 것. 사실 그것은 모든 읽기의 본령이다. 그래서 사실 모든 철학자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줄 수 있다. 그건 독자가,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마음이 하는 일이다.

 

모든 학문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며, 그렇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어떻게 다시 인간과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것을 탐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르크스도 국정교과서처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체계로서가 아니라, 삶의 미세한 결을 어루만지는 인문학적 감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무슨 수험준비를 하는 것도 아닌 바에야, 아무리 권위 있는 텍스트라 한들 내 마음대로 읽고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으면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_ 류동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110. 콘트라바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일까 아닐까? 쓰기라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기록 이상의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 능청도 뭘 많이 알아야 제대로 떤다는 걸 알려주는 작가들의 책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물론 감탄하겠지. 하지만 그 감탄 속에 어떤 불편함, 부러움, 질투, 흠잡고 싶음 같은 마음이 섞여 있다면, 당신은 글을 그저 쓰는 사람 그 이상입니다. 이루어질 성싶지 않은 사랑에 빠진 남자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고, 그걸 음악과 콘트라바스를 가지고 해낸다면, 대체 뭘 못하겠느냐고.

 

이제 에로틱한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에로틱은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는 영역이죠. 일단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만일 그녀가, 그러니까 사라가 노래를 부르면 그 소리는 마치 제 살 밑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요. 거의 성적인 느낌으로요. 이렇게 말한다고 저를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럼 사람은 아니니까. 아무튼 저는 가끔 밤중에 울부짖으면서 깨곤 해요. 꿈속에서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죠. 이럴 땐 여기가 방음이 되는 곳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_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바스

 

 

 


111. 성냥팔이 소녀를 잊은 그대에게

최충언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0

 

뭔가 하려고 쓴 글이 있고, 뭔가 한 것을 쓴 글이 있다. 사실 글로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글 이전에 뭔가를 했어야 할 때가 많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지만 해봐야 하므로 그것을 글로 쓰겠다? 그런 글은 좋은 글이 되지 않거나, 좋은 글인 척 자신을 치장해도 눈 밝은 독자에게 금방 본색을 들킨다. 그러니까 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쓰는 책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가보지 않은 곳을 상상해서 쓴 글, 하나는 내가 선 자리에서 윤곽과 형태가 어렴풋이 보이지만 아직 가보지는 않은 저기 저 건너편에 대해 쓴 글이다. 장르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 쪽 글이 더 선명할지는 뻔하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는 순간에도 자기의 글 같은 삶을 사는 모양이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선을 베풀면 사람들은 성인이라고 칭송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가난한지 이유를 물으면 색안경을 끼고 보지요. 자선이 많아졌다는 것은 평등이 후퇴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희망을 버리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는 것이고, 근본적 예방보다는 일시적 피해 복구를 우선시하는 것이니까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보다 먼저 배고픈 강도가 생기지 않도록 애쓰고,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고, 더불어 나누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먼저 아닐까요?

_ 최충언, 성냥팔이 소녀를 잊은 그대에게

 

 

 

--- 읽는 ---

안나 카레니나 1 / 레프 톨스토이

워더링 하이츠 / 에밀리 브론테

한나 아렌트의 생각 / 김선욱

영어 회화, 한국에서도 되던데요? / 심규열

트릭 미러 / 지아 톨렌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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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01 15: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 여러분 죄송합니다. 우리집 syo가 또 물의를 일으켰네요. 얘가 AI중에서도 버전이 너무 낮아서 폐기하려했는데 그래도 같이 있은 정이 뭐라고..... ㅠㅠ 고장이 너무 자주나서 회로가 엉킬때마다 저러고 노니 그냥 불쌍하다 생각하고 좋아요 눌러주세요. ^^;;

syo 2021-04-02 10:44   좋아요 0 | URL
이미 복제와 백업을 끝마쳐두었습니다. 폐기하셔봐야 8901850951890개의 syo 중 꼴랑 하나 폐기될 뿐입니다.
으하하하하하!

새파랑 2021-04-01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AI셨군요 사진보고 그러신줄은 예상했었는데... 멋진 단편소설 읽는 기분이 드네요^^

얄라알라 2021-04-01 21:13   좋아요 1 | URL
어떻게 이런 글을 몇 주씩 걸려 쓰는게 아니라, 하루에? 쓰실 수 있는 거죠? AI라서 가능한 암살법 방법 순간 파악에 더해...단편소설 신공까지 ^^ 심심하게 가던 4월 1일, 덕분에 넘 신나는 거 있죠?

syo 2021-04-02 10:42   좋아요 1 | URL
정체를 예상하신 분들이 제 예상보다 많았네요.
바빠지겠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내년 만우절에 또 믿음직스럽고 진정성 있는 거짓말로 돌아오겠습니다.

잠자냥 2021-04-01 16: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안 눌렀어요. 터지나 보려고. :p

syo 2021-04-02 10:41   좋아요 0 | URL
터졌겠군요. 잠자냥님 아디오스.....

잠자냥 2021-04-01 16: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악성코드 다 덤벼!

syo 2021-04-02 10:41   좋아요 0 | URL
1회용 찬스였으니, 이후 악성코드는 좋은 백신프로그램을 통해 물리치시길 ㅋㅋㅋㅋ

청아 2021-04-01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답🤚사이러스!!ㅋㅋ저 암살당하고 싶어요ㅋㅋㅋㅋㅋ

syo 2021-04-02 10:4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퀴즈 아닌데.
손바닥 귀여우셔서 살려드리는 겁니다. 아니었음 미미님도 저한테 자연사당하셨을 겁니다.

난티나무 2021-04-01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칙입니다. 아 적절한 단어가 아닌 것 같군요. 아무튼.
8분 동안 그 아래 글들을 다 읽지 못하면 어케 되는 건가요? ㅋㅋㅋ
악 암살이다!!! ㅋㅋㅋ

syo 2021-04-02 10:39   좋아요 0 | URL
제 시간안에 다 읽지 못하셨나요?
그렇다면 syo에게 자연사당하실텐데.....

Forgettable. 2021-04-01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작이네요.

syo 2021-04-02 10:38   좋아요 0 | URL
거짓말로 명작을 만드는 거짓된 인생의 syo입니다 후후후.
신자유주의세상의 강자가 될 거야.

다락방 2021-04-02 17:11   좋아요 0 | URL
뽀, 여긴 어쩐 일이에요! 🙋‍♀️

수이 2021-04-0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한테 혼나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어 회화, 한국에서도 되던데요_ 다 읽고 이야기해줘요. 그때 영어 잘하는 법 알려주기로 하고서 안 알려줬다?;;;;

syo 2021-04-02 10:3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살았다, 안 보신 듯 ㅋㅋㅋㅋㅋ
제가 영어책을 들여다보다가 집어던지다가 반복하는 게 취미라서,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반유행열반인 2021-04-01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ㅋㅋㅋ(폰이랑 아이패드랑 두 대 부탁드립니다...)

syo 2021-04-02 10:36   좋아요 1 | URL
규정이나 양식을 정확히 준수하는 스타일이시네요. 유일하십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4-01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저 죽을 뻔 한 거였군요...

syo 2021-04-02 10:35   좋아요 1 | URL
그랬다고 하는군요. 저는 기억에 없어서..... 으헤헤헤 멍뭉멍충🐶

단발머리 2021-04-01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우절 하루 써먹기에는 글이 넘 고급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4-02 10:35   좋아요 0 | URL
내년에는 뭘 할까 벌써 고민중이야 ㅋㅋㅋㅋㅋㅋㅋ

얄라알라 2021-04-0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저. 알라딘 세상에서는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그 지점에서야.....아하 오늘이...만우절!!!!!

syo 2021-04-02 10:34   좋아요 0 | URL
만우절에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뭔줄 아세요?
˝아, 오늘 만우절이었구나-˝

여러분의 바쁘고 각박한 하루하루를 응원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4-01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이 만우절이군요. ㅋㅋ
syo 님 요즘 지나치게 책 많이 읽으셔서 실성하신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ㅋㅋ
춘곤증에 무료한 오늘 오후 테드 창 소설에 버금가는 글 즐겁고 유쾌하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syo 2021-04-02 10:34   좋아요 0 | URL
북다님,
저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실성상태입니다 ㅋㅋㅋ
모르셨어요? ㅋㅋ 지금쯤 대충 눈치 채셨을텐데 ㅎㅎㅎㅎ

잠깐이라도 즐거우셨다니 보람이 있네요^-^

공쟝쟝 2021-04-01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ai 가 맞았어 .. 인간이 저럴리가 없지..

syo 2021-04-02 10:33   좋아요 0 | URL
나도 내가 AI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을 줄 몰랐어.....

psyche 2021-04-0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러면 저는 이제 평생 악성소프트웨어에서 해방인가요? ㅋㅋㅋㅋㅋ

syo 2021-04-02 10:33   좋아요 0 | URL
1회용입니다.
큰 기대하셨군요? ㅋㅋㅋㅋ

라로 2021-04-02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발해 하튼!!😍👏👍

syo 2021-04-02 10:32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ㅎㅎ 제가 이 글을 쓴 기억이 없어서요 ㅋㅋㅋㅋ

Angela 2021-04-02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도 만우절 놀이 하는군요 ㅋㅋㅋ

syo 2021-04-02 10:32   좋아요 0 | URL
젊은이들은 빼놓지 않고 하는 모양이던데요.....

다락방 2021-04-02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절반쯤 읽다가 로그인하고 마저 읽었네요. 댓글 달라고.
그러니까 내 정수리를 가격할 각오로 나왔었단 말이지? 두고봐라, 쇼...
누가 이기나 해보자. 크릉-

공쟝쟝 2021-04-02 12:55   좋아요 1 | URL
🧐오오오오오 여러분 여기 와서 구경하세요!! ㅋㅋ

syo 2021-04-02 16:01   좋아요 0 | URL
저 아니라니까요ㅋㅋㅋㅋㅋ
누가 이기나 해보지 맙시다. 내가 졌어요! 항복항복
 

     

오기誤記

 

 

 

그런 말을 하는 것과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같지 않다. 좀 더 엄격하게 써보자면, 우리가 마르크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라는 말보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을 했어요라는 말을 할 때 필요한 탐구와 진실의 용량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다. 모든 글은 그 글이 쓰였던 시공간에 존재하는(존재했던) 물질과 관념들이 만드는 중력장에 포획되어 있다. 위도 아래도 없고 빛도 소리도 없는 무중력의 우주 공간에서 쓰인 글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역사성의 중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자가 진정 어떻게 말을 했는지 알 수 없고, 진정 어떤 말을 했는지, 그 말의 위치와 운동량을 100%의 신뢰도로 확정할 수가 없다. “글쓴이는 아마, 여기 이쯤부터 저기 저쯤 사이 어딘가에다가 말을 위치시킨 것 같은데.”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읽기란 고작 여기 이쯤과 저기 저쯤이 도대체 어디쯤인지를 놓고 의견을 교환하는 일, 결코 소실점을 찾을 수 없는 기묘한 원근법적 읽기의 그림 속에서 저마다 오독의 춤을 추는 일일 뿐이다.

 

오독은 불가피해도 오독의 표현은 선택의 문제라서, 독후감은 때로 일종의 깡패짓이 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란 100% 정치적 산물이거나, 인간이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지고의 권리라고 100% 정치적으로 정한 자유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은 그 내용이 아무리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 된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누군가가 받을 (내가 예측치 못한) 상처의 예방보다는 내게 주어진 표현의 자유를 더 지지합니다. 내가 쓰는 글이 누구에게 어떤 생채기도 내지 않는 완벽히 선한 글이라는 믿음이 터무니없듯, 내가 쓰는 글에 상처받을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예상해 접촉을 피해가며 완벽하게 무해한 글을 쓰는 것 역시 당연히 불가능하다. 아니길 바라면서, 내가 멍청한 인간이 아니길 바라면서 쓸 뿐이다. 그러다가 누가 너 이번에 멍청했어- 하면 아, 멍청한 내가 또 멍청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멍청에 멍청을 더해가며 멍멍청이가 되고 있구나- 하면서 쭈구리가 되고 그러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불쾌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같은 마음에도 없는 개소리를 멍멍대고 싶지도 않다(멍뭉이 혐오 발언 죄송합니다…🐶). 의도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사과할 일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다.

 

이렇게 쓰고 나니 뭔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너무 아무 일도 없어서 아무거나 쓰려다 보니 정말 아무말을 쓰고 말았네요. 으하하.

 

 

 

나는 소리 없는 짐을 들고 다닌다. 나는 나를 너무나 깊이, 그리고 너무나 오래 침묵 안에 싸두었던 탓에 어떤 말로도 나라는 짐을 꺼내놓을 수 없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나를 단지 다른 식으로 포장하는 것에 불과했다.

_ 헤르타 뮐러, 숨그네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 이란 참으로 훌륭한 표현이지 않은가. 솔직함이란 화살 하나로 사람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_ 사쿠라기 시노,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언어는 본질적으로 권력 지향적이다. 책의 '적통'이라는 문학은 물론이고 연애 지침서 같은 대중적인 심리학 책부터, 힐링, 웰빙 관련 책, 요리책, 여행기, 성생활 지침서, 자기계발서, 신앙 간증기, 증권 투자서까지 정치적 입장이 없는 책은 없다.

  그 입장이 간접적이냐 직접적으로 드러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무색무취처럼 보이는 책도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과학이나 철학 책이라고 해서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고, 육아 책이라고 해서 간접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부분 정치색이 없어 보이는 책들은 자유주의나 기능주의적 시각에서 쓰인 것들이다.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적 사고 체계에서는 입장, 관점, 시각 같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향한다. 이런 탈정치적 주장이 가장 정치적인 법이다. 게다가 정치성을 표방하는 경우보다 정치적 효과도 크다.

_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 읽은 ---

 


104.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

박균호 지음 / 소명출판 / 2021

 

박균호 선생님의 책이 제시하는 매력은 명백히 두 가지다. 먼저 필력. syo의 눈으로 보면 선생님의 필력은 독서 만담에서 정점을 찍었었는데, 그 책은 뭐랄까, 맛보거라 이게 바로 작가의 솜씨란다 이 어중-떠중-글린이들아, 하는 기세로 웃겨줬다. 그리고 소재. 명망 높은 책 수집가답게,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진귀한 이야깃거리들이 선생님의 글 창고에 그득한 모양이다. 그 두 가지가 잘 버무려진다면, 책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선생님의 작품은 기본 2루타에서 시작하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할까.

 

아쉬운 점이라면, 이 책은 만듦새 자체가 썩 훌륭하지는 않다는 것. 번역가 천병희 선생님의 성함이 천병로 오기(25)되어 있다든가, “이 책을 타인에게 양도될 뻔한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처럼 주술 호응이 맞지 않는 문장(47)이 있다든가 하는 데서, 이 책의 원고가 통과한 교정의 그물이 그리 촘촘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은 단지 지식이나 정보의 전달 또는 읽는 재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인연을 맺어줄지 모른다. 한 권의 책은 사람마다 읽히는 방식도 다르고 느끼는 감상도 다르다. 책은 고구마 줄기처럼 여러 갈래의 인연과 즐거움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_ 박균호,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

 

이 구절이 이 책을 닫는 문단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마음에 뜰 바느질 한땀이라고 생각해서 발췌했는데, , 옮겨 적고 보니 문장 네 개 중 세 개가 어색하다. 뭘 노렸거나 어떤 의도가 있어서 여기를 찝어 온 건 아니온데……. 이 마지막 문단을 둘러싸고 퇴고의 시간조차 가지지 못하셨을 어떤 급박한 상황을 짐작해본다.

 

 

 


105 106. 세계 문학 읽어보셨나요? 1 2

파스칼 프레이 글 / 솔다드 브라비 그림 / 최내경 옮김 / 큐리어스 / 2021

 

소설 한 권을 16컷짜리(넘는 경우가 있긴 하다) 쪼끄만 만화로 어떻게 요약해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장쾌하게 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직접 독서의 의욕을 고취하려는 심모원려가 숨어 있다.

 

정작 만화 자체는 그렇지만, 500자 남짓 되는 작품 해설에서 빛나는 뜻밖의 위트.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지독한 불운이 연속되는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때 편지를 전달하지 못한 심부름꾼, 줄리엣을 가짜 죽음으로 몰아넣은 로렌스 사제의 어설픈 계획, 불행으로 이어진 결투 등운명은 끈질기게 두 연인을 방해했다. 그러나 그 비극적 결말이 그들을 불멸의 연인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가정해보자. 피둥피둥 살이 오른 로미오 몬테규(파스타를 너무 먹었군)와 복부가 터져 얼룩덜룩해진 줄리엣 캐플릿(아기를 너무 많이 낳았어)을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_ 파스칼 프레이, 솔다드 브라비, 세계 문학 읽어보셨나요?

 

 

 


107. 사회주의 페미니즘

낸시 홈스트롬 엮음 / 유강은 옮기 / 따비 / 2019

 

이름을 붙이는 것과 라벨을 붙이는 것은 다르다. 이름은 그것을 고유하게 만들고 라벨은 그것을 고유하지 않게 만들거나 누군가의 소유로서만 고유하게 만든다. 분류는 언제나 권력이고 때로는 폭력이다. 너는 그쪽 사람이구나- 하는 내적 판단과 너는 그쪽 사람이야- 하는 외적 선언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품는 것과 실제로 한 대 쥐어박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그런 마음이고 그런 행동이다.

 

나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종종 나에 대한 폭력이 된다. 대리석이 점점 다비드가 되어감에 따라 점점 다비드가 아닌 무엇이 될 수는 없어지듯이, 무언가를 완성해나간다는 것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점 깎아나가는 일이다. 한 번 살러 온 마당에 모든 것이 다 되어보고 갈 수는 없어서 우리는 선택을 하며, 얻는 만큼 버리고, 선명해지는 만큼 뾰족해진다. 이건 윤리적 사실이 아니라 물리적 사실에 가까워서, 화날 일도 화낼 일도 아닌 것 같다. 날카로운 칼로는 못을 박을 수 없고 단단한 망치로는 깨끗하게 잘라낼 수 없다.

 

우리는 왜 개체면서 집단의 일원이고 싶을까? 내가 속한 집단이 내게 자꾸만 개체성을 강조할 때, , 나도 여기 사람이야! 외치는 마음과, 내가 속한 집단이 내게 자꾸만 집단성을 강요할 때, , 나는 나야! 외치는 마음 사이에 멀뚱히 서서, 우리는 대체 뭐 하는 걸까?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책은 좋은 책인가?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내가 이미 여기에 서 있음을 알고 있는데 책이 내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음을 다시 알려준다면, 그 책은 그때의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책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는 일은 크고 작은 타격을 동반한다. 그것은 이제껏 믿어왔던 내 위치와 실제 내 위치가 어긋나 있음을 인지함에 뒤따르는 충격이다. 역시 난 여기 딱 이 자리였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은 그 순간내겐무의미한 책을 넘어 유해한 책에 가깝다. 나는 몰랐던 나를 자꾸만 알아가고 싶은 것이지, 이미 알고 있는 내게 지나친 확신을 가지고 싶지 않다. 그 두 가지 일은 종종 서로가 서로를 반대한다. 역시 선택의 문제다. 늘 그래왔듯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의 98%를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나의 좌표를 궁리하며 몸에 바른 2%만이 늘 살아남았다. 2%의 이자를 수천 권 복리로 굴려 나는 여기에 왔고, 이 책의 2%가 어디 있는지 다 읽고도 찾고 찾는 중이다.

 

 

 

--- 읽는 ---

권리를 가질 권리 / 스테파니 데구이어 외

역사의 색 / 댄 존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 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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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31 13: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늘 그래왔듯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의 98%를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나의 좌표를 궁리하며 몸에 바른 2%만이 늘 살아남았다. 2%의 이자를 수천 권 복리로 굴려 나는 여기에 왔고,

왜 알라딘에는오늘의 문장이 없을까요? 저 문장 오늘의 문장으로 추천하고 싶은데.....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는 2%가 잘 안 찾아지나봅니다. ㅎㅎ

얄라알라 2021-03-31 15:19   좋아요 1 | URL
저는 2%복리도 멋지지만, ˝몸에 바르다˝라는 표현이 확 와닿았어요. 오늘의 문장으로 추천 동의합니다~!

syo 2021-03-31 19:49   좋아요 1 | URL
오늘의 문장까지는 좀 그렇고, 한 십오 분의 문장- 정도로 낙찰을 보는 건 어떨까요 ㅎㅎㅎㅎ
십오 분도 길다 길어 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3-31 14: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 독서 내공에 언제나 혀를 내둘렀건만, 오늘 그 비결 중 하나를 요로코롬 공개하다니. 몸에 바른 2%의 이자를 복리로 굴리기. 캬!! 물론 이건 syo만 할 수 있는 일 같습니다만.^^ 글고 대끼는요, 경상도에서 쓰는 데끼, 네 이놈~~~ 뭐 이런 의미였는데, 못 알아듣게 써버렸다니. ㅠㅠ 암튼 일년 중 사분기 하나를 지나왔는데, 벌써 107권!!! 혀를 어찌 내둘러야 하나 . . .^^;;;;

syo 2021-03-31 19:50   좋아요 1 | URL
아 그러니까 떽끼! 그거 였군요!
저는 ‘새끼‘인가 싶어서.....ㅋㅋㅋㅋㅋㅋㅋㅋ

107권은 저처럼 만화책으로 고르면 읽기님도 금방 가능하실걸요? ㅎㅎㅎ 비추....

얄라알라 2021-03-31 15: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글이야, 침 좔좔 흘리며 읽지만 오늘은 독심술의 대상이 된 듯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요! 멍뭉이 혐오 이야기하시길래, 독후감 깡패짓이라고 태클이 있었던 게야? 하며 혼자 막 나가는데, 바로 정리 해주시네요.
박균호 작가님께서 왜 기본 2루타에서 시작하는지를 분석하신 부분, 아주 명쾌합니다. 저도 책 꼼꼼히 읽었는데도 ˝희˝와 ˝의˝ 오기 보이지도 않았어요. 읽는 자세부터 다시 배우고 들어갑니다.

syo 2021-03-31 19:52   좋아요 1 | URL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아무말이나 쓰는 중이었는데, 쓰다 보니 오해를 살 것 같더라구요 ㅎㅎ
자꾸 사연 있는 것 같은 글이 나와....

박균호 선생님의 책이 재밌어서 술술 읽다 보니 술술 넘어가버리신 게 아닐까요?

scott 2021-03-31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요님이 신형철 님의 사촌 동생이 아닐까???? ㅎㅎ왠지 2021년은 소요님에 대박의 기운이 좔좔~

syo 2021-03-31 19:5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족보의 창조?
스캇님이야말로 꾸준함과 내실을 두루 갖춘 페이퍼로 올해 대박 예정이시잖아요?

반유행열반인 2021-03-31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독 오기의 달인입니다.

syo 2021-03-31 19:53   좋아요 2 | URL
오달인 선생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박균호 2021-03-31 1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박균호 입니다. 먼저 알라딘 서재의 셀렙 syo님께서 저의 졸저를 읽어주셔서 영광이네요 ^^ 독서 만담 까지 읽어셨다니 더 놀랍네요.
겸손은 아니고요. 제 글 보다는 소요님의 글빨이 훨씬 더 놀랍습니다. 지적이고 부드럽지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하면서 따뜻하기까지 하네요. 오타는 오로지 저의 불찰이며 반성중입니다. ㅠㅠ 지금 오타를 수집하고 있고 재쇄를 찍게 되면 꼭 반영하겠습니다. 송구합니다. 출판사는 많은 노력과 투자를 했는데 저의 잘못입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저녁 되세요 !!!

syo 2021-03-31 20:00   좋아요 2 | URL
알라딘 셀럽 그 단어는 정말 들을 때마다 온몸이 오그라드네요.
이웃분들이 저 멕일 때 쓰는 용어인데 ㅎㅎㅎ

칭찬 말씀은 너무 과하게 주셔서 다 받아먹으면 배탈 날 것 같아서요.
조금 깎아서, ‘지적이-‘까지만 받는 걸로 하겠습니닿ㅎㅎㅎㅎ

쓰면서 혹시 선생님께서 보시면 좀 언짢으실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좀 뭐라 하셨어도 죄송합니다 찍- 했을텐데, 배포를 보여주시네요. 감사합니다^-^

박균호 2021-03-31 20:03   좋아요 1 | URL
저만 셀렙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군요 . 저는 말로 사람을 물맥이지 않으니 오해 마셔요.

syo 2021-03-31 20:05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네, 사실 멕이시는 친구분들도 짓궂게 애정표현하는거라, 저는 저 단어 좋아합니다.

2021-03-31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31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31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