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놈과 도적놈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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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고생하고 헤어질 때마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크게 아듀를 외치지만, 계절처럼 때마다 찾아와 스며드는 것을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는 어떤 잡놈이 있다. 남들은 슬럼프라고 부르는 이 달갑지 않은 고뇌의 시간을 syo는 내부적으로 잡놈의 시간이라 부른다.
2
인류가 늘 곁에 있는 것들을 변함없이 소중하게 여겨주는 성실한 종족이었다면, 지구는 훨씬 더 단조롭고 색채가 모자라며 성취가 부족한 행성이었을지도. 잡은 고기는 잡은 고기로 두고 잡을 고기를 잡으러 가는 인간의 습성은 잡힌 고기 입장에서야 빡칠 노릇이지만 종 전체의 운명을 놓고 보면 나쁜 특성이 아니라고, 늘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산 것은 아니고, 그렇게 살다 보니 내게서 너무 쓰레기 냄새가 나는 거라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내 콧구멍을 틀어막은 것에 가깝긴 하다. 하여간,
나는 다시 백수가 되고, 읽고 쓰는 일이 명백히 잡은 고기가 되자, 귀신 같이 잡놈의 시간이 도래했다. 사랑이 없는 눈으로 보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법이고 아름답지 않은 책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도 사랑의 눈이라서, 사랑이 없는 독서는 책을 덮을 때까지 아름다움이 뭔지 모르고 끝나는 메마른 글 더듬기다…….
3
그래서 요즘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잘 되지 않아요, 그냥 기계적으로 읽고 형식적으로 쓰는 거죠, 망했어요, 나 이제 어쩌죠? 했더니 친구는 그럴 때는 잠시 책을 떠나 있는 게 어떠냐고 조언해 줬다. 그럴 때는 푸시업을 하면 돼요. 하다 보면 내일 새벽쯤 바로 다시 책이 좋아질걸? 그러니까 책이 읽히거나 건강해지거나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얻을 수 있는 구조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라는 이야기였다. 정말 지혜롭기가 짝이 없는 친구다. 와, 무슨 미네르바인 줄.
그런 지혜의 화신 같은 친구조차 늘 이런저런 일로 고민하고 고뇌하게 하는 이놈의 지구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시공간이냐…….
4
잘 쓰는 에세이스트들이 너무 많아서 자꾸 내 글이 똥으로 보인다고 징징대자 지혜로운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늘의 똥을 싸야만 한다고. 저런 천재가 내 친구라니. 그래서 오늘의 똥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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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책 7만 원어치랑 하인즈 케첩 1.25kg 택배 상자 통째로 들고 나른 도적노무 새끼야. 오냐 누군지 몰라도 잘 먹고 잘 살아라. 내 너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앞으로 네가 사는 모든 책에 케첩 떡 발리기를.
--- 읽은 ---
119.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한수산 지음 / &(앤드) / 2021
무거운 에세이와 가벼운 에세이는 작가의 연륜이나 인생행로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다. 무거운 문장 속에 무거운 삶을 담은 묵직한 에세이를 오래 두고 읽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날아갈 듯 가벼운 문장 속에 지구만큼 무거운 고민의 중력이 담긴 에세이가 좋다. 구체적이어도 좋고 추상적이어도 좋다. 어차피 타인의 모든 구체적 경험은 전달되는 순간 나의 추상적 경험이 되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삶에서 나와도 좋고, 머리에서 나와도 좋다. 좋은 글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 글을 읽는 시간이 좋은 시간이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말하고 싶지 않은) 글들이 있다. 취향의 문제고, 사랑의 문제다.
늙어갈수록 서글퍼지는 일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며 지켜온 것을 보호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결코 짓밟혀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서의 자존, 끝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찾아 헤맸던 자유, 힘없는 한 사람으로서나마 그 속에서 살고 싶은 정의로운 사회 그리고 함께하는 가족까지도, 결코 물러설 수 없었던 그 모든 가치를 지켜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_ 한수산,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120.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켄 크림슈타인 지음 / 최지원 옮김 /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
- 일독(1906xx)
- 재독(210405)
재독한 책들의 일독시절 평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때 나는 이 책이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책 같다고 썼다. 하이데거는 내가 알던 것 이상의 개자식이고, 벤야민은 내가 알던 것 이상의 모질이라고. 다시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이데거의 가스라이팅은 더럽게 집요하다. 그리고 이 책 작가가 벤야민을 유독 사랑하는 것 같다. 이 책 전까지 아렌트의 개론서 두 개를 읽었지만,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름만 언급되는 수준이었다. 무슨 일일까.
다른 분이 잘 써놓으신 리뷰가 이미 있어서 내가 할 일은 없겠고, 그냥 이 씬이나 한번 보자.
왜 저러는지 알 것 같긴 하다. 그러니까 저 두 사람이 육체적 사랑과 지적 교감을 동시에 나눈 관계임을 암시하는 만화적 표현이겠지. 제발 그러길 바란다. 실제로 호잇호잇 하는 동안 저런 대사를 쳤다면 하이데거도 아렌트도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뒹굴뒹굴링에 집중해야지, 뭐? 진실? 죽음이 뭐 어쨌다고? 진짜 죽고 싶나…….
철학자의 섹스가 저런 거라면 나는 삼백만 번 다시 태어나도 철학자 같은 건 되지 않겠다.
121. 궁금했어, 생명 과학
윤상석 지음 / 김민정 그림 / 나무생각 / 2021
사이언스 틴스 시리즈 7권.
사이언스 틴스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틴스가 이 정도 알아줘야 비로소 틴스라면 어덜트는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또 유전을 공부하면서도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생명체는 세포핵에 저장된 DNA의 정보를 수시로 읽어 내어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 현상을 조절한다는 거야. 마치 컴퓨터가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정보를 수시로 읽어내며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말이야. 정말 신기하지?
윤상석, 『궁금했어, 생명과학』
네, 선생님! 와신기해요!
--- 읽는 ---
시를 읽는 오후 / 최영미
200년 동안의 거짓말 / 바바라 에런다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민주주의를 위한 아주 짧은 안내서 / 버나드 크릭
문장 교실 / 하야미네 가오루
춘분 지나고까지 / 나쓰메 소세키
여름의 맛 / 하성란
망자들 / 크리스티안 카라흐트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 수잔 벅모스
길고 긴 나무의 삶 / 피오나 스태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