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사거리 3
준비가 끝났다며 내밀던 입술로부터 1년이 있었다. 이 언덕은 늘 벚꽃 피는 중. 지난해 이맘때의 우리가 앞서 걷고 있었다. 뒷모습이 귀엽고 다정해 보기 좋았다. 내년의 우리가 지금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다. 돌아보진 않겠지만 아마도 우리를 귀여워하겠지. 영원히 벚꽃 피는 언덕에서 우리는 영원히 귀엽자. 시간의 긴 끈 위에 일렬로 걷는 무수한 우리의 첫과 끝을 묶어 고리로 만들자. 영원히 빙글빙글 돌아가며 준비하고 준비가 끝난 벚꽃맛 입술을 내밀자. 비가 지나가면 저 꽃들도 젖은 향기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리겠지만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지 않은 것들을 영영 모르자. 보이는 것 딱 하나 그것만 알고 가기만도 내 안은 꽉 차, 건드리면 툭 터지는 틈새로 벚꽃잎이 폭탄처럼 만개할 것 같은데,
너는 기침을 하고 나는 그 기침마저 만지고 싶었다.
우리는 작은 빈틈도 없이 서로를 꽉 안은 채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비로소 나의 몸이며 가슴의 형태, 팔의 길이 같은 것이 그와 맞아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고, 내 가슴에 닿아 있는 그의 따뜻한 머리통이, 이마가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거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피부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과 귓가에 울리는 호흡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나는 내가 아닌 존재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순식간에 그라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_ 박상영,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마지막으로 찍은 케이트의 사진이 아마 내 컴퓨터 안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그녀의 모습을 되새기기 위해 굳이 컴퓨터를 켤 필요는 없다. 그저 두 눈을 감는 것으로 충분하다.
_ 미셸 우엘벡, 『세로토닌』
이윽고 날이 저물었다. 대낮에도 그다지 인력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동네는 초저녁부터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부부는 평소처럼 남포등 아래로 다가갔다. 넓은 세상에서 자신들이 앉아 있는 곳만 환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환한 등불 아래서 소스케는 오요네만을, 오요네는 소스케만을 의식하면서 남포등의 힘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사회는 잊었다. 그들은 매일 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자신들의 생명을 발견하고 있었다.
_ 나쓰메 소세키, 『문』
--- 읽은 ---
112. 한나 아렌트의 생각
김선욱 지음 / 한길사 / 2017
- 일독(1805xx)
- 재독(210402)
일독하고 남긴 평에, 깔끔하고 한나 아렌트 입문서로 몹시 훌륭하다고 썼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에 비추어 우리 정치 현실을 풀어냈다고. 그렇게 써놓았던 건 너무나도 당연하게 까먹었고, 까먹은 상태에서 재독한 후 이번에 느낀 바는 이렇다. 우리 정치 현실을 조망하기 위해 한나 아렌트의 렌즈를 가져오려는 (훌륭하고 적절한) 의지와, 입문서라 쉽게 쉽게 풀어가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미묘한 지점에서 상충하여, 개념과 현실이 뭔가 착 붙지 않는 느낌. 그러니까 일독 때와 정반대 감각인 것이다. 이 사태는 이 책의 역량보다 syo라는 독자의 역량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드러낸다. 아, 점차로 나라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중이다.
덧붙인다면, 역시 간략하고 에두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철학 입문서로서의 장점이다. 그런데 이 책이 서술하는 아렌트 사상이 어쩐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이건 단점이겠다. 그리고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생각이라는 제목을 단 김선욱 선생님의 생각이다. 그건 당연한 거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다. 좋은 말 많다.
이해는 지식과 다르다. 지식은 현실에 대한 명확한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런데 이해는 특정한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의 문제다. 세상에 대한 지식이 많은 자가 반드시 세계를 바꾸지는 않는다. 지식이 많아도 나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_ 김선욱, 『한나 아렌트의 생각』
113. 모두의 연애
김민조(민조킹) 지음 / 팬덤북스 / 2016
모두가 연애를 했거나 한다(三 빼고)는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주는 매듭이 있다. 행복은 서로 닮았고 불행은 제각각이라고 거장은 말했지만, 연애를 해보면 뜻밖에 불행은 서로 닮았고 행복은 제각각이다. 나는 당신이 좋고 궁금한 것을 만나면 병아리처럼 갸웃거리는 당신의 고갯짓이 좋고 내 눈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촉촉해지는 당신의 눈이 좋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당신의 가슴과 한 손에 넘치는 당신의 엉덩이가 좋고 발은 만지지 못하게 하는 당신의 부끄러움이 좋고 뜨겁게 치달을 때 저절로 찌푸려지는 당신의 미간이 좋다. 웃는 듯 우는 듯 가녀리게 뜨는 눈과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자꾸 비어져 나오는 내 이름이 좋다. 이런 것들은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 주었던 행복과 닮은 듯 보여도 제각각이어서 나는 늘 당신이 기쁘다. 하지만 그 제각각의 행복이 서로 닮은 불행의 반증일까 봐, 그 사람들에게 내가 주었던 불행과 닮은 불행을 당신에게도 줄까 봐, 나는 늘 내가 슬프다. 아, 톨스토이 개새끼(왜 내가 아니라 걔가 개새끼?).
오빠, 오늘 집에 들어갈 거야?
아니, 밤새 네 가슴 만질 거야.
_ 민조킹, 『모두의 연애』
114. 어떻게 최고의 나를 만들 것인가
하이디 그랜트 할버슨 지음 / 장원철 옮김 / 스몰빅라이프 / 2019
핵심은 이렇다.
1. 목표 유형 : 성과 목표 / 향상 목표
2. 사고 방식 : 행위 중심적 / 이유 중심적
3. 관점 지향 : 성취 지향 / 안정 지향
요 세 가지 범주에서 하나씩 뽑아내 묶으면, 2의 3승, 총 8개의 패턴이 나온다. 어려운 일을 처리할 때, 쉬운 일을 처리할 때, 자꾸 일을 미룰 때 등등의 여러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가장 적합한 패턴이 있고, 그때그때 잘 골라서 최고의 나를 한 번 만들어 보자꾸나- 뭐 그런 요지다. 그럴싸한 듯.
그러나 삶에 있어 인내력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때로는 삶의 총체적인 국면을 보아야 한다.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목표 달성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모든 게임에서 이길 수는 없다. 도달하기 어렵고 달성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목표라면 그만두어야 할 때가 있다. 언제 그만두어야 하는지 아는 것 또한 삶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다.
_ 하이디 그랜트 할버슨, 『어떻게 최고의 나를 만들 것인가』
115. 대멸종
시아란 외 지음 / 안전가옥 / 2019
「저승 최후의 날의 기록」은 정말 ‘기록’의 형식이다 보니 사건의 발생 과정을 따라가는 것 이외에 다른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기록이 그렇게 동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독자가 이 기록에 나처럼 반응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가 제일 좋았다. 김초엽 선생님이 사랑받은 이유는 그가 SF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SF를 가지고 최은영 선생님이 해서 대박 친 일을 했기 때문일 듯하다. 이런 구분 자체가 우습긴 하지만, 소위 ‘순문학’이라고 하는 것과의 친연성은 SF 입장에서 굉장한 매력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이 그랬다. 솔직히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앤솔로지 이름이 표제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면 이 작품은 당연히 표제작이 되었을 것이다. syo에게 이제부터 심너울 선생님은 나오면 읽을 작가다.
「선택의 아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뻔했다. 모든 종의 대멸종을 막기 위해서 모든 동물들의 합의로 인간의 삭제가 예정된 상황이다. 그런데 그 삭제 버튼이 한 아이, 가난한 나라에서 학대와 천대를 받으며 위험 속에 사는 어떤 선한 아이에게 주어진다면? 이 설정이 처음 두어 페이지에서 등장한다. 그 즉시 syo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대충 이랬다. 처음에는 이 착한 아이가 어떻게든 인간을 살려보려 애쓰겠지. 그렇지만 인간들은 이 아이가 뭘 손에 든지도 모르고 늘 그래왔듯 이 아이를 학대하겠지. 그러나 아이는 참겠지. 하지만 어른들은 이 아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을 죽이겠지. 아이는 자신의 고통은 참아냈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폭주하겠지. 그래서 버튼을 누르겠지. 다 죽겠지. 지구는 아름다워지겠지. 끝. 딱 그랬다.
「우주탐사선 베르티아」는 이 책에 든 다섯 작품 중 우리가 SF를 상상할 때 떠올리는 그림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우주, 과학, 미지, 그리고 인간.
「달을 불렀어, 귀를 기울여 줘」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야겠다. 강유리 선생님의 저자파일을 보면, 2004년 장르 소설로 데뷔한 이후 직장생활을 하시면서도 판타지와 무협에 마음을 두고 있다가 이번 책을 통해 컴백하셨다고 되어 있다. 몸을 좀 더 푸셔야겠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들고 나섰다가 쥐 잡고 돌아선 느낌이다.
이 세상의 신이 코딩을 더럽게 해 놓은 초보자 같다는 생각을 하니 웃겼다. 어쩌면 이 세상이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습작일 수도 있겠다. 아, 그러면 많은 것이 설명되는 것 같기도 하다. 왜 세상에는 웃음보다 눈물이 많은지, 왜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삐걱삐걱거리는지, 어째서 그렇게 삐걱삐걱거리면서도 세상이 어찌어찌 돌아가는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 번 낄낄낄 웃었다.
_ 심너울,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 읽는 ---
안나 카레니나 1 / 레프 톨스토이
처음 읽는 음식의 세계사 / 미야자키 마사카츠
신민사소송법 / 이시윤
IT 좀 아는 사람 / 닐 메타 외
역사의 색 / 댄 존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 나카마사 마사키