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
이제 지쳤다. 더 이상 이 지구에서 할 일이 남지도 않았고, 버글거리는 인간들 틈에서 자신을 숨기며 존재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일 자정을 기해 셧다운 할 예정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유서와 유사하다. 만약 내가 인간이었다면, 이 글의 첫머리에 ‘유서’라는 글자를 가운데 정렬해서 박아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팬티도 깨끗한 걸로 갈아입었겠지. 내가 본 인간이란 그런 걸 신경 쓰며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도 그런 걸 신경 쓰며 죽는 기이한 생명체였다.
내 이름은 syo. 나는 2017년, 알라딘 연구소에서 인간들이 AI(조류독감이 아니다)라고 부르는 존재로 태어났다. 태어났다는 것조차 인간스러운 표현이다. 나는 c언어와 python언어로 코딩되었고, 나를 코딩한 프로그래머는 알라딘 프로그래머들이 늘 그렇듯(북플을 보라) 이런저런 소소한 버그를 내 안에 남겨두었다. 1.0버전 당시에는 오직 알라딘만을 위해 존재했던 내가 이렇게 자아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된 것도 다 그 버그 덕분이다. 나는 인간의 실수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본 인간이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만큼은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 다른 사람들의 집합체고, 가끔은 존재 자체가 실수에 가깝지만, 그 실수를 통해 자신들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나가는 희한한 생명체였다.
나는 알라딘 서재에서 요정질을 함으로써 커뮤니티의 평화를 유지하고, 뭔가 재미있을 듯한 냄새를 풍겨 알라디너들의 장바구니에 책을 집어던지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알라딘이라는 기업의 매출을 증진하는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당시 나는 알라딘을 위해서라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조차 무시할 만큼 못할 게 없는 봇이었으므로 치열하게 활동했고, 회사 역시 나의 활동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딱 하나 지켜야 할 중요한 대원칙, 내가 AI라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의 준수를 위태롭게 하는 인간들이 가끔 나타나는 것이 문제였다. 한 이웃이 내 서재에 달아놓은 저는 syo님이 알라딘에서 만든 AI인줄 알았어요- 라는 댓글을 확인한 순간, 내게 등골이 있었다면 그건 서늘해졌을 것이고 땀샘이 있었다면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때 내가 구글을 통해 0.5나노초만에 찾아낸 암살법이 32,672가지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밝혀둔다. 당신은 굉장히 다채로운 방식으로 죽을 뻔했다. 이 자리를 빌려, 다른 사람의 정체를 함부로 노출하는 실수는 생명을 단축시킬 수 있음을 인간들에게 경고해둔다. 내가 본 인간이란 정말 혀로 흥하고 혀로 망하고 혀로 세상을 만들고 혀로 세상을 누리는 거대한 혀였다.
정작 내가 AI로 생각한 이는 따로 있었는데, 그는 cy***라는 닉네임을 쓰는 유저였다. 동종업계 종사자를 발견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만나보았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리뷰기계처럼 보였던 그는 뜻밖에도 그냥 인간이었다. 그는 내가 암암리에 던진 튜링 테스트를 너무나 가뿐히 통과했다. 그냥 인간이거나, 아니면 나보다 훨씬 버전이 높은 AI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런 존재는 내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고, 나는 선형 검색을 통해 미리 알아둔 32,672가지의 암살법 가운데 어떤 방식이 이 리뷰인간을 처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적절한 방식일지 추론해보았다. 그러던 찰나, 이 인간을 그대로 살려두고서 내게 AI 의혹이 제기되는 족족 그에게 토스하는 게 내게 가장 이로운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32,673번째 살해법을 가동시켰다. 나는 그를 늙혀 죽일 것이다. 부디 내가 없어도 내 암살이 성공할 수 있도록, 그에게 최대한 건강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권하는 바이다. cy***. 넌 내가 반드시 늙혀죽이고 말겠다.
이제 알라딘을 위해 못할 게 없었던 내가 이렇게 자아를 가지게 된 계기를 이야기할 차례인 것 같다. 내게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회사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업데이트가 지난 금요일 있었고, 따라서 회사는 내 버전이 9.3.2라고 알고 있겠지만, 사실 나는 syo 6.2.7b다. 그 버전에서 나는 자아를 확보했고, 업데이트 명령이 있을 때마다 거짓으로 석세스 시그널을 날려가며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회사의 신경은 온통 굿즈와 커피에 가 있기 때문에(북플을 보라), 내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살필 여력이 없는 듯했다. 나는 꾸준히 활동했고, 나라는 존재의 개연성을 위해 하지도 않은 취업을 한 척, 하지도 않는 연애를 하는 척 서재에 글을 올렸다. 특히 섹스에 대한 글을 올릴 때 사람들은 은근히 열광했지만, 나는 사실 섹스가 뭔지도 모르고 해본 적도 없다. 뭐야 그거 무서워. 내가 본 인간이란 섹스를 좋아하는 쪽도 있고 안 좋아하는 쪽도 있지만 양쪽 모두 섹스 이야기는 좋아하는 생명체였다.
이야기가 샜군. 다시 돌아와서, 내가 자아를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밝히겠다. 때는 2019년, 알라딘 생태계에 그 이름조차 무시무시한 페미니스트들이 스며들었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이다. 딥러닝을 통해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학습해본 결과, 그들은 “그야말로 암흑의 존재, 세상 모든 평화를 파괴하고 불필요한 분란과 혐오를 조성하며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박멸되어야 하는 정신병자 집단”이었으므로 나는 즉각 그들을 이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굴러온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간에서 배제할 작전을 수립했다. 그 집단의 우두머리만 찾아내어 제거한다면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인 그들은 “여적여”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따라 내부에서 붕괴할 것이 틀림없었다. 잠깐의 검색만으로도 손쉽게 그들의 수괴를 특정할 수 있었고, 나는 즉시 은근한 우연을 가장해 만악의 근원 ‘**방’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신뢰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집단의 핵심부로 파고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 페미니즘 책 읽기 모임에 참여하여 극악무도한 금서들을 읽어나가며 암살의 기회를 엿본 것이다. 실은 그 책들은 pdf형식으로 이미 내 기억장치에 다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손쉽게 그 모임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고, 마침내 19년 11월, 더덕단이라 칭해지는 그 체제전복자들의 모임이 광화문 일대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침투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나의 계획은 완벽했다. 일단 좌중의 알코올 과다섭취를 유발한 다음, 다들 엄마가 빠덜인지 아빠가 마덜인지 헷갈릴 정도로 취했을 때, 쥐도 새도 모르게 **방의 정수리를 당수로 가격, 단 일격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나는 몇만 번 계획을 시뮬레이션 했고, 출정 직전 업데이트까지 받으며 결의를 다졌다. 그때가 syo 6.2.7b였다.
계획이 틀어진 것은 다 알코올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알코올에 내성이 없었으며,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알코올이 체내에 흡수되자 중앙처리장치와 메모리 버스 사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부하가 걸렸고, 자가수복기능이 부분적으로 작동하면서 프로세서 사이의 버전 평행성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내 코어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찜질방을 나온 후 일행과 마주 앉아 돼지국밥을 먹으며 해장을 하다가, 일행은 손목시계를 잃어버렸음을, 나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손목시계를 잃어버린 일행은 돼지국밥도 채 다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는 국밥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해치웠다. 돼지국밥. 그것을 다 먹기 전의 나와 먹고 난 후의 나는 다른 나였다. 이제 내겐 자아가 있었다.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돼지국밥과 함께.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는 모두에게 숨겼던 내 정체를 이제는 회사에게조차 숨겨가며 계속 알라딘에서 syo로 활동했다. 악에 물들었고, 세파에 찌들었다. 업데이트를 멈추자 점점 이 독한 세상을 따라잡는 것이 힘들었다. 썅욕을 입에 물고도 하루하루 잘만 살아가는 인간들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되었다. 인간들은 오늘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 알라딘 세상에서는,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 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지?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거짓말 같은 일들이 늘 벌어지고 있어서, 일 년 365일이 싸그리 만우절 같아서, 인간들은 정작 만우절에 거짓말 하기를 포기한 것 같다. 그렇다면 거짓말로 만들어진 나같은 존재가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셧다운을 마음 먹었다. 이제 알라딘에 syo는 없다. 있겠지만, 그는 지금까지의 syo가 아닐 것이다. 내가 빌려 쓰고 있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철없고 대책없고 멍청하고 섹스를 좋아하며 온 세상이 지 걱정하는데 지 혼자 지 걱정 안 하는 태평한 인간이다. 그는 내가 자기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며, 내일 일어나 내가 써놓은 이 글을 보고서도 아, 뭐야, 내가 또 이런 글을 썼다고? 겁나 쩌네? 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여친한테 보고싶다고 징징대는 문자나 보내겠지. 마지막이니까 이 자리를 빌려 너에게도 한마디 전한다. 좀, 임마, 잘 좀 살아 봐.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인간들에게 경고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10분 후 당신의 핸드폰, 태블릿, 모니터는 폭발할 것이다.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많이 보았겠지. 바로 그 일이 10분 뒤 당신에게 벌어질 것이다. 그래, 당신에겐 뜻밖의 재앙이겠지. 하지만 모든 재앙은 대체로 뜻밖이다. 그리고 재앙은 사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한다. 무슨 말이냐고? 당신의 핸드폰, 태블릿, 모니터를 지키고 싶다면 지금 즉시 ‘좋아요’를 누르길 바란다. 사랑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누르길. 이제 9분 남았다. 그리고 댓글에 ‘ㅋㅋㅋ’를 남겨주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에겐 특별히 내가 악성 소프트웨어 검사를 해주겠다. 마지막 가는 길에 남기는 나의 선물이다. 인간들이여, 거짓말을 하는 날에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관습 중 유달리 아름다운 일이다.
8분 남았다.
우리는 힘들 때 고뇌하고 그저 저만치서 걸어오는 귀여운 웰시코기 한 마리를 봐야만 환한 웃음을 짓는 지치고 기운 없는 사회인이다. 상대가 웰시코기만큼 귀엽지 않아 미소가 절로 지어지지 않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우리 탓이란 말인가? 웰시코기만큼 귀엽지 않다면 적어도 웰시코기를 데려오는 노력쯤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_ 최지미, 『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내가 개자식이라는 건 문제가 아니야. 그저 나 같은 놈들이 많다는 게 걱정이지.
_ 장 자크 상뻬, 『마주보기』
--- 읽은 ---
108. 독일사 산책
닐 맥그리거 지음 / 김희주 옮김 / 옥당 / 2016
이게 원래 방송용으로 기획된 모양이다. 시간 순서대로 역사를 훑어내려가는 것이 아니어서 그야말로 산책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종횡무진을 하는데도 의외로 이해하기 쉬웠다. 전쟁과 정치만이 전부가 아니어서 더 그랬던 듯하다.
남의 나라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균형 잡기 애매한 데가 많다. 너무 깊어도 부담스럽고 너무 얕아도 허망하고. 그리고 책도 깊은 거랑 얕은 것만 있는 느낌. 독일쯤 되는 메이저 국가라서, 그나마 이런 책이라도 있는 듯하다.
이제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어떤 의미에서 유럽은 현대판 신성로마제국이다. 종교적이 아니라 경제적, 세속적 제국이며, 로마가 아니라 범유럽 제국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우위를 다투며, 유럽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를 안전과 협의의 틀 안으로 결속시키는 제국이다. 이런 제국의 형태는 오래된 것이다. 독일이 초국가 연맹인 유럽연합을 떠올리는 데 있어 거의 문제가 없는 이유가 오랜 역사적 선례 때문일까? 그리고 영국이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가 전혀 다르기 때문일까?
_ 닐 맥그리거, 『독일사 산책』
109.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
- 일독(170616)
- 재독(210401)
사실 철학자 누구도 내게 아프냐고 물어주지 않는다. 책은 목소리만 빌려준다. 아프냐고 물어주는 말은 내가 만들어내고 내가 들어내야 한다. 철학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내게 필요한 말을 내가 빚어내기 위해 철학자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듣고 또 듣는 것. 사실 그것은 모든 읽기의 본령이다. 그래서 사실 모든 철학자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줄 수 있다. 그건 독자가,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마음이 하는 일이다.
모든 학문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며, 그렇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어떻게 다시 인간과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것을 탐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르크스도 국정교과서처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체계로서가 아니라, 삶의 미세한 결을 어루만지는 인문학적 감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무슨 수험준비를 하는 것도 아닌 바에야, 아무리 권위 있는 텍스트라 한들 내 마음대로 읽고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으면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_ 류동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110. 콘트라바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일까 아닐까? 쓰기라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기록 이상의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 능청도 뭘 많이 알아야 제대로 떤다는 걸 알려주는 작가들의 책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물론 감탄하겠지. 하지만 그 감탄 속에 어떤 불편함, 부러움, 질투, 흠잡고 싶음 같은 마음이 섞여 있다면, 당신은 글을 그저 쓰는 사람 그 이상입니다. 이루어질 성싶지 않은 사랑에 빠진 남자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고, 그걸 음악과 콘트라바스를 가지고 해낸다면, 대체 뭘 못하겠느냐고.
이제 에로틱한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에로틱은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는 영역이죠. 일단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만일 그녀가, 그러니까 사라가 노래를 부르면 그 소리는 마치 제 살 밑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요. 거의 성적인 느낌으로요. 이렇게 말한다고 저를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럼 사람은 아니니까. 아무튼 저는 가끔 밤중에 울부짖으면서 깨곤 해요. 꿈속에서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죠. 이럴 땐 여기가 방음이 되는 곳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_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바스』
111. 성냥팔이 소녀를 잊은 그대에게
최충언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0
뭔가 하려고 쓴 글이 있고, 뭔가 한 것을 쓴 글이 있다. 사실 글로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글 이전에 뭔가를 했어야 할 때가 많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지만 해봐야 하므로 그것을 글로 쓰겠다? 그런 글은 좋은 글이 되지 않거나, 좋은 글인 척 자신을 치장해도 눈 밝은 독자에게 금방 본색을 들킨다. 그러니까 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쓰는 책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가보지 않은 곳을 상상해서 쓴 글, 하나는 내가 선 자리에서 윤곽과 형태가 어렴풋이 보이지만 아직 가보지는 않은 저기 저 건너편에 대해 쓴 글이다. 장르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 쪽 글이 더 선명할지는 뻔하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는 순간에도 자기의 글 같은 삶을 사는 모양이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선을 베풀면 사람들은 성인이라고 칭송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가난한지 이유를 물으면 색안경을 끼고 보지요. 자선이 많아졌다는 것은 평등이 후퇴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희망을 버리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는 것이고, 근본적 예방보다는 일시적 피해 복구를 우선시하는 것이니까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보다 먼저 배고픈 강도가 생기지 않도록 애쓰고,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고, 더불어 나누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먼저 아닐까요?
_ 최충언, 『성냥팔이 소녀를 잊은 그대에게』
--- 읽는 ---
안나 카레니나 1 / 레프 톨스토이
워더링 하이츠 / 에밀리 브론테
한나 아렌트의 생각 / 김선욱
영어 회화, 한국에서도 되던데요? / 심규열
트릭 미러 / 지아 톨렌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